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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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신 (7)
[그래서 대답은?]“대가만 충분하다면.”
희망의 신에게 답했다.
그 대가가 충분하다면 희망의 신과의 협력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반대 이유라고 해 봐야 희망의 신과 손을 잡는다는 생리적인 꺼림칙함 정도인데.
이 경우 나는 거절하지 못한다.
근거 없는 찝찝함 때문에 확실한 이득이 될 수단을 외면한다는 건 그 자체로 위험했다.
미래에 있을 위기에 대비를 소홀히 했다는 것이며, 미래에 내가 패배를 정당화할 빌미가 될 수 있었다.
‘아, 그게 부족해서 졌네.’ 혹은 ‘하긴 그때 이만큼 안일했으니.’ 등의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려서는 안 된다.
희망의 신이 이만큼이나 대가에 대한 자신을 내비치고 있는 이상 무작정 거절할 수 없었다.
신이 되고서 가끔 드는 생각이다.
내가 결정한 정체성이 나 자신을 속박하다 못해, 이 세상의 부품 따위로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주체인 신이 그 신성의 개념보다 위에 있으며, 그 개념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 신조차 자신의 신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모든 신이 그럴 것이다.
나만큼 페널티가 극단적인 신은 많지 않겠지만, 아무 페널티도 없는 신은 없을 것이다.
페널티를 조심하며 행동을 제한하다 보면, 어느새 신의 모든 행동과 생각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떤 정체성에 몰입해 있기 때문에 그 정체성의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신으로 하여금 그런 모습을 강요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성이 직관적인 신일수록 강대하고 위대할 수밖에 없다.
뚜렷한 신성의 테두리를 가지고도 신으로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반증이 되었다.
느림, 빛, 헌신, 균형, 자연, 희망.
백신전 주요 신들의 신성이다.
흉오, 고창, 이런 신성을 가지고 있던 완성자 신들과는 단어의 무게 자체가 달랐다.
과연 저런 신들은 어느 정도의 제약을 받고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제약 속에서 오랜 시간 존재해 오기 위해 어떤 선택들을 거쳐 왔는지도.
기회가 있다면 그 경험들에 대해 직접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선불이다.”
협력 대 정보, 그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제안에서 이득을 볼 수는 있었다.
그래야만 하기도 했고.
[선불?]“그래, 내가 필요한 정보부터 다 토해 놔.”
[…그랬다가 네가 약속을 어기면 나는 어찌하느냐.]“약속은 지킬게.”
희망의 신은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 들켰네.
신이 되고 나서는 다들 내가 거짓말을 못 할 거라고 지레짐작해 속이기 쉬웠는데.
희망의 신 또한 부분적으로 거짓을 말할 수 있을 법한 신이라 그런지, 넘어가지 않았다.
[뭐, 좋다. 정보뿐만 아니라 협력 또한 너에게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을 테니. 그걸 담보로 삼겠다.]꽤나 묵직한 담보였다.
희망의 신이 알고 내뱉은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질서의 신을 아느냐?]“알아, 쩌리 신이잖아.”
튜토리얼에서의 경험을 돌이켜 보아도 질서의 신에 대한 메시지를 본 기억은 몇 번 없었다.
세 번이던가, 네 번이던가.
심지어 그것도 거의 모든 신이 관심을 표시할 때였다.
단독으로는 어떤 눈에 띄는 반응도 보이지 않았었다.
내게 별 관심이 없고.
내 입장에서도 별 관심이 없는 신이었다.
애초에 질서라는 팍팍한 신성을 가진 신하고는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니다!]희망의 신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어서 그 말을 취소해라!]“싫은데?”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거절했다.
희망의 신은 잠시 분개해 뭐라 뭐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포기하고는 말했다.
[질서의 신은 현시점에서 가장 강대한 신이다.]“백신전에서?”
[모든 세상을 통틀어서.]예상외였다.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신인데.
[너는 질서의 신이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느냐?]글쎄.
모르겠다.
[생각해 보거라.]으음.
그냥 알려 주면 안 되나?
과거 희망의 신을 처음 만났을 때도 희망의 신은 내게 역으로 질문하며 답을 유추해 낼 것을 요구했다.
그때는 한정적인 정보 값 내에서 원하는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함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희망의 신이 가진 하나의 특성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아, 어서!]희망의 신이 나를 다그쳤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팔걸이를 잡았다.
아까 의자로 두들겨 맞았던 탓에 희망의 신은 몸을 움츠리며 소리쳤다.
[왜, 왜 조금만 생각해 보면 될 것을 굳이 폭력으로 해결하려 하느냐!]“네가 알려 주면 되는데, 뭐 하러 내가 심력을 소모해. 질서의 신이 뭐 어쨌는데.”
예전에도 그랬다.
정보 값이 있는 만큼 희망의 신은 내 말에 답해 줘야만 했고.
나는 희망의 신의 물음에 큰 고민 없이 되물었었다.
말을 마친 희망의 신은 잠시 내 눈치를 보았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답을 추측해 내길 바라는 것 같다만, 나는 희망의 신의 생각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었다.
희망의 신이 답을 말하길 기다렸다.
[…시스템이다. 뻔하지 않느냐.]시스템이라.
예상하지 못한 답이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희망의 신의 말대로 고민을 했다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답이었다.
성숙한 자아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하나의 생명체 혹은 개체라 부르기 어려운 지구도 오랜 시간 사람들의 신앙을 받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낸다.
더 나아가 그런 지구에 모인 신앙, 근원을 억지로 추출해 가던 완성자들도 있었다.
시스템 아래 구속된 백신전과 만신전의 신들.
그 신들이 자신들을 구속하는 시스템의 존재를 인지할 때마다 그 신성이 쌓였다면.
아무리 무형으로 존재하는 시스템이라지만, 하나의 신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
한낱 필멸자가 생산하는 신앙과 신격에 발을 내디딘 존재가 만들어 내는 신앙은 그 규모부터 차원이 다르다.
하물며 세상의 강대한 신을 죄다 모아 놓은 백신전과 만신전의 신들이 간접적인 신도라면.
우주에서 가장 강대한 신인 것 또한 일견 당연해 보였다.
[나는 질서의 신의 사도이기도 하다.]“아아, 알겠다.”
희망의 신의 짧은 말에서, 어떻게 시스템의 제약을 피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사도라는 것 자체가 신으로 하여금 시스템의 제약을 피해 자신의 영역 밖에서 제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언가 모순적이라고 생각되긴 했으나 이론상으로도 불가능 해보이진 않았다.
시스템 그 자체인 질서의 신과 그런 시스템의 빈틈을 이용해 편법을 저지르는 질서의 신의 사도라.
해학적인 감상보다 우선해 고민해 볼 게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퀘스트창] [질서의 신-???]설명 : 질서의 신은 아직 당신에게 바라는 점이 없습니다.
키리키리가 만들어 준 퀘스트창에 표시된 질서의 신 항목이다.
질서의 신은 내게 바라는 점이 없단다.
희망의 신에게 이 점을 물어보았다.
[당연하지. 튜토리얼 또한 시스템의 일부다. 다른 신들은 몰라도 질서의 신은 튜토리얼의 이양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빌어먹을.
일이 또 꼬였네.
* * *
질서의 신은 자아도, 이성도 있는 신이다.
아무리 메시지를 통해 자신을 내보인 적이 적다 해도 없지는 않았다.
만약 질서의 신이 시스템과 튜토리얼의 존재 그 자체라면 짚이는 것도 있었다.
처음 근원의 힘을 이루었던 59층을 클리어했을 때.
어떤 존재에 의해 스테이지 내에서 모았던 근원의 힘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그게 아마 질서의 신이겠지.
젠장, 그 힘도 언젠가 되찾아야 하는데.
100층을 클리어했을 때도 어느 신이 나를 지켜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튜토리얼 스테이지가 종료되고, 지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직접 지켜볼 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질서의 신뿐이었다.
만약 질서의 신이 여타 다른 신들과 다름없이 행동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튜토리얼의 자발적 이양은 불가능하다.
질서의 신은 자신의 일부를 내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키리키리의 퀘스트창을 통해 모든 신의 동의를 받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분명 반대하는 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신들의 경우에는 퀘스트가 아닌 무력시위로 튜토리얼 이양의 동의를 받아 낼 생각이었고.
하지만 질서의 신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튜토리얼 이양 자체가 질서의 신의 정체성에 위반되어, 적당한 무력시위로는 동의를 받아 낼 수 없을 것이다.
강제로 빼앗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이 우주에서 가장 강대하다는 신을 상대로.
빌어먹을.
이 시점에 처음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대비하고 있어야 할 정보였다.
“거 뒤통수가 얼얼하네.”
키리키리의 목적이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자.
그녀는 시스템의 약화를 원했다.
그리고 시스템의 빈틈을 이용해 해악을 끼치는 희망의 신의 제재를 원했다.
시스템 그 자체인 질서의 신의 약화와 그 사도인 희망의 신의 제재.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희망의 신을 제재하는 것까지는 키리키리도 내게 협력했었다.
그다음은 어떨까.
내가 질서의 신과 충돌하는 것에도 협력할까?
키리키리는 분명 시스템의 제약을 약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시스템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어쩌면 튜토리얼의 이양이 질서의 신에 대한 견제책일지도 모른다.
질서의 신과 충돌하지 않고 튜토리얼을 내게 이양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고.
아직 내게 말해 주지 않았을 뿐, 때가 되면 질서의 신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키리키리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당장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알려 주지 않았다.
문제는 얼마 전 퀘스트창의 목록이 죄다 물음표로 변경되었다는 점과 키리키리가 내 연락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모험과 느림이 한시적으로 손을 잡아 나를 축출해 내는 걸 모두가 방관하게 했지만, 질서의 신은 조금 다를 거야.]희망의 신은 마치 내 속마음을 훤히 읽고 있는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아무리 네가 인과에 손을 대었다지만, 그것만으로 느림과 모험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어. 영원히 유영하는 자와 정해진 운명을 막아선 자는 그 자체로 인과의 일부를 상징해.]그새 다시 한 번 말투를 바꾼 희망의 신이 소곤거렸다.
의자 등받이 깊숙이 기대어 앉은 희망의 신이었지만, 그 목소리는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거의 감고 있는 것처럼 가늘게 뜬 실눈은 마주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불길함을 느끼게 했다.
뱀과 같았다.
작은 혼란이었다.
그 혼란의 냄새를 맡자마자 돌변하는 희망의 신의 모습을 보면서, 되레 동요하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백신전에 가입하라는 제의를 거절했다지?]희망의 신은 킥킥, 웃으며 말했다.
혐오스러운 웃음이었다.
사악하고, 비열하고, 추잡스러운 웃음이었다.
희망의 신은 그런 점을 감추지 않고 내보였다.
그 모습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완연한 신격을 이룬 후에 이렇게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인간일 적, 내 이성으로 감당하기 힘든 역겨움이나 공포스러움을 느꼈을 때와 같았다.
개구리가 뱀을 보았을 때, 어떤 짐승이 자신의 천적을 마주했을 때 느낄 법한 그런 원초적인 감정이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감정은 뒤섞여 위압감과 두려움이라는 결과물을 조장해 내었다.
흥미로웠다.
희망의 신이 만신전의 신들을 어떻게 갖고 놀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이제 나와 협력할…….]“야.”
[…응?]“눈깔에 힘 안 푸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