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SS 431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외전-52화(431/432)
외전 52화
After (1)
“요즘 무슨 일 있나?”
지르지는 고개를 들었다.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별일 없습니다.”
지르지는 그리 대답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별일 없었다.
그의 일은 체력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고되고 험했다.
때때로는 위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직업적인 특성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에 불과했고, 그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거 좀 가져가. 가져가서 좀 고아 먹어.”
정육점 주인은 봉투에 고기를 좀 담아주었다.
지르지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왔다.
그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계속 물어보고 있었다.
주로 지르지가 사는 동네 주민들이 그러했다.
지르지는 동네의 치안 유지에 힘을 보태고 있었고,
그 영향은 적지 않았다.
예의 바르고 친절한 초능력자 지르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지르지의 변화를 민감하게 눈치채었다.
“요새 좀 우울해 보여.”
“아니에요.”
지르지 본인은 바뀐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르지는 그것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에게 집은 침묵의 장소였다.
밥을 먹거나 가끔 업무상 통화를 하는 일 외에는 입을 열 일이 없었다.
그건 당연한 사실이었고,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일이 아니었다.
보름 정도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집에 들이닥쳐 객식구처럼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함께 지내던 보름 동안은 그의 입이 쉴 새가 없었다.
집에 있어도 하루 종일 수다를 떨어야했다.
소란스럽고, 정신없던 보름이었다.
그 보름뿐이었다.
가족에게서 독립한 이후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지르지의 집은 조용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 그럴 것이다.
그렇게 익숙한 외로움이었지만, 고작 보름간 소란스러웠다는 이유로 조용한 집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지르지는 망원경을 들여다보았다.
최근 소행성에 변화가 있었다.
아주 큰 변화였다.
소행성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분해되고 있었다.
구체 형태의 소행성은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조립식으로 이루어진 구형 건축물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레고 모형을 분해하듯,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던 소행성은 스스로 형태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소행성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처음에는 위대한 초능력자의 봉인이 깨지고 괴물들이 부활했다고 생각했다.
아카이덴 구출 작전은 취소되었고, 공습대비가 준비되었다.
하지만 소행성은 추락하지도 않았고, 괴물들을 쏟아 내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불안에 떨면서도 저 소행성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지르지는 얼마 전, 망원경으로 소행성을 지켜보다가 어떤 여성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그는 그 여성이 소행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가사의한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름 전, 아카이덴 구출 작전의 발표와 동시에 사라져 버린 그의 친구와도.
* * *
소행성이 움직이기 시작한 지 이 주가 지났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행성은 이제 거대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애롭게 팔을 벌리고, 하늘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성인의 조각상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낮익은 형상이었다.
아카이덴을 기리는 조각상이 보통 저런 형상이었다.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아카이덴이 부활했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기도가 닿아 아카이덴이 깨어났고, 소행성은 자신을 기리는 조각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었다.
사람들은 황당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어 주고는 했다.
투명 개구리라는 핑계에 속아 넘어갔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오후마다 아카이덴을 향해 묵념하던 몇몇 사람의 의식은 이제 국가적인 행사가 되었다.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될 때마다 사람들은 소행성, 아니 아카이덴 공중 조각상을 향해 기도했고, 절을 했다.
아카이덴을 믿는 종교가 탄생했다.
놀랍게도 초능력자들이 주도해 이끌어 나가는 종교였다.
과거 초능력을 발견되었을 때, 기존 종교들을 부정하고 없애는 데 앞장섰던 초능력자들이 종교인을 자처하고 있었다.
오후 기도 시간은 자율이 아닌 의무 사항이 되어 버렸다.
교리도 만들어졌다.
아카이덴은 스스로를 희생해 세상을 지켰고, 만민의 추앙에 의해 신이 되었다.
신이 된 아카이덴은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며, 교인들의 믿음이 충분해졌을 때,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리라.
그런 유의 교리였다.
대중과 정부는 그걸 막아설 수조차 없
었다.
대중은 아카이덴 교를 지지했다.
초능력자와 비능력자 간의 격차와 갈등이 심화된 상태였지만, 위대한 초능력자 아카이덴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계층을 뛰어넘었다.
정부 또한 종교를 저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초능력자 협회와 국민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
곧 연방 정부는 아카이덴 교를 국교로 지정하게 되었다.
지르지는 우려스러웠다.
아카이덴 교는 초능력자와 비능력자 간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시켰다.
비능력자들은 초능력자들을 싸잡아 욕할 수 없게 되었다.
위대한 초능력자가 하늘에서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동안에는.
하지만 그 갈등의 단초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카이덴 교의 교리는 초능력자와 비능력자 사이의 간극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계층을 넘어 새로운 신분제가 확립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미스터리한 일이 터지는 요즘이었지만
이번 일 또한 어디 빠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상위 초능력자들이 무더기로 실종되었다.
정부에서, 초능력자 협회에서 그리고 교단에서 막강한 영항을 휘두르던 초능력자들이 일시에 사라지자 사회 지도층의 공백 상황이 벌어졌다.
그 혼란은 말단이었던 지르지에게까지 전해졌다.
지휘 체계가 망가진 것인지, 상부로부터 아무런 결재도 내려오지 않았다.
당장 월급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돈이나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느 날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르지는 긴장감을 느꼈다.
쓸쓸함과 외로움, 공허함을 느낄지언정 지르지는 집에서 긴장과 두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집은 평화로워 보였다.
가구도 그대로였고
침입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딱딱한 돌처럼 굳어갔다.
뱀을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 개구리가 이러할까.
공포에 질려 버린 지르지의 몸은, 이러다 근육 경직으로 죽는 게 아닐까, 우려될 만큼 바짝 굳어 버렸다.
곧 그의 두려움이 허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순하고 착하다고 들었는데, 웬 야생 곰이 한 마리 있네.”
작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길을 걷다 보면 으레 볼 수 있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여자가 연상되는.
살벌하게 빛나고 있는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정말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덥수룩해 보였다.
긴 머리카락과 펑퍼짐한 옷차림은 여성의 체구를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아저씨가 뭘 보고 댁한테 일을 맡기려는지 모르겠네. 나는 57층에서 이런 사람 못 만났던 것 같은데.”
망원경으로 소행성에서 본 여자였다.
저 특이한 옷차림과 흉흉한 눈빛은 잊을 수가 없었다.
“천사백, 맞죠?”
* * *
인식기에 신분증을 가져다 대었다.
신전의 문이 열렸다.
여전히 어색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첨단 기술에 의해 열리는 신전의 입구라니.
종교는 초능이 발견되기 이전 구시대의 산물 정도로 취급되던 것이 고작 몇 달전의 일이다.
지르지는 아직도 종교라는 것을 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카이덴 교의 주교가 되어 교단의 대소사를 돌보고 있는 지금도 그랬다.
아카이덴 교는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하늘에 떠 있는 아카이덴의 조각상과 아카이덴 교의 사도들은 불신의 여지를 지워 버렸다.
아마 지르지를 제외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카이덴을 신으로 믿고 따를 것이다.
지르지만 제외하면.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과 직접 대면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지르지만이 신을 숭배하지 않았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꼬마가 다가왔다.
신전 내부는 원칙적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유일한 예외인 지르지마저 접견일이 아니라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저 아이의 정체는 뻔했다.
신전 내부에서 나온 아이다.
“이거 드릴까요?”
아이가 내민 것은 몇 송이의 들꽃이었다.
잡풀을 엮어 꽃송이들을 예쁘게 묶어 놓았다.
“그래도 되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지르지는 꽃을 받아 들었다.
고맙다고 인사하자 아이는 쑥쓰러워하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여러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 신전 내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예를 들어 출입 금지 구역인 신전에서 어린아이가 뛰놀고 있는 것도 그랬고.
그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 여우 귀 한 쌍이 달려 있는 것도 그랬다.
지르지는 이 황당하고 신비로운 모든 현상에 적응해야 했다.
걷다 보니 다시 문이 나왔다.
가벼운 노크 후에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르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 왔냐, 천사백.”
언제나처럼 무성의한 인사였다.
“케륵.”
그 옆에는 2미터가 넘는 도마뱀 인간이 손을 흔들며 인사해 주었다.
지르지는 그 광경을 보며 아직 적응이 덜 되었음을 느껴야 했다.
* * *
오랜만에 보는 천사백은 손에 웬 꽃송이를 들고 있었다.
뭐여, 저건.
나 주려고 가져온 건가.
설마 그런 거라면 조금 소름 돋을 것 같았다.
“뭐야, 그 말라비틀어진 풀떼기는.”
“요 앞에서 만난 꼬마 아이가 선물해주던데. 여우 귀가 달린 꼬마가.”
“예쁜 꽃이네.”
예쁜 꽃이었다.
옆에 있던 박정아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무시했다.
천사백은 들어오자마자 일 얘기를 시작했다.
초능과 관련된 일이었다.
우리는 초능력자와 비능력자 간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초능 자체를 통제했다.
초능 입자를 연구해 그걸 변형하고, 사람에게 주입하거나 제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걸 통해 위험한 초능력을 제거하고, 자신이 원하는 초능력으로 능력을 바꾸거나 비능력자도 돈을 주고 초능력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위력은 약화되었다.
전투가 필요 없어진 현대 사회의 일상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지르지는 매일매일이 바빴다.
덕분에 지르지는 오늘도 주구장창 일 얘기만 하고 있었다.
매정한 놈이었다.
저 녀석은 처음 재회했을 때도 그랬다.
오랜만이라는 내 말에, ‘그래, 세 달 만이네’ 하고는 무뚝뚝하게 말했었다.
저 녀석, 아무래도 나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섭섭함과는 별개로 지르지는 믿을 만한 녀석이었다.
사회 계층 간의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놈이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았다.
인성이 모나지도 않았으니 관리직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나중에.”
일 얘기를 마친 지르지가 자리에 일어나며 말했다.
“응?”
“언제 한번 우리 집에 놀러와. 오랜만에 한잔하자. 그… 게임도 하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조만간 갈게.”
지르지는 머쓱해하면서 나갔다.
이래저래 재밌는 친구였다.
“케륵, 일하는 대장이 멋있다. 이지적인데다 다정하기까지 하다.”
옆에 있던 이디가 말했다.
밑도 끝도 없는 칭찬이었다.
쾅!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박정아가 책상을 내려쳤다.
쟤는 갈수록 사람이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다.
박정아는 온갖 인상을 쓰면서 이디를 노려보았지만, 이디는 그게 또 재밌다고 케륵거리며 웃어 대었다.
나는 가운데 껴서 묘하게 불편한 상황이었다.
“…종교 이름은 아카이덴 교로 둘 거예요?”
박정아가 물었다.
최근 박정아도 사무적인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워낙 일이 많아져서.
“그럴까 해.”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 건 알죠?”
물론 안다.
사람들은 초능력자 아카이덴을 숭배하는 거니까.
정작 종교를 운영하고,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건 나지만, 내게 모이는 신앙은 그리 크지 않다.
신들이 자신의 신명을 내걸고 종교를 운영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숭배 대상이 명확하지 않으면 신력이 분산되어 버리니까.
“지금이라도 종교명을 바꾸는 건 어때요.”
“됐어, 별 효과 없더라고.”
당장 지구만 해도 그랬다.
아직도 내 종교는 이호재교라 불렸고.
사람들은 호멘, 호멘, 거리면서 돌아다녔다.
내가 아홉 시 뉴스에까지 나가서 그놈의 호멘 좀 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끝까지 호멘, 호멘, 거리더라.
그냥 사람들이 믿고 싶은 걸 믿게 두는 편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역시 대장은 쿨해서 멋있다. 케륵.”
이번에는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러다 이빨 다 나가겠다.
“케륵, 인간 여자가 사나워졌다. 예전에 봤을 때는 수줍어했는데. 케륵, 케륵.”
이디는 박정아를 만난 적이 있었다.
예전에 12층을 공략할 때쯤 대화합의 날이 열려서 같이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박정아를 봤었지.
십 년도 전의 일이다.
열 살 넘게 먹었으니, 바뀌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입 밖으로 내었다가는 박정아가 또 화낼 것 같아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우리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 케륵. 같은 처지가 아닌가.”
이디가 말했다.
박정아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너랑 내가 왜 같은 처지야. 너랑 나랑은 레벨이 달라요.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우리는 할 거 다 했어. 너는 그냥 치근덕거리는 도마뱀이고.”
박정아는 아주 격정적으로 설명했다.
할 거 다 했어, 하는 부분의 손동작이 심히 남사스러웠다.
“케륵, 인간 여자가 거짓말한다. 약해빠져서 대장이랑 번식 활동도 못 하는 거 다 알고 있다.”
이디의 반격이 세게 들어갔다.
박정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쯤 되니 나까지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한참 씩씩거리던 박정아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
“튜토리얼로 돌아가요!”
거기는 왜 또 돌아가.
여기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기필코 강해지고야 만다. 그래서 내가 번식…….”
아이고, 못 듣겠다.
나는 못 듣겠다.
성교 행위를 통해 도마뱀 연적과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박정아는 밖으로 향했다.
“야, 일은 어떻게 해.”
“알아서 하세요!”
소리를 빽 지르고 나가는 박정아였다.
그런 박정아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었다.
“너는 왜 또 따라와!”
“케륵, 나도 강해질 거다. 그래서 나도…….”
나는 조용히 두 귀를 막았다.
이디의 바람도 그 뒤에 이어진 박정아의 욕설도.
나는 듣지 못했다.
듣지 못한 것이다.
“어휴.”
두 사람은 사이가 안 좋은 듯하면서도 친했다.
저러고 싸우는데도 내가 나서서 말리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은 그냥 저러고 지낸 까닭이다.
친구도 기댈 사람도 없는 두 사람이라 그런지, 서로 짜증 내고 놀리면서도 계속 붙어 다녔다.
가운데 끼어 있는 나만 애매한 처지가 되었다.
갑자기 박정아와 이디가 모두 나가 버렸다.
이러면 일은 또 누가 다 하나.
호치 놈은 말도 없이 집에 안 들어오고 있고.
이연희는… 그러고 보니 얘도 할당된 일은 다 끝났을 텐데 연락이 없다.
김민혁이나 지구의 인원들은 이미 과로에 시달리고 있어 다른 일을 시키기 미안했다.
정말 일이 너무 많았다.
질서의 신을 무너뜨리고 튜토리얼 세계를 해방한 뒤에 내 소속으로 끌어들인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튜토리얼 스테이지가 담고 있던 세계가 너무 방대했다.
이곳 57층만 놓고 보아도 그랬다.
초능력자들이 존재하는 행성.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 행성이 속한 우주에는, 다른 튜토리얼에 등장하는 다른 행성들도 있었다.
심지어 지구도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스테이지 하나하나는 배경이 되는 지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지, 노말, 하드, 헬 난이도의 400여 개 스테이지는.
400개에 달하는 우주를 담고 있었다.
심지어 시간대가 비슷한 우주를 살펴보면 동일 인물을 찾아볼 수도 있었다.
이쯤 되면 평행 우주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런 우주에는 온갖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당장 스테이지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는 세계가 멸망할 레벨의 위험들이 숨어 있었고, 그 외의 사회적인 문제나 재난들도 끊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막막함에 한숨을 쉬고 있는데.
조용히 공간이 열렸다.
출입이 금지된 신전 내부였지만, 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방문이 예정된 손님이었다.
“안녕!”
공간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키리키리였다.
특유의 쾌활한 태도로 등장한 키리키리는 내게 물었다.
“자, 백신전을 방문할 준비는 다 됐어?”
“물론이지.”
나는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