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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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7)
결투의 신.
튜토리얼 초창기 시절부터 나를 지켜보던 신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풋내기 도전자 시절부터 나와 성향이 맞지 않았고.
덕분에 나를 그다지 좋게 평가하지 않던 신이다.
중간에 평가가 바뀌어 권능까지 선물하게 되지만.
다시 평가가 바뀌어 내게 별 관심을 두지 않던 신이기도 했다.
60층에 진입하기 전까지, 결투의 신과 관련해 보았던 메세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결투의 신이 무언가를 후회합니다.] [결투의 신이 불쾌해합니다.] [결투의 신이 무언가를 아쉬워합니다.] [결투의 신이 당신에게 실망합니다.]요딴 식이었다.
죄다.
결투의 신이 뭘 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뭐, 공명정대하고 정정당당한 대결이겠지.
시발, 그런데 그게 되면 헬 난이도가 아니다.
어떤 식으로 진행하든, 누구 뒤통수를 치거나 지름길을 찾아야 조금이라도 편한 헬 난이도에서 저런 걸 요구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4층이었나.
거기선 고블린 도시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반복했다고, 내게 부정적인 메세지를 날렸었다.
그럼 내가 고블린 도시 정문에서부터 고블린 왕 안방까지 일직선으로 달렸어야 됐나.
결투의 신이 원하는 건 항상 그런 식으로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힘을 얻고 나서는 결투의 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왜 그러겠는가.
정정당당하고 공정한 대결 따위에는 관심 없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결투의 신은 나와 성향적으로 맞지 않는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호치와 용용이가 참가했던 경합에서, 결투의 신이 권능 반환을 요구했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저 완고한 신은 자신의 권능이 야비하고 비열한 방식으로 쓰일 때마다 괴로워한다.
이미 개조하고 복제하고 씹고 뜯고 즐기기를 끝낸 권능을 굳이 대가를 약속해가며 반환 받으려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결투의 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몸의 거구.
설화에 나오는 도깨비가 연상될 법한 부리부리한 안광과 떡 벌어진 체형.
13층에서 만났던 수도승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쩌면 같은 종족 출신일지도 모르겠다.
“여긴 무슨 일로 왔지?”
”권능 반환을 요구한다.”
결투의 신은 평범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별 요상한 날파리의 형상을 한 채 텔레파시로 소통하던 희망의 신과는 조금 달랐다.
딱딱한 말투였다.
수도승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말투는 조금 달랐다.
“그 요구는 내가 수락했었지.”
결투의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합에서 결투의 신은 충분한 대가를 약속했다.
이미 쓸모도 없어진 권능을 돌려주는 대가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너 지금 누구 허락받고 여기 들어온 거냐.”
”물론 그대의…….”
단조롭게 대답하던 결투의 신의 목소리가 딱 그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숙소 거실의 소파와 자명종, 식탁 등의 가구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진동하다 파손되었다.
건물 벽과 천장에 구멍이 숭숭 뚫린다.
진동하는 것은 결투의 신도 마찬가지였다.
살갗이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벗겨진다.
붉은 피부를 가지고 있던 결투의 신은, 피부색이 아니라 온몸에 흥건한 피로 더욱더 붉어진다.
일본에 자신의 심상 세계를 소환해 나를 상대했던 희망의 신과는 경우가 다르다.
결투의 신은 내 영역 한복판에, 그것도 내가 숙소로 쓰고 있는 장소에 맨몸으로 뛰어들었다.
뒤질라고.
“나는 권능 반환이라는 요구에 수락했었지. 아무 때나 내 집 문 따고 들어와도 된다는 말은 안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결투의 신은 힘을 일으켜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 애썼다.
그리고 말했다.
“바쁜 일이라도 있었나?”
더럽게 평온한 목소리였다.
눈깔이 반쯤 뽑혀 나오고 있는 상황에 내뱉을 대답은 아니었다.
바쁜 일은 있었다.
세레지아의 복구… 치료도 해야 하고.
김민혁을 불러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호치와 용용이는 그동안 뭘 했는지 알아봐야 한다.
겸사겸사 박민을 찾아가 목도 뽑아야 하고.
“많이 바빴나 보군. 미안하다. 나중에 찾아오라 했으니, 그 시기는 내가 결정하고 다시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을 거라 판단했다.”
결투의 신은 곧바로 사과했다.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눈깔이 반쯤 뽑혀 나온 상태에서도 비명이 아니라 담담한 사과를 건네는 그 모습이.
“무엇보다 지금 그대를 만나는 편이 가장 좋을 거라 생각했다. 나에게도, 그대에게도 그리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다른 신들을 위해서도.”
빌어먹을 자식.
저게 제일 열 받는다.
결투의 신은 혼자 찾아오지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신들의 시선이 붙어 있다.
백신전의 신들이다.
이연희가 만신전 신들의 시선을 주렁주렁 달고 60층을 찾아왔듯, 결투의 신은 여러 신들의 시선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내게 달가운 모습은 아니었다.
신들은 결투의 신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와 지구를 살펴볼 수 있다.
“무슨 뜻이지. 날 위해서도 좋다는 건.”
별 의미 없는 이야기이기만 해봐라.
두 눈깔을 뽑아 13층의 주지처럼 장님으로 만들어줄 테다.
“많은 신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무엇을.”
”물론 그대를.”
쯧. 혀를 찼다.
키리키리가 했던 말과 동일했다.
“그대는 여러모로 이례적인 존재다. 전투적인 성향을 가진 신들은 대부분 대신격에 닿지 못하지만, 그대는 이미 격을 넘어선 위력을 보이고 있으니.”
“이거 섭섭한데.”
백신전이 내 힘을 우려하는 건 알 바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 힘을 바랐던 건 백신전의 신들이라는 점이다.
“사냥 끝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가마솥을 준비한 거냐.”
바라던 대로 완성자들과 희망의 신을 족치고 나니 곧바로 견제가 들어온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일단 시선의 매개체인 결투의 신을 죽이고, 지구를 폐쇄한 뒤에 생각해볼까 고민했다.
‘세레지아.’
[네. 용사님.]‘도와줘.’
[지금은 무리입니다.]‘어떻게 해도 안 될까?’
[어떻게 해도 안 됩니다.]젠장.
아무래도 세레지아의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가짜를 죽일 때 희망의 신의 전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던 타격이 컸다.
나도 그 힘에 피해를 입었지만, 무기로서 정면으로 그 힘에 부딪혀야 했던 세레지아는 훨씬 큰 피해를 입었다.
괜히 그녀가 지구로 빨리 돌아가자 보챘던 게 아니었다.
일단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백신전 신들이 본격적으로 지구에 강림하기 전에, 결투의 신부터 죽이고…….
앞으로의 행동을 계획하고 있는데, 갑자기 퀘스트창이 열렸다.
내 의지와 별개로 열린 퀘스트창이 정신없이 반짝거렸다.
[퀘스트 창] [느림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 [회한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 [기원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 [유희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 [헌신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 [빛의 신 – 시밤쾅 터트려주세요! (완료)] [빛의 신 – 시밤쾅 터트려주세요! (new!)]느닷없는 등장이었다.
하지만 백신전 신들의 의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 결투의 신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었으니.
결투의 신을 대변인 삼아, 내 생각을 들어두겠다는 거겠지.
[느림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설명 : 느림의 신은 당신의 최근 행보에 호기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권능을 반환 받기 위해 찾아간 결투의 신과 대화를 통해, 당신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려 합니다.
[회한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설명 : 모험의 신이 시켰습니다.
[기원의 신 – 결투의 신과의 대화.]설명 : 기원의 신은 당신의 최근 행보에 깊은 우려를 느끼고 있습니다.
권능을 반환 받기 위해 찾아간 결투의 신과의 대화를 통해, 당신의 행보가 기원의 신의 안위를 위협하진 않는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심지어 같은 퀘스트를 주면서도 원하는 바에 대한 설명은 제각각이었다.
느림의 신은 호기심을, 기원의 신은 우려를, 유희의 신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빛의 신은…….
뭐여, 저건.
분명히 클리어했었는데.
[빛의 신 – 시밤쾅 터트려주세요! (완료)] [빛의 신 – 시밤쾅 터트려주세요! (new!)]설명 : 빛의 신이 ‘한 번 더’를 외치고 있습니다. 빛의 신은 퀘스트 보상으로, 튜토리얼 이양을 위한 동의가 아닌 새로운 대가를 준비했습니다. 그 보상이 뭐가 되었든, 무시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무시하자.
다른 신들은 모두 결투의 신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었다.
대화를 통해 어떤 결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판단 근거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상한 일 처리였지만, 백신전의 신들이 그간 도전자를 대해온 태도였다.
“대화라.”
”이야기해볼 생각이 들었나?”
결투의 신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 차분함에 돌을 던져보고 싶었다.
대화 좋지.
내가 선호하는 대화는 항상 몸을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대화였다.
“짠!”
그때, 퀘스트창을 통해 사라졌던 키리키리가 도로 튀어나왔다.
* * *
“히힝. 내가 둘이 싸울 줄 알았엉.”
키리키리가 초코파이를 까 먹으며 말했다.
이제는 내가 주지 않아도 주방에서 혼자 간식거리를 꺼내 온다.
“자자, 먹어. 먹으면서 이야기해.”
키리키리는 그렇게 말하며, 나와 결투의 신에게도 초코파이를 하나씩 주었다.
야, 그거 내 거야.
내 집이고.
굳이 따지자면, 김민혁 소유의 집이고, 김민혁이 사 온 간식들이지만.
“결투의 신은 말을 잘 못 행. 바보야. 아하핳.”
키리키리는 결투의 신의 등짝을 팡팡 때리면서 말했다.
결투의 신은 조용히 초코파이 봉지를 뜯어내고, 그걸 우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키리키리가 때리는 등짝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다.
거슬린다.
저놈이 너무나 무해하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백신전 신들이 우려하는 건 크게 두 가지양.”
”뭔데.”
”하나는 네가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
그게 문제가 되나.
시스템의 경계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던 희망의 신과는 경우가 다르다.
희망의 신은 수하들을 이용하면서도, 본인은 백신전에 소속되어 있기에 다른 신들에게 보복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백신전과 연관이 있을 뿐, 따지고 보면 제3자라고 보아야 한다.
함부로 백신전의 공동 구역을 침범했다가는 백신전의 역공을 받아야 한다.
“뭐, 빈틈을 찾을 수도 있는 거고. 무엇보다 특정 신의 개인 영역이라면, 백신전 차원에서 방비는 불가능해. 네가 희망의 신의 성역을 무너뜨렸듯.”
그건 백신전이 아니라, 그 특정 신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일이다.
“백신전 신들 중에는 자신들이 네 타깃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신들도 있엉.”
그럴 일은 없다.
“내가 뭐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거는 줄 아나.”
”히힝.”
키리키리는 그저 미소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본데.
“두 번째 걱정은 호오우재애가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 제약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는 거야.”
”뭔데, 그게.”
시스템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 제약을 피한다니.
”호오우재애도 잘 알 텐뎅. 다른 신의 사도가 되는 거.”
사도.
그 얘기가 다시 튀어나올 줄은 몰랐는데.
“애초에 사도는 신들이 제약에서 벗어나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만든 거니까. 다른 신의 사도가 되면, 어쨌건 백신전 소속이 되지만 시스템의 제약은 피해갈 수 있지.”
”신이 된 이후에도 다른 신의 사도가 될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징.”
몇 가지 가설이 생각났다.
희망의 신에 대한.
“백신전 소속 신들 중에서, 다른 신의 사도인 신도 있어?”
”응. 응. 있엉. 대표적으로 희망의 신이나.”
역시 희망의 신이었다.
이상하게 시스템에서 자유롭다는 인상을 받은 건 그 때문이었나.
키리키리는 옆에 앉은 결투의 신을 보며 말했다.
“여기 결투의 신도 그렇고.”
결투의 신이 다른 신의 사도였다라.
어떤 신의 사도일까.
곧 답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느림의 신.”
결투의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히힝. 아무튼 지금 호오우재애의 위치가 워낙 특이해. 전에 한 번도 없었던 경우고. 그래서 그런 거야. 백신전은 지금 널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것만 알아줘.”
백신전은 나를 적대할 생각이 없다.
물론 그렇겠지.
백신전 전체의 통일된 의견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구성원인 백여 신 모두가 제각각 다른 생각을 하는 곳이 바로 백신전이다.
“그래서. 결투의 신이 나와 하고 싶었던 대화는 뭐지?”
”글쎙. 앞으로 네가 뭘 할지, 그 계획에 백신전 소속 신들을 적대할 의사가 있는지 정도가 궁금한뎅.”
결투의 신에게 물었지만, 키리키리가 대신 대답했다.
결투의 신은 그런 키리키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제안이 있다.”
”으잉?”
키리키리가 눈이 동그래져서 결투의 신을 바라보았지만.
결투의 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느림의 신의 제안이다. 그분의 사도가 되어라.”
키리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뜬 그 얼굴 그대로 무섭게 안광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역시 백신전은 개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