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70
홀로 자다 추워 깬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빈자리가 아프게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일이었다.
“초원 씨 참치 마요 계란말이 할 줄 모르잖아.”
안 먹으면 그만이었다. 그가 해 주던 따뜻한 밥도, 그 애정이 가득 담긴 밥 따위 안 먹으면 그만이었다. 초원은 입술을 깨물고 젓가락을 의미 없이 움직였다.
“잼 뚜껑은 누가 열어 주고⋯. 그래, 뭐 이건 딴 놈도 해 줄 수 있겠지.”
그 말에 초원의 입술 사이로 짧은 탄식이 새어 나갔다.
‘그게 아닌데⋯.’
다른 여자를 만나라고 헤어지는 거지, 다른 남자를 만나려고 헤어지는 게 아닌데. 이유를 아무리 말해 줘도 저 남자는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나만큼 초원 씨 사랑해 줄 남자가 또 있을진 몰라도⋯.”
그런 남자 절대 없을 거라는 걸 이미 아는 초원의 눈가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어떤 여자도 초원 씨만큼 사랑할 수가 없는데.”
초원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랑이란 거 다 호르몬의 속임수예요. 3년도 채 못 가고 식어요. 생리 현상에 속아서 시간 낭비하지 마요.”
그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말에 승준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3년도 훌쩍 넘겨 가며 세상에 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했던 여자가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 모순에 웃음이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바람 잘 날 없던 그때에는 이 사랑이 시한부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모조리 잃은 후에도 이 감정만은 살아남았다. 그러니 3년도 채 못 가고 식는다는 건 그에겐 애인에게 신발을 사 주면 도망간다는 소리만큼이나 허무맹랑했다.
여전히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초원을 가만히 바라보던 승준은 손을 들어 식탁을 가리켰다.
“그 주먹밥 식으면 버릴 거예요?”
“네?”
“그걸 왜 버려. 그쵸? 다시 데워 먹으면 되는 거지.”
뜬금없는 주먹밥 소리에 방 안으로 고개를 돌린 초원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사랑도 그런 거잖아요. 식는 건 열정이지, 사랑이 아니라.”
뜨거워도 미지근해도 차가워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열정이 식었다고 그 사랑 버릴 거예요? 다시 불 지피면 되는걸. 아니, 그리고 꼭 뜨거워야 사랑인가?”
“우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뭐가 문젠데?”
“이미 한 말 또 하게 하지 마요.”
초원은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대체 뭐가 문제야? 우리 아무 문제도 없잖아.”
있지도 않은 문제를 꾸역꾸역 만드는 여자를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문제가 없다니⋯.”
초원으로선 그간의 괴롭고도 치열했던 고민을 가볍게 부정해 버리는 남자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초원 씨가 불임인 거, 내가 가족이 없는 거 둘 다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잖아. 그럼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지 뭐 하러 무겁게 떠안고 다니면서 끙끙 앓아?”
“아니죠. 내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승준 씨가 가족이 없는 건 만들면 해결되는 일이잖아요.”
말씨름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자 승준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초원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건 뭐로 들은 걸까?
“초원 씨는 지금 날 위해서 그런다고 믿고 있겠지만 뭐가 날 위하는 길인지는 내가 더 잘 알아.”
더는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초원은 창밖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몇 주째 매달리는 남자. 누가 누구더러 고집이 세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얼마나 모질게 굴어야 포기할 거야?’
눈앞에 보이는 한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떠나고 싶었지만 그 또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포기하고 서명해 줄 때까지 전보 신청서를 내밀어야 하는 걸까? 그냥 사직서를 내밀어 버리고 싶지만 그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친다, 진짜.’
가끔은, 아니 사실은 매일같이 포기해 버릴까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모질게 내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준이 힘들어하는 걸 볼 때마다 끌어안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울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가 누려야 할 기회를 빼앗지 않으려면 더 독해져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몇 달만 버티면⋯.’
생각에 잠겨 있던 초원은 난데없는 코 고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아, 진짜 여기서 자면 어떡해⋯.’
승준은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운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 초원은 한숨을 푹 쉬며 침대로 다가갔다.
분명 흔들어 깨우려고 뻗었던 손이었다. 그랬던 손이 어째선지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어루만지고 있었다. 살결이 거칠어졌다. 뺨도 홀쭉 들어간 것 같았다. 밥은 제대로 챙겨 먹는 건지, 술만 이렇게 마시고 다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초원의 시선이 여전히 그의 손목에 감긴 은빛 시계에 머물렀다.
‘마음 약해지게 굴지 마요, 제발.’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는 초원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아, 따가워.’
깊은 잠에서 깬 초원은 얼굴을 찡그렸다.
‘모기라도 있나?’
하지만 지금은 꽃피는 계절. 모기가 있을 때도 아닌데 갑자기 쇄골 위가 간지럽고 따가웠다. 여전히 잠에 몽롱하게 취한 채로 손을 뻗어 아픈 곳을 매만졌다. 어쩐 일인지 살갗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뭐지?’
목을 더듬던 손가락 끝에 얇은 체인이 걸리자 초원은 번쩍 눈을 떴다. 돌려준 목걸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잠옷 셔츠는 벌써 풀어 헤쳐져 맨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초원은 손을 들어 가슴 사이에 파묻힌 검은 머리를 밀었다.
“그만, 앗⋯.”
젖꼭지가 뜨거운 입속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촉촉한 입술과 혀가 여리디여린 살점을 물고 핥기 시작하자 머리를 미는 손이 서서히 힘을 잃었다. 강렬한 자극에 반응해 어느새 도톰하게 솟아오른 돌기를 혀가 톡톡 건드릴 때마다 다리 사이에 숨은 돌기도 움찔움찔 떨었다.
“하아, 왜 이래요?”
금세 달아오른 목소리에 승준은 고개를 들며 씨익 웃었다. 타액에 젖은 그 입술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옷은 언제 벗어 던진 건지 이 남자는 이미 알몸이었다. 그는 두 손 가득 그녀의 말랑한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앗!”
“초원 씨 느끼고 싶어.”
매일 밤 이렇게 살을 맞대고 그 온기를 느끼고 싶었던 그에게 홀로 보냈던 3주는 잔인한 고문이었다.
“이러지 마요.”
초원은 그의 팔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손은 가슴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승준은 뜨거운 사막을 헤매다 드디어 오아시스를 찾은 것만 같은 희열감을 느끼고 있었다. 초원의 맨살을 이렇게 만지고 있으니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갈증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 밤만, 제발 오늘 밤만⋯.”
두 눈동자에 새겨진 간절함을 버틸 수 없었던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위험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제 짝을 찾아 내려왔다. 입술이 닿기 직전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돌려 버렸다. 이내 승준의 낯빛에 서운한 기색이 짙어졌다.
“술 냄새 나요.”
정말 냄새가 난다는 듯 초원이 얼굴 위로 손을 내젓고, 승준은 웃으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가 싫은 게 아니라 술 냄새가 싫은 거라면 서운할 것 없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아래로 머리를 내렸다.
“앗⋯.”
입술이 여린 피부를 간지럽히며 서서히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 뜨거운 것이 살갗에 닿을 때마다 초원의 심장이 기쁜 듯 쿵쿵 날뛰었다.
‘하아, 나 진짜 뭐 하는 거야?’
머리는 밀어내야 한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몸은 조금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애초에 이 몸의 주인은 이 남자였으니까.
어느새 입술은 배꼽 주변을 더듬고 있었다. 여린 배꼽 속으로 축축한 혀가 파고들자 초원은 깜짝 놀라 몸을 비틀었다. 밀어내는 그녀의 손짓에 어쩐 일인지 순순히 물러난다 싶더니 입술은 곧장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허리 아래가 허전해졌다. 커다란 손이 잠옷 바지와 속옷을 거침없이 벗겨 내더니 그 바람에 양말이 반쯤 벗겨져 버렸다. 승준은 그걸 놓치지 않고 꼼꼼한 손길로 다시 신겨 주었다.
초원의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발이 항상 시린 그녀를 위해 다 벗기더라도 언제나 양말만은 남겨 두는 남자였다.
이렇게 세심하고 자상한 남자이니 그를 사랑해 줄 여자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그녀보다 더 사랑해 주고 아껴줄 여자. 세상엔 그녀보다 예쁘고 그녀와는 달리 착하고 능력 있는 여자가 넘치니까.
말캉한 혀가 꽃잎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고 초원의 눈가로 슬픔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오늘 밤만, 제발 오늘 밤만.’
이 남자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내일 아침 해가 뜰 때 다시 매정하게 뿌리치면 안 되는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이제는 머리조차도 몸에 잠식당한 모양이었다.
혀 놀림에는 굶주린 티가 역력했다. 도톰한 살 속에 파묻힌 단단한 살점을 혀로 마구 훑고 쪽쪽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리도록 입술로 빨아댔다. 그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했던 그는 꽃잎을 혀로 가르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타액과 그녀의 애액으로 은밀한 곳이 흠뻑 적셔졌다. 그토록 맡고 싶었던 초원의 젖은 내음을 승준은 폐 속 깊이 들이 삼켰다. 내쉬는 숨이 꽃잎을 간지럽히자 속살이 흥분해 오므라드는 걸 입구를 간지럽히는 혀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혀를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 아흑⋯.”
보드랍고 유연한 혀가 여린 속살을 거침없이 핥았다. 황홀한 절정의 전조가 온몸에 감돌기 시작했다. 파들파들 떨리는 엉덩이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속살을 휘젓던 승준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미처 감추지 못한 아쉬움이 초원의 얼굴을 스쳤다.
‘이것 봐. 하고 싶으면서⋯.’
몸을 일으킨 그는 그녀의 몸 위로 덮치듯 올라갔다. 촉촉이 젖은 초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들여다보는 승준의 그윽한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완강한 눈빛을 견딜 수 없었던 초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애정 어린 손길이 초원은 반갑고도 두려웠다. 비집고 들어오는 하체에 밀려 허벅지가 한껏 벌어지고 다리 사이를 그의 분신이 찔러오기 시작했다. 그대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려던 찰나 초원의 엉덩이가 뒤로 쑥 물러났다.
“왜?”
초원은 승준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고 몸을 비틀었다.
“이렇게 해요.”
승준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또 이런다.’
그는 돌아누우려는 초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난 얼굴 보고 하고 싶은데.”
“난 이게 더 좋아요.”
“난 안 좋아.”
그대로 어깨를 내리누른 승준은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초원의 몸속 깊이 밀고 들어갔다.
“앗⋯.”
찡그린 얼굴, 자지러지는 몸, 헐떡이는 숨소리와 착 달라붙어 조여 오는 속살까지, 이 모든 게 달콤했다. 자신의 몸에 매달려 마찰 하나하나에 격렬한 반응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여자가 주는 이 쾌감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그가 느끼는 모든 감각의 끝에는 초원이, 초원이 느끼는 모든 감각의 끝에는 그가 있었다. 그의 삶에서 초원과 하나가 되는 이 순간보다 완벽한 순간은 없었다.
“아흡⋯.”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누르려는 손을 승준은 거칠게 떼어 냈다.
“우리 사이에 벽 만들지 마.”
커다란 손이 초원의 두 손을 머리맡으로 올리더니 그대로 깍지를 껴 틀어쥐었다.
“눈도 감지 말고.”
말을 들을 그녀가 아니었다. 고집스럽게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초원의 귓속으로 절박한 속삭임이 파고들었다.
“내 생각 안 났어? 난 초원 씨 없으니까 잠도 못 자겠어.”
수면제도 듣지 않는 외로움에 매일 밤이 괴로웠다.
“회사에서 매일 보는데 만질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고 미치는 줄 알았는데⋯.”
붙들었던 손을 푼 승준은 초원을 집어삼켜 버릴 기세로 끌어안았다.
“초원 씨는 안 그랬어?”
이 남자의 리듬을 따라 속절없이 흔들리는 몸과 함께 마음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초원은 두 팔로 그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눌렀다.
“솔직히 말해. 나 없인 못 산다고 해 줘.”
그 애처로운 목소리가 심장을 깊숙이 찔러 오고, 초원은 괴로움에 흐느꼈다.
“응? 대답 좀 해 봐.”
“흑⋯.”
“하아, 제발 눈 좀 뜨라고. 나 좀 봐줘.”
간절함이 통한 듯 슬며시 올라가는 초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제발.”
“응?”
“⋯이러지 마요.”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어깨를 밀어내는 손도 힘이 없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이성의 끈을 놓게 만들어야만 하는 걸까? 승준은 초원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을 기세로 절정을 향해 거칠게 밀어붙였다.
“아앗⋯. 그, 그만⋯.”
가슴팍을 밀어내던 작은 손이 그녀의 몸이 뒤로 휘어지는 순간 떨어져 나갔다. 그만하라는 솔직하지 못한 윗입과는 달리, 역시나 솔직한 아랫입은 멈추지 말라는 듯 그의 분신을 꽉 물어댔다.
“초원 씨 사랑해.”
“제발, 안 돼요⋯.”
초원은 몸속을 차지하고 있는 그를 밀어내려 엉덩이를 비틀어댔다. 하지만 놓아줄 리 없었다. 승준은 가는 허리를 두 손으로 단단히 붙들었다. 붙들린 허리도, 그의 몸이 세차게 부딪혀오는 허벅지 안쪽도 얼얼해졌다.
“안 돼⋯.”
아픈 걸 참아 가며 모질게 밀어낸 날들을 한순간에 덧없게 만들 순 없었다. 절대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이 남자의 역린이라도 건드려야 하는 걸까? 끔찍한 결단을 내리고 질끈 감은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목숨이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해.”
승준은 달싹이기 시작하는 초원의 입술을 절박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흑⋯, 현우 선배⋯.”
별안간 움직임이 멈추고 두 사람의 시간도 멈췄다. 공기 속에 서려 있던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눈을 감고 적막이 깨어지길 기다리는 이 시간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아 초원은 숨이 막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눈치 없이 절정의 여운에 떨던 몸속에 묻혀 있던 그가 단숨에 빠져나가고, 갑작스러운 허전함에 초원의 몸이 휘청였다.
“하, 이렇게까지 잔인해야 해?”
침대가 출렁이고 바스락거리며 옷을 입는 소리가 들리는 동안에도 초원은 질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잔인하지 않으면 안 떠날 거니까.’
심장을 관통하는 아픔이 느껴지지 않게 꼭 깨문 입술이 아렸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가려는 흐느낌을 죽였다.
쾅, 현관문이 거세게 닫혔다. 관짝이 닫히는 소리였다. 초원이 잔인하게 죽여 버린 두 사람의 관계에 그렇게 사망 선고가 내려졌다.
제 손으로 끝낸 주제에 염치도 없이 초원은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몸이 차갑게 식어 가도록 한참을 죽은 듯 누워 요절해 버린 사랑을 애도했다.
이번은 해피엔딩?
참으로 궁상맞은 한 달이었다.
시리도록 싸늘해진 그의 눈빛과 태도를 마주하며 낮에는 잘됐다고 자신을 타이르곤 밤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였다. 물론, 헤어진 걸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헤어진 게 아플 뿐.
어느 날은 침대 밑에서 그의 머리카락이 나와서 울었고 또 어느 날은 안 나와서 울었다.
그러다 어떤 날은 그의 애프터셰이브 향이 미칠 듯이 맡고 싶어 늦은 밤 열려 있는 드럭스토어를 찾아 헤매기까지 했다.
‘내가 봐도 이렇게 꼴사나운데 남 눈에 안 보여서 다행이지.’
비밀 연애라 다행이었다. 여기저기 헤어졌다고 광고하고 다닐 필요 없으니.
애초에 회사에서 잘 웃고 다니지 않은 것도 다행이었다. 그랬더라면 단번에 티가 났을 테니까.
회의실에 앉은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모를 거다. 현우만 빼면. 한 번씩 괜찮냐고 물어 오는 게 거슬렸지만 초원이 귀찮아하면 며칠은 입을 다물었다.
“⋯상반기도 두 달밖에 안 남았⋯.”
초원은 승준의 나직한 목소리를 들으며 멍한 시선을 노트에 고정했다.
버틸 만해진 거였다. 그렇지만 역시 고문이 따로 없었다. 차라리 기억을 지우면 아무렇지 않아질까?
‘헉, 설마 예전에도 이래서 같이 기억 억제한 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공식 사건도 아닌 개인의 연애사에 사건 보고서가 있을 리가.
상사와 사귀는 건 정말이지 미련한 짓이었다. 저 남자도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후회하고 있길 바랐다.
그날 후로 초원이 주었던 은빛 시계는 자취를 감췄다. 이젠 전보 신청서를 들고 찾아가도 흔쾌히 서명해 주겠지.
“헉⋯.”
옆에서 팔꿈치를 툭 치는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헐, 나 존 거야?’
곁눈질을 하자 현우가 긴장한 얼굴로 눈치를 줬다. 조마조마한 시선을 들어 맞은편에 앉은 얼굴들을 살폈다. 희경의 매서운 눈빛에 초원은 죽을죄를 지은 표정으로 승준이 앉은 쪽을 살폈다. 다행인 건지 그는 늘 그렇듯 굳은 얼굴일 뿐, 이쪽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아, 진짜 요즘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