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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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층 (19)
“무슨 짐을 그렇게 많이 쌌어, 용용아.”
용용이는 대답해 주지 않고 그냥 헤실헤실 웃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용용이가 메고 있는 백팩에는 분명 공간 왜곡 마법이 덕지덕지 붙어 있을 텐데.
저 가방이 꽉꽉 들어차, 빵빵해지려면 도대체 뭘 얼마나 넣어야 하는 걸까.
“방에다 가져다 놓게?”
“응.”
아무래도 지구에서 처음 본 물건들 중 신기한 게 많았나 보다.
용용이는 예전부터 신기한 물건이나 처음 보는 물건이 있으면 하나씩 자기 방에다 가져다 두고는 했다.
“야, 근데 너는 지구에 남아 있는 게 낫지 않겠냐?”
김민혁에게 물었다.
사실 김민혁이 60층에 따라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싫어, 튈 거야. 나 거기 가서 잠수 탈 거야.”
아무래도 김민혁에게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준 것 같다.
저번부터 기회가 나는 대로 잠수를 타거나 일을 피하려 하고 있다.
“거 국밥은 내 아공간에 넣어 두자. 식겠다.”
김민혁에게서 포장된 국물과 밥, 반찬 등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다.
60층과의 연결에 성공하고, 그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연희의 부모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죄다 실종되거나 사망한 내 가족과는 달리, 이연희의 가족은 모두 건강히 잘 살아 있었다.
심지어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은 풍족한 삶보다는 10년이 다 되어 가는 시간 동안 딸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퍼하셨다.
이연희의 부모님은 조만간 60층으로 가 이연희를 만나 볼 거라는 내 말에, 자신들이 손수 만든 돼지국밥을 이연희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예전에 두 분이 돼지국밥 장사를 했었고, 덕분에 이연희가 어릴 적에는 국밥을 정말 많이 먹었다고 한다.
“준비 다 됐으면 가자.”
“응. 나는 뭐 해야 될 것 없어? 물약을 마신다든지.”
김민혁이 물어보았다.
“그냥 튜토리얼 포탈 타듯이 가만히 있으면 돼.”
김민혁은 어쩐지 좀 불안해하며 포탈에 올라섰다.
나도 용용이의 손을 잡고 포탈 위에 섰다.
“왜, 세레지아도 손 잡아 줘?”
“됐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세레지아도 한발 늦게 포탈에 올라섰다.
“그럼 이동한다.”
* * *
[60층에 입장하셨습니다.]“오, 여기가 60층이야?”
김민혁이 물었다.
“노말 난이도 60층이랑은 전혀 다른데.”
“당연하지. 리모델링을 몇 번 했는데.”
내가 홧김에 때려 부쉈던 것 때문에.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대규모 재건축 작업이 있었고.
그 외에도 자잘하게 뜯어고친 게 수도 없이 많았다.
용용이가 건축 쪽에 관심을 둔 이후 새로 생긴 것도 많고.
그나저나.
“되게 오랜만에 돌아온 것 같네.”
고작 두 달간 지구에 있다 돌아온 것인데, 체감상 일 년은 나갔다 온 기분이다.
턱을 긁적였다.
벗어나고 싶어서, 떠나고 싶어서 그렇게 발악했던 장소인데.
이렇게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응! 오랜만이야!”
용용이가 대답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좋은지, 많이 설레는 것 같다.
맞잡은 용용이의 작은 손에게 콩닥콩닥하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아빠, 나 내 방에 갔다 올게.”
“그래.”
용용이는 신나서 자신의 방으로 날아갔다.
저리 좋을까.
용용이의 입장에선 이곳이 말 그대로 정말 집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용용이 방은 어디야?”
김민혁이 물었다.
용용이가 어디로 간 건지 궁금한 모양이다.
“저기.”
“저기?”
“저기, 탑 있잖아.”
김민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게 탑이야? 탑이네. 이런 미친. 나는 무슨 배경인 줄 알았다.”
용용이 방이 좀 크긴 하지.
눈으로 그냥 보면 한눈에 다 안 들어와서, 인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실제 크기가 저만한 건 아니고, 공간 왜곡 마법이 걸려서… 세레지아! 어디 가!”
조용히 옆에 있던 세레지아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세레지아는 대답도 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방향을 보니, 결계 쪽이었다.
세레지아는 대검의 형상으로 결계의 에너지원이 되어 오랜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세레지아에게는 결계 내부가 자신만의 방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에효.
오랜만에 60층에 돌아온 해후를 좀 나눠 보려 했더니.
용용이도, 세레지아도 휙 하니 가 버렸다.
호치라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일단 내 방으로 가자.”
“네 방도 저런 탑 같은 거냐?”
“탑은 무슨.”
그 전에 먼저 챙겨야 할 사람이 있었다.
저기, 거주 지역의 건물들 사이에 숨어 눈만 내놓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이연희였다.
“아, 아저씨? …정말 아저씨예요?”
* * *
“으어엉어어엉.”
“천천히 먹어라, 좀. 쉬었다 나중에 먹든지.”
이연희는 말 그대로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며 국밥을 퍼먹고 있었다.
그것참, 딱해 보이는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러웠다.
눈물이고, 콧물이고 국물로 다 떨어지고 있잖아.
억지로 이연희의 손에 수건을 쥐어 주고(작은 손수건이나 휴지로는 감당이 될 양이 아니었다), 얼굴부터 닦고 국밥을 먹게 했다.
“좀 진정이 되냐?”
“…네에.”
이연희는 연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는 말했다.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운 건지, 눈가와 콧잔등이 아주 새빨개졌다.
“국밥이 그렇게 맛있냐?”
이연희는 60층에 찾아온 나를 보고 불안해했고, 또 무서워했다.
솔직히 조금은 반가워할 줄 알았기에 나도 덩달아 당황했다.
일단 국밥이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 했다.
그리고 이연희는 국밥을 입에 넣자마자 아주 시원하게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네… 맛있어어으엉…….”
맛있다고 대답하며 다시 국물을 떠먹던 이연희는 다시 오열하기 시작했다.
미칠 노릇이네.
나는 떨떠름하게 숟가락을 놓았다.
이연희의 부모님들은 나와 김민혁도 먹을 수 있도록 국밥을 넉넉하게 준비해 주셨다.
나도 국밥은 오랜만에 먹는 거라 기대했는데.
이연희가 죽자고 오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맛이 달아났다.
그냥 울기만 하면 모르겠는데, 저리 서럽게 울면서도 꾸역꾸역 국밥을 입에 넣고 있다.
“그게 그렇게 맛있나. 나는 이제 지구 음식보다 튜토리얼 상점창에서 사 먹는 음식이 훨 맛있더만.”
혼자 중얼거렸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김민혁이 내 다리를 퍽 걷어찼다.
바로 째려보자 김민혁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했다.
이연희가 짠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가슴이 갑갑하기도 했다.
나는 느껴 볼 수 없는 감동이었으니까.
내 가족은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고.
튜토리얼에 들어왔을 때, 이미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후였다.
이연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이연희도 정말 오래 갇혀 있었으니까.
그것도 혼자서.
60층에 갇힌 이후로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고작 두 달이지만, 고립된 인간은 시간 흐름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어릴 적 부모님이 자주 해 주셨던 음식 맛을 느끼면 눈물도 나겠지.
이연희의 목표는 처음부터 살아서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가족을 다시 만나고 싶어 했는지 잘 알기에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새삼 미안해졌다.
“연희야.”
최대한 자상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하며 이연희를 불렀다.
이연희는 그릇을 향해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국밥 맛있지?”
이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가져다줘서 고맙지?”
이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사도가 되기로 해서 참 다행이지? 만약 거절했으면 국밥도 못 먹었을 것 아냐.”
이연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핫.
“그래, 그래, 많이 먹어. 천천히 많이 먹어. 얘기는 다 먹고 나서 나중에 하자.”
옆에서 김민혁이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무시했다.
이런 게 정말 중요하다.
이연희는 여러모로 중요한 재원이었다.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점수 따 두면 좋은 거지.
“아줌마, 울지 마아.”
어느새 다가온 용용이가 이연희의 무릎에 올라앉아 그녀를 토닥여 주었다.
이연희는 저도 모르게 용용이를 끌어안고 또 엉엉, 울기 시작했다.
저봐라.
경합에선 용용이를 납치해 인질로 삼느니, 뭐 하느니 했던 이연희다.
결과와 잘잘못을 떠나, 보기 민망해서라도 사이가 어색한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감정이 격해져 있을 땐 머리가 이성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용용이의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토닥임.
그 온기에 마음이 절로 열리는 것이다.
용용이도 당황하지 않고 이연희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국밥을 포장해 오길 참 잘한 것 같다.
안 그래도 이연희와 어떻게 화해를 하고 친해져야 할지 걱정이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김민혁이 옆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 * *
“처음엔 환각인 줄 알았어요.”
“뭐가, 우리가?”
“네…….”
이연희는 60층에 들어온 우리를 보고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줄 알았단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었고… 혼자 계속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까, 언젠가부터 제가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상태인지는 나도 알고 있다.
몇 번 겪어 본 적이 있어서.
“고마워. 그 와중에도 내가 부탁한 일을 잘해 줘서. 네가 여기서 보내 준 신호가 아니었으면 60층을 찾아오는 데까지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야.”
“네…….”
이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혈색이 좀 나아졌다.
“그런데 아저씨.”
“어, 왜?”
“저 안 죽일 건가요?”
그 담담한 질문에 순간 멈칫했다.
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왜 너를 죽이겠어.”
“…쓸모가 다했으니까?”
이연희를 사도로 삼아 60층에 남겨 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60층과 지구를 쉽게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그 역할을 다했으니 더 이상 자신이 필요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쓸모가 없어졌으면 그냥 죽여 버리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
“네…….”
냉철한 판단이다.
“심지어 저는 아저씨를 배신하기도 했었고… 아저씨 성격에 등 돌렸던 사람을 가만 내버려 둘 것 같진 않아요.”
이연희는 예전에 61층에서도 자신을 죽일 거냐고 담담히 물었었다.
마치 달관한 듯한 태도로.
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보면, 생에 미련이 없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녀의 심리가 궁금했다.
“배신하기는 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먼저 배신한 거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반대로 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굳이 따지자면 이연희보다는 내 잘못이 컸다.
나는 이연희의 배신을 예상했고, 방조했고, 심지어 유도하기도 했다.
물론 누가 더 잘못했으니 누가 사과를 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그녀의 잘못 때문에 그 죗값을 거론할 생각은 없다는 말이었다.
“적이 되긴 했었지만.”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했다.
“어쨌든 내가 이겼잖아?”
“그런가요.”
이연희는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이제는 적이 아닌 거네요?”
“그렇지.”
이연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동조차 없는 그녀의 몸가짐에선 아무런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근육이 이완되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확실히 이연희도 뛰어난 능력자였다.
사실 당연한 말이었다.
비록 내 도움이 있었다고는 하나, 헬 난이도 60층까지 기어 올라왔으니.
그걸 아무나 할 수 있었다면, 나는 두 달 전이 아니라 10년 전에 튜토리얼을 클리어했을 것이다.
나는 이연희에게 앞으로의 내 계획을 이야기해 주었다.
이전에는 조금씩 단서를 주었지만, 터놓고 이야기해 준 적은 없었다.
“신들에게 튜토리얼을 이양받는다고요.”
이연희는 헛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61층을 보면… 그리 허황된 이야기도 아닌 것 같네요.”
“가 봤어?”
“네.”
두 달의 시간 동안 61층에 가 보았고, 내 신도들도 만나 본 모양이다.
60층에 혼자 있었던 걸 보니, 그들을 만나기는 했어도 받아들여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도로서 제가 과연 필요한지 의문이 들 정도였어요.”
내 신도들을 봤으면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어쩌면 그 때문에 이연희가 내가 자신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필요해.”
나는 백신전에게서 튜토리얼을 이양받을 것이다.
그리고 튜토리얼 스테이지에 적용된 시간의 되감기를 없애 버릴 것이다.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고, 파괴된 땅은 다시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 목표였다.
다만 그렇게 내버려 두면 튜토리얼 스테이지의 대부분은 곧바로 멸망하게 된다.
순리에 따라 튜토리얼 세계들을 멸망으로 내몰 생각은 없었다.
위기를 극복하게 하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
“제 역할이 그거네요. 멸망 직전의 세계들을 구해 낼 신의 사도.”
“그래. 사실 튜토리얼의 스테이지 미션과 크게 다르지도 않을 거야. 다른 점이라면, 클리어하고 난 이후를 걱정할 필요 없던 이전과는 달리, 그 이후의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임해야 된다는 정도이지.”
되풀이되는 시간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미래가 이어질 테니까.
“사도로서의 대우는 최고로 해 줄게. 튜토리얼을 완전히 이양받고 나면, 시간이 날 때마다 지구에 나가 가족도 볼 수 있을 거야. 물론 업무를 잘해 낸다는 전제하에.”
이연희는 잠시 고민하다 네게 물었다.
“…왜 저예요?”
“무슨 말이야, 그건.”
“그건 제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왜 굳이 제게 그 일을 맡기려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연희가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리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단어는 쉽게 취급하면 안 되었다.
이연희는 과거 나에게 대체가 불가능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기대와 관심을 쏟았고.
이연희 또한 그걸 그리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내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했었다.
“네가 필요하니까.”
되도록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누구보다 나랑 비슷하니까. 판단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내가 그렇게 가르치긴 했지만, 네가 그렇게 성장하기도 했어. 그래서 튜토리얼 세계를 너한테 믿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그곳에서 네가 내릴 판단을 믿을 수 있으니까.”
진심이었다.
그녀의 판단은 내 판단과 별 차이가 없었다.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이연희의 판단이 오히려 내 판단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
나는 이연희가 스테이지들을 겪으며 내렸던 모든 판단을 기억한다.
4층에서 처음 생명체를, 문명을 가진 종족을 만났을 때.
6층에 고립되어 절망을 맞닥뜨렸을 때.
13층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적을 마주했을 때.
조금 엉뚱하지만 재밌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던 16층이나.
역겹다 못해 기구해 보이는 적들이 등장했던 20층에서의 판단들.
다양한 종류의 괴물을 처치해야 했던 40층대의 스테이지들과 사도로서 사람들을 이끌어야 했던 50층대의 스테이지들.
이후 이연희와 주고받는 연락이 줄어든 이후에도.
이연희는 자신이 스테이지를 어떻게 클리어했는지 정도는 꼬박꼬박 알려 왔다.
나도 그에 맞춰 조언을 해 줬었고.
그 편지들에 적힌 그녀의 행보를 모두 기억했기에, 그녀가 내릴 미래의 판단들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건 능력적인 면과는 별개인 이유인데.
“우린 가장 힘든 시간을 함께했잖아.”
비록 얼굴 한번 못 보고 편지와 메시지로만 주고받던 대화였지만.
하루하루가 아니라 당장의 일분일초가 지옥 같던 시절에.
이연희가 있었기에 미래를 보고 살 수 있었다.
“할게요, 아저씨의 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