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17)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17화(117/350)
처음 빙의를 했을 때.
바르간의 모든 기억들과 감정들이 공유가 되었다.
내 것과 남의 것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감각은, 이질적이면서도 모순되게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는 완전하게 두 존재가 하나가 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두 개의 영혼.
원작에서, 조금씩 자신의 과거에 대해 혼동을 느끼던 리암.
그는 중후반에 가서, 빙의할 때 들어간 자신의 영혼과 기존 리암의 영혼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감각을 공유하면서도 영혼은 두 개.
이는 어차피 하나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이니 두 개 있다고 해서 아무런 피해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문제가 있었다.
기존에 있던 리암의 영혼이 새로 들어온 영혼을 조금씩 물들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새로 들어간, 현세에서의 리암의 영혼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점은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는 것.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면 ‘나’에 대한 개념이 바뀐다.
원래 있었던 리암의 영혼과 기억, 감정이 주. 현세에서의 리암의 것들이 보조가 되는 것이다.
이 순서 싸움은 사고를 완전히 바꾸게 만든다.
현세와 소설 세계를 엄격히 구분하던 그의 기준이 깨진 데는 이 영향이 결코 작지 않았다.
…흠.
그런데 이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운이 좋았다고 말해야 할까.
나는 영혼이 죽어 가고 있는 병에 걸린 ‘바르간’에게 빙의를 했지 않은가.
해서, 기존 바르간의 영혼은 ‘내’ 영혼을 물들게 하기는커녕 서서히 꺼져 가는 중이었다.
한없이 주도권을 잃고 추락하는 영혼.
에리카에게 특정의, 복합적인 감정을 품고 있는 기존 바르간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중간 점검차 무상으로 도우면서까지 이번 일에 나선 것이다. ‘기존’ 바르간의 의지는 나와 같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감각을 공유하니까.
…….
하나, 아무래도.
에리카에 대한 이 감정은…….
⎯바르간 도련님.…보고 싶습니다.
알리시아에게 주었던 것과 연결되어 있는 비상용 수정구가 반짝이며 음성이 흘러나온다.
그녀와 통신을 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발언에 주목이 되었다.
알리시아에게 준 수정구가 처음 빛을 발하는 순간.
그녀의 양어미에 대한 사건이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위급할 때 사용하라고 쥐여 준 것을 대체 무슨 용무를 위해 연결했는가 했는데.
양어미의 죽음을 경험한 알리시아는.
음성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표정, 어떤 심정인지가 물씬 전해지는 문장들을 연이어 말했다.
기본 골격은 나에 대한 감사함이었고, 거기에 살점이 되었던 것들이 사건들이었다.
사용인을 시켜 그녀의 양어미를 보호해 주고 돌봐 주었던 것.
이번에 며칠 동안 머무는 것을 허락하여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보장해 주었던 것 등등.
솔직히 길게 늘어지는 감사 인사를 듣고 있자니, 그냥 수정구를 꺼 버릴까⎯까지 고려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가장 간절했던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나를 보고 싶다라….
“…….”
⎯…아.
작은 외마디의 비명이 수정구에서 나왔고.
이는 곧 버벅거리며 뒷말을 잇는다.
⎯아니, 그게… 그런 게 아니오라…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는 것이 대놓고 티 나는 목소리.
대면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녀의 눈알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기에 젖어 있던 목소리도 어느새 잦아들었다.
평소보다는 침착하지만, 그래도 어쩔 줄 몰라 하는 건 매한가지다.
나는 일단 이어지는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 그것이… 도련님을 모시고 싶고, 뵙고 싶다는 건 맞지만…. 결코 이상한 뜻은… 결코… 결코 아닙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관망하는 태도를 이어 나가자, 알리시아는 나를 다급하게 불러 댔다.
무반응이 가장 두렵다고, 현재의 알리시아에게는 제대로 적용되는 모양이다.
“알리시아.”
⎯네, 도련님….
나는 긴장한 듯한 알리시아에게 말했다.
이제 그녀에게 이 말을 전해야 할 때가 왔다.
“착각하지 않았으니 감정 소모 다 했으면 그동안의 밀린 보고나 올려라.”
⎯……예?
에리카와 관련된 일로 크게 파도를 치던 내면의 바다가, 알리시아와의 짧은 통신으로 인해 금방 잠잠해졌다.
경과야 어찌 됐든 이왕 자리가 마련된 거, 진정이 좀 되었으면 이제 슬슬 멈춰 있던 시동을 다시 걸 때다.
본래 줄거리에 없었던 양어미의 장례까지 치르게 해 줬으면 나도 받는 게 있어야지.
“네 마지막 발언이 감정의 연쇄에 의한 실언이라는 것을 안다.”
⎯앗, 예….
“이제 며칠 후면 방학이 끝나게 된다. 새로운 시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너의 현 상태를 알아야 더 정확하게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니냐.”
방학 동안 내가 원하는 정도를 충족시키는지. 어떤 쓰임새가 더 늘었는지를 알아야지.
⎯예, 예…! 맞습니다. 맞습니다만….
“그게 아니면 뭐냐. 설마, 아직도 분출해야 할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안타까운 일이다만, 그만 접어 두어라.”
⎯…….
“네가 오랜만이라 이마가 허전한가 보구나.”
⎯지, 지금 바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 이후, 침착해진 알리시아에게 이번 여름방학을 통해 얻은 성취를 전해 들었다.
그녀의 멘토인 샤를로테의 교육이 제법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 알리시아는 붉은 오러의 두 번째 충족 조건인 「형태변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오러의 형상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한다.
앞으로 마지막 한 단계만 더 올라, 갈고닦는다면 아르텔리온과 같은 붉은 오러의 사용이 가능해질 것이다.
마나를 본격적으로 운행하기 시작해서 불과 1년 만에 형태변화의 경지에 도달했다.
역시 미친 천재 알리시아. 날아다니는 속도가 차원이 다르다.
곁다리로, 같은 연구회인 에밀리의 현 상황도 알 수 있었는데 속성확립 단계를 도전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빠르진 않아도 발전은 꾸준히 하고 있다.
…자, 그럼 확인은 이 정도 하면 되었고.
이제부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그녀에게 살짝 언급할 시간이다.
“2학기가 시작되고 축제가 있기 전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으니 등급전을 통해 카티아를 얻고 발전에 힘쓰면 된다.”
축제 전에,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깜짝 이벤트가 있긴 하지만, 이를 미리 알리시아에게 알려 주어 도움이 될 게 없다.
2학기의 메인 에피소드는 어디까지나 축제와 기말고사.
그중, 먼저 다가올 축제에 대해 말해 보자.
“아카데미아의 축제는 5일 동안 이루어진다. 주최 기관이 기관인 만큼 여타 축제보다 화려하고 크게 진행되지.”
외부인도 출입이 가능한 유일한 시즌.
각종 먹거리를 파는 매점들이나 노래, 춤 따위의 재주가 있는 자들이 초청되어 공연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4일 차까지의 이야기. 마지막 날인 5일 째는 아카데미아의 시험이 시작된다.”
⎯시험이라 하시면 어떤….
“2학년이 아카데미아를 장악하려는 악역을 맡는 것이지.”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3학년과 4학년이 외부로 나가 있는 상황이라 1학년과 2학년만이 남게 된다.
그중, 2학년은 아카데미아를 침공하려는 빌런 역할, 1학년은 이를 막으려는 히어로 역을 하는 것.
즉, 우리는 축제에 남아 있는 일반인들을 지키며 2학년들의 기습을 막아 내야 한다.
원작에서는 이 과정에서 고대 드래곤에 의해 통제를 따르지 않던 프란체스카의 군세가 난장판을 만들었던 것이고.
“요주의 인물이라 하면….”
2학년 중에서… 쓸 만한 놈들은 몇 없지만.
용사랭킹 1위의 딸이자, 1학년 1위인 오셀 율리오 클레멘스와.
2위인 오셀 빅토리아 프란체스카.
그리고, 어중간한 순위를 고집하는 태평한 한 남자는 그 안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이들은 축제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인물 세 명.
인당 몇십을 대체할 수 있는 인재들이다.
“아직 조원들이나 연구회 인원들의 방학 동안의 성취를 확인하지 못하였으니, 정확하게 구상하지는 않았으나 아마 알리시아. 너는 2인조로 이들 중 어느 하나를 막을 것이다.”
⎯반드시 막아 내 보이겠습니다.
“그래.”
알리시아에게 그 외에 다른 말은 해 주지 않는다.
정석적으로 축제를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만 보이게 한다.
내가 프란체스카를 통해서 이번 축제를 원작보다도 더욱 화려하게 진행할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도련님의 도움이 되겠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음질도 좋지 않은 상태, 비상용으로 연결된 통신망이라고 하더라도.
알리시아는 다시금 굳게 맹세한다.
***
그리고 찾아온 방학의 마지막 날.
포트레트가에서 아카데미아로 향하는 고급 마차 안.
“에리카, 왜 요즘 나를 피해 다니고 있는 거지?”
“…….”
“약혼자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이냐?”
“…….”
잠깐 눈길을 주는가 했더니 바로 거두어 창문 밖을 뚱한 눈으로 바라보는 에리카.
이 정도의 도발을 했으면 최대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거나, 최소 차가운 눈으로 무시하는 발언을 해야 정상(?)인데 좀처럼 관심을 주지 않는다.
최근 3일 동안 계속 이런 식이다.
리리안스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와중이라 고맙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감사를 전할 때 말고는 전부 건조하다.
식사를 할 때에도, 훈련을 할 때에도,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눈길과 함께 아예 자리를 피해 버린다.
부끄럽거나 한 그런 핑크빛 감정은 아니다. 그쪽보다는 무채색의, 무심한 느낌.
…뭐, 사실 제대로 감사를 전한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 칼리쿨레아한테 구해 줬을 때도 틱틱거리며 간신히 고맙다는 말을 전한 에리카인데.
어쨌든, 이것은 이상 사태임은 확실하니.
조금만 더 건드려 보도록 하자.
그녀의 기본 성격이 있으니 곧 발끈할지 모른다.
“그러고 있으니, 부부 싸움 이후 크게 다툰 아내와 같구나. 남편의 외도를 알았다거나 하는 종류의.”
익살스러운 태도로 말하자, 에리카가 오랜만에 제대로 눈을 마주하며 입을 뗐다.
날이 선 목소리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라니?”
“…됐다.”
에리카의 고개가 다시 돌아간다.
아마 아카데미아에 도착하고 나서도, 당분간 에리카는 나와 단 한마디도 나누려 하지 않을 것 같다.
…흠.
저택에서 나올 때 그녀의 어머니인 리리안스가 나에게.
‘에리카를 잘 부탁해요.’라든지, ‘바르간의 일이니까 두 사람 사이를 걱정하진 않을게요.’라는 말을 건넸는데….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건드려 보도록 하자.
“계속 무시를 하다니, 너무하는군. 네가 나를 ‘바르간’이라고 불러 주기에, 틀림없이 나를 다시 받아 준 것이라고 여겼거늘.”
밤의 호숫가에서 에리카가 나를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불렀던 장면은 인상적이었어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
비록 그때의 정서가 애정이라기보단, 비애에 가까웠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읏.”
그 말을 들은 에리카의 연분홍 입술이 조금 달싹였다. 입 주위의 근육이 어색하게 순간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이후.
“…내가 언제.”
모른 척을 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모른 척을 한다.
“하.”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고, 이만 분위기를 읽어 주었다.
말을 하기 싫다는 데 재간이 있나.
여기서 더 건들이면 발끈 정도가 아니라, 터질 게 분명하다.
그렇게 자연스레 내 시선도 창문 밖을 향했다.
어느새 마차는 목적지 부근에 도착하여 그림자 진 곳을 달리고 있었다.
그림자는 주인이 있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도시, 아카데미아.
커다란 마석이 박혀 있는 신성한 배움터는 완벽한 방어 시스템을 자랑하며 용맹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어느덧 빙의를 한 지 1년.
무사히 1학년 1학기와 여름방학까지를 마칠 수 있었다.
여러 변수와 기존에 있던 전개를 활용하여 기존의 바르간이 얻을 수 없었던 수준이나 장치들을 차곡차곡 모아 가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아카데미아에서 뽑아 먹을 건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적어도 2학년의 어느 기점까지는 착실하게 다니면서 이를 차근차근 뺏어 와야지. 성실하게 말이다.
“…….”
…하나, 그 이후가 된다면.
이야기의 전개가 중후반에 접어들게 된다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러한 잠깐의 평화 따위는.
‘조금도’ 없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아직 예비 단계이자, 기지개를 켜는 수준.
조급해하지 말고 준비하도록 하자.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더라도 완벽에 가까운 계획은 존재하니까.
완벽해질 필요는 없다. 최대한 그에 가까워지면 되는 것이지.
***
“그럼 인원이 딱 맞으니 괜찮겠군요.”
“하지만… 다른 조원들 간의 균형을 고려하면.”
“그만 덩그러니 남게 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아카데미아의 한 회의실에서.
관계자들과 루이사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주제는 ‘새로운 조원 편성’.
1학기 기말고사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으로 인해, 예비 용사 셋이 사망에 이르고, 한 명이 아카데미아를 떠나는 결과가 발생했다.
그 때문에 리암의 조원은 아무도 없게 된 상황.
그런 와중, 다른 조에서 공석이 하나 나왔고 마침 수가 알맞게 떨어지게 되어 리암을 그 자리에 넣기로 한 것이다.
“루이사 교수님의 이견이 없다면, 이대로 진행하려 하는데 어떻습니까?”
해당 주제의 결정권은 결국 담당 교수인 루이사에게 향한다.
그녀는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상당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고, 리암의 재도약을 도울 생각이었다.
그녀는 종이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리암의 포지션을 생각하면 알맞긴 하다.
다른 조들보다 평균 수준이 부쩍 올라가 버리기는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이는 별수 없다.
루이사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조들에 비해 월등한 힘의 균형이 아니었다.
그 조원들 간의 관계 때문에 난처한 것이다.
“으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루이사는.
결정을 내린다.
“알겠습니다. 리암을 바르간의 조에 포함시키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