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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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옥.
나에게는 익숙했다.
느림의 신의 권능, 시간 유폐를 내 성장을 위해 자주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와 별개로, 세상과 단절되어 시간의 벽에 가로막혔던 경험이 많았다.
처음 벽에 가로막혔을 때 나는 포기했고, 도태되었다.
나이가 들면서 감각이 무뎌지고, 실력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한 나는 도전을 포기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스스로를 좁은 방에 가두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살다가 술에 찌들어 급사한다 하더라도 그리 놀라지도 애석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사라져 있었다.
두 번째로 벽에 막혔을 때는 계속해서 부딪혔다.
언젠가는 내가 벽을 뚫어 낼 수 있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튜토리얼 속에선 나이를 먹지 않았고, 나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내 정신력이 무너지지 않는 한, 언젠가는 6층을 클리어해 낼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는 벽을 향해 계속 부딪힐 수 있었고, 끝내 벽을 부수고 그 너머로 향할 수 있었다.
세 번째로 벽에 막혔을 때는 다시 확신을 잃어버렸다.
드디어 목표가 생겼음에도 목표로 향하는 와중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쳐 버렸다.
나는 내가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음을 믿었고, 언젠가 목표에 도전해 그것을 쟁취할 수 있을 거라는 것도 믿고 있었다.
하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을 버티지 못했다.
61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동료 없이는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매 순간 내 자신을 태우는 듯한 갈증과 조급함 속에서 몇 번이나 망가졌다.
그때 나를 건져 내 준 것은 60층에서의 시간을 무의미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준 호치와 용용이였다.
그리고 희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준 이연희였다.
결국 나는 이연희가 61층에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그곳에서 빠져나올 만한 능력을 얻게 되었다.
세 번의 도전을 통해 나는 완전한 확신을 얻었다.
내가 견뎌 낼 것이라는, 그리고 끝내 승리할 것이라는.
키리키리가 내게 시간 유폐를 걸어 시간의 감옥에 가둔 지금도 그랬다.
나는 이 감옥의 벽을 무너뜨리고 탈출할 것이다.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든,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든.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 벽을 넘을 수 있다는 뜻은.
그 확신은 내게 답을 주었다.
빛의 신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똑바로 바라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손가락이었다.
내 콧잔등을 향해 다가오는 손가락은 마치 신기한 것을 만져 보고 싶다는 듯,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불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치워.”
빛의 신은 크게 놀랐는지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이 심히 부산스러웠다.
조금 뒤로 물러나자 다시 빛의 신의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빛의 신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빛나고 있었다.
그 빛 때문에 얼굴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인간의 형태와 흡사하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 손가락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으로 시력이 멀어 버렸을 것이다.
비단 손가락뿐만 아니라 빛의 신의 몸 전체가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 때문에 얼굴의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인간의 형태와 흡사하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다.
빛의 신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마치 수전증 있는 사람이 들고 있는 폭죽처럼, 불규칙하게 사방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잠시 그러고 있던 빛의 신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양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아주 밝게 빛나는 구체 하나가 떠올랐다.
그게 손바닥 사이즈로 축소시킨 시밤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작게 만드니, 작고 예쁜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눈부셔.”
그걸 가까이다 들이대니, 나조차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빛의 신은 내 말을 듣고는 그게 칭찬인 줄 알았는지, 또 박수를 치며 사방을 향해 날아다녔다.
박수가 쳐질 때마다 팡팡, 하고 빛이 산란되었다.
시야를 어지럽히며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빛의 신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아무리 악의가 없을지라도 지나치게 성가셨다.
잠시 잡아 두기 위해, 빛의 신을 향해 날아가며 손을 뻗었다.
빛의 신은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에 기겁하더니, 내 반대 방향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그 뒤로 밝은 빛의 무리가 길게 늘어졌다.
등장만큼이나 요란스럽고,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다.
“저건 못 잡겠네…….”
담담히 인정했다.
신들은 대개 어딘가 나사가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나 자신도 그랬고.
하지만 방금 만난 빛의 신처럼 참신하게 미쳐 보이는 신은 또 처음이었다.
괜히 내 기분까지 어수선해진 것 같다.
뒤를 돌아보았다.
행성이 붕괴하고 있었다.
지면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폭발을 이기지 못한 행성은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별의 죽음.
어쩌면 죽음의 신이 원했던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 이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저건 막지 못한다.
그러려면 지나치게 많은 힘을 소모해야 했다.
그리고 설령 그러한다 해도 의미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저 행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은 이후였으니까.
돌아가자.
이미 죽어 가는 별의 폭발에 휘말릴 생각도 없었고.
더 많은 죽음이 탄생하는 것을 방치할 생각도 없었다.
질서의 신이 초월 신이 되어 세상이 멸망하는 것도.
그 질서의 신을 약화시킨다는 명목으로 키리키리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도.
모두 막아야 했다.
[도전하라.]질서의 신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 맴돌았다.
도전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질서의 신의 영역.
튜토리얼.
다시 그곳을 찾아가야 했다.
*
우주의 끝.
세상의 끝.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거대한 이 우주에도.
그리고 정말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의 길고 긴 여정에도.
키리키리는 백신전의 입구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드디어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짧은 모험이었구나.]느림의 신이 말했다.
긴 모험이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느냐.]키리키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생각하고 있던 이상적인 형태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끼워 맞출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빛의 신을 보내 만신전 신들을 뿔뿔이 흩어 두었다.
겁에 질린 그들은 영역 곳곳에 흩어져 숨을 것이다.
그들을 추적한다는 빌미로 세상 곳곳에 백신전 신들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도전자 이호재는 마침내 돌아가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했다.
사실 그가 클리어했을 때 모든 것을 알려 주어야 했지만, 그랬다간 아무 준비도 없이 질서의 신에게 도전할 것을 우려했었다.
그녀의 의견에 끝까지 반대하던 천공의 신은 질서의 신의 힘을 빌려 약화시켜 두었다.
희망의 신은 완전히 소멸해 버렸는지 자취조차 찾을 수 없었다.
항상 화신체 하나를 유지해야 하는 백신전 내에서도 그러했으니, 완전히 소멸해 버린 게 틀림없었다.
한 가지, 이호재를 힘으로 억압해 둔 게 걸렸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뒤에는 이호재도 자신의 계획에 따라 질서의 신에게 도전할 거라 믿었다.
그의 신성이 결과에 맞추어져 있음을 아니까.
“어쩔 수 없지. 모험은 항상 계획대로 완벽하게 흘러가지 않으니까.”
[그래, 모험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변수가 따르는 법이지.]키리키리는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느림의 신의 말에서 그녀를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면 과민 반응하는 걸까.
키리키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백신전의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입구로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균형의 신은 마주칠 수 있었다.
노인의 모습을 한 균형의 신은, 못 보던 사이 부쩍 더 늙어 버린 모습이었다.
물론 신이 늙을 리 없으니 그만큼 피로해 보인다는 뜻일 것이다.
화신체의 겉모습에 그게 드러날 만큼.
“잘 다녀왔는가?”
“응.”
키리키리는 느림의 신의 방을 지키고 있던 균형의 신에게, 그가 맡은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다행히 느림의 신께서는 움직일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네.”
“그렇겠징.”
키리키리는 간단하게 답하고 문을 열었다.
“그럼 수고행.”
균형의 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키리는 느림의 신의 방을 벗어나 백신전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던 키리키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에 대경했다.
분명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야 할 이호재가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안 돼!”
*
“어, 왔어?”
호치가 물었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함까지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준석이는 데려왔어?”
그러고 보니 호치는 내가 이준석을 데리러 간 것까지만 알고 있었다.
내가 타다토스에서 겪은 일들을 모두 설명해 줘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관두기로 했다.
당장 설명해 주기엔 지나치게 긴 이야기였다.
호치는 시스템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교단의 상황을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단이 지구적인 규모로 성장한 이후,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갑작스러운 성장에 관리자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스템창이라도 없었다면 교단의 본질이 변질되기도 했을 것이다.
종파가 갈리고, 자신이 신인 양 착각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이 나타나고.
시스템창은 교단의 성장뿐만 아니라 관리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역시 잘 만들었다 싶었다.
“짠!”
호치의 목에 있던 목 베게가 돌연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용용이로 변화했다.
용용이는 호치의 어깨를 밟고,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용용이를 안아 들면서 물었다.
“왜 목 베개로 변해 있었어. 비듬 떨어지게.”
그 말에 호치가 발끈했다.
“야, 나 비듬 없어.”
“심심했어.”
용용이는 내가 없어진 사이, 많이 심심했던 모양이다.
호치도 일하느라 바빴을 테니.
칭얼거리는 용용이를 꼭 안고, 토닥여 주었다.
“가자, 용용아. 나랑 갈 데가 있어.”
시간이 별로 없었다.
괜한 방해가 들어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응!”
다행히 용용이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도 않고 수락했다.
나와 용용이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호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
“그래, 그럼.”
61층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었다.
용용이와 호치가 먼저 넘어가고, 나도 뒤따라 넘어가려 발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키리키리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멈춰!]어디서 들리는 건가 싶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퀘스트창이 열려 있었다.
[…왜, 왜 이러는 거양!]왜 이러냐니.
나는 승산을 높이겠다는 이유로, 세상이 멸망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무모해!]키리키리는 나보고 무모하다 말했었다.
그 증거로 느림의 신의 힘에 사로잡혀 꼼짝 못 하는 나를 말했다.
“빠져나왔잖아, 이렇게.”
나는 팔을 벌리며 말했다.
키리키리는 내 말뜻을 알아들은 건지 다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그래도는 무슨 그래도야.
[감당할 수 있어? 네가 실패하면 모든 게 끝날 거야!] [마지막 희망조차 없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해 버리는 거야. 앞으로 있을 모든 미래와 가능성이 사라져 버리는 거라고!]키리키리는 연신 소리를 질러 대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절박해 보였다.
[제발 들어가지 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이대로 네가 도전했다가 죽어 버리면 더 이상 남은 기회가 없단 말이야.]“이기면 되잖아.”
승산이 낮은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다.
절대로.
[못 이기면!]나는 그 말에 웃어 주었다.
*
용용이와 호치는 할멈과 함께 얼음 궁전 쪽으로 보냈다.
나는 혼자 화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곧 거대한 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용암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누워 있는 영감이 보였다.
거인 전사들은 영감의 근처에 모여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괜찮아?”
“괜찮다.”
영감은 선선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영감은 그저 기운을 조금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신성의 상실은 그만큼 큰 손실이었다.
아마 제대로 거동하기까지는 길고 긴 정양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시 확신과 신성을 되찾아 건강을 회복하든지.
“가는 건가?”
영감이 물었다.
“다들 눈치챘네. 아무 말 안 했는데.”
“느껴지니까.”
“뭐가.”
“그대의 흥분이. 그리고 긴장과 각오가. 한눈에 보인다. 드디어 때가 온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구나. 우린 그대와 함께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약속만을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거늘.”
영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거대한 몸이 일어서자 용암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항상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던 영감의 몸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처량하게 보이기만 했다.
“결국 우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구나.”
그렇지 않다.
마지막 순간 나와 함께 가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그들의 노력은 절대 의미가 없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어. 이기고 돌아올 테니까.”
*
용암과 얼음이 뒤섞인 묘한 인테리어의 경기장.
이전에 한 번 와 보았던 곳이다.
61층을 클리어했을 때.
용암의 궁전과 얼음의 궁전 양쪽 모두를 클리어했을 때, 소환되는 경기장이었다.
“아빠!”
용용이가 나를 부르더니, 내 쪽으로 열심히 달려왔다.
용용이를 안아 들면서 생각했다.
나는 용암의 궁전으로, 그리고 용용이와 호치는 얼음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는 뜻은.
역시 용용이를 통해 61층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용용이를 도전자 삼아 61층을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일 것이다.
용용이의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해 줬다.
용용이는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었다.
“용용아, 아빠 잠시 어디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오래 걸려?”
“아마, 그럴 것 같네.”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참 묘한 일이다.
아무리 내가 용용이의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한들, 당시의 나와 호치, 둘이서 용용이를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이로 키워 냈다는 게 놀라웠다.
어쩌면 용용이 스스로 잘 자라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정말 축복 같은 아이였다.
“안 돼.”
그래서 용용이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용용이는 시무룩했지만,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지는 않았다.
“미안하네.”
호치가 대뜸 말했다.
“뭐가.”
“그냥. 내가 도움이 못 되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호치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나는 항상 호치에게 쓸모없다 화를 냈었고, 호치는 내게 그딴 건 자신이 알 바 아니라고 대들었었다.
“아니야, 충분히 많은 도움이 됐어.”
호치는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 서려 있는 걱정과 불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야, 걱정 좀 하지 마. 아직도 날 못 믿냐.”
“믿어.”
“그럼?”
“그래도 걱정되잖아.”
호치는 그렇게 말했다.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그래.”
고마워.
마지막 말을 삼키고 다시 포털에 올라섰다.
밝은 빛에 몸이 휩싸였다.
다음 순간, 나는 아름다운 동산에 서 있었다.
바닥에서 질척하게 피가 묻어 나오는 끔찍한 동산이 아니라 풀 냄새가 가득하고, 포근한 바람이 살랑거리는 동산에.
그 동산에 뿔난 토끼가 하나 있었다.
“키리키리.”
“흥!”
*
“더 이상 막지는 않네.”
나는 키리키리가 날 보자마자 다시 붙잡아 두려 할 줄 알았다.
“못 막는 거양.”
내 말에 키리키리는 발로 바닥을 팡팡, 밟으며 말했다.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는 방법이 용용이보다도 유치했다.
“내 힘으로는 널 막을 수 없으니깡!”
그렇겠지.
그랬다간 천공의 신처럼 질서의 신에게 붙잡힐 것이다.
“그리고 호오우재애는 말로는 설득이 안 되는 꼴통이고!”
“꼴통이라니, 거 말이 너무 심한데.”
“호오우재애의 이상한 이름이 더 심해!”
얼씨구, 인신공격까지.
“대신 케이크 사 줄게.”
“안 머겅!”
이건 좀 충격이었다.
설마 그동안 케이크를 좋아했던 건 다 트릭이었나.
키리키리는 갑자기 한숨을 푸욱 쉬더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일단 너에게 도움이 될 정보들을 알려 줄게.”
“그래도 돼?”
“…그게 내 역할이니깡.”
이렇게 되니 예전 튜토리얼을 진행할 때랑 똑같이 느껴졌다.
스테이지에 들어가기 전, 키리키리에게 간단한 조언과 정보를 얻었던 것처럼.
키리키리는 세세한 정보까지 모두 알려 주었다.
튜토리얼을 진행할 당시, 내 성장을 위해 모든 정보를 다 알려 주지 않았던 과는 달리, 이번에는 거의 모든 정보를 다 알려 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키리키리가 알려 주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암기했다.
그녀의 조언을 새겨들어 손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키리키리는 앞에 모은 무릎에 고개를 푹 숙였다.
“힝, 이대로 혼자 들어가면 분명 죽을 거야.”
여전히 걱정이다.
내 앞에는 이미 포털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포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전하라.]이미 몇 번 들어 본 목소리였다.
질서의 신의 목소리.
어쩌면 저 도전하라는 재촉이, 키리키리의 계획대로 흘러가기 전에 내가 도전하길 부추기는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우스워졌다.
“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포털에 올라섰다.
키리키리를 뒤로하고, 포털에 올라서는 간단한 행동에서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한 긴장도.
“죽지 마!”
키리키리의 배웅을 들으며, 나는 이동되었다.
[입장을 환영합니다, 도전자 이호재 님.]눈앞에 나타난 메시지가 나를 반겨 주었다.
좁고 어두운 통로였다.
마치 튜토리얼 1층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내 상태를 점검했다.
아무 이상도 없었다.
복장도 내가 입고 있던 그대로였고, 허리춤에 찬 검들도 그대로였다.
[메이데이, 메이데이.]밑도 끝도 없이 엉뚱한 말을 하고 있는 세레지아와.
[저, 용사님……? 저는 왜 여기 있는 거죠?]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아부부.
억울하다며 찡찡거리는 아부부를 이번 일이 끝나면 천공의 신에게 돌려보내 주겠다는 말로 달래었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았다.
지금까지는 튜토리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처럼.
이게 진정한 본 게임임을 알리듯, 좁은 통로의 벽에서 불길하고 위험한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졌다.
그리고 저 멀리서부터 질서의 신이 느껴졌다.
나는 그곳을 향해 말했다.
“내가 그랬었지. 네가 뺏어간 힘, 언젠가 되찾으러 찾아가겠다고.”
질서의 신은 내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느껴지는 오싹함에 잠시 주춤했다.
어두운 통로 반대편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기운은 그만큼 위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전까지 걸어온 길고 긴 발걸음이 있었기에 지금 이 순간 한 발, 한 발 주저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긴 튜토리얼이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어려운 튜토리얼이었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끝내고, 내 목표를 앞에 두게 된 지금.
나는 패배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