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utorial Is Too Hard RAW novel - Chapter SS 432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외전-53화 (외전 완결)(432/432)
외전 53화
After (2)
“재밌는 곳이넹.”
키리키리가 말했다.
재밌는 장소이기는 하지.
이 신전은 모든 차원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건물이지만, 이 신전의 문을 통해 지구에 갈 수도, 지르지가 있는 행성에 갈 수도 있다.
관리하는 세계가 많아지고, 내 소유의 신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신전은 다양하고 많은 세계와 연결될 것이다.
키리키리는 바로 출발할 거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곧바로 키리키리를 따라가는 대신, 복도에서 놀고 있던 묭묭이를 불렀다.
다행히 묭묭이는 잘 지내고 있었다.
신전 내에 꾸며진 정원을 관리하기도 했고, 신전의 방문객들에게 꽃을 선물하기도 하면서.
가끔은 자신의 고향 마을에 다녀오기도 했다.
마을 밖으로 나가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 종족이다 보니, 외지 생활에도 금방 적응했다.
남 도와주길 좋아하고, 꾸미고 청소하는 걸 태생적으로 좋아하는 종족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완벽한 종족이었다.
“여우 수인이넹? 안녕?”
옆에 있던 키리키리가 묭묭이에게 말을 걸었다.
묭묭이는 낯설어 하면서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19층의 주인공인 그 아이구나. 희생의 신이 좋아하겠는데.”
“희생의 신이?”
별로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사이코 패스 신이 우리 묭묭이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찝찝했다.
“그 스테이지는 희생의 신이 후회하던 과거를 담고 있으니까.”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묭묭이가 듣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묭묭아, 용암 할아버지한테 내 말 좀 전해 줄래? 백신전에 다녀온다고 해 주면 돼.”
묭묭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부탁 들어주는 걸 좋아하는 묭묭이답지 않았다.
“왜, 싫어?”
“…그 아저씨는 계속 만지려고 해서 싫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다.
여기서 만지려 한다는 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한다는 뜻이다.
영감은 어울리지 않게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했다.
묭묭이를 처음 데려왔을 때, 나만큼이나 기뻐하기도 했었다.
어린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예뻐해 주고, 같이 놀아 주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성을 회복해 시한부 신세에서는 벗어났지만, 용암 영감은 새로운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붉은 피부를 가진 거인의 모습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용암 피부를 가진 거인이 되어 버렸다.
그의 몸에선 땀 대신 용암이 분비되었다.
그런 몸이다 보니, 영감의 몸은 항상 고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영감은 체온을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절해 봐야 화상은 입지 않을지언정 닿기 거북할 정도로 뜨거운 건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뜨거운 손바닥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하면 당연히 싫어하지.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할게.”
내 말도 안 들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면 할멈한테 일러야지.
묭묭이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부탁을 들어주는 걸 좋아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강한 책임감을 가지는 아이다.
묭묭이는 곧바로 신전 밖으로 나갔다.
61층으로 바로 건너갈 것이다.
여러 차례 포털을 넘어 다녀 보았기에 길을 잃거나 하지도 않을 것이다.
“되게 예뻐하넹.”
“예쁘잖아.”
키리키리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공간을 열었다.
백신전으로 향하는 공간이었다.
“무기는 가져가면 안 돼. 여기 두고 가야 행.”
“무기 안 가지고 있어.”
키리키리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가지고 다니더니.”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부부는 천공의 신에게로 갔고.
세레지아는 61층에서 개조에 한창이었다.
질서의 신을 무찔렀을 때, 일행 모두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가장 공훈이 컸던 건 세레지아였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은 것인지, 세레지아는 스스로 자신을 개조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아가 검이라 할지라도 개조당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을 텐데.
내가 하도 개조를 해 대었더니.
이제는 개조당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가자.”
나는 키리키리와 함께 공간 너머로 발을 옮겼다.
아무것도 들지 않고, 혼자서.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새삼스럽게도 튜토리얼에 처음 떨어졌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아무것도 없었지.
심지어 주머니에 동전 하나 들어있지 않았다.
그때는 그렇게 후회했었다.
도구 하나라도 들고 왔다면.
라이터나 플래시, 하다못해 집 방문짝이라도 뜯어 왔다면.
생존 확률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맨몸으로 튜토리얼에 떨어졌고.
끝끝내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 정말로 길고 길었다.
* * *
“짠!”
키리키리가 팔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여기가 백신전이양!”
그래, 보였다.
아마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끌려왔어도 이곳이 백신전인가, 하고 의심해 볼 만큼.
이곳은 백신전처럼 보였다.
좋게 말하자면, 전형적인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진부했다.
“히힝, 인식은 중요하거든. 신들에게도 그랭. 신전에 거하고 있다는 인식이 얼마나 소중한데.”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는 인식 대신에 말이지.
일리가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작은 문이 있었다.
방금 우리가 공간을 통해 들어온 문이었다.
저게 백신전의 입구이자 출구인가.
“백신전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엉.”
키리키리는 손가락을 펼치며 설명했다.
“그중 몇 가지만 설명해 줄 거야. 우선 여기서 싸움은 안 돼. 모든 분쟁은 대화와 투표로!”
비무장지대라 이 말이지.
서로 으르렁거리는 백신전의 신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전투가 허가되어 있다면 진작 무슨 사달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백신전 소속 신들은 항상 이곳에 자신의 분신을 남겨 두어야 해.”
인질.
신의 분신체란, 마법사가 만들어낸 분신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분신은 또 다른 자신이고, 분신이 소멸하거나 억압당하기라도 한다면 그건 본체에게 바로 영향이 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성이 소멸해 버릴 수도 있겠지.
“마지막으로 신성력의 사용은 제한이 돼.”
키리키리는 천장의 황금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장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황금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질서의 신이 사용하던 황금과 비슷해 보였다.
저게 신성력의 사용을 억제하는 건가.
신성 자체를 지워 버렸던 천공의 신과 아부부의 가상 세계와 101층과 비슷한 능력이었다.
신성을 일시적으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 어렵게 억제하는 정도라는 점이 달랐다.
이런 곳이라면 아무리 강대한 신성력을 가진 신이라 해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어떤 변수에 의해 분신이 당할지 모르니까.
위험천만한 곳이지만, 그렇기에 질서와 법이 더 잘 유지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 사회가 그랬다.
인간은 무장한 인간에 의해 쉽게 살해당할 수 있다.
옆에서 걷고 있는 사람이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칼을 들어 나를 찔러죽일 수 있다.
그런 위험성은 인간에게 도덕과 법규 그리고 사회성을 강요했다.
백신전의 신들이 보여 주던 묘한 사회성은 이런 백신전의 상황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오히려 만신전이나 소속이 없는 완성자 잡신들의 경우에는 더 독선적이고, 직선적으로 행동했다.
“흥미로운 곳이네.”
“응응, 그렇징?”
물론 이런 백신전에서 문제가 없을리가 없다.
신들은 백신전의 규제를 달가워하지 않으며, 신들이란 자신이 벗어내고 싶은 굴레는 벗어 내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였다.
질서의 신마저 그러했다.
아마 수많은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백신전의 제약을 무너뜨리기 위한.
그때마다 키리키리가 그런 시도들을 막아 낸 것이겠지.
“백신전은 백 개의 방과 하나의 공동으로 이루어져 있엉.”
백 개의 방은 백신전 신들의 분신이 거하는 개인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공동은 누구나 오갈 수 있는 장소.
“보통 투표를 할 때는 공동에 모이는 편이양. 방에서 안 나오면 기권이고. 아, 내 방은 튜토리얼에서 사용되던 그 동산이양.”
그렇게 키리키리가 설명하던 와중이었다.
“빰!”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내 등을 치고 지나갔다.
뭔가 싶어 뒤돌아보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또 반대편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빠암!”
또 내 등을 치고 지나갔다.
이쯤 되니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빛의 신이양. 무시해.”
그래, 빛의 신이겠지.
밑도 끝도 없이 남의 등짝을 때리고 도망가는 신은.
그나저나 빠르기는 엄청나게 빨랐다.
신성이 억제되는 공간에서도 저 정도인가.
“짠!”
…이번에는 키리키리의 귀를 치고 지나갔다.
“아아아악! 진짜!”
키리키리는 괴성을 질렀다.
아프다기보다는 짜증을 참지 못해 터져 나오는 괴성이었다.
“…열 번쯤 저러다가 말 거야.”
괴성을 멈춘 키리키리는 체념한 듯 말했다.
빛의 신은 열네 번쯤 우리를 치고 도망간 뒤에 사라졌다.
“원래 저래?”
“응.”
단호한 대답이었다.
“아마 호오우재애가 처음 백신전에 와서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뜬 것 같지만, 행동 자체는 평소 그대로야.”
그래, 사실 당연한 일이다.
신은 언제나 평소 그대로의 모습이니까.
사소한 일에서조차 변화란 쉽지 않았다.
“방에도 한번 들어가 볼까?”
“그래도 돼? 개인 공간이라며.”
키리키리는 후후, 웃으며 말했다.
“안 돼. 하지만 이 방은 괜찮지.”
방문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회한의 신의 방의 방문’.
자기 방을 처음 갖게 된 초등학생 꼬마가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은 이름표 같았다.
키리키리는 노크도 없이 호쾌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은 습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대기가 아니라 수중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방 안은 수림이 우거진 늪지대였다.
넓게 펼쳐진 동산을 방으로 쓰던 키리키리처럼, 이 회한의 신의 방 또한 상당히 넓었다.
키리키리는 나를 늪지대 한복판으로 안내했다.
늪지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앵앵거리는 날벌레와 깨록깨록거리는 두꺼비 한 마리가 있었다.
키리키리는 두꺼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양. 잘 지냈엉?”
두꺼비는 당연하게도 눈을 꿈뻑거리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갈색 빛이 많이 도는 두꺼비였는데.
별로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양서류와 파충류에 조예가 깊은 내가 보기에도 그랬다.
저건 두꺼비라고 쳐도 너무 못생겼다.
“자, 인사행. 회한의 신이양.”
나는 잠시 키리키리가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했다.
“진짜양. 얘가 회한의 신이양.”
키리키리는 두꺼비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두꺼비는 그 손길이 싫다는 듯 옆으로 폴짝 뛰었다.
그래 봐야 손바닥 한 마디 정도 멀어졌을 뿐이다.
키리키리는 두꺼비 등을 잡고 들어올렸다.
길게 늘어진 뒷다리와 비교적 짧은 앞다리가 볼품없이 펄떡거렸다.
하지만 등을 잡힌 두꺼비는 키리키리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백신전의 분신을 유지하려면 항상 신력을 소모해야 행.”
자릿세 같은 걸까.
“그런데 이 회한의 신은 신력이 너무 부족해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양. 진짜, 진짜 회한의 신 맞앙. 자, 네가 대답해 봐. 너, 회한의 신 맞지?”
“맞아.”
두꺼비가 대답했다.
놀랍게도.
“신력이 얼마나 들길래 신이 저 꼬라지를 하고 있어야 되는 거야?”
“별로 안 들어. 회한의 신이 바보라서 그래. 맨날 신력을 잃어버려서, 이제는 신력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그 말이 사실이라면 굉장히 볼품없는 신이었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회한의 신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 나 버렸다.
“회한의 신은 바보야. 친구도 없어서 신력을 빌려줄 신도 없고.”
신랄한 평가였다.
“아니야, 나 친구 있어.”
그 평가에 대항해, 두꺼비가 항변했다.
키리키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꺼비를 쳐다보다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핳, 심지어 거짓말도 못해.”
“아니야, 진짜 있어!”
“으하핳핳.”
키리키리는 목젓이 보일 만큼 크게 웃어 대었다.
두꺼비는 속이 상했는지, 거칠게 몸부림쳐 키리키리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어디론가 폴짝폴짝 뛰어가 버렸다.
“진짜 친구가 하나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니양, 없어.”
키리키리는 단호했다.
우리는 바보인 데다 친구도 없고, 거짓말도 잘 못하는 회한의 신의 방에서 나왔다.
다른 신의 방에도 가 보았다.
천공의 신의 방에는 출입 금지 표시가 있었고.
결투의 신의 방은 노크해 보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키리키리는 신들의 개인 공간은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아까 회한의 신의 방을 함부로 막 들어갔던 것과는 상반된 설명이었다.
“느림의 신의 방은 어때?”
나는 가장 궁금했던 신의 방을 물어보았다.
키리키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후후, 웃었다.
“느림의 신은 이미 봤잖아.”
“봤다고?”
“응, 제일 먼저 봤엉.”
느림 신의 방을 가장 먼저 봤다니.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몇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억 조작, 인지 부조화, 시간 흐름에 따른 인과의 왜곡.
마지막 쪽이 가장 가능성 높아 보였다.
키리키리는 답을 말해 주지 않았다.
“히힝, 한번 맞혀 봐. 의미는 없지만.”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말해 줄 의향이 없는데, 꼬치꼬치 캐물어 봐야 소용없었다.
나중에 내가 알아봐야 할 일이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작은 공동이 나왔다.
신들의 커다란 방과는 다르게 공동은 작은 소연극장 정도의 크기였다.
공동에는 몇몇 신이 모여 있었다.
희생의 신.
여러 개의 꼬리를 흔들며 인사하는 희생의 신은, 이제 여러 번 보아 익숙해져 있었다.
자연의 신이나 파종의 신.
의지의 신과 절망의 신, 전사의 신처럼 비중이 적어 신경 쓰지 않았던 신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균형의 신.
지구에서 한번 만나 본 적 있었다.
지구인 도전자 중 하나를 사도로 삼아 데리고 있기도 했다.
신들을 소개해 주려나 싶었다.
하지만 키리키리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모여 있는 신들을 향해 말했다.
“시작하자.”
[투표가 시작됩니다.] [찬성: 21] [반대: 7] [기권: 72] [안건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시간부로 백신전의 신격 간의 전투 제한이 조건부 수정됩니다.]거 흥미로운 안건인데.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
“간단한 투표양. 백신전 내의 전투를 무조건 금지하는 게 아니라 특정 조건에서는 전투가 가능하게 만든거지. 본래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질서의 신이 약화된 지금이라 가능해.”
“어떤 특정 조건.”
키리키리는 한발 물러서, 나에게서 멀어지며 답했다.
“백신전 소속이 아닌 신을 상대로 할 때.”
오, 세상에나.
백신전 소속이 아닌 신이라.
그건 이 자리에 나밖에 없잖아.
참으로 놀라운 주제였다.
“이유를 알려 줄 수 있을까?”
다시 키리키리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신명은 너무 위험해.”
키리키리는 그렇게 말했다.
옆에 있던 희생의 신이 거들었다.
“너는 화살이다. 화살이 날아갈 곳이 없으면 창고에서 썩어 갈 뿐이지. 하지만 너는 창고로 돌아가는 대신, 새로운 표적을 만들어 낼 거다. 그 표적을 꿰뚫고 나면 또 다른 표적을 만들어 내겠지. 너는 영원히 만족하지 않을 거다.”
다시 키리키리가 말했다.
“나는 너에게 더 이상 싸울 적이 없어졌을 때가 걱정돼. 너는 싸울 적이 없는 세상을 견디지 못할 거양. 세상을 잡아먹든가, 초월을 통해 신격을 벗어던지겠지.”
이 또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네게는 가능성이 있어, 초월을 이뤄 낼 가능성이. 새로운 초월의 신이 등장할지도 모르는데, 그걸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어.”
미래에 위험해질 가능성 때문인가.
이해했다.
“미안행.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
키리키리는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저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르고.
“죽이지는 않을 거양. 신성을 무너뜨리는 정도로 끝나겠징.”
재밌네.
의외의 타이밍에 배신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의외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질서의 신을 처치하며 튜토리얼 세계를 차지했다.
백신전의 신들이 그 과정에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튜토리얼 세계는 질서의 신이 말했듯, 질서의 신에게 귀속되었던 것이고, 그걸 내가 빼앗은 것이다.
내 신력은 갈수록 방대해질 것이다.
확정적으로.
내 힘이 더 커지기 전에.
질서의 신을 처치하고 내 마음이 풀어져 있는 지금.
저들의 본거지인 백신전에 끌어들여 처치한다는 건, 어찌 보면 합리적인 판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너무 화내지 마.”
“화 안 났어.”
화를 내다니.
나는 화나지 않았다.
배신이란 신뢰하는 상대로부터 당하는 것이다.
애초에 신뢰하지 않았다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
“미안해. 최대한 빨리 끝…….”
키리키리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내 뒤에서 공간이 열리고 있었다.
이 백신전을 만들고 관리하는 건 키리키리다.
하지만 그 관리 권한은 이미 기계신, 질서의 신에게 넘어가 있었다.
질서의 신이 사라진 지금, 백신전의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은 신들의 투표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백신전의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딱 하나.
백신전의 규칙을 무시해 가며, 완성자들을 쥐고 흔들며 신력으로 장사를 하던 신이 있다.
희망의 신은 질서의 신의 사도를 자처해 백신전의 제약을 피할 수 있었다.
“…소멸한 줄 알았는데.”
키리키리는 곧 당황스러움을 지우고 내게 물어보았다.
“언제부터였지?”
키리키리가 물었다.
나는 기꺼이 그 질문에 답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나는 항상 이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그랬잖아. 몇 번이고 그랬지.”
튜토리얼에 막 떨어졌을 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동료들이 죽고, 내 스스로 혈관과 신경을 끊어가며 고문하던 그때.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여기서 나가면 너희 다 가만 안 둘 거라고.”
한낱 인간의 신경질이었다.
현실성 없이 내뱉는 저주라고 생각했겠지.
공포에 질려 미쳐 버린 인간의 혼잣말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신이 된 이후에도 아무 걱정 없이 발 뻗고 있었겠지.
열린 공간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건, 전투준비를 마친 거인들이었다.
영감과 할멈이 이끄는 수백의 거인이 백신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공간을 통해 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61층에 대기하고 있던 세레지아였다.
무슨 개조를 한 건지, 검날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
거인들은 내 말에 고성을 지르며 화답했다.
하나하나가 신을 상대하기 위해, 이 순간을 위해 양성된 병사였다.
“…이건 예상에 없었는뎅.”
키리키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신들도 슬금슬금 공동을 벗어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듯 보였다.
애초에 백신전 신들 사이의 단합은 그리 끈끈하지 못하다.
“우, 우리 친구 맞징? 우리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 볼깡? 화 많이 났엉?”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화 안 났다.
나는 매우 침착하고, 냉정하고, 고요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자, 시작해 볼까.”
길고 길었던 모험의 끝에서.
드디어 간절히 바라던 목표에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 두게 되었다.
주저할 것도, 불안해할 것도 없었다.
나는 헐레벌떡 황금 칼날을 소환하는 키리키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 항복!”
“시끄러워! 항복은 얼어 죽을 항복이야! 칼 들어!”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다.
여기서 항복해 버리면 내 분은 어디다 풀라는 말인가.
항복은 나중에 내 화가 다 풀리고 나면, 그때 해야 한다.
“역시 화난 게 맞잖앙!”
튜토리얼이 너무 어렵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