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69)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69화(169/350)
흑도가 된 나이아스를 쥔 채.
온 힘과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알리시아.
송글송글 맺힌 땀이 그녀의 하얀 뺨을 타고 내려온다.
검 끝을 바라보고 있는 눈은 날카롭게 각이 잡혀 있으며 맹금류를 연상시켰다.
주변에서는 아르텔리온이 그녀의 훈련을 지켜보고 있다. 그의 경험에 의거하여 직접 알리시아를 도와주고 있는 왕자. 그녀의 자잘한 움직임이나 호흡까지 확인한다.
나이아스에 모이는 푸른 오러의 기운.
더욱 응축시키고, 다듬는다.
얇고 굳세게.
견고하면서 확실하게.
아르텔리온은 눈이 멀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는 알리시아의 오러를 바라봤다. 특이하게도 오러는 사람에 따라 그 특질이 조금씩 달랐는데, 알리시아의 것은 깨끗한 빛깔이 눈에 띈다.
그녀의 성격을 닮아 강인하지만 청렴하고 순수한 색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괄목할 점은.
‘성장 속도가 경이로운 수준이다.’
최근 몇 주 동안 알리시아의 훈련을 도와주고 있는 아르텔리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만심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아르텔리온은 자신 이상 가는 검의 재능을 가진 자를 보지 못했다.
클레멘스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검은 아니니 제외하고, 자신의 멘토인 용사의 검도 훌륭하였지만 몇 년이 지나면 충분히 따라잡을 정도였다.
반면, 그녀는 어떠한가.
클래스전에서 알리시아와 검을 맞댈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날이 갈수록 그녀의 성장은 더뎌지기는커녕 날개가 달린 듯 솟아오르고 있다.
‘상당한 마나 총량과 안정된 마법이 그녀의 검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인가….’
바르간과 함께하면서 알리시아는 마법을 배우고 기반을 단단하게 굳힌 모양이었다.
마력은 곧 체력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이미 지난 시간 동안 필요한 요건을 다져 두었으니, 강풍을 만나도 최소한의 흔들림으로 날 수 있는 것이다.
아르텔리온과 훈련을 시작하기 전, 알리시아가 자신의 성장에 느꼈던 조바심이 남들이 봤을 때 기만으로 느껴질 정도로.
알리시아의 재능은 압도적이다.
아르텔리온은 처음으로 자신 이상 가는 재능의 소유자를 볼 수 있었다.
어째서 바르간이 알리시아를 움켜쥔 채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는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가능했다.
“…크읏.”
나이아스를 태우듯 번쩍이던 오러가 서서히 꺼져 간다. 알리시아는 끝까지 마나 회로를 돌리며 불씨를 되살리려 하지만 굳건히 버티고 있던 자세마저 흔들리게 된다.
결국 검의 끝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알리시아는 이에 지탱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그녀의 눈은 분한 기색이 역력하다. 저렇게 월등한 성장을 보이면서도 갈구하는 곳이 워낙 높다 보니 만족할 줄 모른다.
아르텔리온은 다가가 준비해 두었던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의 친절에 알리시아는 분한 기색을 지우고 미소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
아르텔리온은 묵묵하게 땀을 닦는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학생회장 선거에서 그녀의 일행에 의해 패배를 겪었음에도 신기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 쓰고 있던 일이 하나가 정리되니 깔끔하게 알리시아와 함께하는 단련에 매진할 수 있었다.
‘…지금의 상황에 즐거움을 느끼는 건가?’
단련을 즐긴다고…?
지금껏 게을리 살아온 적 없어 훈련을 빼먹은 적은 없었지만, ‘재미’를 느낀 적은 없었다.
성취감 정도야 있었다만 그것도 하루 이틀 가면 오래간 정도. 순수한 그 과정에서 이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다.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에 제 스스로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르텔리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의문을 가졌다.
“…….”
땀을 닦아 내던 알리시아의 초점이 멀어진다. 짓고 있던 웃음도 천천히 지워져 간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듯.
애절함마저 느껴지는 눈빛.
“…또 바르간을 떠올리고 있는 건가.”
아르텔리온의 말에 알리시아의 정신이 단번에 돌아왔다. 은방울꽃을 닮은, 온화한 미소를 도로 짓는다.
“제가 또 정신을 놓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아르텔리온은 고개를 저으며 죄송할 필요 없다는 말을 대신했다. 그는 묻는다.
“이번에는 또 어떠한 걱정을 하고 있었지?”
“아… 그게, 에리카 님과는 무사히 만나게 되셨는지,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지 염려가 되어…….”
알리시아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게 부끄러운지 눈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르텔리온은 더 이상 파고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타인을 부러워하게 된 것 역시 처음이군….”
“…예?”
알리시아의 커다란 눈이 깜빡거리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자, 그는 몸과 함께 주제를 돌렸다.
“오러의 예기가 상당히 좋아졌다. 이대로 훈련을 이어 가면 이번 학기 내에는 붉은 오러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아, 그렇군요…?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리시아는 앞으로 모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마나가 일정 이상 돌아오는 즉시, 훈련의 재개다.
***
“처음 만나게 되는군요.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 저는 슈겐하르츠 가문의 삼남, 바르간이라고 합니다.”
공간의 왜곡점에서 빠져나온 에리카가 사뿐히 땅을 밟는다. 그녀가 들고 온 여행용 가방은 가볍게 바닥과 부딪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자신을 향해 돌연 인사를 한 바르간. 에리카는 반달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바르간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보인다.
“과거를 청산하고 처음 만나는 것처럼 대하기로 약조를 했으나, 막상 단 한 번도 인사를 나누지 않은 것 같아 한번 해 봤다. 뭐든 일에는 격식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격식은 무슨. 그냥 나를 놀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놀리다니 그럴 리가 있나.”
바르간은 웃음기를 대놓고 걸어 둔 채 말했고, 에리카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대신 주변에 있는 여인 한 명을 흘깃 보며 묻는다.
“…그래서, 이분은 누구셔?”
“마데레로 길드 소속의 헌터다. 이번에 우리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지.”
바르간의 소개에 긴장하고 있는 여성이 고개를 숙인다. 그녀에게 달린 귀와 꼬리가 유난히 눈에 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 소속을 밝히며 입을 움직였지만, 에리카는 그녀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
“아인종인가 보네?”
“예, 예! 그렇습니다!”
“그중에서도 여우 종류고?”
“맞습니다. 과연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
에리카의 시선이 곱지 못하다. 여성은 이유 모를 차가운 눈빛에 흠칫 놀란다.
여성이 혹시 자신이 무슨 실례를 보였는지 물었지만, 에리카는 여성과는 관련 없는 일 때문에 그런 것이라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답하였다.
대신 이 모든 것을 알고서 상황을 만들었을 바르간을 쏘아보다가 틱틱대는 말투로 뱉는다.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말할게.”
“무엇을 말이냐?”
축제 날부터 지금까지.
바르간과 술을 마시고 나서 알고는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던 불만.
“슈겐하르츠. 너, 최근 나를 너무 써먹는 거 아니야?”
오늘까지도 말할 생각이 없었으나, 자신의 반응을 보며 즐기려는 슈겐하르츠의 반응에 에리카는 입에 담았다.
“선거야 디피엘리아를 위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렇다 치는데. 내가 너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알고 난 후로부터 벌써 몇 번이나 워프를 했는지 알아?”
바르간은 그 횟수를 세며 손가락을 접었다.
“다섯 번이로구나?”
“그냥 다섯 번이 아니야. 장거리, 그것도 이번 한 번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을 이동시켰었잖아.”
자신보다 타인을 이동시키는 데 훨씬 무리가 가기 때문에, 축제의 마지막 날 세 명의 4학년들을 이동시킨 에리카가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이다.
에리카는 투정에 가까운 말투로 말을 잇는다.
“심지어 지금은 2주 동안 너를 도와주려고 여기까지 왔지. …이 정도면 사실 빚을 다 갚은 수준이라고.”
그러나, 상대는 슈겐하르츠.
분명 말의 허점을 발견해서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에리카,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이번을 마지막으로 해도 나는 괜찮다.”
“뭐…?”
“마음의 빚이라는 게 정확히 수치화하거나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네가 그렇게 여겼다면 이번을 끝으로 더는 나를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그건….”
애초에 빚을 갚겠다고 말을 꺼낸 사람은 에리카였다. 빚은 바르간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대안책이기도 했다.
파혼을 하기 전.
모든 관계를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죽어 버린 라일라의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
“…….”
에리카는 입을 다문 채 눈을 피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손톱을 드러내며 털을 세우던 고양이가, 지금은 혼이 나고 풀이 죽어 버린 것만 같다.
바르간은 그런 에리카를 보며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웃음 지었다. 그녀의 가방을 들고 하얀이의 안에 넣어 버리며, 멈춰진 대화를 이끌기 위해 시선을 돌린다.
이들은 현재 세이만 협곡의 시작점에 서 있다.
좌우로 나란히 우뚝 서 있는 거대한 곡벽은 한참을 가도 끝이 없을, 구불구불한 길을 형성한다.
바르간은 그 거대한 협곡을 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출발하도록 하자. 시간은 부족하지 않지만, 낭비해서 무엇 하겠나. 안내원.”
“예?! 예, 예예!”
“앞장서라.”
***
세이만 협곡의 던전은 이미 발현되었고.
길드 마데레로는 이미 해당 던전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다.
여우의 귀를 가진 여인은 초반에 긴장하였으나, 시간이 지나자 능숙하게 바르간과 에리카를 안내해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가을이었음에도 제법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긴 했지만, 그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사실, 공중을 날 수 있는 사역마를 타면 단숨에 나아갈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세이만 협곡이 왜 세이만 협곡이라고 불리는지 아시나요?”
길을 안내하던 여성이 돌연 그런 말을 꺼냈다.
바르간은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느껴 답하지 않았고, 에리카가 대신 입술을 움직인다.
“십이신수 중 하나인 세이만이 살고 있는 협곡이라서 그런 거잖아.”
“맞아요.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걸어서 이동하고 있는 거고요.”
십이신수는 인간 만사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키며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 존재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세이만은 협곡에 나타나는 알티프만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고 사람종이 이동하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다만, 세이만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공역(空域)이었다.
세이만 협곡을 날 수 있는 생물은 오직 세이만뿐이다.
다른 존재는 자신의 영역에 침입하고 해를 주는 존재로 간주하여 죽인다.
교회의 비공정 역시 세이만 협곡의 상공은 우회해서 지나간다.
이는 세이만이 강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녀석의 존재의 손익을 따졌을 때 이득이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하늘을 사용하게 못하게 될지라도 대도시 브루템베르크로 향하는 길목을 철저하게 방어하고 있어 대부분의 알티프는 이곳을 지나지 못한다.
결국 공생의 관계로 지내기로 해 사람들은 세이만 협곡에서 하늘을 날지 않는 것이다.
“세이만은 길조의 상징으로도 불리고 있어요. 우연히 세이만 협곡을 지나가 멀리서라도 그 새를 본다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예부터….”
“입을 다물고 나아가기나 해라. 세이만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알고 있고, 하등 중요하지 않다.”
“앗! 넵. 죄, 죄송합니다.”
바르간의 제지로 인해 안내원은 입을 틀어막았고, 안전하게 안내하는 데만 집중하였다.
…….
그렇게 한참을 더 가자 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안내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는 게 좋겠어요.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준비를….”
“가림막 역할을 할 사역마가 있으니 괜찮다. 우리의 인기척도 함께 숨겨 줄 것이니 충분하다.”
바르간은 카멜레온같이 생긴 사역마를 소환하며 자신의 그림자 안에 있던 어둑이 역시 꺼내어 이중융합을 시켰다.
합쳐진 사역마는 부피를 늘려 돔의 형태가 되었고, 색은 물론이고 재질 역시 주변의 절벽과 같은 색으로 변하였다.
이를 보던 에리카가 묻는다.
“또 언제 그런 사역마를 늘린 거야?”
“미리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퇴보하는 게 세상의 법 아니냐.”
바르간이 둥그런 돔에 손을 대자 입구가 생겨 제법 큰 이글루와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안내원은 기껏해야 바람막이 정도를 준비했었는데 순식간에 완벽한 공간이 만들어지자 입을 떡 벌렸다.
바르간은 에리카를 보며 말한다.
“참고로, 따로 방이 없으니 같이 자야 하는데 괜찮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