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ime-Limited Leader Makes the Raid a Success RAW novel - Chapter (587)
제587화
#587.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단장님 상태, 심각합니까?”
토마스는 혼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자신보다 남의 건강이 더욱 걱정됐다.
놀랄 일이었다.
이젠 기억도 가물거리는 어린 시절 몬스터로 인해 고아가 됐고, 미국으로 입양된 이후 양부모님도 몬스터에게 죽어 두 번째 고아가 된 이후로 처음이었으니까.
각성한 다음엔 마나중독증으로 몸이 갉아 먹히는 고통을 겪느라 누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 고통과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공포 속에 누군가를 걱정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그는 이런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인지하고서야 비로소 몸이 거의 완치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살 만해졌구나, 토마스. 남을 걱정한다니.’
단순히 병증이 나아지면서 감정을 느끼는 감각이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마나중독증이 없어져도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태도와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었다.
단지 토마스는 강무혁을 이타카 길드에서 벗어나게 해준 은인으로서, 같은 병과 싸운 동지로서, 진짜 헌터가 될 길을 알려준 스승으로서 존경하기에 신경 쓰는 것이었다.
그의 물음에 강창수가 답했다.
“사람은 기대 수명이란 게 있지 않나? 무혁이는 여기서 한 발만 삐끗해도 위험해.”
“얼마나요?”
“지금부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무난하게 산다고 해도 50을 넘기기 힘들 거야. 마흔 전에 요절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지금도 신체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게 용할 정도야,”
아들의 시한부를 선고하는 강창수의 음성은 뜻밖에 담담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았다. 그 역시 마나중독증 환자 특유의 기민한 눈썰미를 갖추고 있었다.
강창수는 지금 무섭게 인내하면서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친 기색이 있긴 하지만, 박사님 눈은 포기하지 않았어. 저건 싸우는 사람의 눈이야.’
강무혁에게서 봤던 눈동자이기도 했다.
헌터의 눈.
게이트에서 나온 것들과 싸우기는 강창수도 마찬가지였다.
뚫어지게 보는 토마스의 시선이 멋쩍었는지 강창수는 안경을 벗어 입김을 불어 티셔츠에 닦으며 말했다.
“해결 안 되는 한 가지 병과 오래 싸우다 보면 말일세, 때론 원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무감각해질 때가 있네. 목적과 수단이 뒤섞이는 거야. 연구 과제가 이기는지, 아니면 내가 이기는지 승부욕을 불태우지. 결국, 고집과 결벽증만 남아.”
“나쁜 성격과 주량도요. 아? 매형 성격은 원래 안 좋았지?”
마침 연구실로 들어오던 윤일도가 핀잔을 줬다.
“매형도 늙었네. 청승맞게 한풀이나 하고 있고.”
“게이트 관련 연구자 중에 성격 좋은 놈 봤냐?”
“저요.”
“그래서 처남이 야매라는 거야. 난 진퉁이고.”
윤일도는 대꾸 대신 토마스를 돌아보며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봤죠? 성격 나쁜 거. 무혁이가 병 때문에 성질머리 고약해진 게 아니라니까. 유전이야, 유전. 외탁했으면 순둥순둥했을 텐데. 걔 엄마는 아파서도 착했거든.”
“다 들린다.”
“무혁이처럼 입술 읽을까 봐 손으로 가리고 말했는데. 귀 밝은 것도 남았네.”
토마스는 강창수가 독순술을 익혔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강 박사님도 단장님처럼 독순술을 익혔습니까?”
“아마 무혁이보다 먼저 배웠을걸요. 무혁이는 모르겠지만. 뭐, 저 양반이 재미도 없고, 무뚝뚝해도 의외로 로맨티스트거든. 그런 귀여운 맛도 없었으면 우리 누님이 비커에 믹스커피 마시고, 샬레에 초코파이 올려 디저트라고 우기는 데이트나 하는 사람하고 결혼 안 했지.”
“만년 노총각, 아니 내일모레 노인 총각이 어디서 연애 훈수질이냐?”
“이게 다 매형 때문이잖아요. 한창 파릇파릇한 나이에 여기 잡혀 와서 이러고 있으니 내가 어느 세월에 여자를 만나겠어?”
“언제는 독신주의라며?”
“사회가 잘못된 거야.”
“지난번엔 연구실 탓하더니.”
토마스는 윤일도를 보면서 남모르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강창수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덕이었다.
누군가에겐 아내, 누군가는 누나.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모여 사는 것 자체가 위로인 셈이었다.
그 소중한 사람이 남긴 강무혁이라는 유산을 지키려는 공동의 목표도 확고했다.
윤일도가 곁에서 떠받쳤기에 강창수도 버틸 수 있는 것이리라.
“여튼, S랭크 헌터를 카운슬러로 두는 호사는 적당히 부리시고. 다음 단계로 나갈 때입니다.”
“다음 단계? 무슨?”
“지난번 영국에 보냈던 메일이요. 그 답변 왔습니다.”
“지, 진짜?!”
“두드리면 열릴 거라더니. 토마스 덕분에 살았어요.”
윤일도는 스마트폰을 꺼내 메일 어플을 열어 모두가 볼 수 있게 화면을 돌렸다.
작은 글씨라 강창수는 돋보기안경을 찾느라 수선을 떨었다.
“이놈의 돋보기는 찾을 때마다 안 보여.”
토마스가 먼저 마나로 메일 내용을 스캔한 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멀린의 탑이 미끼를 물었군요.”
“드디어.”
“잘됐습니다. 돌파구가 생겨서.”
“토마스가 제안했을 때만 해도 진짜 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진짜 되는군. 진짜로 마나중독증에 관심을 가질 줄이야.”
윤일도는 메일을 다시 한번 돌려 보면서도 여전히 얼떨떨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토마스는 예상했다는 투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요. 그들은 마법사 집단입니다. 그래서 마법 연구에 집착을 보이죠. 저 역시 마법사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도 마나중독증이 어떻게 S랭크 마법사를 만들 수 있느냐에 관심을 보일 겁니다.”
윤일도는 새삼 토마스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S랭크는 다 이런가? 아니면 마나중독증 걸리면 다 이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나?’
물론 둘 다 아니었다.
S랭크라도 폭군과 같이 생각 없이 구는 이가 있었고, 마나중독증 환자라도 지능에 유의미한 자극을 주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토마스가 마법사라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영화나 게임 등에서 나오는 마법사의 이미지는 헌터계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그 깊이에 차이가 있을 뿐, 마법사치고 머리 나쁜 이는 없었다. 마법이라는 까다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만큼 매사 꼼꼼하고 용의주도한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더라도 마나중독증 연구에 세계 최고의 엘리트 마법사 집단을 이용할 계획을 세울 줄이야.’
이 제안은 토마스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진행된 일이었다. 그는 그저 통보만 했을 뿐.
일단 강무혁과 혈육이기 이전에 오랫동안 마나중독증을 연구해온 세계 유일의 연구소로서 함께 호흡을 맞추기 위해선 토마스도 자신의 계획을 밝혀야 했다.
그래서 메일주소와 패스워드를 공유한 것이고.
멀린의 탑. 통칭 마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선 메일을 보낼 때 이들의 전문 지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론적인 관심을 끈 뒤에 마지막에 진짜 S랭크 마법사의 존재를 밝히면 몸이 달아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윤일도는 마탑의 관심이 기뻤다.
마나와 게이트 분야에 관련돼 가장 선두에 선 마법사 집단, 이는 곧 연구 골수분자들의 랩(lab)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쪽 바닥에서 가장 방대한 지식과 인력풀, 장비를 모두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마나중독증 연구에 숨통을 틔워줄 길인 셈이었다.
하지만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우려되는 점도 있었다.
윤일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무혁이가 이거 몰라도 되나? S랭크 마법사 존재를 최대한 숨긴다고 그렇게 용을 쓰던데.”
“괜찮을 겁니다. 저와 아이언윌과의 관계는 드러내지 않았으니까요.”
“응? 그러면 어떻게 접촉한 거야? 신분 확실하지 않으면 메일이 아예 들어가지도 않을 텐데. 아니, 그러고 보니 마탑 메일주소는 또 어떻게 알았고?”
이때 서류 더미 아래서 겨우 돋보기안경을 찾은 강창수가 콧등으로 안경다리를 펼치며 스마트폰을 뺏어 들곤 말했다.
“당연히 헌터연맹이겠지.”
“맞습니다. 그곳 라인을 통하면 이름을 밝히지 않고도 접촉이 가능합니다.”
윤일도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렸다.
“가명이라도 쓴 건가?”
“뭐, 가명이라기보다는 제 메일주소가 좀 특별해서요.”
“메일이?”
윤일도는 이제 막 메일을 확인하려는 강창수의 뒤에 붙어서 화면을 확인했다.
강창수가 빠르게 본문 내용으로 넘기느라 스크롤을 내리는 바람에 메일 주소를 앞머리만 읽을 수 있었지만, 대충 봐도 특이할 것 없는 듯 보였다.
“C005 어쩌고저쩌고? 뭐야? 이상한 게 없는데?”
윤일도는 답을 얻으려 되물었지만, 토마스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C로 시작하는 숫자열은 연맹에서 딱 다섯 명밖에 쓸 수 없는 코드니까요.’
* * *
강무혁은 일하던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갑자기 탕비실로 가 커피 믹스가 있는 찬장 뒤 판넬을 열었다.
그 안엔 금고가 있었다. 누구도 금고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장소였다.
강무혁은 단장실 곳곳에 비밀 금고를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안에 이는 중요한 물건을 보관한다기보다 만약을 대비해 금고를 연 이에게 혼동을 주기 위해서였다.
진짜 그럴싸한 금고엔 정작 중요한 물건을 넣어두지 않은 것이다.
그는 높이 10cm도 되지 않을 작은 금고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노트북은 은색 메탈 커버로 덮여 있었다. 크기와 무게는 요즘 노트북답지 않게 두껍고 넓적했다. 헌터 업계에 제법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 봤다면, 이 노트북의 커버가 게이트 금속임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강무혁은 자리로 돌아가 노트북을 열었다.
노트북은 흔한 OS 화면도 없이 바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치는 빈 칸이 표시됐다.
그는 ‘C004’로 시작되는 열일곱 자리 긴 아이디를 적었다. 그리고 그보다 두 배는 긴 패스워드를 누른 뒤 ‘waiting’ 표시가 뜬 사이 키보드의 스페이스 바와 ‘ASDF’ 키, ‘JKL;’키 위에 동시에 손가락을 올렸다.
열 손가락 지문이 순식간에 확인된 뒤에는 노트북의 웹캠 쪽에 눈을 가져갔다.
홍채 패턴이 확인되자 아래쪽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씨공공사. 세계헌터연맹 커맨더 강무혁.”
이윽고 삐익 하는 긴 비프음과 함께 노트북에서 AI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영합니다, 커맨더.
-원하시는 검색어 혹은 파일 넘버를 입력해주세요.
‘후우, 이거 보안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한번 보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단 말이야.’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스케줄을 소화하는 강무혁 입장에선 참 비효율적이라고 느낄 만했다.
하지만 고을지 스피커가 길드 정보를 휘파람 불 듯 술술 불고 다니는 걸 생각하면 차라리 지나친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하긴 연맹 ‘선악과(善惡果)’ 시스템에 접속하는 노트북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