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27)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27화(127/350)
아카데미아의 지하에 위치한 어둑하고 칙칙한 장소.
촛불 정도의 밝기를 가진 몇 개의 등이 전부인 이곳에서, 두 여인은 하루 종일 벌레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브락키움은 철저하게 그들을 관리하였고, 공명하지 않는 마나는 조금의 용서도 없이 바로 배제시켰다.
그 결과 몇 차례 잡벌레의 괴랄한 주둥이와 몸이 닿기도 하였으나,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곧바로 강렬한 마나의 빛이 쏟아져 나왔고.
약 10시간이 지나자.
알리시아와 에리카는 다친 곳 없이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슈겐하르츠…! 가만두지 않을 거야!”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에리카는 씩씩거렸다.
몇 번 눈물을 흘렸던 것인지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
“그렇게 밀쳐 두고 지는 할 일이 있다고 가 버려?! 이 나쁜 새끼!”
에리카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녀의 교복도 푹 젖어 있었고, 손발은 달달 떨렸다.
추위마저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지쳐 있다.
그러다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숨을 고르고 있는 알리시아를 바라본다. 그녀 역시 에리카의 상태와 다를 것 없었다.
…화를 내고 있지 않다는 점만 빼면.
“알리시아, 너는 화도 안 나?”
“예?”
“슈겐하르츠가 저 끔찍한 구덩이에 우릴 무책임하게 밀어 버리고 나갔잖아.”
“그건… 그러긴 하셨지만….”
“들어가지 않으려 했던 게 아니야. 들어가려고 했었어! 내 발로 직접 걸어 들어가려고 했다고…! 근데 녀석은…!”
에리카의 체내에 남아 있는 마나가 반응하며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바닥에 깔린 매끈한 돌의 표면에는 성에가 일었다.
알리시아는 그녀의 분노를 모르지 않는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더니 말했다.
“…그래도 손으로 밀어 주셨잖아요.”
“무슨 말이야 그게?”
“도련님 나름의 배려가 있었다고 생각해요.”
“배려? 지금 배려라고 한 거야?”
에리카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을 벌렸고, 알리시아는 ‘으음….’ 하며 잠시 입안에서 문장을 머금더니 추가로 덧붙였다.
“도련님께서 하시는 행동은 모두 의미가 있다는 건 에리카 님도 알고 계실 거예요. 저희를 두고 가신 것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 테고요.”
“…그렇다고 해도!”
“게다가, 잡벌레 구덩이를 통해서 에리카 님과 저의 마나 공명도가 높아진 건 사실이니까요.”
“그건….”
에리카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진다. 알리시아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다만, 에리카가 저 안에서 보냈던 끔찍한 10시간이 그녀를 감정적으로 만들었던 것.
알리시아 역시 본인과 같은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하는 태도가 아예 달랐다.
알리시아는 슈겐하르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지탱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입안에서 비릿한 맛이 나기 시작한 에리카.
“…….”
잔뜩 부풀어 올랐던 풍선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듯.
에리카의 눈동자에 차올랐던 분노가 새어 나온다.
진정된 눈에 비친 것은 새하얀 수건이다.
“수고들 많았다.”
10시간 동안 그녀들의 훈련을 도와준 브락키움.
그가 에리카와 알리시아에게 수건을 건네었고 두 사람은 감사히 그것을 받았다.
브락키움은 무뚝뚝한 말투로 대사를 이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푹 쉬어라.”
별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치고는 상대의 고생을 알아주는 그.
에리카와 알리시아는 각자의 방식으로 대답하였고, 천천히 떠날 준비를 했다.
준비물이 많았던 것은 아니니 땀을 닦아 내는 게 거의 전부였다.
젖은 옷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벗지는 못하고 우선 더운 바람을 보내 대충 말렸다. 어서 기숙사로 가서 빨아야 한다.
옷이 나름 건조되고 있는 가운데, 브락키움이 그들의 현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둘의 마나 공명도가 높아지면서, 위력과 안정도가 함께 상승했다. 소요되는 시간 역시 단축되었고.”
“다행이네요, 에리카 님! 역시 효과가 제대로 있었어요!”
“응… 그러게.”
알리시아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기뻐하였고, 에리카는 조금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알리시아가 ‘어째서 에리카 님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에 대해 의문을 품으려는 찰나.
브락키움이 답하듯 말했다.
“앞으로 몇 번만 더 구덩이에 들어가면 될 것 같다.”
“…끝난 게 아닌 건가요?”
“…….”
에리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짚으며 묻는다.
가녀린 팔목에 가려져 한쪽밖에 보이지 않는 검은 그녀의 눈동자였으나 절실함이 잘 전달됐다.
“앞으로 몇 번 정도 더 하면 될까요?”
부디 최대 한두 번이길.
간곡히 바라며.
“다섯 번 정도면 될 거다.”
“아…….”
“…….”
다음 훈련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한동안 잡벌레들과의 살벌한 동거는 계속될 예정이었다.
***
에리카와 알리시아를 아카데미아의 지하에 내버려 둔 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당연히 아니다.
최근 사용했던 ‘생명의 향수’.
당일, 수업 시간에 각종 마법식으로 무장해 있던 비석을 통해 현재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훈련에 들어갔었다.
6시간이라는 지속 시간 동안 수업에 사용된 것은 고작 20분 남짓. 남은 시간은 거의 전부 단련을 돕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몸에 피해가 없는 선에서 나는 향수의 효력을 제대로 이끌어 내 초월의 계위가 얼마 남지 않은 마나 총량의 확대에 힘썼고.
그 결과 정말 코앞까지 다가설 수 있었다.
그 후 며칠간의 모든 단련은 마나 총량에 투자하였으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고지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긴장감과 동시에 설렘을 느꼈다.
이젠 고개를 들 필요도 없다.
바로 내가 바라보는 그 시선이,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 넓디넓은 바다다.
지이이잉-.
손에 땀이 맺힌다.
감고 있는 눈 주위의 근육이 긴장하기 시작한다.
어두운 방 안에서 가부좌를 튼 채 집중하고 있는 나는 호흡을 다스리며 바닥에 붙어 있는 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마지막 한 걸음을 내뻗으려 애쓰고 있다.
오래 기다려 왔던 순간이다.
마력 총량 초월의 계위.
이 단계에 들어가게 되면 드디어 내가 원하는 형태의 고유 술식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모두 모이게 된다.
기존의 바르간이 완성하지 못한 고유 술식을 완성시킬 수 있을 터이다.
앞으로 한 발자국….
중력이 무거운 것처럼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는 이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걸으면…!
그렇게, 지면과 하나가 된 듯 붙어 있던 발걸음이 겨우 떼어져.
타박-.
나아가졌다.
“……!”
눈을 떴다.
아니, 자연스럽게 뜨였다.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알 수 없는 세상.
바로 앞에 지대한 몸집으로 막고 있는 검은 철문.
잠깐 고개를 돌려 주변을 바라보자 아무것도 없다.
온통 하얀 세계.
내가 서 있는 곳은 수면 위였고, 수면은 하얀 하늘이 비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색이라고는 모든 면에 칠해져 있는 하얀색과,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철문, 나 자신뿐이다.
다시 철문을 바라본다.
정말로 새까맣다.
이 세상이 물감으로 되어 있다면 그 색을 모두 흡수했기 때문에 이렇게 거멓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처음 보는 광경, 처음 보는 세계.
주인공이었던 리암은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원작에서 초월의 계위에 도달했던 묘사 따위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나 역시 지금 이 공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대충 초월에 도달한 자들의 떠돌아다니는 경험담을 주워들은 것으로는, 각자의 심상에 따라 다른 형태가 나타난다고는 했는데 나는 이렇게 되었다.
이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나 역시 모른다.
하나,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마나 총량이 초월의 계위에 도달한다.
그 하나의 진실만이 너무나 매혹적이라,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손이 뻗어졌다.
어느 정도의 힘을 가해야 열리는 걸까?
모른다.
밀어야 할까, 당겨야 할까?
이 역시 모른다. 그러나, 막상 손을 덴다면 알게 될 것 같다. 분명 그렇다.
이대로… 문을 연다면….
“호호호, 잠깐만 기다려 주겠어요?”
인자한 노인의 목소리에 내뻗어지던 내 손이 정지했다.
강압적이지도 않았거늘, 확실하게 멈췄다.
그러자 흐려져 있던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내 눈은 오로지 칠흑의 문에만 향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있던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지금은 도로 돌아와 고개를 내 의지로 돌릴 수 있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백발의 노인이 서 있다.
나는 저자를 알고 있다.
“학생, 지금 그 문을 여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거예요.”
“…….”
“열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습이로군요. 젊음의 패기인 건가요? 호호호, 일단 잠깐 앉아 대화를 나누죠. 이곳에는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의미가 없죠.”
노인이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더니 테이블과 다과가 갖추어졌다.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제대로 형태가 있었다.
노인은 주름진 손으로 맞은편 자리를 안내한다.
“우리 아카데미아 학생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되니 아주 반갑군요.”
그는 아카데미아의 총장.
굴레마시아.
현 마법사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
후릅-.
굴레마시아는 새하얀 찻잔을 들고는 안에 담긴 차를 마셨다. 차…라고 하기에는 우유같이 보였으나, 냄새는 제대로 홍차였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기에도 애매해, 잔을 들어 입안에 머금었다.
혀를 굴려 보며 혹시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파악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호호호, 의심이 많은 학생이군요. 위험한 건 타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눈매를 좁히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의 행동거지가 없다.
신체로 표출되는 게 전부는 아니며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버릇처럼 나왔다.
굴레마시아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정말로 총장이 맞는 건가?
의문이 줄줄이 생기며 목구멍 뒤로 차가 넘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으나, 차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저절로 넘어갔다.
“…….”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생은 상당히 무리를 하고 있어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노인의 지고한 눈을 바라보자 그의 눈에 현기(玄機)가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깨달은 자였다.
“신체는 버틸 수 있겠죠. 버틸 수 있는 마지막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줄 타고 있더라도, 결코 넘지는 않으니까요.”
“…….”
“하지만 학생의 영혼… ‘두 개’의 영혼 모두가 상당히 지쳐 있어, 이 노인은 걱정입니다.”
“……!”
지금 이자가 두 개의 영혼이라고 한 건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원작에서 리암의 건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했던 게, 묘사된 적이 없었는데…!
노인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그렇게 놀랄 것 없다고 했다.
“이 나이쯤 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보이던 것은 보이지 않게 되기 마련이지요.”
“…마나 총량이 초월에 다다르면 그런 것 또한 알 수 있는 건가요?”
“…글쎄요. 이 노인이 어째서, 그리고 언제부터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살필 수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군요.”
“…….”
굴레마시아는 입이 건조한지 다시 차를 한 잔 천천히 마시고는 입을 뗐다.
“학생, 무엇이 그렇게 급한 겁니까? 무엇을 위해 자신을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겁니까?”
“…저는 급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을 몰아친 적도 없고요.”
“그렇다면… 학생은 자신이 어떠한 상태인지도 모를 정도의… 치열한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로군요.”
“…….”
굴레마시아는 나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짐작하건대 눈동자를 통해 내 지금의 생각이나 성격 따위를 분석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에게 불쾌함을 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으나, 내 속을 전부 들여다보는 것 같아 유쾌하지 않았다.
“묘한 학생입니다. 이미 많은 것들을 경험한 것 같아요. …부도, 명예도. 사람이 가장 탐내는 모든 것들을 이미 얻었던 인물처럼 느껴집니다.”
굴레마시아는 주름진 눈웃음을 지으며, 긴 수염을 매만지며 의심을 별거 아닌 양 넘겼다.
“단순히 슈겐하르츠의 자손이니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요, 호호호.”
총장 굴레마시아는 사람에 대해 금방 파악해 버리는 관찰안을 지녔다.
헤일리온도 상당히 사람의 성질에 대해 어렵지 않게 알아내는데 이 노인은 더하다.
단순히 마법의 수준만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 온 다채로운 삶의 역사가 그의 뼈대가 되고 있다.
대단하고 지극히 존경하기에 마땅하지만, 동시에 성가실 수 있는 인물이다.
총장과의 대화는 분명 흥미로우나, 여기서 더 이어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겠다.
그런 판단을 한 나는 짧은 대화를 잘라 냈다.
“제가 지금 저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언제가 되어야 열어도 되는 겁니까. 그리고 열어서 안 되는 이유는 뭐죠?”
끝낼 땐 끝내더라도 얻어야 하는 정보는 얻어야 한다.
이대로 그냥 가 버린다면 나는 바로 앞에 다가온 초월의 계위를 그림에 그린 떡처럼….
“이제 되었습니다. 열고 싶을 때 열도록 하세요.”
“…….”
이제 되었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이 노인의 발언에 어이가 없어 되물어보려는 순간, 혹시 몰라 체내의 마력을 급하게 돌려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자 그가 한 말에 대해서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놀라워하며 물었다.
“…어떻게 하신 거죠?”
“호호호, 마법을 오랫동안 연구하다 보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게 된답니다.”
마나는 혈관 같은 것처럼 형태가 실존하지 않는다.
다만, 마나는 어엿하게 존재하며 몸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닌다.
즉, 가상의 관을 만들고 이를 활동시켜야 하는데, 관의 너비를 사용자가 스스로 확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할 텐데….
지금의 나의 마나의 관은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가상의 심장 역시 새롭게 변하여 왕성하게 작동한다.
굴레마시아는 내 반응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고, 목적을 마쳤다며 서서히 사라져 갔다.
대체 어떻게 하는지를 전혀 모르겠으나.
올 때도, 갈 때도.
제멋대로인 노인이다.
그는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자기를 사랑해야만 비로소 모든 형상이 제대로 보일 겁니다.”
그렇게 내 앞에는 검은색 철문만 남게 되었다.
“…허.”
나는 기가 차 헛웃음을 뱉었고.
다시 한번 내 상태에 대해 재점검을 한 뒤, 침을 삼켰다.
졸지에 예상도 못 한 경고와 도움을 받게 되었지만, 이것으로 준비는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
저 총장의 형상을 한 존재가 정말로 총장이었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지금 여기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나는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방금 전과 같이 저절로, 무의식적으로 뻗은 것이 아닌, 명확하게 나의 ‘의지’로 인한 움직임이었다.
마침내.
허공을 지나가던 손은 철문에 닿았고.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한 치의 이질감도 없이.
내 마나 총량은 초월의 계위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