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14)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14화(114/350)
「목소리」
그것은 세상에 넷으로 존재한다고 알려진 추기경.
그중 가장 영향력이 큰 아몬의 권능에 속한다.
목소리는 아몬의 세력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한 힘이기도 하다.
비록, ‘지정된 인물’에게만 사용할 수 있지만.
이를 활용하여 세상의 많은 흐름을 좌지우지한다.
목소리의 진행 과정은 이렇다.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내부에서 들리는 그 특정한 음성은 해당 인물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동요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뜻하는 바와 거의 같은, 미세한 차이만을 가진 의견을 살며시 흘린다.
그럼 대부분의 이들은 목소리를 자신의 의지로 간주하고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실제로 초기에는 목소리의 말에 그대로 따른다고 해도 본인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심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 목소리를 듣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미세한 차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벌어진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보자면.
한 인물이 A를 가져오려 한다고 해 보자.
본인의 의지는 A를 가져오는 것이고 이건 매우 단순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목소리가 개입을 하게 되고, 가는 길을 살짝 비틀어 A와 상당히 유사한 A1을 가져오게 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A1도 충분히 최초의 의지에 부합하는 결과물이다.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으며 도출되는 결과 값도 같다.
하지만, 목소리의 영향력은 날이 가면 갈수록 커지고, 점차 크게 길을 비틀어 댄다.
A1, A2, A3 정도의 차이였던 것이.
B1, B2, B3가 되더니.
이윽고는 Z100, Z99가 되어 버린다.
그 사람의 의지와 완전히 다른 사고와 결과를 초래하게 만드는 것이다.
리리안스는 적어도 2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목소리가 보이는 값에만 의존하게 되고 자신의 사고를 포기하게 되면서 모순이 발생한다.
리리안스는 그녀의 딸인 에리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에리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에리카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잠깐 이야기를 뒤로 되돌려 보자.
본래의 이야기에서 에리카가 여신교에 편입되는 발판이 되었던 사건. 극장에 숨어 있던 칼리쿨레아.
그곳에 가는 티켓을 주었던 인물이 누구였나.
바로, 에리카의 친 어미인 리리안스였다.
이것은 우연인가? 어찌 보면 그렇게 치부할 수도 있다.
‘우연하게도’ 리리안스가 구한 티켓은 ‘우연하게도’ 칼리쿨레아가 숨어 있던 극장이었고, 또다시 ‘우연하게도’ 칼리쿨레아는 성서를 통해 에리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완벽한 시나리오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연결시켜 버린 개연성 최고의 각본.
…일 리가 없다.
그런 각본이라면 소각시키는 게 낫다.
이미 목소리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대로 빼앗긴 리리안스는 에리카를 위한다는 일념을 왜곡당하고 이용당한 것이다.
주교인 칼리쿨레아가 형상파 소속.
형상파가 추기경 아몬이 이끄는 수많은 파벌 중 하나라는 걸 알고 있으면 어렵지 않게 추론이 가능하다.
리리안스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여신교가 하는 일을 도우며 에리카를 죽음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가 이들의 중간에 난입하여 각본을 헤집어 놓았다.
여신교에 편입되어야 할 에리카가 개연성을 잃어버렸고, 이를 입맛대로 수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왜곡과 시간이 필요했다.
해서, 아몬은 사실상 에리카를 편입시키려는 것을 그만 두었을 것이고, 이를 위해 필요했던 리리안스는 기능을 잃었고 아몬에게 버려졌다.
그녀에게 들리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아마 높은 확률로 뿌려 놓았던 권능의 파편을 회수해 갔을 것이다.
어느 정도 간격으로 목소리가 들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몇 달이 지난 지금. 리리안스는 이상을 알아차리고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인다.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지지대가 사라진 그녀는 자신만의 힘으로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
그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에 도달하는 방법은 알고 있다.
관건은 에리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느냐 마냐.
프릭칸리스크 때와 마찬가지로, 미래를 안다고 하며 적합한 논리를 들이밀곤 에리카를 속이는 수도 있으나, 이번에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간에 빙의를 하고 나서, 에리카와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 중간 점검을 겸해서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다.
***
바르간과 에리카는 어둠이 덮어지고 있는, 아무도 없는 호수의 주변을 걸었다. 그곳을 택한 이유는 다를 게 없었다.
에리카가 멀리 가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재 별다른 대화를 나눌 기력도, 생각도 없다. 어서 안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곁을 지키고 싶다.
바르간은 에리카의 어둑한 눈에서 그 감정을 읽었다. 그녀의 작은 입이 열린다.
“…어디서 들었어?”
“장모님께서 편찮으신 걸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상하군.”
“포트레트가의 누군가가 말해 준 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괜한 일을 했네.”
가냘프다고 느껴질 정도로 옅은 에리카의 음성.
바르간과 에리카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호수 주변을 따라 나 있는 길만을 본다.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 바르간이 무언가를 툭툭 던지듯 물어보거나 화제를 던질 만도 하건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이어 가는 건, 자리를 파하고 싶은 에리카였다.
“불러냈으면 용건을 말해. 오래 시간 끌고 싶지 않아.”
“정확한 원인도 모르면서 네가 붙어 있기만 한다고 상황이 호전되진 않을 텐데.”
‘목소리’에 대한 건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다.
에리카 역시 그녀의 어머니가 어째서 이렇게 됐는지 모르는 상황.
그렇게나 자신을 아끼고 상냥하시던 어머니가 너무나도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으니 두려울 것이다.
힘 빠져 있던 에리카의 눈매가 조금 날카롭게 변하더니 바르간을 노려본다.
“비아냥거리려고 여기 온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바르간은 에리카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다. 차갑다고는 해도 무언가를 얼릴 정도는 아니다.
바르간은 곧바로 ‘확인’에 들어갔다.
지금까지의 서사와 감정이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는지를.
“에리카. 너는 나를 얼마나 믿지?”
“뭐?”
“잘 못 들은 거 같으니, 다시 한번 말하마.”
뜸은 들이지 않는다.
직설적인 화법을 이용해서 창대처럼 꽂아 버린다.
“현재의 나를 얼마나 믿는지 물었다.”
“…너를 얼마나 믿냐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다. 과거의 일로 인해 네가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대충 파악할 수 있는 정도라면….”
“⎯슈겐하르츠.”
에리카는 바르간의 말을 끊었다.
바르간이 갑작스레 방문을 열고 왔을 때와 비슷하다.
직접적으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적요함 속에 그녀의 감정이 묻어져 있다.
서글프기까지 느껴지는 에리카의 말에는 소량의 물기가 스며들어 있다. 그녀는 이어 뱉는다.
에리카는 현재 지쳐있다.
“나, 간다.”
에리카는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몸을 완전히 돌려 버린다.
그녀의 어머니 일로 인해서 말랑말랑해져 분출되기 쉬웠던 감정이 한줄기 흘렀다.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 내고 걸어간다.
아니, 걸어가려 했다.
“못 간다.”
바르간이 에리카의 손을 잡으며 돌아가려는 것을 방해한다.
고된 훈련으로 인해 단단해진 그의 손.
에리카는 강제로 잡아진 손을 풀려고 하지만, 최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자지도 못한 탓인지 힘이 부족하다.
“이거 놔.”
“…….”
“놓으라고⎯!”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듣기 전까지는 보내 줄 수 없어.”
줄다리기를 하듯 몇 차례 팽팽한 끈이 왔다 갔다를 반복하더니, 힘이 부족한 에리카에 의해 멈춘다.
그녀는 질렸다는 듯 손을 내팽개쳤다.
그러곤 다시 몸을 돌려 바르간을 향하게 한다. 무너져 내렸던 눈동자에 심지가 돋아나 있다.
“그게 그렇게 듣고 싶어?”
에리카의 눈에 솟아난 심지는 분노로 만들어졌다. 계기는 지금 바르간이 보인 태도와 발언.
하지만 그 원천은 과거의 기억이다.
에리카의 절제되어 있던 분노가 해방된다.
“고작 그딴 게 듣고 싶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거냐고⎯!”
한번 터진 물길은 에리카 본인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가득 담긴 물이 지나기지 못하도록 막고 있던 얇은 나무판자 문이 닫히질 않는다.
“…왜? 다시 예전처럼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즐기고 싶니? 내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다시 네 망막에 새기고 싶은 거야?”
“그런 게 아니다, 에리카.”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너 눈치 빠르잖아…. 내 지금 상황도 들어서 알고 있다며. 그러면… 이럼 안 되는 거 아니니?”
문장이 끝남과 동시에 에리카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린다. 한없이 작고 유난스러운 진동이다.
“혼자서 힘들어하고 있는 나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있는 거 아니야?”
“…….”
“네가 적어도 내 약혼자라면….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최소한의 정이라는 게 있다면…. 피를 흘리고 있는 나에게 돌은 던지지 말아 주라.”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에리카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는 건 4년만이었다.
“부탁할게. 바르간….”
마침표를 찍는 순간, 바르간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로워진 에리카는 흐느낌을 다시 감추려 들며 저택으로 걸어간다.
바르간은 가만히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의 내부에서는 이성과 감정이 출동을 일으키며 에리카가 보였던 반응을 다시 확인한다.
“…….”
잠시, 숨 돌리고 갈 시간이….
조금은 필요할 거 같다.
***
어머니의 방으로 돌아온 에리카는 지쳐 있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나 감정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는데 바르간이 남아 있던 것마저도 모두 밖으로 꺼내 버렸다.
이젠 눈물도 나오지 않을 거 같다.
그녀의 하얀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이 굳어 있다.
어둠이 가득한 넓은 방 안에 있는 건 에리카와 그녀의 어머니. 단둘뿐이다.
에리카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다면 화들짝 놀라면서 손수건으로 닦아 주실 어머니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셨다.
감긴 어머니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메마른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감정은 모두 소모하였지만 어머니의 불안감이 이어지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오한에 몸이 떨린다.
차라리 방금 전처럼 어떤 말이라도 중얼거리시면 좋겠는데 이젠 그것마저도 그만두셨다.
혹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 꿈속으로 도망치시려는 게 아닐까.
에리카는 갈등한다.
그녀를 깨워야 하는지, 아니면 이대로 두어야 하는지.
그녀가 잠시 편해진 것인지, 아니면 죽어 가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깨우면 다시 괴로워하시게 되는 건가? 그냥 두어야 하나? 다른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어떻게 해야 조금은 진정하실 수 있으실까….
지나친 사고, 방대한 양의 판단과 계산이 흘러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겉으론 항상 날카롭게, 차갑게 사람을 대하며 낯선 것에 대한 경계심을 잔뜩 세우는 에리카.
그런 에리카의 속은 여리고 여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무너질 모래로 만들어져 있다.
그녀가 겉을 단단하게 만들어 올리는 건.
무딘 속을 감추기 위해서다.
어머니의 용태가 심상치 않은 지금. 에리카의 사고는 중심을 잃었다.
…똑.
…똑똑. 똑똑.
더욱 깊어진 밤의 한때.
누워있는 리리안스의 곁에서 엎어진 채 잠을 자고 있던 에리카의 눈꺼풀이 떠진다.
그녀는 자신이 잠에 이른 것도 몰랐다.
그저, 지금 눈을 떴으니 자다가 일어났나 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슈겐하르츠가 왔었고, 방 안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곁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건 잊지 않았다.
주변의 마나를 확인하니 아직 아침이 오려면 한참 멀었다. 취하듯이 빠진 수면이었는데 그 시간이 길지 않은 것이다.
⎯똑똑.
다시 에리카의 귀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방문에서 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창밖에서.
창밖에서 새의 부리 같은 게 쪼아 대는 소리다.
에리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자, 노란색의 빛을 밝히고 있는 한 마리의 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자리에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아카데미아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전해 받을 때와 동일한 술식이다.
에리카는 이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 틈으로 노란 새가 들어오고 에리카의 주변을 빙글빙글 배회한다.
이것 역시 똑같다.
일부러 지정을 해 두지 않으면 이런 모션을 취하지 않을 터이다.
몇 번을 날아다니다 에리카의 어깨에 내려앉은 새는 곧, 팡⎯ 하고 터지며 별무리를 남겼다.
별들은 새롭게 조합되어 편지 봉투가 되었다.
“…….”
편지를 잡은 에리카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바라본다.
그녀가 한 마법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대체….
에리카는 편지 봉투의 인장을 뜯고 내용물을 확인한다.
그녀의 손에 잡혀 나온 건 여러 방면으로 찢어졌던 경력이 있는 종이들이었다.
갈기갈기 나눠진 흔적들을 모아 다시 알아볼 수 있게 한 꾸깃거리는 편지.
쓰여 있는 글씨체부터 질감까지, 바르간에게 받은 재수 없는 고양이 인형에 넣어 놓았던 것 그대로다.
에리카는 본문의 내용을 훑었다.
노란 새의 마법.
그 안에 담겨 있던 편지지의 질감까지 같은 그것은.
「에리카. 나는 목소리에 대해 알고 있다.」
그의 특유한 글씨체로 전혀 다른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