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28)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28화(128/350)
검은 철문에 손을 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이 되어 있었다.
총장은 그 공간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설명했었는데, 연관성이 적을 뿐 흘러가는 건 매한가지였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해득의 계위에 올랐던 것과는 달리 별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엄청난 개방감이 있다거나, 마력이 치솟는다거나 하는 감각은 전혀 없고 그저 몸이 개운할 뿐이다.
수면을 원하는 만큼 푹 취하고 일어났을 때의 느낌?
그것 말고는 차이를 모르겠다.
현재 이 소설 속에서 마나 총량이 초월에 다다른 이는 총장과 나, 두 사람.
그 수수께끼의 공간에서 문을 봤을 때는 분명 그러한 만족감이 들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높은 성취에 올랐다는 자만심과 콧대가 높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숙연해졌다.
초월은 끝이 아니다.
새로운 출발 지점일 뿐.
지금까지는 지표를 따라 쭉 항해를 했던 것이라면 이제는 아무런 섬도, 나침반도 없이 망망대해를 뻗어 나가야 한다.
이 뱃길에서 틀린 방향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만의 방향으로, 각자만의 속도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학문으로서의 진리이며 초월에 도달한 자의 특권 같은 것.
그러나, 나는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살아야’ 하니까.
이 순간조차 세력을 불리고 있는 알티프를 전멸시켜야만 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비교할 상대와 지표가 필요하다.
『앞으로 3일 후에 학생회장 선거, 1차 선출이 있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것도 좋지만, 학생 여러분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이 강당에 모여 있다.
나도 그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는데.
앞에 마련된 선단에 올라서서 느긋하게, 인자한 태도로 확성 도구를 잡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보인다.
허리는 굽어졌고, 생기도 힘도 없는 백발. 세월이 묻어나는 손.
그는 아카데미아의 총장, 굴레마시아였다.
내가 마나 총량 초월의 계위에 손을 뻗을 때 도움을 준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리고 나보다 훨씬 먼저 그곳에 도착했었던 존재.
『여러분들은 모두 귀한 존재입니다. 어느 누구랄 것 없이 동등한 권리와 의미를 지녔지요. …이번 학생회장 선거에서도 이 점을 항시 염려에 두고 참여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는 매번 연설을 할 때마다 학생들은 귀한 존재라는 말을 습관처럼 하였다.
평화와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
성자(聖子)라는 개념과 가장 합치할 것만 같은 노인이다.
전혀 성자 따위가 아니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저 대마법사의 위대함을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다.
그의 인품, 역사 이런 것을 전부 배제하고서라도.
하나의 분야에서 초월을 넘은 지금이라면 말이다.
‘멀리도 있군… 대체 얼마나 더 가야 도달할 수 있을지.’
한 분야에서 같은 초월에 속한다고 해도 속을 까 보면 전혀 같지 않다.
앞서 말했듯, 초월은 새로운 시작.
지금까지 걸어온 것 이상, 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죽을 때까지 나아가는 것.
그런 망망대해에서 총장은 나에게 유일한 지표가 되었다.
그의 뒤에도 까마득한 세상이 펼쳐져 있지만, 그와 나 사이에도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저 노인은 어떻게 저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이 늙은이의 말이 길어졌군요.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고 이만 마치도록 하죠….』
굴레마시아는 수분을 원하는 목을 큼큼거리며 가다듬더니, 다시 마도구를 가까이 대며 말한다.
『아카데미아는 사람을 위해 있고, 그 사람 속에는 여러분도 있습니다. 부디 그 사실을 잊지 마시길….』
그는 그 말을 마지막을 단상에서 내려왔다.
우연이라도 나와 단 한 번도 눈이 마주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 대사는 내 머릿속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 총장이 그곳에 있었던 인물과 동일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바로 지워 버릴 대사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랬다. 이걸 신기하다고 할지, 특이하다고 할지.
역시 묘한 노인이다.
***
강당에서 조례를 마친 뒤, 강의를 듣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아카데미아에서의 식사는 대한민국의 초중고처럼 급식의 형태가 아닌, 본인이 원하는 음식을 고를 수 있는 식당 형식인데.
날마다 고를 수 있는 메뉴가 달라진다는 점에서 대학교와 비슷하다.
…음식의 퀄리티는 아주 다르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은 그렇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기에 적당하게 영양소를 얻을 수 있는 식단으로 고른 뒤 자리에 앉았다.
주변의 이들도 모두 착석하고.
식사가 막 시작되었을 무렵.
음식을 한 입 넘긴 나는.
귀족의 예절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대화를 꺼냈다.
“에리카. 알리시아와 제법 높은 마나 공명도를 보일 수 있게 되었다고 들었다.”
나는 현재 식당의 한 4인용 테이블에 앉아 있다.
옆에는 알리시아가.
맞은편에는 에리카와 디피엘리아가 자리 잡고 있다.
이렇게 식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1차 선출이 얼마 남지 않다 보니 여러 가지로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어 마련했다.
에리카는 가지런하게 채소와 고기류가 담겨 있는 샌드위치를 작은 입안에 처음 넣으려다 말고, 나를 쏘아본다.
“일부러 지금 말 건 거지?”
“그럴 리가 있겠나.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다.”
“…….”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에리카는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접시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귀족의 식사 예절상, 입안에 음식을 둔 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알리시아와 디피엘리아도 눈치를 살핀 것인지, 입을 오물거리며 음식물을 삼켰다.
에리카는 말한다.
“식사 자리에서 말하긴 뭐하지만, ‘그 끔찍한 구덩이’에서 6일 연식으로 함께했으니까. 그 이후로도 알렉세리아 선배와 브락키움 선배의 집중 훈련을 받았기도 하고.”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전혀 합이 맞지 않아 튕겨 나가려던 두 사람의 마나는 현재 제법 자리가 잡혔다.
잡벌레 구덩이에서의 모든 훈련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면에서 안정화되어 있었다.
그 이후, 멈추지 않고 훈련을 지속했으니 현재는 더 발전했을 터였다.
에리카는 자신의 할 말을 모두 마치고는 대화가 멈추게 되자, 다시 샌드위치를 양손으로 들어 먹을 준비를 했다.
보고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적으로 질문한다.
“1차 선출이 있을 3일 후까지, 내가 안정화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수준까지 만들 수 있겠나?”
“…….”
에리카의 눈이 가늘게 좁혀지며 도로 접시 위에 샌드위치를 올려놓는다.
그러고는 아예 접시를 앞으로 밀어 버린 채 답했다.
“완전히는 아니고, 어느 정도라면. …그런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출력이 더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필요한 일이다.”
“어째서? 저번에 보여 줬듯 하면 되잖아. 그렇게 자랑을 하더니만.”
에리카가 언급하는 순간은 그녀들이 구덩이의 훈련을 마친 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체를 접촉하지 않은 채 그들이 만든 얼추 공명된 마나를 조절하였고 이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마나가 밖으로 표출되었다.
존재감만은 확실한, 밖으로 내보낸 마나가 사람의 눈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은 마나 총량이 초월의 수준이었다는 방증이었고.
이를 알고 있었던 알리시아를 제외한 에리카와 디피엘리아가 크게 놀랐다.
내가 새로운 경지에 오른 것을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기에 알고 있는 인물들은 거의 없다시피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에리카와 디피엘리아가 짓는 표정은 제법 볼만했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에리카의 의문에 대꾸했다.
“지금의 나는 그토록 수월하게 너희 둘의 마력을 조절하지 못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불과 며칠 전에 했으면서 지금은 안 된다니?”
나는 의문을 표하는 에리카와 집중하고 있는 알리시아와 디피엘리아를 한 번 훑으며 말했다.
“나는 현재 고유술식을 위한 ‘시련’을 받고 있다.”
“뭐?”
“도련님, 시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알리시아 또한 몰랐던 사실인지라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번거롭지 않게 모두 모여 있을 때 전하려 한 것이니 그럴 만하다.
“말 그대로다. 나는 현재 첫 번째 고유술식을 정립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 과정에 시련이 있는 것이고.”
“슈겐하르츠.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설명해. 고유술식을 연구하는데 시련이 필요하다고?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어.”
에리카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나를 찌른다.
확실히,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더 나아가 바르간이 연구했던 고유술식은 저주 마법 중에서도 성질이 나쁜 것.
얻기 위해서는 술자의 인내가 필요하다.
“나는 시련 기간 동안 본 마력의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한다.”
“…허?”
“그러니 너희의 마력을 오롯이 통합하여 사용하는 것도 저번처럼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말이지.”
초월에 오른 상태이니 절반이 깎여 나간다고 한들 아카데미아의 어떤 학생에 비해도 못지않을 정도의 출력과 총량을 사용할 수 있으나.
전과 비교하면 역력하게 부족하다.
나는 현재 스스로에게 저주를 건 상황.
쉽게 비교하자면 헤일리온이 건넸던 유물의 훈련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그때보다는 마나의 상황이 훨씬 낫긴 하지만, 그 당시와는 달리 가파르게 성장하고 하는 건 없다.
내가 나한테 저주를 걸었는데 그런 게 있을 리가.
갑작스러운 발언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에리카는 허탈해하며 어이가 없다는 듯 숨을 뱉더니, 이내 진정하고 묻는다.
“그 시련이라는 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데?”
“대략 6개월 정도면 되겠구나.”
“……하, 진짜.”
에리카가 말문이 막히자,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던 디피엘리아가 연이어 묻기 시작했다.
감고 있는 눈 주위에 우려의 굴곡이 생겼다.
“바르간. 그 고유술식… 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디피엘리아는 과거, 신탁을 통해 바르간이 사용했던 미완성된 고유술식을 본 경험이 있다.
그로 인해 용사와 학생들이 죽어 나가는 현장을.
바르간이 자멸해 가는 광경을.
성녀의 물음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손을 까닥이며 이에 대한 그녀의 여러 감정들을 밖으로 쳐냈다.
“성녀, 괜찮지 않으면 내가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다 필요한 수순에 지나지 않지.”
원작 바르간은 부족한 시간 속에서 단 2개월밖에 시련에 임하지 못하고, 미완성된 고유술식을 사용했다.
“좀 방식이 특이할 뿐, 남들의 고유술식의 연구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어떠한 길을 걸었는지를 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는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번 선출에서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은 적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너희 둘이 더욱 필요하다.”
나는 알리시아와 에리카를 연이어 바라보았다.
알리시아는 차분함 속에 걱정을 품은 것처럼 보이고.
에리카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두 사람은 이번 선출의 메인 스톤이다.
살며시 미소를 지은 나는 고개를 내리고 온기를 잃어 가는 스프를 바라보았다.
더 차가워지기 전에 먹는 편이 나을 듯하다.
“이쯤 하면 대충 오고 갈 것은 전부 끝났군. 마저 못한 식사를 이어 가도록 하지.”
나는 먼저 스푼을 떠서 스프를 담았다.
건더기가 입안에 굴러다니고, 미적지근한 스프가 혀를 감싼다. 끈적거리면서도 부드러운 식감.
또한 그 향과 맛은…….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시련으로 걸었던 저주가 마나의 통제만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쉬웠다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
괜히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소란스럽기나 하겠지.
“…….”
목구멍 뒤로 스프를 밀어 넣었다.
입안에 처음 들어와, 혓바닥을 지나, 뒤로 완전히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미적지근한 온기와 울퉁불퉁한 채소의 감각은 느껴졌으나.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어 허전했다.
…….
그렇게, 남은 3일이라는 기간은 갖은 훈련 속에서 아주 빠르게 지나가.
1차 선출의 날이 밝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