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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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합의 장 (15)
[경기가 180초 후, 시작됩니다.]꿀꿀해졌던 기분도 잠시, 경기장에 입장하자마자 다시 기분이 풀렸다.
역시 나는 이런 게 어울려.
계속되는 항복으로 나는 준결승까지 주먹 한번 안 휘두르고 직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준결승에 오른 지금, 드디어 항복을 안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상대를 만났다.
“설마 그냥 항복하는 건 아니겠죠?”
“그러지는 않을 생각이네만.”
내 준결승 상대는 일본의 수염 아저씨였다.
항복을 안 할 거란다.
나의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할 방법이 없을까?
없을 것 같다.
준결승은 이전의 본선 무대와 달린 대기 시간이 조금 더 길었다.
다른 차이점으로는 동시에 여러 경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금 이 거대한 경기장에 진행되고 있는 경기는 나와 저 수염 아저씨의 준결승뿐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무대에서 싱겁게 항복을 선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비록 자네 실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은 이미 보고 들어 알고 있지만, 최선을 다하겠네. 일본인의 자긍심을 보여 주지!”
자긍심은 얼어 죽을.
어찌 되었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만은 환영이다.
준결승 무대는 단독으로 치뤄지는 만큼, 경기장에 확성 마법과 확대 마법이 걸려 있었다.
멀리 있는 관중석에서도 나와 수염 아저씨의 말소리를 또박또박 들을 수 있었고, 우리의 움직임을 가까운 시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확실히 이런 무대에서 쪽팔리게 그냥 항복할 수는 없겠지.
아, 그러고 보니 항복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어본 내 말은 듣기에 따라 도발로 들릴 수도 있었겠네.
일본 사람들 모두가 듣고 있는 말이니.
수염 아저씨는 몇 발자국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도 엉겁결에 인사했다.
대결 전에 하는 인사인가?
이거 괜찮네.
태권도 도장에서 대련 전에 간단히 인사시키듯이, 대결 전에 저런 인사를 의무화하는 것도 괜찮겠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나 기본적인 예의, 스포츠맨십 등을 담고 있는 인사이다.
비록 그딴 걸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을 테고, 큰 의미 없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지만, 요식 행위는 요식 행위 나름의 쓸모가 있다.
나중에 건의해 보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수염 아저씨가 허리에 찬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그 동작이 제법 그럴싸했다.
역시 검술에 조예가 있는 걸까?
“아저씨, 여기 들어오기 전에, 칼 쓰는 사람이었어요?”
무예인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일본도 좀 만져 본 야쿠자 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두루뭉술하게 물어보았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 잡아본 칼은 식칼뿐이었네.”
그런 것치고는 동작이 그럴싸한데.
다른 도전자에게 배운 걸까?
하지만 튜토리얼은 다른 도전자에게 오랫동안 무엇을 배우기에 적합한 공간이 아니다.
수시로 찢어지고 헤어져야 하니.
그리고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일본 서버엔 저 수염 아저씨만 한 실력자는 없었다.
내 의문을 말해주자, 수염 아저씨는 조금 멋쩍어 하는 얼굴이 되었다.
방금까지는 되게 비장한 표정이었는데.
“음, 솔직히 털어놓지. 만화에서 봤네. 만화를 좋아했거든.”
네? 예?
“만화에 나온 검술 동작을 따라 하는 거라고요? 그런 것치고는 자세가 그럴싸해 보이는데요?”
“계속 연습하면서 동작을 보완하다 보니, 조금씩 자연스러워지더구만.”
허… 생각지도 못했다.
만화 캐릭터를 따라 하는 것이었다니.
생긴 것과는 달리 머릿속에 꽃밭이 있는 아저씨였다.
“처음 이 튜토리얼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 많이 당황했었지. 술에 취해 있었기에 입장 당시를 기억하지 못했거든.”
나랑 똑같은 경우네.
“강제로 이 세계에 끌려와, 그 사실에 오랫동안 절망했었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이곳에 갇혀 버린 것을. 그래서 절망하는 대신 새로운 목표를 하나 만들었네. 그게 바로 동경하던 만화 캐릭터를 흉내 내는 것이었지. 현실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튜토리얼을 오르면서 만화 캐릭터와 같은 초인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이 튜토리얼을 통해 내 어린 시절 꿈을 이뤄 보고자 하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해 보니 나름대로 이해는 갔다.
나도 어린 시절에는 드래곤볼에 나오는 에네르기파를 쏘고 싶었지.
사실 혼자 방에서 연습해 본 적도 있다.
어쩌면 100층을 넘어 현실로 나갈 때쯤, 나는 정말로 에네르기파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아저씨는 그런 생각으로 이 튜토리얼 세계 안에서의 생활에 적응한 것이다.
특이한 동기부여였지만, 어쨌건 성장에 열중했고, 저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 유치함이었지만, 저건 저것대로 낭만적이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와중에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경기가 시작됩니다.]“무기는 꺼내지 않을 건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내가 여기서 무기까지 쓰는 건 반칙이다.
나는 공정한 사람이다.
“그럼 가겠네.”
가긴 어딜가요, 아재.
재미도 없는 딴죽을 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수염 아저씨가 나에게 달려드는 모습을 응시했다.
간격 안에 들어온 수염 아저씨는 빠르게 검을 휘두르며 공격을 시작했다.
아,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니, 빈틈이 수두룩하게 보인다.
확실히 이 아저씨는 검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나도 검술에 조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디나 16층의 기사에게서 기본적인 개념만은 배운 상태였다.
그런 내가 보기에 수염 아저씨의 검에는 구멍이 많았다.
동작들은 겉으로는 멋있어 보였으나, 동작 사이사이에는 너무 쓸모없는 낭비가 많았다.
딱 보기에도 빈틈이 많고, 효율적이지 못하다.
다시 말해 실전적이지 못하다.
그냥 멋있어 보이는 동작들을 조잡하게 이어둔 것에 불과했다.
물론 계속 언급하듯, 멋있어 보이기는 했다.
일본도를 일본 서버에 유행시킨 사람은 이 수염 아저씨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염 아저씨의 검은 제법 위력적이었다.
맨손으로 바위를 깨뜨리고 다리 힘으로 아파트 2, 3층 높이를 뛰어오를 수 있는 초인이다.
아무리 엉성하더라도 맹렬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검을 휘두르니, 함부로 볼 수가 없었다.
물론 나한테 위협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마치 마창을 내찌르듯, 큰 동작으로 내 왼쪽 어깨 쪽으로 검을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주먹으로 짧게 수염 아저씨의 가슴을 끊어 쳤다.
주먹을 통해 뚝 하고 끊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갈비뼈 하나 나갔겠네.
공격을 마치고, 거리를 조금 벌렸다.
김경식과의 경기처럼 수염 아저씨의 체면을 좀 차려 줄 생각이다.
수염 아저씨가 일본 서버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고 있는데, 굳이 압도적으로 꺾어서 일본인들 멘탈에 상처를 입힐 필요는 없다.
유일하게 준결승에 진출한 일본인이기도 하고.
더군다나 수염 아저씨는 우리에게 나름 협조적으로 나오기도 했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수염 아저씨가 정신없이 몰아치는 것을 내가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받아치다가, 반격을 한 번에 성공하고 거리를 벌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수염 아저씨 본인은 잠깐의 공방 동안 나와 자신과의 격차를 깨달았을 것이다.
역시 실력 차이가 크네.
단순히 나와 비교해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준결승에 진출한 네 명의 도전자 중 저 수염 아저씨의 실력이 가장 처진다.
대진운이 좀 있었지, 뭐.
수염 아저씨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선 채로 침묵했다.
입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는 듯싶었지만, 무대 위에서 말하기는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는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기다려야 할까?
남들이 보기에는 고수들의 기 싸움 내지는 눈치 싸움 정도로 이해될 만한 공백이 지나고, 수염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군.”
기껏 생각해서 그럴싸하게 넘어가 주려는데, 굳이 본인 입으로 말을 한다.
쯧.
수염 아저씨는 자신의 가슴을 꾹꾹 눌러 확인하고는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한 번이라도 자네의 전력을 보여 줄 수 있겠나?”
“위험할 텐데.”
“어느 정도 부상은 감수하지.”
봐주면서 싸우는 것보다 깔끔하게 있어 보이게 끝내서, 체면을 살려 주는 게 낫겠다.
“좋아, 내 전력을 보여 주지.”
인벤토리에서 천변기를 꺼내, 장검의 형태로 만들었다.
장검에 오러를 씌우고 앞으로 내밀었다.
수염 아저씨도 멋있는 동작으로 검을 크게 한번 휘두르고, 앞으로 내밀어 자세를 잡았다.
“나카지마 신페이.”
뭐야, 저 아저씨.
지금 자기 이름 말한 거야?
와 나, 오글거려서 소름 돋았어.
“이호재.”
하지만 남자라면 그 유치함에 답할 수밖에 없지!
나도 한 유치 하거든!
생각보다 길고 외우기 귀찮은, 그리고 앞으로 내가 머릿속에 기억할 일은 없을 것만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수염 아저씨가 발을 떼는 타이밍에 맞춰 검을 휘두르며 동시에 스킬을 사용했다.
[점멸]정확히 점멸이 발동하는 타이밍에 맞춰 휘둘러진 검은, 수염 아저씨의 검을 허공 위로 날려 버렸다.
검날은 수염 아저씨의 손목 절반까지 파고들었고, 검끝은 가슴을 길게 그어 냈다.
나름 힘 조절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 사용이 미숙하다.
바닥에 수염 아저씨의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수염 아저씨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이름이 뭔가?”
내 이름은 방금 전에 말해 주었다.
그런데 왜 또 이름을 묻는 걸까?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있자, 수염 아저씨는 자신의 말을 보충했다.
“방금 사용한 기술의 이름 말일세.”
…그런 거 안 키우는데.
아무래도 이 아저씨는 기술마다 이름을 붙이고, 사용할 때마다 큰 소리로 외치는 타입의 그런… 사람인가 보다.
1층 대기실에서 만났던 여대생이 생각나네.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해괴한 이름이나 주문을 외치는 모습에 식겁했던 기억은 있다.
이 아저씨는 그런 과였군.
잠시 고민했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동작이나 기술에 이름을 붙여 놓고, 그것에 얽매인다는 것이 얼마나 전투에 있어 악영향을 미치는지 알려 줄까?
아니면 저 진지하게 유치한 아저씨에게 조금 더 어울려 줄까?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점멸(漸滅) 베기.”
“멋진 기술이군. 좋은 승부였다. 항복.”
수염 아저씨는 2부에서 다시 등장할 것이 분명한 1부의 라이벌 캐릭터처럼 의연한 태도로 퇴장했다.
[본선 준결승에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승리 메시지와 함께 나는 관중석으로 다시 이동되었다.
이동되자마자 김민혁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나를 반겨 주었다.
“여, 점멸 보이 이호재.”
“죽을래?”
아아아악!
막상 하고 나니까 쪽팔린다.
“민혁아, 호재 놀리지 마라. 나름 멋있었어, 점. 멸. 베. 기. 크으…….”
언제 왔는지 뒷자리에 앉아 있던 박종식도 합세해 놀려 댔다.
김민혁과 박종식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박종식.”
“김민혁.”
“크으… 소년 만화인 줄 알았다, 호재야.”
“나는 서부 영화의 한 장면인 줄 알았다. 푸하하하.”
젠장, 아무래도 김민혁과 박종식은 오늘 일을 가지고 오랫동안 우려먹을 것 같다.
내 흑역사가 한두 개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뭐야, 왜 반응이 없어. 조금 더 부끄러워해 봐라, 호재야.”
거의 10분이 넘도록 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며 나를 놀리려던 박종식은, 내가 계속 반응하지 않자 김빠진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러는 동안, 경기장에서는 준결승에 진출한 또 다른 두 도전자의 대결이 진행되고 있었다.
한국 서버의 이준석과 호주 서버의 그 흑인 헬 난이도 도전자 간의 대결이었다.
흑인 도전자는 이형진과의 대결을 질질 끌면서 1시간이 넘는 장기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의 대결에서도 승승장구, 무난히 준결승까지 진출했다.
헬 난이도 6층 도전자와 하드 난이도의 떠오르는 신예 간의 대결.
많은 사람의 기대를 끌어모은 매치업이었지만, 경기 내용은 일방적이었다.
이준석이 흑인 도전자를 그냥 가지고 놀고 있었다.
“저 정도면 종식 형보다 센 거 아니에요?”
김민혁의 질문에 박종식이 발끈했다.
“아니거든! 십 년은 멀었다!”
내가 보기에도 이준석은 박종식과 비교해 최소한 비등한 정도로 보인다.
이준석에게는 예전 대화합의 날 당시, 마력 회로 스킬을 보조해 주는 아이템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분명 저 정도가 아니었는데.
성장 속도가 굉장하네.
이준석은 주변에 광범위한 전격 필드를 깔아 두었다.
그것만으로도 흑인 도전자는 이준석 근처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전격 공격에 당하는 것을 감수하고 달려들려 해도, 이준석은 거리를 벌리며 전기 작살을 날려 발을 묶고,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려 했다.
그렇다고 범위 밖에 있자니, 이준석의 원거리 스킬에 무방비하게 노출된다.
결국 흑인은 이도 저도 못 하고, 고양이에게 몰이를 당하는 쥐처럼 경기장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호재야… 그… 저 녀석 말인데.”
박종식이 드물게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다.
“한번 밟아 두라고요?”
“어.”
이준석은 박종식이 아끼는 도전자다.
하드 난이도의 도전자들 중에서도 특히.
박종식 라인의 직계라고 볼 수도 있는 이준석이다.
그런 이준석을 밟아 두라는 것은, 싹을 짓밟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자신의 성장에 취해, 기고만장해진 녀석에게 압도적인 패배를 한번 보여 주라는 것이다.
나도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준석은 제힘에 취해 신나서 날뛰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저러다가 죽는 거다.
이준석을 위해서라도 브레이크를 한번 걸어 줘야 한다.
“쟤, 멘탈은 괜찮아요?”
“괜찮아. 한 번 깨졌다고 땅굴 팔 녀석은 아니야. 나름 근성도 있거든.”
괜찮네.
옆에서 박종식이 계속 끼고 있는 이상, 저 이준석이라는 친구는 제법 높이 올라올 것 같다.
박종식은 슬쩍 김민혁을 바라보았다.
“저야 뭐, 종식 형이 그걸 원하면 이견은 없어요. 애초에 형 담당이기도 하고. 제가 간섭할 일은 아니죠.”
박종식은 다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좀 세게 다뤄도 되는 거죠?”
“한 번은 박살을 내 주는 게 좋겠지.”
아주 좋다.
아주, 아주, 아주 좋다.
이곳에 모인 도전자 중 한 손에 꼽힐 것이 분명한 실력자를 상대로 힘 조절할 필요 없이 험하게 다뤄도 된다는 얘기다.
그 사실에서 오는 만족감에 나도 모르게 씩 미소를 지었다.
그때 승기를 굳힌 이준석이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단순한 우연이었을지, 아니면 우리가 있는 쪽을 딱 집어 바라 본 것인지, 나와 이준석의 눈이 마주쳤다.
이준석의 입에 걸린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면서 만족감과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오늘은 스트레스 좀 풀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