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emperature difference between the woman and the man RAW novel - chapter 9
“안 사무관은 좀⋯.”
아니나 다를까 팀장이 고개를 들더니 무슨 헛소리냐는 듯 인상을 구겼다.
“하긴 팀장님은 총각이신데 안 사무관님은 돌싱에 애기 엄마라 좀 그런가요?”
“아니, 안 사무관은 그게 문제가 아닌데? 초원 씨도 잘 알잖아요.”
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쨌거나 제 윗사람 험담이니까 웃으면 안 될 걸 알면서도 초원은 저도 모르게 깔깔대며 웃었다.
‘그래, 팀장님도 다 아시긴 아시지.’
그렇게 초원은 밸런타인데이에 생각지도 못한 비싼 밥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얻어먹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준 팀장이 내일 보자며 돌아섰다. 초원은 술의 힘을 빌려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팀장님, 감사해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팀장님이 저 많이 챙겨 주시는 거 저도 알아요.”
“그래요? 티 난다니 다행이네.”
“네?”
초원은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망할 술. 본심이 불쑥 나와 버린 승준은 당황해 말을 돌렸다.
“들어가요. 늦었는데⋯.”
그가 초원의 어깨를 감싸며 건물 입구 쪽으로 슬쩍 밀었다. 낮에 맡았던 포근한 향기가 초원의 코를 자극했다.
“그럼, 내일 봬요.”
승준은 말없이 손만 흔들었다.
– 공금 by Jira
초원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가 아닌 욕실로 들어갔다. 회사에 있을 땐 얼른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안 나오고 싶더니, 지금은 어쩐지 마음이 가벼웠다.
느긋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와 침대에 누웠다. 길고 긴 하루였다. 파란만장은 오늘 같은 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니 어매가 매일같이 물 떠 놓고 비는구만 ⋯⋯ 어매한테도 미안하다고 좀 전해 주래이.’
낮에 삼신할머니가 한 말이 떠오른 초원은 핸드폰을 열었다.
[엄마, 이제 물 떠 놓고 안 빌어도 돼. 삼신할머니도 안 된대.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래.]전송 버튼에 손가락을 대려다 뗐다. 그렇게 핸드폰을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기껏 쓴 메시지를 지우고 다시 쳤다.
[엄마, 미안해. 그리고 항상 고마워.]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새해 첫날에 싸운 후로 엄마와 계속 냉전 중이었다. 긴말 안 해도 엄마에게 진심이 닿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어, 엄마⋯.”
그날 밤 초원은 엄마와 울고 웃으며 기나긴 통화를 했다.
팀장 말 잘 듣는 착한 홍 주임
띠링.
폰이 울렸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던 초원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초원 씨, 오늘 점심 같이 먹어요. ^^]초원은 잠시 고민하다 핸드폰을 열고 답장했다.
[아, 어쩌죠? 팀원들이랑 같이 먹기로 했어요. 이따가 퇴근하고 봐요.]사실 점심을 따로 먹어서 안 될 건 없었다. 그렇지만 괜히 남들 이목을 사는 것도, 팀원들한테 쓸데없이 놀림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아직 정식으로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몇 주 전, 초원은 심사숙고 끝에 팀장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가 가장 안전하지만 그게 배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니다.’
물론, 슬슬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벚꽃이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기 때문은 아니다, 절대로⋯.
가벼운 연애만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의 걱정도 덜고, 자신도 덜 외롭고, 현우에 대한 마음도 정리하고⋯. 그러다 보면 또 모르지, 잘돼서 해피엔딩이 될지도.
그렇게 마음먹은 날 초원은 병훈에게 물었다.
“그 회계과 사무관이랑 소개팅, 아직 가능해요?”
이름도 외모도 나이도 모르는 남자였지만, 자꾸 주변에서 그 남자랑 소개팅했냐고 물어보니 궁금한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초원은 나이 서른셋의 회계과 오원혁 사무관을 만나 토요일 점심때 파스타를 먹고 장미 꽃다발을 받았다.
원혁은 현우의 말대로 괜찮은 사람 같았다. 초원은 남자의 애프터 신청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같은 직장에 다녀서 초원이 하는 일을 이해한다는 건 놓칠 수 없는 장점이었다.
그러다 두 번째 데이트가 세 번째가 된 날, 원혁이 말했다.
“초원 씨, 진지하게 만나 보고 싶습니다.”
초원은 부담스러웠다. “진지하게”라니.
‘이미 결혼은 생각 없다고 소개팅 날 말했는데⋯.’
역시 그런 걸까. 결혼 적령기의 남자와 가벼운 연애라니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
이쯤에서 끝낼까 했지만 초원은 좀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원혁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이제 세 번 만났는데⋯. 좀 이른 것 같아요. 저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초원은 직장 사람들에겐 말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이 좁은 청에서 사내 가십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그다음 월요일부터 특이생물3팀 홍 주임이 회계과 오 사무관과 썸을 탄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사귄다고 안 난 게 어디야⋯.’
초원은 한숨을 쉬며 노트북을 닫았다.
오늘 점심은 백반집에 모처럼 팀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한 팀이 다 모였다. 한참 식사를 하던 승준이 참다못해 물었다.
“홍 주임, 요즘 연애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맞습니까?”
“아, 제가 홍 주임, 회계과 오원혁 사무관이랑 소개팅시켜 줬거든요.”
질문은 초원에게 했는데 엉뚱하게 병훈이 끼어들자 승준은 짜증이 치밀었다.
“아, 그게⋯.”
“아직 사귀는 거 아니래요.”
이번엔 초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현우가 먼저 나섰다. 초원은 왜 자신의 연애사를 당사자는 빼고 남들만 이야기하는지 당황스러웠다.
“중매 잘 서면 술이 석 잔이라는데, 홍 주임 나 술 언제 먹여 줄 거야?”
“뺨 석 대 맞을 준비는 안 하세요?”
초원은 병훈의 뺨을 당장이라도 내려칠 기세로 숟가락을 세워 들었다. 화제를 바꿔야 했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이 집 되게 괜찮지 않아요? 된장찌개에 꽃게도 들어 있네.”
“근데 그거 발라 먹기 되게 번거롭지 않아요? 대게 정도 사이즈면 모를까⋯.”
아무렇게나 던진 말을 다행히 현우가 덥석 받았다. 그리고 그걸 맞은편에 앉은 아름이 덥석 뺏어 또 아무렇게나 던졌다.
“대게 이야기하시니까 먹고 싶다. 친구들이 저번 주에 영덕에 대게 먹으러 갔다 왔는데 엄청 맛있었대요. 현우 주임님, 초원 주임님, 우리 대게 먹으러 가요.”
“어디요? 영덕에?”
현우가 놀라 물었다.
“네!”
“엄청 먼데⋯.”
“4시간 반 정도 걸린대요. 그래도 바다도 보고 맛있는 대게도 먹고 좋잖아요.”
“대게 맛있지⋯.”
초원은 이제 게딱지에 밥 비벼 먹을 생각뿐이었다.
“그럼, 이번 토요일에 어떠세요?”
아름이 신이 나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아⋯, 나 약속 있는데⋯.”
초원의 말에 잠자코 식사를 하던 승준의 미간이 꿈틀댔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어? 나 장산범 때문에 주말에 부산 가려고 했는데⋯. 홍 주임은 그럼 못 가요?”
간만에 그럴듯한 장산범 제보를 받은 현우는 주말에 부산으로 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그럴 땐 늘 초원도 함께했기에 이번에도 같이 갈 줄 알았던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번졌다.
“미안해요. 선약이 있네요.”
현우가 여느 때처럼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애원했지만 초원은 한숨만 옅게 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원 주임님, 제발요⋯. ㅠ_ㅠ]점심을 먹고 온 다음부터 아름은 사내 메신저로 초원에게 조르고 있었다. 현우와 데이트를 하려고 별일을 다 꾸며 봤지만, 그는 좀처럼 넘어오지 않았다. 초원과 같이 가자고 하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이번엔 그 망할 장산범이⋯.
[그럼 그냥 다음 주말은 어때요?] [아아 주임님, 저 진짜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ㅠ_ㅠ 현우 주임님은 장산범 일요일날 찾으러 가시면 되잖아요.] [그럼 아름 씨가 따라간다고 해 봐요. ㅎㅎㅎ] [그건 쫌, 무서운데;;;; 초원 주임님, 토요일날 약속 오 사무관님이랑 있는 거죠?] [네] [그럼 사무관님도 같이 오시면 넷이서 더블데이트하고 좋잖아요. 그쵸?]아름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초원과 원혁이 알콩달콩하며 분위기를 잡아 주는 사이 자신은 현우와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글쎄;;] [아, 주임님 ㅠ_ㅠ 제발요⋯. 현우 주임님한테 장산범은 일요일날 찾으러 가라고 설득 좀 해 주세요.] [그럼 내가 말해 볼 테니까 잘되면 숙소랑 차편은 아름 씨가 알아서 예약해요. 물론 돈은 나눠 내는 거지만요.] [아유, 그 정도야 당연하죠! >__<] [ㅎㅎㅎ;;] [주임님, 방은 오 사무관님이랑 같이 쓰실 거예요? *-_-*] [아뇨. 따로 잡아 주세요. 제발. 아직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_-]“⋯그래서 토요일에 영덕 가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시간 괜찮으면 가실래요?”
“아, 저야 좋죠.”
원혁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설마 1박이라고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초원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름 씨한테 제가 얘기해 둘게요.”
“오늘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요, 초원 씨?”
“글쎄요. 지금까진 제가 먹고 싶은 거 먹었으니까 오늘은 원혁 씨가 먹고 싶은 거로 먹어요.”
“흠⋯, 내가 먹고 싶은 거라⋯. 초원 씨가 안 좋아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저 안 가리고 다 잘 먹어요. 뭔데요?”
“닭발이요.”
초원은 아직 내숭이 필요한 사이에 닭발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닭발은 맛있으니까⋯.
“네, 저 닭발 좋아해요.”
원혁이 활짝 웃으며 차 시동을 걸었다.
닭발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매운 숯불 닭발과 소주를 시켰다. 닭발이 익기 기다리면서 둘은 오늘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초원은 원혁을 만날 때 이 순간이 제일 좋았다. 회사 밖 사람들에겐 못 하는 이야기, 팀원들은 이미 다 알아서 할 필요 없는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생겼으니까.
닭발이 다 익자 둘은 소주잔을 부딪쳤다. 초원이 닭발을 주먹밥 위에 올리고 입에 넣는 모습을 보던 원혁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초원 씨 의외네요.”
“네?”
“이런 거 잘 못 드실 것 같이 생기셨는데⋯.”
“왜요?”
“이슬만 먹을 것 같이 생기셔서 이렇게 징그럽게 생긴 것도 잘 드시고⋯.”
‘농담인가?’
농담이라기엔 원혁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초원은 당혹스러웠다. 그럼 이런 거 잘 먹게 생긴 건 어떻게 생긴 건가 묻고 싶었다.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이라니⋯. 그래,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한 소리겠지. 근데 잘 먹고 있는데 징그럽게 생겼단 말은 왜 한담?’
“제가 사실 파스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여자분들은 좋아하시니까 간 거거든요.”
“그렇구나⋯.”
잘 먹어 놓고 이제 와서 안 좋아한다니 조금 당혹스러웠다.
“혹시 알탕은 드세요?”
“음, 국물만 먹어요.”
“잘됐네요. 저는 건더기 좋아하는데. 하하.”
그 후로도 원혁은 ‘닭은 퍽퍽 살과 다리 살 중 뭘 좋아하는지’, ‘냉면은 물냉인지 비냉인지’, ‘고기는 비계가 좋은지 살코기가 좋은지’를 물었다.
눈치가 좀 없지만 그래도 착하고 재밌는 사람. 초원은 신나서 계속 이것저것 묻는 원혁을 보며 생각했다.
둘이서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닭발집을 나섰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 원혁의 손이 자꾸 스쳐 왔다.
‘뭐, 그래 손쯤이야.’
초원은 모른 척 손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다.
차로 돌아와 원혁은 뒷좌석 문을 열고 초원을 먼저 들여보낸 후 옆에 앉았다. 원혁이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는 동안 초원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주차장을 가로등 몇 개만이 듬성듬성 밝히고 있었다.
‘별일 없겠지?’
지금까진 이 남자와 별일 없었지만, 인적 드문 곳, 좁은 차 안에 단둘이 있으니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초원은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이었고 핸드백에는 현장 요원에게 지급되는 권총도 있었다.
“5분 안에 온다네요.”
원혁은 앞좌석으로 몸을 숙여 시동을 켰다. 라디오에서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초원 씨, 벌써 집에 가긴 아쉬운데 한잔 더 하러 갈래요?”
“아뇨. 내일 출근해야죠.”
“에이⋯. 그럼 영화라도 보러 갈까요?”
“지금요? 술 냄새 나는데?”
“나는 초원 씨랑 더 있고 싶은데⋯.”
원혁이 초원의 오른손을 쓰다듬으며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 닭발이랑 마늘이랑 소주를 그렇게 먹고?’
원혁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초원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뒤로 뺐지만 남자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