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SS 430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외전-51화(430/432)
외전 51화
101층 (3)
“아니야! 사망 플래그가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누가 봐도 사망 플래그겠구만.
이제 누구한테 고백할 거라느니, 반지를 준비했다느니 하는 말만 곁들이면 완성이었다.
“진짜 아니야.”
호치는 크게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소설이나 만화에 심취하던 녀석이라 사망 플래그라는 농담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다.
“무슨 얘기였는데.”
“아니야, 말 안 할래.”
그렇다고 하던 말을 안 하면 어쩌자는 건가.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하던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말해 봐. 어차피 플래그는 다 세워졌어. 말이라도 하고 죽어야 덜 억울하지.”
“플래그 아니라니까! 그리고 안 죽어!”
그래, 그래, 안 죽어.
호치를 달래 주어야 했다.
“그래. 그래서 누구랑 사귀는 중이냐. 우리 신도 중 한 명은 아니겠지.”
서울 신전에는 사무원을 비롯해 수많은 교인을 체류시킬 예정이었다.
지금쯤이면 완공이 되고도 남았을테니, 호치가 주로 지내는 신전 내에서 자주 마주치는 신도들이 더러 있을 터였다.
호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버럭하며 발끈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조금 미묘했다.
진짜 관심 있는 신도가 하나 있는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러면.”
“그… 네 가족을 같이 찾아보지 않을래?”
의외의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내 가족?”
우리 가족이 아니라 내 가족이라고 말했으니.
호치와 용용이 그리고 61층의 거인들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응. 튜토리얼에서 나오고 나서 한번도 안 찾아봤잖아.”
튜토리얼에 들어가기 전, 우리 가족은 세 명뿐이었다.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나.
친척들과는 왕래가 없었다.
후에 만들어진 내 다큐멘터리에서는 되게 가깝고 친한 친척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상 명절에도 얼굴 한번 안 보는 사이였다.
굳이 그들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튜토리얼에 있던 시기이지만, 누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확실했다.
실종된 조카가 있기는 했다.
처음 조카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어지간해서는 살아남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원체 똘똘한 아이였다.
하지만 세상이 뒤바뀌고, 서울 한복판에 괴물들이 튀어나오던 시기에 사고를 당한 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실종 처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시기 실종은 사실상 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찾아갈 가족이 없었다.
“그래도…….”
호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족을 찾아갔으면 하는 모양이다.
이유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호치 녀석이 나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게 뭔지도.
“그럼 납골당이라도 찾아가 볼까.”
정부에서 아버지와 누나의 유골함을 보관 중이었다.
현충원을 비롯한 국립묘지들이 죄다 쑥대밭이 된 이후로는 국립 납골당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 같이 가 보자.”
호치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착한 녀석이다.
내가 저 녀석 입장이었도 나에게 저만큼이나 마음을 써 줄 수 있을까.
항상 뒤통수치고 목 딸 생각만 하고 있었겠지.
그래, 납골당에 가 보자.
아버지와 누나에게 정말 오랫동안 미뤄 왔던 사과도 하고.
인사도 드리고.
죄책감과 자괴감에 몸부림쳐 보기도 하고.
후회도 하고 그래야겠다.
신성을 잃지 않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결정이다.
할 수 없는 결정이기도 했다.
신성을 잃은 것이, 이런 점에서는 좋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렇지! 앞에 제대로 틀어막고!”
내 말대로 호치는 적들을 제대로 마크해 내었다.
적들에게 치명타를 먹이는 건 용용이와 영감의 몫이었다.
이곳의 적들에게는 파훼법이 존재했다.
여기 괴물들은 특출 나게 강력한 편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 우리 일행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질서의 신의 힘을 담은 황금이 문제였다.
몬스터들의 이빨과 손톱, 검과 창날 등의 황금은 신성을 잃은 채로는 도저히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행이 고전하고 있던 이유는, 단 한 번만 당해도 매우 위험해지는 저 황금을 필사적으로 피해 가며 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성은 없지만 황금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는 호치가 제대로 탱킹을 해 주고, 용용이와 영감이 안전하게 공격에만 집중한다면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었다.
가면 갈수록 괴물의 수가 줄어들었기에 점점 순조로워졌다.
“수고했어.”
호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은 싸울 때마다 기괴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변신한다기보다는, 메타몽이 꾸물거리면서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보였다.
호치가 취하는 형태는 대부분 황금을 두른 다른 괴물들의 모습이었다.
아마 당장 떠올리기에, 그보다 강력한 형태는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다.
“계속 진행할까?”
일행은 휴식 없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야, 근데.”
호치가 또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았다.
“인과가 없는 게 무슨 의미야?”
그게 궁금했구나.
궁금할 만한 일이었다.
사실 호치는 예전부터 이 문제를 궁금해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대답해 주지 않았었고.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되나.”
“복잡해?”
“복잡하지.”
복잡하게 얘기하려고 들면 한도 끝도 없을 만큼 복잡했다.
신성의 기초부터 이야기해야 하니까.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저 질서의 신의 황금에 닿아도 너는 아무 상관 없지?”
“응.”
그냥 만지고 닿는 것을 넘어, 황금으로 만들어진 무기에 찔리거나 얻어맞아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그러지 못한다.
저 황금은 질서의 신의 힘을 담고 있다.
질서의 신은 여러 신 중에서도 특별하다.
창조된 기계신이고, 초월에 다가가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질서라는 개념 자체가 특별했다.
신이란 기본적으로 세상의 법칙을 자신의 의지대로 왜곡시킬 수 있는 존재다.
어쩌면 그게 신의 정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서의 신의 신성은 세상의 법칙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고 수호하는 것에 있다.
그렇기에 질서의 신은 다른 신들을 상대로 매우 강력한 모습을 보여 준다.
신성을 통한 법칙의 왜곡 자체를 불가하게 막아 버리니까.
그렇다고 신이 아닌 존재들에게 약한 것도 아니다.
질서의 신의 힘을 품은 무기는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규칙을 강하게 지키고 있다.
보통 칼에 맞으면 베이고, 찔리고, 다치고, 아프다.
그 법칙은 그 무엇보다 강하게 발현된다.
막을 방법도, 충격을 완화할 방법도 없다.
그냥 맞으면 아픈 거다.
인과의 변수를 이용하는 힘이 아니라 인과의 변수를 없애 버리는 힘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벌써 복잡해.”
“그래. 아무튼 너는 인과가 없으니까, 그 능력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거야.”
아예 인과의 바깥에 서 있으니까.
어쩌면 질서의 신이 그토록 바라고 있는 최종 목적지가 호치 녀석처럼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너무 건너뛰었잖아. 애초에 나는 왜 인과가 없는 건데. 분신으로 태어나서?”
“그럴 리가 있겠냐. 그렇게 쉬우면 누구나 인과를 벗어던졌겠지.”
질서의 신이 자유를 얻고자 저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왜 그런 건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 또한 신성을 잃었기에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고.
“네 문제가 아니야. 내 문제였지.”
“네 문제?”
“내 신성이 뭐냐. 아니, 뭐였냐.”
호치는 승리라고 답했다.
“그래. 승리라는 신명을 가지려면 최소한 나는 승리에 매여 있어야 해. 이전에도 수없이 많이 이겨 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기기만 할 것이고. 그런 믿음이 필요해. 타인의 믿음이든, 내 자신의 믿음이든.”
“어, 그건 나도 알아. 네가 그렇게 해서 승리의 신이 된 거잖아.”
그랬어야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끝끝내 못 이긴 상대가 딱 하나 있었어. 앞으로도 못 이길 것 같고.”
“그런 게 있었어?”
있었다.
지금 바로 내 앞에서 얼빵한 표정을 하고 있는 놈이.
“너 말하는 거야, 멍청한 호치 놈아.”
“으엉?”
“결국 내 뜻대로 강해지지도 않았고, 내 부속품이 되지도 않았고, 끝끝내 네 자아를 유지하고 생존했지. 그 정도면 패배로 인식하기에 충분했지.”
호치는 패배의 상징이었다.
내 안일함을 의미하는 건지도 몰랐다.
덕분에 나는 승리라는 신명을 가질 수 없었다.
호치가 존재하는 한.
아니, 신성 자체를 가질 수 없었다.
호치를 창조한 순간, 나는 신이 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또 다른 자신의 존재는 신성에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내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어느새 가족이 되어 버린 호치를 죽이고 흡수하느냐, 신이 되는 것을 포기하느냐.
그래, 그 당시를 지켜봤다면.
질서의 신이 내게 기대를 걸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인과를 초월했었다.
그렇게 나는 신이 되었다.
그 초월의 증거가 바로 호치였다.
이호재는 승리한다는 인과에서, 호치는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수는 없었습니까.]세레지아가 물었다.
“없어.”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밖에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었다.
인과를 인위적으로 넘어서는 건.
질서의 신 말마따나 우주를 집어삼키고 법칙의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 신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 또한 인과를 벗어날 수 없고.
그 방법을 모를뿐더러, 호치의 경우가 어떻게 성사된 건지 이해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 *
“짠!”
용용이가 변신했다.
다시 키 작은 꼬맹이가 되었다.
처음 보는 밀리터리 룩을 입고 있었다.
위험한 곳에 들어오겠다고 나름 준비를 해 오긴 한 모양이다.
정작 들어와서는 계속 드래곤 형태를 벗어나지 못해 무용지물이었지만.
“용용이 옷 예쁘네?”
용용이가 활짝 웃었다.
신성 억제가 사라지자마자 용용이는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해츨링 모습도 귀엽다고 말해 주었지만, 용용이는 역시 어린 인간 아이의 모습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기분도 좋아 보이고.
그나저나 신성을 되찾자마자 폴리모프가 가능해졌다는 건, 용용이의 신성이 저 아이의 모습과 연관이 깊다는 뜻이다.
“이제 어떻게 해?”
호치가 물었다.
일행은 벌써 신성 억제가 사라졌던 구간에 도달했다.
이미 한 번 공략을 끝내 본 내 경험이 있었고.
호치의 능력이 가면 갈수록 사기적이었던지라 크게 다친 사람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정확히는 곧 만나게 될 질서의 신이 문제였다.
“승산은 어느 정도야?”
“낮아.”
엄청 낮다.
질서의 신의 힘이 어디까지 나아가 있을지는 질서의 신만이 알 수 있었다.
천공의 신을 제압하던 장면을 지켜보았지만, 그게 전부일지, 다른 힘이 더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호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평소 호치가 승산을 물었다면 나는 시원스레 무조건 이긴다고 말해 줬을 것이다.
어쩌면 호치도 그런 대답을 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승산이 없지는 않아.”
분명 가능성은 있었다.
“유효타는 먹일 수 있어.”
그게 유효타가 될 거라는 건 확실했다.
다만 그 유효타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장담하지 못해서 문제였다.
“준비하자.”
“벌써?”
이곳은 질서의 신의 영역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질서의 신에게 우리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보여 주고, 대책을 고민할 시간을 줄 필요가 없었다.
준비가 되었다면 바로 들이닥치는 편이 가장 좋았다.
“용용아.”
“알았어, 준비할게.”
용용이가 당차게 대답했다.
나는 용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위험한 데 오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역시 당찬 대답이 돌아왔다.
이 아이를 전사로 키울 생각은 없었다.
마법과 전투에 대해 가르쳤고, 위험한 상황에서의 마음가짐을 알려주었지만.
용용이를 전투에 동원할 생각은 한 적 없었다.
그때는 그게 육아의 방식이었다.
하늘을 불태우고 대지를 가르는 마법을 가르쳐 주며 아이와 놀아 주었다.
내가 너무 서툴렀다.
차라리 찰흙 놀이 같은 걸 하면서 놀아 주었어야 하는데.
후회가 될 뿐이었다.
용용이가 마법을 준비했다.
나는 아부부를 꺼내 영감에게 건냈다.
“뭘 해야 할지는 알지?”
“물론이다.”
영감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상태가 호전되었다.
몸 상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안색과 기분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천둥처럼 시끄러운 목소리로 영감이 말했다.
“결국 돌아 돌아 이렇게 되었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았다.
“우리가 가짜 세상을 부수고 신들을 죽이자고 다짐했던 그때도 우리는 신이 아니었다. 신이 되어 바깥에 나왔으나. 목적에 단 한 걸음을 남겨 놓은 지금은 우리가 처음 약속했던 그때와 다를 바가 없구나.”
영감이나 나나 61층에 있을 때, 신이 되지 못했던 그 시절의 몸 상태니까.
맞는 말이었다.
“만약 그때 이곳에 올 수 있었으면 우리가 도전하지 않았을까?”
“했겠지!”
그 단호한 대답에 대기가 찌르르 울렸다.
여전히 목청만큼은 대단했다.
“아아악! 이렇게 목소리만 큰 남자 거인 손에 들리긴 싫어요! 싫습니다!”어쩌고 하며 비명을 지르는 아부부를 영감에게 건네주었다.
“자, 너도 준비하자.”
“…나? 뭐, 뭘 준비해?”
호치는 그냥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딱히 작전을 설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서의 신의 영역에서, 질서의 신과 어떻게 싸울지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
“다 상황이 되면 알아서 하게 되어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으엉?”
그때였다.
바닥에 복잡한 도표와 룬 문자가 그려졌다.
문자는 허공을 타고 오르며 우리를 감쌌다.
용용이가 전개한 공간 이동진이다.
용용이가 신성을 되찾은 시점에, 우리는 곧바로 질서의 신에게 쳐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미 한번 가 보았던 길이라 굳이 걸어서 찾아가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적의 집 대문에 노크를 하고 점잖게 들어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냥 창문 깨고 들어가면 된다.
구구구궁!
진동이 극심했다.
안 좋은 몸 상태 때문에 이런 진동만으로도 몸이 크게 괴로웠다.
질서의 신의 방에 무단으로 쳐들어가는 중이다.
편하고 쉽게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용용이는 내가 직접 키운 아이다.
마법으로는 나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고.
저 어린 나이에 신성까지 차지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주변 환경이 뒤바뀌었다.
좁은 통로가 아니었다.
검은 허공, 허공에 떠 있는 질서의 신의 거대한 눈동자.
용용이는 결국 모든 방해를 뚫어내고, 질서의 신의 코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는 데 성공했다.
[포기자여, 나는 그대에게 분명…….]질서의 신의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으워어어어어어!
거대한 목소리가 주변을 메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폭발음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상한 표현은 아니었다.
실제로 목소리는 멀리서 들리고 있었으니까.
영감은 이동을 확인하자마자 자신의 몸을 크게 키기웠다.
집채만 한 몸을 가지고 있던 거인의 크기에서 빌딩만 한 크기로, 거대한 산맥마저 아래로 굽어볼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어쩌면 그 이상까지 자신의 몸을 크게, 더 크게 불렸다.
한계까지 몸을 키워 낸 영감은 그대로 자신의 손을 내려쳤다.
주먹을 휘두른다기보다는 행성이 하나 떨어지는 것 같아 보이는 광경이었다.
질서의 신은 그 모습에 아무런 대꾸도, 감상도 없이 거대한 황금 방패를 내밀어 막아섰다.
영감의 주먹은 황금에 닿자마자 산산조각이 났다.
영감의 신체를 이루고 있던 용암이 방패 위로 줄줄 흘러내렸다.
질서의 신은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감이 준비한 공격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영감은 다른 한쪽 팔을 휘둘렀다.
질서의 신은 차분하게 방패를 내세웠으나 영감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태산만 한 주먹 안에 아부부가 숨어 있었다.
영감이 집어 던진 아부부가 질서의 신을 향해 날아갔다.
초월적인 속도로 날아가던 아부부였지만, 질서의 신이 내보낸 황금 촉수들은 아부부를 잡아채었다.
결국 질서의 신에게 닿지 못한 아부부였지만.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아부부의 목적은 질서의 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게 전부였다.
키리키리가 만든 시련에 도전하고, 질서의 신을 무력화하려 했던 천공의 신이 준비한 검.
이곳 101층의 초입이 그러했듯, 저 아부부는 신성을 억제하는 능력을 담고 있었다.
검고 검은 심연만이 존재하던 세상이 색채로 밝아졌다.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바닥에는 황무지가 깔렸다.
하늘 너머에서는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어둠이 걷혔다.
억제된 질서의 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질서의 신은 거대한 야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야수의 얼굴에 빼곡한 갈기 한 올 한 올이 무한정 길게 늘어나며 촉수처럼, 손가락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갈기의 끝마다 황금이 달려 있었다.
황금은 개별적으로 움직이다가도 서로 합치며 거대한 방패가 되기도, 창이 되기도 했다.
“자, 가자. 우리 차례야.”
“엉?!”
다들 이만큼이나 잘해 줬다.
기대 이상으로, 충분하리만큼.
나는 호치의 목덜미를 잡고 앞으로 날아올랐다.
[탈라리아의 날개]눈앞에 둔 고난과 적의 위험성에 비례해, 그 위험에 도전하는 도전자의 능력을 상승시켜 주는 희대의 사기 권능.
오랜만에 사용하는 것이지만, 역시 좋았다.
저 강대한 질서의 신을 상대로 사용하자 마치 신이 된 것과 같은 전능감을 맛볼 수 있었다.
실제로 단순 능력만큼은 신에 전혀 뒤질 구석이 없을 것이다.
질서의 신의 갈기들이 우리를 인지했다.
끝에 황금의 무기를 세우고 날아들었다.
드디어 호치가 나설 차례였다.
“준비됐지!”
“뭐! 무슨 준비! 무슨 준비!!!”
아직도 깨닫지 못한 호치였다.
나는 호치를 든 손을 뒤로 한껏 당겼다가 그대로 앞을 향해 휘둘렀다.
화살처럼 앞으로 날아가는 호치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야, 이… 개새끼야아아아아!”
호치의 욕설과 함께 호치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급격한 변화였다.
호치는 거대한 사슬이 되었고, 그물이 되었다.
세상마저 덮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질서의 신의 몸을 덮쳤다.
갈기들이 엉키고 부딪혔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질서의 신을 향해 날아갔다.
갈기를 하나하나 피하면서.
그래, 예전에는 이렇게 빗발치는 수천 개의 마법을 피해 가며 싸웠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스케일이 되어 버렸지만.
그때와 다를 건 없었다.
차분하게, 때로는 과감하게 갈기들 사이를 누볐다.
그렇게 나는 질서의 신에 근접할 수 있었다.
못생긴 야수의 얼굴에.
나는 발을 올려놓았다.
필사적으로 내게 날아드는 갈기들이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세레지아를 뽑아 들고 있었다.
그 시절, 내 모든 집념과 독기를 담아 벼르고 벼렸던 검.
신을 죽이기 위한 목적만으로 준비한 무기였다.
[초월을…….]그놈의 초월.
이 세상에는 누구나 초월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세상의 법칙의 바깥에 서는 것.
사실 그 방법은 굳이 우주를 집어삼키지 않아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죽음을 통해 세상의 제약에서 해방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진리였다.
“그냥 죽어!”
나는 주저 없이 검을 질서의 신의 안면 깊숙이 꽂아 넣었다.
* * *
키리키리는 흙바닥에 그냥 누워 있었다.
원피스도, 팔다리도 흙 때문에 지저분해졌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그녀만의 공간에서 그녀를 탓할 사람도 없었다.
엉망이었다.
키리키리는 결국 파헤쳐진 땅을 복구하는 걸 포기하고 누워 버렸다.
언젠가는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최근 그녀가 겪은 수많은 일 때문에 결국 지쳐 버린 건지도 모른다.
최근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가 신이 된 이후 겪어 온 길고 긴 시간 동안 마주해 온 온갖 고난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키리키리는 지금 지쳐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흙바닥에 대자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엉망이 되어 버린 땅과는 달리, 하늘은 고요하고 깨끗했다.
하늘에 금이 갔다.
무언가 깨지는 소음과 함께 구름이 밀려나고, 푸른 색체에서 검고 어두운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키리키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질서의 신과 자신의 공간을 구분하던 경계가 무너졌다.
둘 중 하나를 뜻했다.
질서의 신이 키리키리 자신의 제약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든.
반대로 저 공간에 존재하던 질서의 신이 완전히 무너졌든.
키리키리는 손을 꼭 쥐었다.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계속해 온 모험의 끝에서, 그녀는 결과를 기다려야만 했다.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뿌려져 있던 진주의 잔해에 눈길이 갔다.
하늘이 쏟아져 내렸다.
완전히 열어젖혀진 공간에서 그녀가 기다리던 존재가 걸어 나왔다.
마침내 마주하게 된 결과 앞에서, 키리키리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바닥의 진주 잔해를 발로 걷어차버린 키리키리는 자신의 동산으로 돌아온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