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8
“아, 귀찮아요. 방해되니까 얼른 퇴근들 하세요.”
초원이 얼굴을 팍 찡그리더니 이어폰을 고쳐 끼며 키보드 위로 다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더는 말 걸지 말라는 뜻을 읽은 두 사람은 마지못해 물러나야 했다.
“그럼 우리끼리 먼저 가 있을 테니까 끝나고 와.”
두 사람이 팀장실을 지나치며 팀장에게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는 팀장은 딱히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혹시 이거 기다리시느라 집에 못 가시는 건가?’
초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네.”
“팀장님, 혹시 녹취록 기다리시는 중이세요?”
“아뇨, 할 게 있어서.”
“아⋯.”
다행이었다. 그럼 부담 없이 천천히 해 놓고 가면 되는 거였다.
“얼마나 남았죠?”
“한 시간 정도 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그냥 퇴근하고 내일 아침에 해서 주세요.”
“아뇨,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마무리하고 가겠습니다.”
초원은 빈 사무실로 돌아와 앉았다. 혼자 있으니 어쩐지 더 능률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녹취록을 마무리하고 맞춤법 검사까지 끝낸 다음에 팀장의 메일로 보냈다. 시계를 보니 7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팀장님.”
다시 팀장실 문을 두드렸다.
“네.”
“녹취록 파일,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그래요?”
메일을 확인하는 팀장의 무표정한 얼굴에 모니터 불빛이 어른거렸다. 초원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서서 기다리며 생각했다. ‘수고했어요.’라는 말이 떨어지면 바로 고개를 꾸벅하고 짐을 챙겨 이불 속으로 직행해야지.
“초원 씨, 아직 저녁 안 먹었죠?”
팀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물었다.
저녁 아직 안 먹었냐니⋯. 무슨 질문이 이럴까? 본인이 시킨 일 때문에 오후 내내 사무실에 붙어 있는 걸 봤을 텐데, ‘아뇨, 저녁 먹었습니다.’라고 하면 ‘아, 그래요?’ 하고 집에 보내 줄 것도 아니지 않은가.
“네, 아직⋯.”
“그럼 저녁 먹으러 가죠.”
팀장이 컴퓨터를 끄고 일어서더니 외투를 걸쳤다.
‘둘이서요?’
초원은 하마터면 진짜 물을 뻔했다. 하필 이런 날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니. 아까 혼자 남아서 좋다고 한 거 취소다.
머뭇거리며 팀장실 문 앞에 계속 서 있자 팀장은 나갈 준비는 안 하고 뭐 하냐는 듯 눈짓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와 주섬주섬 코트와 가방을 챙겼다. 팀 사무실 입구에서 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따라나서면서 초원은 생각했다.
‘약속 있다고 할 걸⋯. 왜 아깐 그 생각을 못 했지?’
둘이서만 엘리베이터를 타자니 어색했다. 초원은 최대한 멀찍이, 하지만 팀장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섰다.
“초원 씨, 뭐 먹고 싶어요?”
“아, 저는 아⋯.”
“아무거나라고 하면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 사 줄 겁니다.”
그거 솔깃한데? 고르는 데 10초, 데우는 데 30초, 먹는 데 30초. 도합 70초 만에 삼각 김밥을 흡입한 다음 ‘팀장님, 잘 먹었습니다.’하고 집으로 냅다 뛰는 상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더니 팀장도 웃고 있었다.
‘왜 웃으시지?’
“가격 생각하지 말고 지금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거로 말해요.”
“…⋯.”
‘가격 생각하지 말고’라는 말에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지만, 초원이 생각해도 이건 어이가 없었다.
“뭔데 그래요? 셋 셀 동안 말 안 하면 진짜 삼각 김밥 먹으러 갑니다.”
“감성돔이요.”
“네?”
팀장님도 어이가 없겠지. 초원은 그 이름난 돌부처답지 않게 허를 찔린 듯한 얼굴을 보고 우물쭈물했다.
“그냥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거 말하라 하셔서⋯.”
팀장이 피식 웃더니 물었다.
“감성돔 좋아해요?”
“저는 회는 다 좋아해요.”
“그래요, 그럼 감성돔 먹으러 갑시다.”
‘귀엽네.’
이 여자는 다 귀엽다.
어차피 사 주려던 탕수육인데 깜찍한 수를 쓰며 먹고 싶다는 티를 내는 것도 그렇고. 저녁 먹으러 가자는 그의 느닷없는 말에 허둥지둥하는 것도 그렇고. 반찬이 나오자마자 저 아담한 손으로 메추리알부터 집어 까고 있는 것도, 메추리알을 까다 얇은 흰자도 같이 까였는지 시무룩해지는 것도 귀엽다.
이 여자는 미워 보여야 할 때도 그저 다 귀엽다. 면담실에서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웃는 것, 다른 사람이었으면 한소리 했을 텐데 그저 아쉽기만 했다. 웃는 얼굴 귀여울 텐데 뒷모습만 보여서. 회의 때마다 넋 놓고 종이 뒷면에 바람개비만 그리고 있는 것도 귀엽기만 하다. 그래서 괜히 일찍 끝날 회의를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알까?
하지만 우는 건? 오늘 낮 삼신할매의 앞에서 저 귀여운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가며 점점 울상이 되던 잔상이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녹취록 작업을 끝내고 팀장실 문 앞에 섰을 때도 두 눈에 서러움의 흔적이 남은 것이 아팠다. 점심때처럼 먹고 싶은 거라도 사 주면 기분이 풀릴까? 젓가락을 들고 뭐부터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저 얼굴을 보니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초원 씨는 못 먹는 거 없이 다 잘 먹네요.”
낙지를 청양고추와 잔뜩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는 초원에게 그가 말했다.
“저는 없어서 못 먹는 거 빼곤 다 잘 먹어요.”
그 말에 승준이 소리 내 웃었다.
‘오늘 팀장님 두 번 웃겼네. 누가 오늘의 직원으로 안 뽑아 주나?’
초원은 괜히 뿌듯해져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침 빼고 다 팀장님하고 같이 먹네요.”
“그러네⋯.”
‘아침도 같이 먹는 사이면 좋을 것을⋯.’
승준은 상사로서 가지면 안 될 부적절한 속내를 매실주 한 잔과 함께 삼켰다.
초원은 낙지를 한 젓가락 더 입에 넣으며 마주 앉은 상사를 골똘히 바라보았다.
점심은 그렇다 쳐도 저녁은 왜 먹자고 하신 걸까? 사실 이유야 뻔하지 싶었다. 팀장도 사람인데, 게다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궁금하겠지. 그래도 그게 이렇게 비싼 밥까지 사면서 캐묻고 싶을 정도인가?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님 못 물어보게 계속 딴소릴 해야 하나?
낙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어떻게 난감한 질문을 피할 것인가 고민하는데 종업원이 회 접시를 들고 왔다.
‘그래, 일단 먹고 고민하자.’
초원은 감성돔 한 점을 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쫄깃쫄깃하고 고소한 게 제맛이었다. 매실주로 입가심을 하고 한 점을 더 집으려는데 회가 전혀 줄어들어 있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팀장이 수저는 안 들고 초원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팀장님은 안 드세요?”
“먹고 있어요.”
“혹시, 회 별로 안 좋아하세요?”
“아뇨, 좋아하는데. 초원 씨 많이 먹으라고.”
“안 드시면 저 민망해서 못 먹는데요.”
초원은 회 한 점을 집어 팀장의 앞 접시에 놓고 “이 맛있는 걸 왜 안 드시고 보고만 계시냐.”며 웃었다. 승준은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회는 거의 다 먹어 가는데 아직도 팀장은 ‘그 난감한 질문’을 건드리지 않았다. 초원은 잠자코 팀장이 운을 떼길 기다리다가 매실주를 세 병째 비웠을 즈음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팀장님, 저 저녁은 왜 사 주시는 거예요?”
“그냥, 초원 씨 맛있는 거 좋아하잖아요.”
‘맛있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인가?’
초원은 뾰로통한 얼굴로 물었다.
“아까 할머니가 무슨 소리 했는지 물어보시려고 저녁 먹자 하신 거 아닌가요?”
“아닌데?”
승준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잘못 짚었나 보다. 초원은 민망함에 죄 없는 풋콩만 열심히 깠다. 그런 그녀를 조용히 관찰하고만 있던 승준이 초원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뭐, 초원 씨가 얘기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요.”
“딱히⋯, 얘기한다고 기분이 좋아지거나 무슨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닌걸요.”
“그럼 안 해도 되고.”
두 사람은 말없이 두세 번 술잔을 비웠다 채우기만 했다. 초원은 그 침묵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팀장도 딱히 초원의 말을 기다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녀는 혼자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아무리 간절히 빌어도 안 되는 일이 있더라고요.”
“음⋯, 그렇죠.”
어떤 의미로 이해한 걸까? 잔을 다시 채우는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이 사람도 간절히 빌었지만 안 된 일이 있을까? 괜히 저 때문에 팀장까지 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진 것 같아 초원은 미안해졌다.
“오늘 밸런타인데인데. 팀장님 붙잡고 제가 우울한 소리만 하고 있네요.”
“아니, 난 괜찮은데⋯. 초원 씨랑⋯.”
‘초원 씨랑 보낼 수 있으면 최고의 밸런타인데이 아닌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적절한 말을 찾으며 머뭇거리는 사이 초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초원이 상 위에 엎어뒀던 핸드폰을 뒤집자 보이는 건 현우의 이름이었다. 퇴근했냐며 문자가 오는 걸 내키지 않아 무시했더니 이젠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초원이 머뭇거리고 있자 팀장이 받으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원 씨, 일 끝났어요?]“네.”
핸드폰 너머로 “2차는 홍 주임 가고 싶은 데로 간다 그래!”라고 외치는 병훈의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예요? 저녁은 먹었어요?]“먹고 있는 중이에요.”
차마 누구랑 먹고 있는지는 말 못 하고 앞에 앉은 팀장을 슬쩍 봤더니 메추리알을 정성스럽게 까고 있었다.
“아뇨, 됐어요.”
초원은 어쩐지 팀원들에게 들키면 안 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괜찮아요? 내가 초원 씨 있는 데로 갈까?]평소와는 다른 기색을 눈치챈 건지 현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갑자기 팀장이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더니 곱게 깐 메추리알을 초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팀장님 취하셨나?’
“아뇨, 저 지금 혼자 아니라서⋯. 저는 괜찮으니까 재밌게 노세요.”
[아⋯, 그렇구나. 그래요, 그럼 내일 봐요.]“네.”
초원은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차현우 주임?”
“네.”
“왜?”
“박 주임님이랑 2차 간다고 올 생각 있냐고요.”
“가고 싶으면 가도 되는데⋯.”
“아뇨, 딱히⋯.”
현우를 좋아하는 초원이라 기다렸다는 듯 일어설 줄 알았더니. 예상이 어긋나는 걸 싫어하는 그이지만 이번에는 꽤 마음에 들었다.
“가 봤자 아까 무슨 일이었냐고 캐물을 게 뻔한데요.”
초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에 든 메추리알을 내려다봤다.
‘근데 뜬금없이 이건 왜 주신 거지?’
“박 주임이 시켜 준다던 소개팅은 했어요?”
“아⋯, 아뇨.”
“왜?”
팀장은 정말 취했는지 갑자기 질문이 많았다.
“그냥 관심 없어서요.”
“근데 초원 씨는 연애를 안 하는 이유가 뭐예요?”
초원은 순간 알고 묻는 건가 싶어 흠칫했다. 삼신할머니도 못 하는 일, 그리고 초원이 연애를 안 하는 이유. 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왜 물으세요?”
“그냥⋯, 청에 초원 씨 좋아하는 남자들 많던데, 연애를 안 한다니 남자들이 불쌍해서.”
초원은 평소의 팀장답지 않은 말에 쑥스러워져 웃기만 했다.
“우리 청 남자들이 별론가?”
“아니, 그건 아닌데요. 예전에 만나던 사람이랑 안 좋게 끝나서⋯.”
‘안 좋게’를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 심각하게 나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냥, 오래 만났어요. 당연히 그렇게 사귀다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게 서로 좋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또, 처음에는 괜찮다던 것도 시간이 지나니까 사람 마음이 변하는지 안 괜찮다고 그래서⋯.”
초원도 취했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팀장한테 술술 하다니.
“그냥 이젠 사람을 못 믿겠어요. 마음 여는 게 무섭기도 하고⋯. 물론 저도 부족한 것투성이지만⋯.”
“초원 씨가 뭐가 부족해요?”
딱히 둘러댈 말이 생각나지 않아 초원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근데 그런 말도 있죠.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게 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초원이 되물었다.
“그럼 팀장님은 왜 싱글이신데요?”
“어⋯, 나는⋯.”
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던 승준이 피식 웃었다.
‘초원 씨가 연애를 안 해서.’
이렇게 솔직히 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연애를 하면 일상을 공유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오늘 회사에서 뭐 했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다 보니 상대는 내가 자기한테 애정이 없어서 그런다고 착각하고, 그렇게 벽이 생기고⋯. 뭐 그런 거죠.”
뭐, 그런 건 다 급조한 핑계다.
“그럼 여기 다니는 사람 만나시면 되잖아요.”
승준은 씁쓸하게 웃다 초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그게 어디 그렇게 쉽나.”
“하긴 여기가 좀 심하게 남초죠.”
“그 와중에 연애 안 한다는 사람도 있고 말이지.”
회사에서는 그렇게 눈치 빠르면서 왜 이런 일에는 눈치가 지독히 없는 걸까? 승준의 속뜻을 알아채지 못한 초원은 그와 어울릴 만한 여직원들을 곰곰이 떠올려 봤다.
“법무과에 계신 변호사님 싱글 아닌가요?”
그 법무과 변호사는 여직원들 모임 때 대놓고 조승준 팀장은 자기가 찜했다고 하는 분이었다. 초원은 팀장의 반응을 살폈지만 그는 모른다는 듯 고개만 갸웃했다.
“두 분 잘 어울리시는데⋯.”
“됐어요.”
팀장은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한 얼굴로 매운탕만 뒤적였다.
“흠, 안 사무관님도 싱글이시긴 하네요.”
불쑥 이 말을 내뱉고 초원은 민망한 듯 웃었다. 제가 한 말이긴 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