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rashy PD Has To Survive as an Idol RAW novel - Chapter (486)
486
“아, 창피하다.”
당황스러워해야 할 건 이쪽 같은데.
그 순리에 맞지 않는 현상을 성지원이 순순히 받아들였다고?
연신 부끄럽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던 성지원은 이내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난… 아니, 제가 여태까지 오해했나 봐요. 그냥 꺼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모를 줄은…….”
꺼리기만 했냐? 시스템이 미친 듯이 경고를 날려댔는데.
게다가 성지원이 날 알아챈 듯한 뉘앙스를 흘리고 난 뒤 시스템 오류가 연쇄적으로 발생했기도 하고.
“야…….”
아무래도 발 빼기엔 늦은 것 같았다.
성지원의 변명을 듣는 내내 바짝 긴장하던 난 조심스레 물었다.
“대체 언제부터냐?”
“…그… 2년 전, 제 생일 때부터.”
성지원이 앓는 소리를 내는 와중 고개를 들어 올려 허공을 바라봤다. 하나, 그 어떠한 시스템창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떨어지는 눈만이 시야에 잡힐 뿐이었다.
성지원이 PD 시절인 날 인지했다고 대놓고 고백하는데, 아니, 애초에 계속해서 그리 믿고 있었다는데 아무런 오류도 생기지 않는다니….
‘받을 부작용은 이미 다 받았다는 뜻인가?’
“이후로도 꽤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잖아…요. 평소엔 건강하다 몇 번이나 쓰러지는 것도 좀 그렇고. 이번에 역시 무슨 일이 있나 보네, 짐작만 했죠.”
“근데 왜 이렇게 민망해하는데?”
“으으음.”
백 보 양보해서 녀석이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단 건 그렇다 치고, 그걸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는지 몰라서 묻자 성지원이 시선을 피하며 귓등을 매만졌다.
“…완전 시치미 떼고 있길래. 서로 알지만 과거는 모조리 잊고 그냥 새 출발하자는 건 줄.”
“…….”
“그렇게 오해했어요.”
마음이 얼마나 배려로 가득하면 이런 식으로 오해할 수 있지?
기가 막혀 한숨을 흘리다가 농담을 섞어 응답했다.
“일단, 존댓말 그만하자.”
“…….”
“너 철수야?”
“예?! 아, 아뇨…, 아니!”
“아니잖아.”
파드득거리며 당혹해하는 성지원을 보며 피식 웃던 나는 녀석이 잡고 있던 우산에 손을 뻗어 어깨가 젖지 않게 기울여주었다.
서로 오해를 했다만, 몇 년의 오해를 푸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았다.
“지원아, 새 출발 맞아.”
그저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성지원은 조금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몰리는 사람들로 눈짓을 주고받은 우리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기념품을 다시 챙겨 다리 끝으로 걸어갔다.
“…근데…….”
“뭐.”
“담배는 끊을 거지?”
“야.”
그 얘기 이제 그만해.
인상을 찡그린 채 투덜거리자 성지원이 어린애 같은 웃음을 터트린다. 때마침 저 멀리서 수많은 인파를 뚫고 기어코 소원을 비는 데 성공한 김성현과 정다준이 뿌듯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을 빌었냐고 묻자, 정다준이나 김성현 모두 비밀이라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프라하에도 이루기 전 언급하면 실현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강이채는?”
“어, 그러게요?”
“그러게는 무슨 그러게야.”
아무리 고개를 빼고 봐도 사람들에 파묻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강이채를 찾아오겠다고 하곤 발을 움직였다.
온갖 잡상인들과 낭만적인 노래를 부르는 악사들을 뚫고 나오니 유독 많은 이들이 몰린 곳이 보였다.
김성현이 떠들어대던 소리에 의하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선 이곳저곳 이동하고 동상을 만져야 해서 몹시도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강이채 역시 그 흐름에 끼어 뭔 동상에 손을 대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강이채한테도 좀 잘해줘야지.’
얌전히 있으면 아직도 그 작달막한 시절이 새록새록 기억나는데.
나는 강이채 가까이 다가가 동상 옆 난간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서 느리게 입술을 뗐다.
“뭐 빌었냐?”
“으응.”
강이채는 내 인기척을 미리 알았는지, 눈도 뜨지 않은 채 맞받아쳤다.
“싹수없고 재수 없고 자기들만 아는 형제에게 두 번 다시는 휘둘리지 않길….”
“…….”
친절하게 굴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그만 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슬며시 한쪽 눈꺼풀만 든 강이채가 내 표정을 샅샅이 훑더니 피식 웃으며 작게 덧붙였다.
“농담이야.”
행처를 찾았으니 속 시끄러운 녀석을 내버려두고 홀로 다시 왔던 길을 거슬러 오르는데, 강이채가 내 뒤를 쫓았다.
“그나저나 벽창호가 갑자기 말을 거네? 놀라게.”
“넌 왜 갑자기 따라와. 무섭게.”
“물어볼 게 여럿 있어서.”
여태까지 날 그렇게 피하더니?
“해.”
“곧 죽어?”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어느새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졌는지 오렌지색 불빛이 수면에 반사되었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분주하게 지나가는 가운데, 강이채는 가만히 날 응시했다.
“편지에 그랬잖아. 무사히 돌아와도 게임이 쉽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새롭게 시작한 게임은, 형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는데.”
“…….”
“안전한 거 맞아?”
나는 잠시 고민하다 턱을 까딱였다.
“다른 질문 먼저 해.”
강이채는 떨떠름해하더니 한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왜 굳이 내게 메일을 남겼어?”
해당 질문 역시 대답하지 않은 채 쳐다만 보았다. 어깨 위로 눈이 조금 쌓일 즈음, 그가 뒤를 이었다.
“……알잖아. 요즘 동영상엔 예약 업로드란 게 있어… 굳이 날 통하지 않았어도, 형이 얼마든지 영상을 퍼뜨릴 수 있었을 텐데.”
민지헌은 애초에 내게 화를 내지 않았고, 주우성은 과도하게 캐물을 게 두려워 피했다고 했다. 그리고 난 이제 강이채가 왜 날 꺼렸는지 알 것 같았다.
녀석은 겁이 났던 것이다.
아직도 내가 그에게 의도를 숨기고, 독단적으로 병신같은 일을 저질러 간신히 되찾은 평화로운 일상을 망쳐버릴까 봐.
‘웬일이래.’
아직 모르나 본데.
‘눈치도 빠르면서.’
강이채에게 기억을 부여한 건 나다.
녀석 또한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일단 기억이 없으면 전후 상황을 모르는 강이채에게 부탁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러 가지 짐작은 했지만… 모르겠어. 직접 듣고 싶어.”
강이채의 물음에 구실을 대려면 못 댈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강이채가 그런 거짓말을 원하진 않을 듯했다.
“야.”
그리고 실상 그런 이유가 아니기도 했고.
나는 목도리를 가다듬으며 삐딱하게 선 채 강이채를 바라봤다.
“그럼 나도 뭐 하나 물어볼까?”
“…뭐.”
“너 소원 빌면서 동상에 새겨진 개 만졌지?”
뭔 개소리야, 라고 얼굴에 쓰여 있어.
“그거 틀렸어. 소원을 이루려면 사실 개가 아니라 다리에서 떨어지는 성자를 만져야 한대. 제대로 하려면 차례대로 다섯 가지 동상을 거쳐야 하고… 무슨 소원 하나 비는데 그렇게까지 까다로워?”
“……설이 다 달라서 그래.”
“차라리 나한테 빌어.”
늘 지겹도록 외친 탓에, 녀석의 소원은 성지원도, 다른 멤버들도, 그 누구도 알 정도로 쉬웠다.
“내가 이뤄줄게.”
때 탄 동상의 강아지에게 비는 것보단 내게 간곡히 부탁하는 게 가능성이 더 높지 않겠냐.
나는 내친김에 흘려넘긴 강이채의 첫 번째 질문 역시 대답해주기로 했다.
“새로 받은 퀘스트가… 진짜, 존나, 너무 어려워.”
무의식에서 돌아오자마자 떠오른 퀘스트를 확인하고 기함할 뻔했다.
이제 진짜 한 번 쓰러지면 정말 죽을 판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면 슬슬 연기로도 해외 진출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게다가 블랙콜은 아직도 잘해 먹고 산다. 아니, 오히려 더 전성기를 맞이했다.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 아이돌들에 밀리지 않으려면 앞으로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하고… 노년의 평화를 위해 어떻게 하면 정기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을까, 이곳으로 돌아온 뒤 고민하는 중이었다.
“나 혼자서는 못해.”
나한텐 그 같은 멤버가, 작곡가가 꼭 필요하다는 걸 제외하고서도, 부양가족 같은 우리 멤버들이 없으면 안 됐다.
어렸을 적부터 알아 온 녀석을 이런 일에 동원하자니 심히 양심에 찔렸으나, 강이채 또한 어린애가 아니라는 걸 충분히 인지했기에 속삭였다.
“같이 달려줘.”
강이채의 입매가 실룩였다. 나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틀었다.
“나도 약속한 대로 돌아왔으니까…. 너도 말 바꾸기 없어.”
천천히 다리를 건너는데, 뒤에선 내 걸음에 맞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우릴 발견한 정다준이 활짝 웃으며 후다닥 달려온다.
“호윤이 형! 광경 너무 이쁘지 않아요?! 감동, 감성 폭발! 이채 형!! 일단 호텔 돌아가면 드러누워서 눈 천사 만들… 뭐야, 형 왜 이렇게 웃고 있어.”
핫팩을 볼에 대고 있던 김성현은 추운 듯 코를 훌쩍거리더니 손을 흔들었다.
“야, 기념으로 사진이나 찍자.”
한 행인에게 핸드폰을 넘겨주며 찍어줄 수 있겠냐 물었다. 몇 차례 포즈를 취한 뒤 고맙단 인사를 전하고 왁자지껄한 웃음을 터트리며 다리를 마저 걸었다.
그 순간, 악사가 들고 있는 아코디언에서 바람 소리가 섞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낯익은 노래였다. 사람들도 익숙한지 많이들 흥얼거렸고, 우리도 후렴을 따라 불렀다. 이곳에 있자니 그간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들은 모두 꿈처럼 멀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저 멀리 블타바강 위에 성의 모습이 비친다. 도시의 타오르는 듯한 불빛은 물밑에 잠겨 어른거리고, 모든 걸 씻어 내릴 만큼 세차게 내리는 눈은 가장 오래된 다리의 난간 위에 소복하게 쌓여간다. 목도리를 가다듬으며 거리에 선 녀석들을 바라봤다.
김성현은 온갖 동상을 다 만져 손이 새빨개진 채 울상을 짓는 정다준을 살피며 장갑을 건네주고 있었고, 성지원은 사진을 확인하는 척 강이채에게 보여주며 조심스레 안색을 훑었다. 강이채는 그저 검지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치며 작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돌아가면 봄이 올 것이었다.
눈이 녹으면, 우리는 할 일이 아주 많았다.
“형.”
먼저 나아가던 강이채가 들뜬 목소리로 날 부르며 다가왔다.
둘이서 일행을 뒤따라가며 거리 위에 발자국을 새겼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상당히 설레는 듯, 여태까지 있던 원한을 전부 푼 듯, 녀석은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잠깐 생각해 봤는데, 소원 이뤄준다고 했잖아. 그럼, 몇 년 후에 다시 이 다리에 올 수 있다는 거지? …헐, 그 표정 뭐야. 진짜?”
부정하진 않았다.
좀 늦어서 창피하지만, 난 끝없는 오만 끝에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게 된 것이다.
살면서 길이야 가끔 잃어버릴지 모르나,
“그럼 우리 유닛 활동도 해? 30년 뒤에도 다 같이 숙소 생활하는 거야아?!!”
“많이도 빌었네, 이 자식….”
결국 누군가는 기꺼이 날 찾으러 와줄 거라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