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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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토리얼 80층 (1)
키리키리는 소원을 들어주며 내가 튜토리얼 스테이지들을 모두 클리어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썩 내키지는 않았다.
애초 튜토리얼에 남아 있던 가장 큰 이유도 그녀에게 말할 소원을 고민해 볼 시간을 위해서였고.
하지만 키리키리는 내가 아직 튜토리얼에서 더 얻어 갈 것이 있다고 조언했다.
당연하지만, 나는 그녀의 조언대로 튜토리얼 스테이지들을 마저 클리어하기로 했다.
키리키리의 조언은 대체로 옳았고, 그녀의 조언을 받아들여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스테이지 클리어는 수월했다.
용용이와 호치에게 전적으로 공략을 맡기고 있었지만, 하루에도 대여섯 개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있었다.
그리 공략을 서두르지 않고 있음에도 그랬다.
용용이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마치 테마파크에 놀러 온 듯 다양한 스테이지 속 세계들을 구경하며 신나 했다.
영감과 할멈은 스테이지에 별 관심이 없었고, 세레지아도 그랬다.
나는 반대로 좀 불편했다.
70층대 스테이지들은 한결같은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다.
매 스테이지마다 토착 신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런 신들이 충돌하며 지옥 같은 환경을 조성했다.
도전자는 백신전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지키거나 백신전의 신격이 등장하기 전까지 버텨 내야 했다.
스테이지의 난이도와 별개로 찝찝했다.
시험을 위한 스테이지라기보다는 선전물을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마치 통제되지 않는 신의 힘이란 이렇게나 위험하고, 집단을 이루어 규율을 갖추고 있는 백신전을 찬양하는 듯했다.
정확히는 백신전의 토대가 되고 있는 시스템이 이렇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정작 이 스테이지를 설계한 백신전의 신들도 대부분 시스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는 게 모순이었다.
신들과 시스템 간의 관계에 대해선 더 알아봐야 했다.
아직 모든 정보를 알아내진 못했다.
키리키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60층에 진입하기 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정보값을 소모했다.
새로운 것을 물어보기 위해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며 다시 정보값을 벌어야 했다.
아마 키리키리가 내게 스테이지 공략이 필요하다 했던 것도 그런 정보를 더 모으길 바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 * *
[80층 스테이지에 입장하셨습니다.]설명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행성에 우주 공간을 표류하던 근원이 불시착했습니다.
근원은 빠르게 일대의 모든 것들을 잡아먹었고, 행성은 황폐해졌습니다.
백신전의 조사원은 이 근원에게 일반적인 근원과는 달리 무언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백신전은 당신을 파견해 근원을 회수하고 해당 근원의 특이점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클리어 조건
1. 근원을 처치하십시오.
2. 근원의 특이점을 조사하십시오.
“평소랑은 좀 다른 스테이지인데.”
호치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달랐다.
아마 80층에 올라오며 콘셉트가 바뀐 모양이다.
신들과 백신전이 주로 등장했던 70층대와는 달리 80층의 주제는 근원이었다.
우선 근원이 다시 등장했다는 점부터 특이했다.
근원 중에서도 특이한 점이 있는 녀석이라는 점도 그랬고.
80층은 평범한 황무지가 배경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소환된 장소 앞에는 근원이 떡하니 보이고 있었다.
발산하고 있는 힘을 보아도, 되다 만 지네 괴물처럼 보이는 외형을 보아도 저건 근원이 확실했다.
“어떻게 할까?”
호치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보통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서 힘을 쓰는 것이 용용이의 일이라면, 방향을 잡는 것은 호치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호치는 처음 보는 상황이 나올 때마다 혹은 무언가를 추리해야 할 때마다 나에게 조언을 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호치에겐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 위해 무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추리할 만큼의 열의가 없었다.
용용이와 마찬가지로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새로운 세계들을 경험해 보는 것을 즐거워했지만, 훨씬 덜 의욕적이었다.
“일단 죽여 봐.”
“그냥 죽이라고? 조사하라잖아.”
80층의 클리어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근원의 처치와 조사, 두 가지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 번째 조건이 처치이고, 두 번째 조건이 조사라는 점이다.
클리어 조건의 순서는 아무렇게나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마 근원을 처치한 뒤에야 제대로 조사가 가능할 것이다.
시체를 조사해 알아내야 하는 점이 있다든가, 죽이고 나면 기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럼 내가 할게!”
용용이가 제 손을 번쩍 들었다.
호치는 웃으며 그러라고 말해 주었다.
용용이는 근원을 향해 힘을 쏘아 보냈고.
근원은 그대로 폭사했다.
[스테이지 클리어에 실패하셨습니다.] [대기실로 이동됩니다.]다음 순간, 우리는 대기실로 귀환되었다.
…뭐야, 이게.
근원을 처치하래서 처치했는데, 왜 미션 실패가 뜨는 거야.
당황스러웠다.
시키는 대로 했는데 느닷없이 대기실로 이동되었다.
80층에 진입하기 전, 키리키리는 스테이지에 대해 별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용용이는 자기가 뭘 잘못한 건가 싶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호치도 설명을 바라는 눈치로 나를 보고 있었고.
나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다시 가 보자.”
포탈을 통해 다시 80층에 진입했다.
[80층 스테이지에 입장하셨습니다.]설명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행성에 우주 공간을 표류하던 근원이 불시착했습니다.
근원은 빠르게 일대의 모든…….
설명 메시지를 대충 넘겼다.
클리어 조건은 근원의 처치와 조사, 두 가지 모두 그대로였다.
“야, 설명 좀 해 줘 봐.”
“으음… 그게…….”
호치가 보채 왔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뭔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갔지만, 체면상 모르는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혹시 너도 모르는 상황이냐?”
“아니, 그건 아니고… 그…….”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젠장, 말하면서 생각하자.
조금이라도 더 생각할 수 있도록 느릿한 말투로 말을 시작했다.
“일단 가능성은 두 가지 정도네.”
“오, 뭔데.”
“하나는 저게 처치 목표인 근원이 아닐 경우.”
이 경우는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다.
당장 이 근방에 보이는 근원은 저 거대 지네 하나뿐이다.
비단 근원뿐만 아니라 이 행성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저 지네와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둘째로는…….”
“둘째로는?”
용용이가 지나치게 강력한 공격을 가했다.
통상적으로 80층 도전자가 절대로 낼 수 없는 수준의 출력으로.
그 때문에 시스템에 오류가 났다.
그런 경우가 있을까 싶지만, 그 외의 다른 경우는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좀 살살 공격해 볼까.”
내 설명을 들은 호치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저 근원은 자신의 주변에 특이한 힘을 두르고 있었다.
근원은 저 능력으로 주변의 모든 힘을 빨아들여 흡수하고 있었다.
이 행성의 지면이 퍽퍽한 황무지 상태가 되어 있는 것도, 근원 외의 다른 생명체의 기척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 것도 저 근원의 능력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행성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도전자는 생기를 빨린 미라 꼴이 되어 죽을 것이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더라도 공략은 어려울 것이다.
어중간한 힘으로 저 근원을 공격해 봐야 그 힘마저도 흡수해 양분으로 삼을 것이다.
조금 전, 용용이가 일격에 근원을 폭사시킨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점이 이상했다.
저 근원의 흡수력을 무시하고 단번에 폭사시키는 건 용용이쯤 되지 않는다면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다.
80층 도전자의 수준으로는 저 근원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아, 이제 대충 알겠네.”
첫 번째 클리어 조건이 페이크였다.
처치라는 목표를 주고, 도전자로 하여금 근원을 공격하게 한다.
그런 도전자의 힘을 근원이 흡수하고, 그 뒤 특이점이라 부를 만한 기현상이 일어난다는 거네.
대놓고 도전자에게 구라를 치는 클리어 조건이었지만, 어떻게든 도전자에게 엿을 먹이고 싶어 하는 헬 난이도 스테이지의 설계를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냥 힘을 던져 줘, 빨리 먹고 크라고.”
용용이는 내 말을 알아듣고 다시 근원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아까 근원을 단번에 폭사시켰던 정도의 힘이 아니었다.
보다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힘, 축구공만 한 크기의 불덩이를 만들어 근원에게 쏘아 보냈다.
근원은 용용이가 던진 불덩이에 적중될 때마다 그것을 흡수해 내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맞을 때마다 저렇게 덜덜 떠는 모습을 보니 좀 보기 징그러운데.
생긴 것이 번들거리는 거대 지네라서 더 그랬다.
그런 내 감상과는 다르게 용용이는 지네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며 좋아했다.
“귀여워!”
이제는 슬슬 용용이의 미적 감각이 의심되기 시작한다.
나와 호치가 용용이보고 하도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귀엽다는 말이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만능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 저 지네가 진심으로 귀엽다 여기는 거라면 조금 사태가 심각했다.
내가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거나 말거나, 용용이는 열심히 지네를 향해 불덩이를 쏘아 보냈다.
지네가 불덩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좋아하는 모습이 마치 연못의 금붕어에게 물고기 사료를 던져 주는 어린아이 같았다.
물론 용용이는 어린아이가 맞지만, 저건 금붕어와는 차이가 큰데 말이지.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기 위해 호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호치는 용용이를 향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기보다는 자기도 조그마한 불덩이를 만들어 지네를 향해 쏘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호치는 조금 쑥쓰러워하면서도 지네에게 힘을 쏘아 보내고 좋아했다.
겉으로는 열심히 태연한 척, 귀찮은 척하고 있었지만 연거푸 불덩이를 만들어 내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신나 있는 모습이었다.
생각해 보니 호치도 용용이 못지않게 애였다.
그렇게 몇 분간 용용이와 호치가 신나게 불덩이를 쏘아 보내고 나자 지네의 꿈틀거림이 극에 달했다.
워낙 거대한 지네였기에 그 꿈틀거림만으로 주변의 지반이 흔들거렸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지네의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클리어 조건이 변경됩니다.]설명 : 조사원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원을 처치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백신전은 조사원을 통해 근원의 이상 행동을 확인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새로운 사도를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기에 사도가 현장에 도착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사도가 도착하기 전까지 근원에게서 생존하십시오.
-클리어 조건
1. 사도가 도착할 때까지 생존하십시오.
2. 근원을 처치하십시오.
예상대로였다.
이런 케이스가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근원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스테이지가 진행되었었다.
40층이던가.
근원은 이제 부들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부들거리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정지해 있었다.
마치 석상처럼 혹은 번데기처럼.
겉으로 그 어떤 변화의 징조도 보이지 않았지만,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내가 한번 겪어 본 적이 있었으니까.
“저거, 그거 맞지?”
“어, 그거야.”
호치의 물음에 답해 주었다.
그거였다.
뭐라 한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저 근원은 진화하고 있었다.
근원의 가장 큰 특징은 탄생과 동시에 자신의 힘에 잡아먹힌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정체성을 차지한 힘은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우려고만 든다.
이성을 잃어버린 괴물이 되어 그저 눈앞의 적을 먹을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껏 보아 왔던 근원이었다.
하지만 저 지네는 그 껍질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잡아먹은 힘을, 원초적인 욕망을 벗어내려 하고 있었다.
옛날 옛적에 이미 힘에 잡아먹혔던 과거의 이성이 다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꿈틀아, 힘내!”
용용이가 멈춰 버린 지네를 향해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언제 이름까지 지은 거야.
잠시 후, 지네의 몸속에서 새로운 꿈틀거림이 감지되었다.
완전히 멈춰 버린 지네 안에서 지네의 껍질을 부수고 무언가가 기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일행 모두 그 모습에 집중했다.
과연 저 안에서 무엇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에.
나로서도 그 모습이 궁금했다.
과연 근원으로 변했던 존재가 자신의 이성을 막 되찾았을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근원이 되기 전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크기만 작아졌을 뿐, 똑같이 지네 괴물의 모습일까.
그도 아니면 전혀 다른 괴물의 모습일까.
아니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본인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의 모습을 바꿔 나갈까.
오랜만에 호기심으로 설레었다.
“꿈틀아!”
용용이가 비로소 지네의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를 열렬한 목소리로 불렀고, 그것은 용용이에게 화답했다.
“캬아악!”
평범한 괴물이었다.
짙은 실망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80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
내가 지네 괴물을 죽인 것 때문인지 용용이는 조금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진심으로 저 지네가 귀엽다고 생각한 걸까.
호치가 용용이를 달래 주고 있었다.
이미 스테이지를 클리어했고, 포탈이 나타났지만 용용이의 기분이 좀 풀어지고 나서야 움직일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해져 저 멀리 있는 호치와 용용이를 지켜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날아왔다.
박정아였다.
[박정아, 90층 : 큰일 났어!]큰일?
뭐 대화합의 날이라도 열리려나.
그러면 좋겠는데.
[박정아, 90층 : 스테이지 입장이 막혔어. 무슨 수를 써도 스테이지로 입장이 안 돼. 지금 도전자들 전부 대기실과 거주 지역에 묶여 있어.]아, 그 말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박정아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었다.
[박정아, 90층 : 관리자들한테 미리 예고 받은 정보도 없고, 단서도 없어. 스테이지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관리자들을 만날 수도 없고. 혹시 뭐 아는 거 없어?] [이호재, 80층 : 그거 내가 한 거야.] [박정아, 90층 : …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