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ampire Is an Academy Honor Student RAW novel - Chapter (225)
225화. 끝매듭 (4)
“후….”
새어 나오는 한숨.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보이는 잔뜩 찌그러진 드워프제 명검.
원래라면 어지간히 험하게 다루지 않는 한 이렇게까지 상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지금이 그 어지간히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다시 검을 들고.
“흐으읍…!”
폐부 가득 숨을 들이마신 뒤.
있는 힘껏 내리쳤다.
쩌어어엉!!!
고요한 설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타격음.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깨진 마나 블레이드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거기에 저릿저릿한 충격이 손목을 타고 올라올 정도니 힘은 확실하게 잘 실렸다.
하지만.
“…쯧.”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 수정.
되려 내려쳤던 검만 더욱 못 쓸 꼴이 되었다.
아깝다는 생각보다는 난감하다는 감정이 먼저 일었다.
이젠 쓰레기가 된 검을 눈밭에 아무렇게나 던지며 생각했다.
“…….”
이걸 어떻게 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했는데도 네크로맨서를 집어삼킨 수정이 깨지질 않는다.
아니,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자그마한 생채기조차 나지 않는다.
이쯤 되면 단순히 힘으로 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바닥에 주저앉은 뒤, 투명한 수정에 갇힌 네크로맨서를 바라보며 생각을 이었다.
신성력은 딱히 통하는 느낌이 아니었으니 마력이 더 필요한가?
아니면 아이리스를 불러다 여기다 마법을 사용해 본다던가.
‘…아니지, 아예 깰 수 없는 물질인 건가?’
오랜 고민 끝에 떠오른 가설이었다.
속성 자체가 아예 깰 수 없는 물질일 경우.
이는 뜬금없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일이다.
이안이 거인에게서 파마의 기운이 서린 무구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네크로맨서의 마법이 마계에서 기원했음을 생각하면 이곳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성질을 띤 물질이 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
좋지 않다.
나는 진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원인은 마지막에 보여준 네크로맨서의 초연한 표정.
별다른 감정의 표출 없이 덤덤하게 마법을 발현했던 모습을 보아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좋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나중을 바라보겠다고.
절대 깨지지 않는 수정에 자신을 가두고, 기약 없는 해방의 날을 기다리겠다고.
“…….”
아무도 부술 수 없는 수정에 자신을 가둔 만큼 누구도 그를 풀어줄 수 없다.
직접 뚫고 나오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 저절로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문제는 그게 당장 내년이 될지, 아니면 10년 혹은 몇 세기를 넘어갈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풀려난다면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게 안 될 수도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 만약 내가 그가 깨어나기 전에 죽어버린다면?
그다음 수십 세기가 지나고, 네크로맨서의 존재가 아주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을 때.
그때 그가 다시 깨어난다면?
‘재앙의 재림이겠지.’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과 똑같은 역사가 반복될 것이다.
아니, 이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면 더욱 잔인하고 치밀하게 변할 수도 있다.
순식간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콱!
수정을 발로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젠장.”
조금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그가 수정에 갇히기 전에 죽일 수도 있었다.
딱 1초만 더 빨랐더라도 결과는 바뀌었을 테다.
실제로도 굉장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으니까.
“후…….”
잠시 후회가 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털어냈다.
어차피 그렇게 후회한다고 이미 일어난 결과가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그런 쓸데없는 곳에 심력을 소모하는 것보다는 이미 벌어진 일에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는 게 훨씬 건설적인 행동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지? 화산 같은 곳에 넣어버릴까?
그럼 설령 깨어난다고 하더라도 바로 죽어버릴 거다.
아무리 자기 신체를 개조했다고는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수정.
“…안 되네.”
힘을 준 순간, 나는 이게 들리지 않을 거 같다는 직감을 강하게 받았다.
무겁다는 느낌이 아니라 아예 이 공간에 고정된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정의 위치도 수정의 내구성과 마찬가지로 단순 물리력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과연.’
이 정도는 그도 생각해 뒀다는 걸까.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나는 잡념으로 가득해진 머리를 비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금 생각을 이어 나갔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고민하여 나온 결론은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상대는 이미 수정에 갇힌 뒤의 일을 고려하여 여러 대책을 세워두었고.
그중에 그가 대비하지 않은 건 딱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정확히는, 대비하지 못한 것.
바로 내 능력이다.
영혼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건 신의 힘이 있어야만 가능하니까.
그가 아무리 용을 써도 이것만큼은 완벽하게 대처할 수 없다.
그러니 이렇게 극단적인 수를 썼겠지.
‘문제는….’
문제는 나도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건 내가 가진 신으로서의 능력일 텐데…. 신도가 열 명 남짓밖에 없는데 당연히 완벽할 리가.
그래서였다.
고민하는 이유.
물리력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내 이능만을 이용해 저 수정의 보호를 뚫고 들어가 네크로맨서의 영혼을 소멸시켜야 하는데.
‘…될까?’
잘 모르겠다.
이는 아르칸이나 히드라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력을 소모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어쩌면. 아니, 매우 높은 확률로 나도 무언가를 잃게 되겠지.
그것이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위험부담이 크다는 건 확실하다.
“…….”
고민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미 각오를 마친 뒤였기에, 자신도 놀랐을 정도로 빠르게 결정할 수 있었다.
어차피 다른 방법으로 떠오르는 게 없기도 했고 말이다.
툭.
바닥의 눈을 치우고 그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그리곤 다리를 쭉 펴며 수정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후…….”
길고 깊은 한 번의 호흡에 편안하게 가라앉는 정신.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렸다.
아마도.
둘 중 하나의 마지막이 될 시간.
밤이 찾아오기를.
* * *
쿵.
불현듯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
미약하던 고동은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간다.
내게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아주 익숙한 감각이다.
“…….”
밤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신호.
나는 명상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그러자 역시나 어둠이 내려앉은 사위가 보인다.
내가 가장 큰 안식과 편안함을 느끼는 환경.
덕분에 지금 내 심리 상태는 더없이 편안한 상황이었다.
아예 긴장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적당한 정도의 수준이다.
무언가 시도하기에는 가장 좋은 상태.
눈이 묻은 엉덩이를 털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이는 눈앞의 수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툭.
서늘한 감촉.
그 너머로 눈을 감은 채 갇혀 있는 네크로맨서의 모습이 보인다.
여느 북부 귀족 집안의 인사라 해도 믿을 만한 모습.
‘어쩐지.’
낌새는 중간부터 느꼈고, 그를 만난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상하리만치 교단에 적대적인 주제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신앙을 설명한 저자.
설마 그 책의 저자가 본인이었을 줄이야.
그는 알았을까?
내가 자신이 쓴 책을 읽을 거라는 걸.
결과적으로 사도의 신도를 늘리는 결과를 만들게 될 거라는 걸.
당연하지만 몰랐을 것이다.
수 세기 전에 쓴 책이 여태까지 남아서 하필이면 내 손에 들어 올 거라고 누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하.”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일까, 나와는 가장 안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틀리셨네요.”
타고난 힘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족의 대부분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하나, 그런 우리도 절대 피해 갈 수 없는 운명이 있다.
[당신은 수호자입니다.]나를 처음 만났을 때 세계수가 했던 말이다.
이제는 저 말이 의미를 너무나도 잘 안다.
지금 상황이 딱 그렇지 않은가?
일족의 존재의의만큼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마를 수정에 대었다.
직후.
촤르르르륵!!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사슬.
사슬은 투명한 수정을 칭칭 휘감더니 이내 완전히 뒤덮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득해지는 감각과 함께 점점 흐릿해지는 눈앞의 풍경.
내 정신이 신체를 빠져나와 수정 안쪽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감각이 하나둘 끊어지며 몸이 천천히 허물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감았던 눈을 떴을 때.
나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
네크로맨서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공간.
그의 심상 세계에.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나는 저 멀리서 감지되는 영혼의 기운을 느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우웅.
둥실둥실 떠 있는 밝은 빛.
나는 지체하지 않고 힘을 쏟아부었다.
쭉 빠져나가는 막대한 양의 생명력.
하지만.
파치치치칙!!!
‘…윽!?’
강력한 반발력이 느껴진다.
평온하게 잠든 상태의 영혼을 강제로 소멸시키기에는 힘이 너무 약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런 만큼 해결 방법도 알고 있었다.
힌트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꿈결에 받은 힌트.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망설이지 말라고 했던가?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손해 보는 역할인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올렸다.
수명이 빠르게 깎여나가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데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드드드득!!!
심상 세계 전체를 떨리게 할 정도의 힘이 모이고.
이내 그것은 고작 한 개의 영혼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콰득.
한때,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이의 영혼이 덧없이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내 몸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나의 세계에, 두 명의 신이 존재할 순 없었으니까.
신도의 숫자를 조절해가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던 균형이, 조금 전 내가 선을 넘으며, 찰나의 순간이나마 신의 영역을 넘보는 것으로 깨졌다.
생소한 고통이 느껴진다.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나를 밀어내는 듯한 감각.
그리고 이때.
‘…….’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젠 필요 없으니까.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일족의 심상 세계로 들어간 뒤.
“감사했습니다.”
“…….”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시조께 말했다.
내가 가진 이 모든 힘.
“이제 회수해 주십시오.”
날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그리 부탁했다.
Epilogue.
이른 아침.
넓은 연무장 안.
“후.”
평소처럼 오전 훈련을 마친 유리엘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손목과 발목에 묶어둔 모래주머니를 풀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높게 낀 가을하늘.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몸을 식혀준다.
“…….”
계절의 변화가 느껴지는 모습에 유리엘의 눈에 잠시 아련함이 서렸다.
이내 고개를 저은 유리엘의 시선이 근처 지붕 위에서 졸고 있는 노아를 향했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요.”
“…….”
“훈련 끝났습니다.”
이에 비몽사몽 하여 일어나는 노아. 와중에도 가볍게 뛰어 아래로 내려오더니 유리엘의 옆에 선다.
둘은 곧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
올해로 전쟁이 끝난 지 햇수로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왕국은 물론 대륙에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몇 세기나 지속되던 전쟁이 끝났으니 이러한 변화의 흐름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이 격변하는 와중에도 딱 하나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
유리엘이 툭 물었다.
“이번엔 일어날까요?”
“…….”
그녀의 물음에 땅만 보고 걸어가던 노아의 고개가 스르륵 돌아갔다.
그렇게 그녀와 눈이 맞은 유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둘은 곧 마차에 몸을 싣곤 제국으로 향했다.
7일 뒤.
성역이 개방되는 날, 지금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로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 * *
2년 전.
전쟁이 끝난 날.
노아는 아직도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날씨, 주변의 풍경, 곁의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다그닥! 다그닥!
“…….”
빠르게 변하는 마차 밖의 풍경.
그러나, 곧 그 위로 그날의 기억이 덧씌워지듯 나타났다.
가을을 맞아 알록달록하던 풍경 위로 넓은 설원이 쭉 펼쳐지고….
저 멀리서 누군가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인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깜짝 놀란 목소리.
‘저기! 누가 온다!’
‘사도님!?’
그 누군가의 정체는 로안이었다.
네크로맨서를 죽이겠다고 떠난 지 열흘이 지나던 날.
로안은 홀로 아군의 막사까지 걸어서 되돌아왔고 그런 그의 손에는 네크로맨서가 사용하던 수정구가 들려 있었다.
정말로 열흘 전 호언대로 네크로맨서를 죽이고 돌아온 것이다.
전쟁의 끝을 알리는 기쁜 소식.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로안의 상태가 심각했기 때문에.
‘……?’
창백한 얼굴에, 싸늘한 체온.
거의 시체에 가까운 상태.
비척비척 걸어온 로안은, 익숙한 얼굴의 기사를 발견하자마자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살아계십니다!’
기겁해서 달려든 기사들이 로안이 살아있다는 걸 빨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멈춰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충격이었으니까.
유미르를 다시 만났을 때 이후로 이렇게 심하게 놀랐던 적은 처음이었다.
‘옮겨라! 의무병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발 빠르게 대처한 결과, 다행이 로안의 생명에 이상은 없었다.
맥은 곧 안정을 찾았고 얼음장같이 차갑던 체온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였고 의식이 회복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도께서는….’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한 달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는 로안.
결국, 로안은 안정과 치료를 위해 성역으로 이송되었다.
에이미와 사제들의 치료를 받으며 의식을 회복하기 위한 단계를 밟았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매년 두 번씩 찾아가는 중이었지만, 그때마다 잠든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달랐으면 했다.
일어나서 걷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느새 가물가물해졌지만….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덜컹!
그때, 마차가 덜컹거리며 노아를 상념에서 깨웠다.
흐릿하던 눈에 초점이 맞더니, 이내 시선이 마차 밖을 향했다.
“…….”
여전히 빠르게 휙휙 바뀌는 마차 밖의 풍경.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노아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톡.
“…?”
어깨에 닿는 가벼운 무게감에 유리엘이 고개를 돌렸다.
코앞에 보이는 노아의 얼굴.
“자요?”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조그맣게 돌아오는 대답.
“아니….”
그러나 그런 대답과는 달리 노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들었다.
유리엘이 희미하게 웃으며 읽던 책을 덮었다.
“…잘 자요.”
“…….”
“도착하면 깨워드릴게요.”
어차피 도착하려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안쓰러운 마음도 있었다.
로안이 그렇게 된 이후로 노아는 잠을 잘 자지 못했으니까.
본인 말로는 맹세를 시키지 못할 거 같아 불안해서라고는 하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힘들어하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후….”
이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한 번도 마음이 편한 적은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여태껏 내색하지 않고 잘 지내왔지만.
이젠 힘들다.
‘이번에는 달랐으면 좋겠는데.’
유리엘이 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늦은 저녁.
둘은 성역에 도착했다.
“…아, 들어가십시오.”
벌써 5번째 방문이라 그럴까.
따로 검문은 없었다.
익숙한 얼굴의 성기사가 길을 터준다.
이제는 익숙해진 길을 따라 노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멈추고 말았다.
돌연 길 한복판에서 멈추는 유리엘.
콩.
“……?”
갑작스럽게 멈추는 바람에 뒤따라오던 노아가 등에 머리를 부딪혔지만 유리엘은 거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저 멀리 익숙한 누군가가 보였기 때문에.
많이 해쓱해지긴 했지만….
“로안?”
“…!!”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로안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둘 다 진정하기까지는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둘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성역 안에 마련된 내 방으로 안내한 뒤 입을 열었다.
“일주일 정도 됐어.”
“뭐가요, 깨어난 게?”
“어.”
말하며 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모습에 유리엘이 물었다.
“어때요?”
“좀 이상해.”
손끝의 감각은 아직도 뭔가 어색했다. 반응속도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라고 할까.
유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그렇겠죠. 2년 만에 일어난 건데.”
“……그렇지.”
벌써 2년이 지났다니.
솔직히 쉽게 믿기지는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는 잠깐 자고 일어난 정도의 감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길어진 머리카락에, 앙상하게 변한 팔다리를 보면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때, 노아의 시선을 받은 유리엘이 그녀를 대신해서 물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사제들이 뭐라던가요.”
”괜찮아. 건강은 문제 없어. 그런데 예전이랑 완전히 같지는 않아.“
“……?”
“힘은 거의 다 잃었거든.”
압도적이었던 신체 능력은 물론 마나와 신성력도 다 잃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나는 그냥 평범한 성인 남성의 몸이 되었다.
“왜요?”
“여기 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아마 그대로 있었다면 다시 지구에 되돌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내 사정을 아는 노아는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그런 게 있어.”
이마에 물음표를 띄우는 유리엘에게는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차피 여기 남기를 선택한 이상, 이젠 알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아무튼. 이제 약해졌다고요?”
“어.”
“잡아 봐요.”
유리엘이 손을 뻗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꽈악!
“최대한 세게.”
“한 거야.”
“이게요?”
“어.”
“이렇게 약하다고요…?”
성인 남성들 평균보다도 훨씬 못 미치는 힘에 당황하여 묻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고작 일주일 지났는데.
“그럼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 그런데 예전처럼은 절대 안 될 거야.”
기술은 몸에 남아있지만, 힘의 근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체적인 능력은 저 둘에게도 한참 못 미칠 가능성이 높다.
“흐응…?”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위험하게 빛나는 유리엘의 눈.
“…!”
심지어 그 옆의 노아도 고개를 스르륵 돌려 나를 빤히 바라본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와 같은 눈빛이라고 할까.
등골에 오싹한 느낌이 일었다.
호랑이 앞의 토끼가 된 기분.
“왜…?”
원인모를 오한에 저도 모르게 의자를 뒤로 살짝 빼면서 물었다.
하지만 둘은 대답하는 대신 서로 의미심장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
“…….”
둘은 딱히 아무 말도 없었다.
“…??”
하지만 휙휙 바뀌는 표정과 얼굴색을 통해 무언의 소통이 오가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후.
“로안.”
자기들끼리 뭔가 결론이 낫는지 유리엘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뭔가 대단히 진지한 분위기.
하지만.
“응?”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주세요.”
하지만 그런 분위기와 달리 그녀의 귓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뭘?”
“…저희도, 되게 오래 기다렸으니까요.”
“그러니까 뭐를….”
철컥!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 덕분에 내 말은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뭔가 불길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일어난 노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뭐해?”
뭔가…. 뭔가 일어나고 있다.
나는 신변의 위험함을 느끼곤 바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꽉!
허리를 꽉 붙잡는 노아.
마치 거목에 붙들리는 느낌과 함께, 나는 강제로 멈춰 세워졌다.
힘에서 워낙 차이가 나니 아예 저항하는 게 불가능했다.
“노아야…?”
“…….”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노아를 바라봤고.
노아는 내 시선을 피하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미안.”
“!?”
…그리고 그날, 나는 밤의 무서움을 처음으로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