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71
시도 때도 모르고 찾아오는 졸음 때문에 뜬금없는 약 먹은 병아리 신세였다.
‘약 먹은 병아리는 할 일이라도 없지.’
회의 중에 뻔뻔하게 자버린 초원은 민망함에 어깨를 움츠렸다.
승준은 고민 중이었다. 심령관리1팀에서 의뢰한 사건이 마음에 걸렸다. 심령1팀에서 받은 서류철을 연 그는 고 팀장이 친히 남긴 메모를 재차 읽으며 미간을 좁혔다.
[조 팀장님, 지원 요청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저희 팀에 있었던 홍초원 주임을 배정해 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영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심령팀 사람들, 죄다 이 정도 능력은 있으면서 굳이 왜?’
보직 이동 요청도 아니고 그냥 일손만 잠시 빌려 달라는데 못할 것도 없었다. 문제는 그 일이 물귀신 씐 석촌호수 오리를 잡는 일이었다는 것. 승준이 걱정하는 건 물귀신도 오리도 아니고 호수였다.
‘물 무서울 텐데⋯.’
고개를 들어 회의 테이블 저편으로 스치듯 시선을 던졌다. 초원은 입술을 깨문 채로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숙인 승준은 고 팀장의 메모를 떼어 내곤 서류철을 왼쪽으로 내밀었다.
“이으뜸 씨.”
“네, 팀장님.”
“해병대 출신이랬죠? 심령1팀 지원 부탁합니다.”
“제정신이야?”
“죄송합니다.”
희경의 책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초원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생트집도 아니고 잘못은 맞으니 억울할 건 없었지만, 이게 이렇게 팀원들 앞에서 공개 처형하듯 잡을 일인가 싶기는 했다.
‘빌미를 준 내가 잘못이지.’
“간이 배 밖에 나와도 정도가 있지. 어디 회의 중에, 그것도 팀장님 앞에서 졸아?”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주임도 달았겠다 이제 몇 년 차 되니까 회사 생활이 아주⋯.”
별안간 희경의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안희경입니다. 네, 팀장님. 네, 알겠습니다.”
전화 통화가 이어지는 동안 초원은 어색함을 참으며 손가락만 비틀어댔다. 탁, 희경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뭐하고 서 있어? 가서 일이나 해. 혈세 아깝게.”
앙칼지게 면박을 준 희경은 서류와 스케줄러를 챙기더니 그대로 일어서 팀장실로 향했다.
“후우⋯.”
늦게 태어난 게 죄다. 늦게 태어나서 늦게 입사하는 바람에 저런 인간을 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초원은 속으로 투덜대며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신경 쓰지 마요.”
현우가 칸막이 너머로 빼꼼 눈을 내밀고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래, 저 인간 저 지랄하는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대각선에 앉은 병훈도 거들고 나서고 머쓱함이 덜 해진 초원은 쓰던 보고서를 마저 쓰기 시작했다.
“근데 어젯밤에 드라마라도 몰아 봤어?”
“아뇨, 완전 잘 잤는데요. 10시부터 잤는데.”
“피곤에 전 얼굴인데? 춘곤증인가?”
그 말에 초원은 서랍에서 거울을 꺼내 들었다. 눈은 병훈의 말대로 피로에 전 동태눈인데 우습게도 뺨은 아주 보름달 뜬 듯 빵빵하고 생기가 넘쳤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살도 쪘다. 배도 자꾸 나오는 게 이러다 맞는 바지도, 치마도 없을 것 같았다. 허구한 날 먹고 자기만 했으니 그럴 법도 했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피곤한 건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뿐인가? 곧 오리라 생각했던 생리도 3개월째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갑상선 저하증?’
초원은 거울로 목을 비추어 보았다. 눈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손으로 꾹꾹 눌러 보았지만 딱히 혹이 만져지지도 않았다.
‘그래도 모르니까 병원에 가 봐야겠네.’
‘뭐야? 벌써 폐경인가?’
불임인 것도 억울한데 나이 서른에 조기 폐경일 수도 있다니 암담했다.
갑상선 호르몬 수치는 정상이었다. 산부인과에 한 번 가 보라는 내과 의사의 말에 오후 반차까지 내고 병원에 온 초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기실에는 초원의 나이 또래가 몇몇 앉아 있었다. 부른 배를 쓰다듬는 여자들을 마주하고 우두커니 앉아 조기 폐경을 걱정하고 있자니 착잡했다.
지지리 복도 없지. 참 지뢰밭 같은 인생이다.
“어?”
신세 한탄을 하던 중, 갑자기 어깨를 무언가가 콕 찌르자 초원은 고개를 휙 돌렸다.
“아, 머리카락 묻어 있어서요.”
옆자리에 앉은 50대로 보이는 여자가 웃으며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쥐고 있었다.
“아, 네.”
결벽증이 심한 여자인가. 요즘도 생판 남의 어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사람이 있나 보다.
“아가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아⋯, 서른이요.”
이런 데서 모르는 사람과 말 섞는 건 싫었지만 살갑게 다가오는 사람에게 예의 없이 굴기도 그랬다.
“어머, 훨씬 어리게 생겼는데.”
“감사합니다.”
“남자 친구는 있고?”
“네? 아뇨.”
하여간에 생판 남한테 이런 호구조사는 왜 하는 걸까? 초원은 마음이 불편해져 몸을 살짝 반대편으로 틀었다.
“참, 나도 주책맞지? 이렇게 생판 모르는 아가씨한테⋯. 우리 딸이 나보고 이러지 좀 말랬는데 내가 좀 심심해서.”
“아, 괜찮습니다.”
괜스레 미안해진 초원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딸이 아가씨보다 두 살 어리거든. 저 서울역 앞에서 제약 회사 다니는데.”
“아, 그러세요?”
설마 딸이 특관청에 다니는 건가 싶었지만 서울역 앞에는 실제로 제약 회사가 몇 군데 있었다.
“아가씨는 어디 다녀?”
“저도 제약 회사요.”
“그래? 같은 덴가?”
“⋯⋯.”
“근데 아가씬 말수가 별로 없나 봐?”
“아, 네. 하하⋯.”
보통 이 나이대 아주머니들은 자식 자랑이며 재산 자랑이며, 이야기를 하는 걸 듣는 것보다 더 좋아하지 않던가.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초원에게 궁금한 게 많았다.
‘들어 주는 건 못 할 거 없는데⋯.’
위아래를 뚫어져라 훑어보는 시선이 불편했다.
“등산 다녀오시는 길인가 봐요?”
초원은 아주머니의 발치에 놓인 등산 가방을 보고 물었다.
“어, 아니. 그냥 내가 짐이 좀 많아서.”
“홍초원 님.”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자 초원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아주머니에게 눈인사를 했다
‘어후, 살았네.’
그렇게 들어가기 싫었던 진료실로 초원은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어디가 안 좋아서 오셨어요?”
마주 앉은 여의사가 안경을 고쳐 올리며 물었다.
“3개월째 생리가 없어서요.”
“임신 가능성은 없고요?”
“아뇨.”
“피임약 쓰시는 거 있으세요? 약 때문일 수도 있거든요.”
“아뇨, 제가 사실 불임이거든요. 배란이 안 돼서⋯.”
“아⋯.”
의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얼굴에 딱하다는 기색은 없어 진료실 공기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생리는 규칙적이셨어요?”
“네, 가끔 스트레스 심하게 받으면 한 달 정도 늦은 적은 있는데 어쩌다 한 번이었거든요.”
“그럼 옷 갈아입으시고 초음파 한 번 보죠.”
의사가 굴욕 의자 뒤 커튼을 가리키자 초원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울상이 됐다.
다리 사이로 쑤욱 들어오는 프로브는 차갑고 끈적했다. 그 불쾌한 느낌에 초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뜨겁고 끈적한 물건이라면 익숙한데⋯.’
머릿속 음란마귀가 눈치 없이 튀어나왔다.
‘시끄러워. 낄 때 안 낄 때를 모르네. 자꾸 그러면 굿해서 쫓아낼 거야.’
눈살을 찌푸리던 그녀는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하세요?”
“아, 아뇨. 하하⋯.”
“금방 끝날 테니 잠시만 참으시면 돼요.”
아무리 여의사라도 이렇게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채로 눈을 마주치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초원은 창피함을 숨기려 고개를 돌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 저게 뭐지?’
그냥 회색빛이어야 할 자궁 한가운데에 검은 공간이 있었다. 그것뿐인가? 그 아래쪽에는 아무리 봐도 조랭이떡같이 생긴 무언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왜 저런 게 저기 있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렇게 생긴 걸 본 적이 있었다. 의대 시절 수업 시간에, 그리고 언니가 조카를 가졌을 때 보여 줬던 초음파 사진에서.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머릿속이 멍해졌다.
‘꿈인 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지만 아기는 엄마에게 ‘나 살아 있어요.’라고 외치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선생님, 설마⋯.”
초원은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의사의 얼굴에는 이미 축하의 뜻을 담은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임신이시네요. 14주 정도 된 것 같은데.”
“아니, 저 불임인데⋯.”
보고도 믿지를 못하는 초원을 향해 의사는 모니터를 돌리고 패널 위의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세찬 심장 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꼼지락꼼지락 팔다리를 움직이는 아기에게 홀려 눈을 떼지 못하는 초원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불임은 병원에서 진단받으신 거예요?”
“네.”
“드물지만 검사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 기적적으로 난소가 회복됐을 수도 있고요.”
“네, 진짜 기적이네요.”
병원은 물론, 삼신할매도 안 된다던 기적이 일어났다. 하지만 기적은 신이 만드는 것 아니던가. 그 신도 못 한다던 일이 일어난 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기는 다 건강하니까 걱정 마시고 태교 열심히 하시고 4주 후에 뵐게요.”
“네, 감사합니다.”
태교라니. 평생 자신과는 상관없을 줄 알았던 말을 들으며 진료실 밖으로 나오는 기분이 얼떨떨했다. 바닥을 밟는 것이 마치 구름이라도 밟는 것 같아 걸음 하나하나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왜? 어째서? 어떻게?’
소중하디 소중한 보물을 품은 초원은 접수대 앞 빈 소파에 조심스레 앉았다. 멍하니 초음파 사진만 두 손에 쥐고 내려다보던 그녀의 옆에 누군가가 털썩 앉았다.
“아이구, 아가씨 임신했어?”
좀 전의 그 아주머니였다.
“네? 아, 네.”
입으로는 인정했는데 머리로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름이 불리자 초원은 계산을 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5월의 오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분주하게 걸어가는 사람들과 어딘가로 빠르게 달려가는 차들을 초원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이 모든 게 다 거짓말 같았다. 설마 병원 대기실에 앉아 졸면서 꾸는 꿈인 건 아닐까? 아니면 잔인하기 그지없는 몰래카메라라도 되는 걸까? 누가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 ‘몰래카메라였습니다!’하고 외치길 기다리며 초원은 길거리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피식 웃었다. 엉뚱한 상상에도 정도가 있지.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답을 몸속에 품고도 이러는 자신이 우스웠다.
지하철역을 향해 멍하니 발걸음을 옮기던 초원은 역 앞에 있는 대형 의류 매장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1층 쇼윈도에 전시된 자그마한 마네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니 마음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초원은 잠시 망설이다 결심한 듯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 들어갔는데, 어느새 하늘색 구름무늬 바디 슈트와 토끼 귀가 달린 분홍색 우주복을 들고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다.
‘아기 성별은⋯.’
‘그건 사실 말씀드리면 안 되는데⋯.’
‘아, 그쵸.’
‘⋯옷은 분홍색 사시면 되겠네요.’
딸이라니. 기적적으로 생긴 것도 고마운데 딸이라니. 아직 손바닥 크기도 안 되는 아이를 두고 벌써 예쁜 옷만 입히고 머리도 예쁘게 땋아 줄 생각을 하는 초원의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갈 줄 몰랐다.
‘에잇, 하늘색이어도 예쁘면 그만이지 뭐.’
둘 다 집어 쇼핑백에 넣었다.
‘으앙, 진짜 보드랍다. 진짜 쬐끄맣고⋯. 세상에, 이건 인형 신발 같네.’
이것저것 예뻐 보이는 건 다 집어 이리저리 돌려보고 만져보았다. 항상 언니 옷만 물려 입었던 어린 시절의 한이라도 풀듯 초원은 카드값 생각하지 않고 쇼핑백을 마구마구 채웠다.
‘아, 신난다.’
제 옷 사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즐거웠다. 손에 커다란 종이 백을 든 초원은 다른 손에 든 핫도그를 한입 크게 베어 물으며 지하철 승강장 벤치에 앉았다.
아직도 꿈만 같았다. 기분 내키는 대로 아기 옷을 잔뜩 사긴 했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초원은 핸드백 안주머니에 넣어 둔 초음파 사진을 꺼내 들었다.
‘진짜 임신 맞아?’
꿈이 아니라는 증거를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의사가 맞댔잖아.’
‘근데 의사가 틀렸으면?’
‘그게 말이 돼?’
‘아니, 그럼 이건 말이 되고?’
간절히 빌어도 안 된다던 일이 어쩌다 일어난 건지 아직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헐, 진짜 임신 맞잖아.”
초원은 임신 테스트기에 떡하니 뜬 새빨간 두 줄을 보고 외쳤다.
집에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온 집 안을 뒤졌다. 승준이 예전에 사다 줬던 임신 테스트기를 찾아 손에 쥔 초원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더랬다.
병원에서 초음파도 실컷 봐 놓고 임신 테스트기를 쓰고 앉았으니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확인하니 마음이 놓였다.
“와, 진짜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항암 때문이라고, 난자가 망가져 성숙이 안 된다고 들었다.
‘그 뇌종양 때문에⋯.’
초원은 습관처럼 왼손을 들어 왼쪽 귀 위를 더듬었다. 원래는 이 자리에 수술 흉터가 있었다. 그랬던 걸 그 아이가⋯.
‘다 고쳤어요.’
“아!”
이제야 깨달았다. 아이가 말하던 ‘다’에 불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걸.
“세상에, 나 왜 그 생각은 못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