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72
이렇게 큰 선물을 아낌없이 주고 간 아이를 떠올리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마워, 시온아. 진짜 진짜 고마워.”
고맙단 말만으로 다 갚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한테 제사 또 지내 달라고 해야지.’
눈가를 훔치던 초원은 느닷없이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아, 나 진짜 바보 아냐.”
그걸 모르고 혼자 울고불고 생쇼를 했다. 할 필요 없었던 고민을 하며 승준을 힘들게 한 건 차라리 귀여운 수준이다. 입에 담기도 힘든 상처를 주면서 아이 아빠를 억지로 밀어냈는데 그때도 배 속에 이 아이가 있었다니.
‘헐, 설마 얘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초원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승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막막할 따름이었다.
“얘, 힌트 좀 주지 그랬니?”
사실 아기는 힌트를 드럼통째 퍼붓다시피 했는데 임신은 생각도 못 했던 초원이 눈뜬장님이었다.
‘어떻게 얘기하지?’
그 난리를 쳐 놓고 임신했으니 돌아오라고 하는 건 뻔뻔스러운 짓이었다. 요즘의 그 차가운 태도를 보면 정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걸지도 몰랐다.
‘사과부터 해야지. 근데 안 받아 주면 어떡하지?’
설마 이젠 초원도 아이도 필요 없다고 하는 건 아닐까? 그럴 법도 했다. 정을 떼버리겠다며 심장에 비수를 꽂아 버렸으니 말이다.
이젠 그 꿈처럼 승준을 닮은 딸을 그의 품에 안겨 줄 수 있다.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초원의 마음에 턱턱 걸리던 고민 없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제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젠 더는 사랑하지 않을지도.
화창한 봄날이던 머릿속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먹구름은 초원이 불러온 것이었다.
고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일은 어떡해?’
아이를 키우며 현장 요원 일을 계속하는 건 무리였다. 야근도 많을뿐더러 잘못하다간 이렇게 어렵게 얻은 아이가 엄마 없이 커야 할 수도 있었다.
‘그냥 관두고 전문의 따야 하나?’
승준과 결혼하면 신병은 걱정할 것 없었다. 그러니 초원이 그렇게 원하던 의사의 길을 이젠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얘는?’
문제는 아이를 키우며 인턴부터 시작해 레지던트 생활을 하는 것도 무리란 사실이었다. 어떻게 얻은 아이인데, 아이가 잘 때 나가 잘 때 들어오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 연구직!’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산 연구소의 연구직으로 옮기면 제법 안전하고 칼퇴근도 가능하니 딱이지 않은가.
‘내일 부탁해 봐야지.’
승준에게 할 말을 고민하며 멍하니 아랫배를 쓰다듬던 초원은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향했다.
‘배가 얼마나 나왔나?’
전신 거울 앞에 서서 블라우스 자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 아랫배가 살짝 둥그렇게 나와 있었다. 손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만져 보았다. 뱃살처럼 말랑하지도 않고 딴딴했다.
‘그래, 이게 어딜 봐서 뱃살이야.’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는 걸 보고 똥배라고, 살쪘다고 생각했다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헤실헤실 웃으며 배를 어루만지던 초원은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다.
“안녕, 아가야? 엄마야, 흑⋯.”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엄마야, 내가 엄마라고⋯.”
***
물은 기분 나쁘게 따뜻했다.
‘기분 나쁘게 핏빛이고⋯.’
몽롱한 정신을 붙들며 승준은 아래로 미끄러지는 몸을 끌어 올렸다. 욕조 속의 물이 출렁였다. 어째서인지 물속에 잠긴 왼팔이 불에 덴 듯 쓰라렸다. 그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왼팔을 들어 올렸다.
‘이거 뭐야?’
치미는 메스꺼움을 참으며 오른손으로 왼팔을 붙들었다. 병원에 가야 했다. 아니, 119를 불러야지. 몸을 일으키려던 승준은 힘이 빠져 다시 욕조 속으로 미끄러졌다.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다. 욕조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 그녀의 얼굴에는 오랜 염원을 이루기라도 한 듯 후련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기괴한 미소에 승준은 숨이 턱 막혔다.
“초원 씨, 나 죽고 싶지 않아.”
눈앞의 여자가 기쁜 듯 활짝 웃었다. 무어라 말하는 듯 입술이 움직였지만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서서히 눈앞도 깜깜해졌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미웠어? 도대체 내가 뭘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
아니지. 이건 그의 잠재의식이었다.
‘나 이 정도로 그 여자가 미운 건가?’
잠에서 깬 그의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며 관자놀이에 긴 눈물 자국을 남겼다.
가로등 불 아래에 선 승준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3층 오른쪽 집 창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굳어 버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초원의 자취방 창문을 바라보던 그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면제의 약발도 거기까지인지 더는 잠이 오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런 섬뜩한 꿈을 꾸고도 그 여자가 보고 싶어 이 새벽에 여기까지 찾아왔다. 문은 두드리지도 못할 거면서.
피곤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가 초원을 끌어안고, 그 보드라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 달큰한 살 내음을 맡으며 잠들고 싶었다. 매일 밤 같이 자는 걸 내기의 소원으로 건 이유를 그녀는 평생 모를 거다. 승준의 낮은 피곤한 일, 끔찍한 일, 더러운 일투성이였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밤에는 초원의 곁으로 돌아가 그 평온한 숨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큰 걸 바란 것도 아니고⋯.’
저곳에서의 마지막 밤을 문득 떠올린 승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승준의 품에서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역겨운 짓을 그녀도 좋아서 한 건 아닐 거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치욕스러울 짓을 할 정도로 그가 떠나 주길 바란다면 어쩔 수 없었다.
‘하⋯, 무심한 여자. 툭하면 상처 주고⋯.’
피식, 실소가 입가로 터져 나왔다.
‘예전엔 내 역할 아니었던가?’
이렇게 되돌려 받는구나 싶었다. 승준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골목길 끝으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입이 근질근질해 출근하는 대로 팀장실로 직행하려 했더니, 운 없게도 오늘은 일산 연구소로 바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어젯밤 격리된 개체를 면담하고 나오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연구소 근처 중국집으로 들어가 앉은 초원은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현우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말해야겠지?’
말도 없이 보직 이동 신청을 해 버리면 섭섭해할 게 분명했다.
‘병 주기 전에 약부터 줘야 하나?’
“왜요?”
시선을 눈치챈 현우가 메뉴판에서 눈을 떼고 물었다.
“선배, 오늘은 내가 살게요.”
“왜? 오늘 무슨 날이에요?”
현우의 멋모르는 물음에 초원은 멋쩍게 웃었다.
“뭔데요? 다 먹으면 말한댔잖아요.”
마지막 남은 탕수육을 집어 초원의 볶음밥 접시 위에 올려 준 현우가 궁금해 못 참겠다는 듯 재촉했다.
“아, 그게⋯.”
딱히 현우가 반길 이야기는 아니라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 초원은 머뭇거리며 짬뽕 국물을 젓가락으로 휘저었다.
“궁금하게. 좋은 소식이에요, 나쁜 소식이에요?”
“음, 나한텐 좋은 소식인데 선배한테는 나쁜 소식일지도 몰라요.”
“설마 경기지청으로 가려고요?”
“아⋯, 정답은 아닌데 비슷하네요.”
현우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일산 연구소요. 연구직으로 옮기려고요.”
“결정 난 거예요?”
“아뇨, 이따가 팀장님한테 말해 보려고요.”
그 말에 현우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에이, 그럼 못 가는 거네. 팀장님이 안 보내 주실걸?”
“하하, 당장 보내 주실걸요?”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그게 사실은⋯.”
초원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임신했거든요.”
“아!”
단무지를 씹던 현우는 생각도 못 한 충격적인 소식에 놀라 혀를 깨물었다.
“헐, 괜찮아요?”
“으⋯, 아파 죽겠네.”
“그게 혀까지 깨물 일이에요?”
초원이 키득대며 놀리기 시작했다. 아린 혀를 달래려 찬물을 들이켜던 현우는 컵을 내려놓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팀장님이랑 결혼하는 거네요.”
“그렇겠죠.”
초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우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팀장님도 아세요?”
“사실 아직 말 못 했어요.”
“근데 그럴 이유가 있어서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
“이유는 나한테 있었죠. 팀장님이 아니라⋯.”
‘있다’가 아닌 ‘있었다.’ 과거형이 주는 그 후련함에 기분 좋게 웃은 초원은 탕수육을 집어 입에 넣었다. 현우는 무슨 생각을 그리 곰곰이 하는 건지 말이 없었다.
“나도 연구소로 옮길까요?”
“네?”
“초원 씨도 없고 팀장님은 나 싫어하고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는데.”
“법대 나와서 연구직 못하잖아요.”
“격리팀으로 가면 되니까.”
“선배는 갑갑해서 못 할걸요? 돌아다니고 쫓아다니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무슨.”
역시 그를 너무 잘 아는 초원이었다. 현우의 얼굴 위로 번진 미소에 아쉬움이 더욱 짙어졌다.
“이러니까 내가 초원 씨랑 못 떨어지는 거예요.”
“홀로서기 해야죠. 선배의 오피스 마미는 이미 딴 애가 채갔어요.”
배를 어루만지는 초원의 얼굴로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아, 까먹을 뻔했네.”
사무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 현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네?”
“축하해요.”
“고마워요.”
자신의 차로 향하던 승준은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한 채 웃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앞에서는 땅만 보는 여자가 현우의 앞에서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미소를 짓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저런 미소, 그에게 한 번도 지어 준 적 없었다. 아무리 활짝 웃어도 언제나 옅은 그늘이 져 있던 얼굴이었다.
‘결국 그런 건가?’
그를 위한다는 건 그저 허울 좋은 핑계에 불과했을 뿐. 마음이 떠난 것을 눈치 없이 매달렸나 보다.
“어, 팀장님 안녕하세요.”
현우의 인사에 승준은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차 운전석 쪽으로 걸었다.
‘헐, 말해야 하는데 어디 가는 거야?’
승준을 따라가려던 초원은 뒤따라오던 병훈의 외침에 멈춰 섰다.
“둘이 알콩달콩 보기 좋네.”
헛소리 그만하라는 듯 초원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병훈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식장 언제 잡아?”
“당장 잡으려고요.”
“오오, 홍 주임 적극적인데?”
“선배 장례식장요.”
병훈의 옆에 있던 으뜸은 물론, 머쓱하게 서 있던 현우까지 웃음을 터트렸지만, 승준은 이쪽을 보지도 않고 운전석 문을 열어젖혔다.
“아, 팀장님!”
초원은 잽싸게 다가가 차에 타려는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저기, 외근 가시는 거예요?”
“네.”
그 사무적인 투에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바로 퇴근하실 거예요?”
“아뇨. 무슨 할 말 있습니까?”
“네.”
여느 때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와 복숭앗빛으로 물든 얼굴에 승준은 하려던 것도 잊고 눈만 깜빡였다.
“나중에 봅시다.”
겨우 눈을 뗀 그는 운전석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초원은 오후 내내 사무실 입구만 힐끔거렸다. 그러다 퇴근 시간을 겨우 10분 남겨 두고 승준이 돌아오자 미리 작성해 둔 보직 이동 신청서를 냉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똑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간 초원은 승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서류 가방에 든 걸 꺼내느라 바쁜지 딱히 눈길을 주지 않았다.
‘뭐부터 얘기하지? 사과부터 해야겠지? 아, 입 간질간질해 죽겠네.’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승준 씨, 나 임신했어요. 승준 씨가 그렇게 바라던 아기예요. 늦가을이 오면 꿈에서처럼 승준 씨 닮은 딸을 안아 볼 수 있을 거예요. 날 닮았을지도 모르지만, 원래 첫 딸은 아빠 닮는다잖아요.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해요. 다시는 아프게 안 할 테니 용서⋯.
“그건 뭡니까?”
골똘히 할 말을 생각하던 초원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놀라 움찔했다. 승준은 손에 든 종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 이건⋯.”
머뭇거리는 초원에게 그는 얼른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찢으면 또 쓰지, 뭐.’
초원이 내민 신청서를 받아 든 승준은 별말이 없었다. 화를 내지도, 찢어 버리지도 않고 종이만 그저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그게 사실은⋯.”
“알았으니까 나가 보세요.”
“네?”
승준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신청서를 서류함에 던져 넣더니 사무실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화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