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74
“어쩌긴 뭘 어째?”
그 꽃 같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비틀린 미소에 승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임산부를 죽일 정도의 쓰레기는 아니거든?”
“뭐?”
휙, 놈이 오른손을 옆으로 냅다 쳤다. 현관 쪽으로 날아간 총이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승준의 턱에 주먹이 꽂혔다.
“어이쿠, 스포일러를 해 버렸네!”
상대는 승준보다 작고 약한 여자의 몸이었다. 문제는 그 몸이 특수훈련을 받은 몸이고 승준은 약에 취했다는 사실이었다. 약 기운에 휘청거리다 주저앉은 그의 옆구리에 강한 킥이 꽂혔다. 어느새 비릿한 피 맛이 나는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임신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얼이 빠진 얼굴로 공격을 막던 승준은 놈이 현관 쪽으로 향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놈이 상체를 구부리며 총으로 손을 내뻗는 순간, 비틀거리며 몸을 던졌다. 쿵, 놈의 몸이 현관문을 강타하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승준은 그 틈에 얼얼한 어깨를 부여잡고 총을 집으려 했지만 그의 목을 단단한 무언가가 가격했다.
“컥⋯.”
그 숨 막히는 고통에 휘청하던 승준은 불길한 철컥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너 끝내러 온다고 약속한 거 안 잊었지?”
그의 머리를 겨누는 검은 총구, 그리고 그 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초원의 싸늘한 얼굴. 그 낯설지 않은 장면에 가쁜 숨을 몰아쉬던 승준의 입가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미친 새끼, 죽은 목숨인데⋯.”
숨을 헉헉대며 외치는 놈의 등 뒤에서 철컥 소리가 난 듯한 건 착각일까?
“⋯웃음이⋯.”
탕탕, 고막을 찢을 듯한 두 번의 총성이 좁은 현관을 울렸다. 몸뚱이가 그대로 풀썩 쓰러지며 흰 대리석 바닥 위로 붉은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힘이 빠져 벽에 등을 대고 늘어진 승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현관문을 지나 다가오는 초원의 손에는 권총이 들려 있었다.
“승준 씨, 괜찮아요?”
그 걱정 가득한 눈빛을 보자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끌어안을 만반의 준비를 갖췄건만, 훈련을 너무 잘 받은 탓인지 초원은 오다 말고 개체 옆에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승준의 총을 집어 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놈의 목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맥박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초원 씨⋯.”
무거운 손을 들어 올려 내밀었다.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아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몰랐다.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저놈이 해코지라도 하지 않았는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지 아는지, 그리고 임신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흠, 죽었네.”
능력을 잃은 몸뚱이가 서서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여전히 무심한 여자인 초원은 승준의 손을 잡아 주기는커녕 정해진 대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고수습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규정 좀 지키래도 그렇게 말을 안 듣더니 이럴 때만 철저하네.’
승준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벽을 짚으며 한 걸음 다가서자 그제야 초원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103동 2101호요. 개체는 이미 사망했고⋯.”
승준은 덮치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무게에 초원의 몸이 휘청거렸다.
“15분 안에 온대요.”
그는 저보다 작고 가녀린 몸에 기대다시피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덴요? 구급차도 불러요?”
“아니, 그냥 몇 대 맞았어. 초원 씨 운동 그만해도 되겠더라.”
무거운 가슴팍을 두 손으로 밀며 지탱하던 초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초원이 밀수록 승준은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근데 왜 내 문자 확인 안 했어요?”
“미안, 살인마랑 싸우느라 좀 바빠서.”
웃느라 들썩이며 스쳐 오는 아랫배의 느낌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임신, 진짜인가?’
승준은 벽을 짚어 가며 무릎을 꿇었다. 얇은 티셔츠를 걷어 올린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 옛날처럼 아랫배가 눈에 띌 정도로 동그랗게 부풀어 있었다. 그곳을 가만히 쓰다듬던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승준 씨, 그게⋯.”
배꼽 아래로 뜨거운 입술이 와 닿고 또 와 닿자 초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아빠의 온기를 아기도 느끼고 있길 바라며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를 손가락으로 애틋하게 어루만질 뿐이었다.
아기에게 열렬히 애정을 쏟아붓던 승준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씨익 웃었다.
“홍초원 주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실까요?”
“사유는 밝힐 필요 없다면서요?”
“아, 진짜 뒤끝 하곤⋯.”
몸을 일으킨 그는 주저 없이 초원에게 입술을 포갰다. 살벌한 배경을 뒤로한 달콤한 키스였다. 그간 억눌렸던 애정을 모두 쏟아부으며 서로를 머금던 두 사람은 입술을 떼고 눈을 마주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둘의 얼굴에 따사로운 봄날 같은 미소가 번졌다. 서로의 눈동자에 각자가 그토록 원하던 세상이 다 담겨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초원과 승준은 온 세상을 품에 끌어안았다.
에필로그: 특이생물관리3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올 때 토마토 주스]문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의아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진 그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미 다들 누가 보낸 문자인지 눈치챈 듯 웃고 있었지만.
엘리베이터 디스플레이의 숫자가 11로 바뀌고 문이 열리자 그는 실장과 과장이 먼저 나갈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당연한 일인 듯 먼저 내린 두 남자는 그가 따라 내리지 않는 걸 보고서야 눈썹을 추켜세웠다.
“먼저 들어가시죠. 저는 차에 놓고 온 게 있어 다시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차는 지하에 있는데 그가 누른 버튼은 1층이었다.
“내 결재판 어디 갔지?”
아무래도 결재판을 신청해서 받는 족족 훔쳐 가는 요정이 사무실에 있는 모양이라며 투덜대던 여자가 포기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옆자리의 파트너에게 물었다.
“선배, 복사할 거 있어요? 나 지금 회의 자료 복사하러 갈 건데.”
“아뇨. 복사 내가 할까요?”
“뭐래⋯. 됐어요.”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폴더 하나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기는 따로 있는데 저를 아기 취급하는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여자가 나가자마자 주무관급 이하 단체 채팅방에 다시 불이 붙었다. 물론, 그 방의 인원은 평소보다 하나가 줄어 있었다.
[박병훈: 난 아직도 충격이 가시질 않아] [이으뜸: ㅎㅎㅎ] [차현우: 팀장님이 홍 주임 예뻐하는 거 모르는 사람 없었잖아요.] [박병훈: 아니, 그래도 그게 흑심인 줄은 상상도 못 했지. 구미호도 돌 보듯 하시는 분인데.] [차현우: 구미호는 돌 보듯 하는 게 현명한 거죠. 양기만 훔쳐 갈 텐데.] [박병훈: -_- 그래도 엄청나다던데 양기를 기꺼이 바칠 만하다며] [정아름: 아 뭐예요 이런 소린 남자들끼리나 하세요 -_-+] [박병훈: 아, 아름 씨;;; 미안;;;] [이으뜸: ㅎㅎㅎㅎ;; 그나저나 홍 주임님 곧 연구소로 가셔야 한다니 아쉽네요.] [박병훈: 차현우 낙동강 오리알 됐네] [차현우: -_-;;;] [박병훈: 근데 홍 주임도 진짜 충격이야.] [이으뜸: 자세히 보면 두 분 잘 어울리시지 않습니까? 느낌이 비슷한 것도 같고요.] [박병훈: 그래 둘 다 아주 한랭 건조하니까] [정아름: ㅋㅋㅋㅋ 근데 팀장님이야 그래도 초원 주임님이 그렇게 쌀쌀맞지는 않은데] [박병훈: 그건 아름 씨가 여자라 그래-_- 남자들한테는 얼마나 까칠한데] [정아름: 그래도 팀장님만 한가요;;; 으으 저승사자랑 어떻게 한집에서 살아요;; 생각만 해도 불편해] [차현우: 집에서는 자상하시겠죠.] [박병훈: 난 상상이 안 된다. 자상한 조승준 팀장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되게 몹쓸 짓 하는 기분이야;;;] [차현우: ㅎㅎㅎ;] [박병훈: 앞치마를 두르고 된장찌개를 끓이는 팀장이라든가 이불 빨래하는 팀장이라든가 마누라 다리 주물러 주는 팀장이라든가] [정아름: 으으-_- 그만하세요 기분 나빠] [이으뜸: 좀 많이 안 어울리시긴 하네요.]병훈의 자세하고도 제법 그럴듯한 예시에 현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언젠가 팀장이 초원의 다리를 주물러 주겠다는 소릴 하는 걸 제 귀로 직접 들은 바 있으니 작두를 타야 하는 사람은 초원이 아니라 병훈인 건지도 몰랐다.
초원이 복사한 자료를 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와 앉고, 잠시 조용했던 채팅방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박병훈: 난 홍 주임이 차 주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차현우: 아닌데요;] [박병훈: 아니, 차 주임 병원에 있을 때 홍 주임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데. 난 딱 보고 캬아, 이런 게 사랑이지! 이랬단 말이지.] [차현우: ㅎㅎ;; 그냥 홍 주임이 의리가 있잖아요.] [박병훈: 하긴 그렇긴 하지. 근데 그때 팀장이 속 좀 탔겠어. 자기 여친이 딴 남자 구하겠다고 바락바락 대들었으니. 그러고 보면 팀장님도 참 대인배네.]그때는 분명 초원이 누구의 여친도 아니었지만 현우는 모르는 척 넘겼다. 이미 말 많은 이곳에서 온갖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초원이었다. 물론, 현우도 못지않게 시달리고 있었지만. 초원과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데에다 실체 없는 염문의 주인공이었던지라 현우에게 질문의 포화가 쏟아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몰랐던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현우가 초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었다.
[이으뜸: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게, 그때 팀장님이 전화로 홍 주임님 멀미한다고 신경 써 달라고 하셨네요. ㅎㅎㅎ] [박병훈: 오, 맞아! 그랬네. 완전 티 나는데 왜 그걸 몰랐지? 그 강도 잡았을 때도 하늘 같으신 팀장님이 황금 같은 주말에 무슨 주임 땜빵인가 했더니 이제 보니 그냥 여친 챙기러 가신 거였구만] [정아름: 맞다! 여친이 의사라고도 하셨잖아요.] [박병훈: 와⋯, 지금 보니 완전 팀장이 이마에 ‘나 홍 주임이랑 사귐’이라고 써 놓고 다녔네. 이야, 내가 왜 그걸 놓쳤지?] [차현우: 감 떨어지셨네요.] [박병훈: 차 주임이 그런 말 할 처지가 아니지. 어째 파트너면서도 몰랐냐? 완전 눈뜬장님일세] [차현우: 그러게요 ^^;] [박병훈: 헐, 차 주임. 팀장 앞에서 홍 주임이 차 주임네 집에서 잤다고 했잖아 0_0] [차현우: 아 그 얘긴 좀 하지 말죠] [박병훈: 차 주임 왜 목이 아직 달려 있냐?] [차현우: 팀장님 앞에서 홍 주임이랑 저랑 식장 잡으라 하셨던 분 목은 왜 아직 달려 있어요?] [정아름: 팀장님 오세요]도합 네 개의 클릭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외근을 나갔던 팀장이 벌써 돌아왔다. 아직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말이다. 채팅창을 내리고 급히 일하던 척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늘 그렇듯 대충 인사를 받아 준 팀장이 팀장실이 아닌 사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의아하던 시선들이 그의 손에 들린 빨간 생과일주스 컵을 발견하는 순간 멋쩍은 시선으로 변했다.
[정아름: 와, 너무하시다 팀장님 ㅠ_ㅠ 초원 주임님 것만 딱 사 오시고 ㅠ_ㅠ] [박병훈: 아름 씨가 팀장님 애 가졌어?] [정아름: 으으-_-+ 왜 그런 소릴 하세요?] [박병훈: 와, 씨. 금방 본 사람?] [박병훈: 아 고개 들지 마 이 사람들아!] [차현우: 왜요? 뭔데요?] [박병훈: 저승사자가 웃었어. 어우 오싹해라] [이으뜸: ㅎㅎㅎㅎ] [차현우: ^^;;] [박병훈: 얼씨구 홍 주임이 저렇게 빵긋빵긋 웃는 것도 오싹하다]이제야 살 것 같다는 얼굴로 토마토 주스를 쪽쪽 빨아 마시는 팀원의 머리를 상사가 귀엽다는 듯 쓰다듬었다. 병훈은 몰래 곁눈질하던 중인 것도 잊고 입을 쩍 벌리고 있다 몸을 돌린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고, 이놈의 악관절이⋯.”
턱이 아파 입을 쩍 벌리고 있었던 척,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팀장이 서 있는 쪽에서 피식 소리가 나더니 이내 발소리가 팀장실로 이어졌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다시 바쁘게 타자 치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박병훈: 진짜 충격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남의 집 안방 엿본 기분이야] [정아름: 근데 사무실에서 애정 행각 너무 당당히 하시는 거 아니에요?;;;] [박병훈: 뭐, 위에서 알아서 묵인해 주는데 눈치 볼 것 없겠지. 팀장은 운도 좋지. 규정 어기고 직속 부하 직원이랑 사고를 쳤는데도 위에서 앞장서서 다 덮어 주고. 운도 능력인가?]팀장이 부하 직원과 비밀 연애에 속도위반까지 저지른 건 제4격리소의 잘못으로 살인마가 탈출하는 바람에 그가 죽을 뻔한 것에 비하면 죄도 아니었다. 그러니 위에서 오히려 팀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다.
[박병훈: 근데 우리 용감무쌍하신 안 사무관님은 무덤 파다 파다 지쳤나? 요즘은 잠잠하네] [차현우: 그러게요. 드디어 팀장님 약점 잡은 것처럼 구시더니.]병훈은 사무실 저편에 앉은 희경을 힐끔거렸다. 틈만 나면 쏘다니던 분이 요즘은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일만 하고 있었다.
[박병훈: 하긴, 여기서 더 파면 쫓겨나는 건데 생각이란 게 있으면 이쯤에서 몸 사려야지.]초원의 임신을 알고 나서 ‘팀장 이제 커리어 막히겠네.’라며 입을 놀리고 다니더니 결국 팀장의 도발에 맹하게 넘어가서 자폭해 버렸다.
계기는 2주 전엔가 있었던 체육 대회였다.
팀장의 집으로 출동했던 사고수습팀을 통해 조 팀장과 홍 주임이 그렇고 그런 사이 같다는 소문이 퍼지더니 이내 간부 비서들을 통해 조 팀장과 홍 주임이 속도위반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다들 궁금해 죽는데 두 사람 다 입을 열지 않아 답답하던 차에 병훈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바로 체육대회 경품 추첨으로 소문의 진위를 가리는 것. 인사과 사람들은 좋다구나 하고 병훈의 아이디어를 실천으로 옮겼다.
그저 운이 좋아 경품에 당첨된 줄 알았을 팀장이 선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잔꾀가 들킨 모양이지만 그는 별말 않고 파란색과 분홍색 유아용 킥보드 중에서 분홍색을 골라 받아 갔다. 곧 애 아빠가 될 게 아니라면 왜 그걸 받아 가겠는가. 그게 병훈의 아이디어였고, 그 김에 아기의 성별까지 캐낼 수 있었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그런데 그게 희경이 무덤의 첫 삽을 뜬 계기가 되었을 줄이야. 희경의 자리를 노리는 병훈으로서는 결국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눈엣가시도 잡는 전개가 된 것이었다.
‘그거 여기 이 주임님 드리면 되겠네.’
뿌듯한 얼굴로 킥보드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초원에게 희경이 한 말이었다. 아기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킥보드를 몇 년씩이나 썩혀 둘 거냐며, 이미 유치원생인 딸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주라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줄 생각 없었던 초원은 물론, 역시나 받아 갈 생각 없었던 물체팀 이 주임도 난감해하는 그때, 병훈의 옆에 서 있던 팀장이 툭 내뱉었다.
‘상반기 평정 때가 다 됐네.’
그리고 희경은 그게 함정인 줄 모르고 황소처럼 돌진했다.
작년 하반기 평정 때 불량 등급을 받은 게 다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팀원이 공사 구분 못 하는 팀장에게 부당한 입김을 넣은 탓이라며 인사과에 찌른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근거 없음’. 그 조승준 팀장이 바보도 아니고 근태 기록이며 뒷받침할 증거가 없었을 리가 있겠나. 그렇게 팀장이 친히 파 준 무덤에 좋다고 뛰어든 희경은 요즘 다른 곳으로 가라는 압박을 팀장에게 받는 중이었다.
[박병훈: 저 인간 사라지면 나 진급 노려봐도 되는 건가? 사모님과 따님께 소갈비라도 사서 바쳐 볼까나? 후후후] [차현우: ^^;;;] [정아름: 근데요. 팀장님 결혼 생각 없는 거 아니었어요?? 전에 시큰둥하게 그랬잖아요. 결혼 굳이 해야 하는 거냐고. 그럼 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시는 건가?;;] [박병훈: 내가 들은 소문은 다른데?]빠르게 타자 치는 소리가 이어지고, ‘헉!’ 소리가 아름의 책상에서 터져 나왔다.
[정아름: 어떡해 초원 주임님 불쌍해 ㅠ_ㅠ]그 순간,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잡담은 그만하고 일들 합시다.”
놀라 굳어 버린 직원들을 뒤로 한 채 팀장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한랭 건조한 북극 한파가 지나간 듯한 정적을 가르고 빨대를 쪼오옥 빠는 소리가 얄밉게 울렸다.
에필로그: 얼음공주와 도둑
끼익, 문이 열리더니 둔탁한 구두 굽 소리가 타일 바닥을 울렸다.
“이제 티 나더라.”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 둘이 칸을 여러 개 띄운 채로 소변기 앞에 섰다.
“응? 뭐가?”
“아까 홍 주임 못 봤어?”
“아⋯, 난 잘 모르겠던데?”
“얼핏 듣기론 벌써 4개월이라던데? 폴더로 배 가리고 다니더니만 그런다고 티가 안 나나.”
“참나, 그 얼음공주랑 저승사자가 사고 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잖아.”
“근데 둘 중에 누가 얌전한 고양이야?”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와하하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남자 화장실 벽을 울렸다.
“전에 회계과 오 사무관은 결혼 생각 없다고 찼다며?”
“사무관 나부랭이는 급이 안 맞아서 결혼 생각이 안 든다는 거겠지.”
“근데 좀 불쌍하긴 하네.”
“응?”
“홍 주임이 보기보다 순진한가 봐.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한테 그렇게 홀랑 먹히고.”
“조 팀장, 그 더러운 도둑놈한테 된통 걸린 거지. 그 소문 들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