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70)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70화(170/350)
슈겐하르츠와 포트레트.
두 가문의 연결 고리인 바르간과 에리카.
편지만을 주고받은 채 서로 얼굴을 본 적 없는 어린 시절. 화창한 봄날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에리카야. 제대로 서서 마주해야지. 계속 그러고 있으면 곤란하지 않겠니?”
식사를 하러 별실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서부터 간단하게 인사를 하는 양 집안.
에리카의 어머니, 리리안스는 온화한 말투로 에리카를 설득하고 있다. 어머니의 드레스 자락을 잡은 채 뒤로 숨어 있는 에리카. 빼꼼 얼굴을 내밀고는 있지만, 한쪽 눈동자 정도만 보일 뿐이다.
어린 에리카는 귀족의 예의범절을 숙지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상황은 어머니의 뒤에 숨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었다.
이를 흘긴 눈으로 바라보던 포트레트가의 가주는 엄격한 말투로 끌어낸다.
“에리카. 품위와 예의를 지켜라.”
“…….”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깔리자, 에리카는 리리안스의 드레스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 한 발자국씩 옆으로 나왔다.
부끄러움에 여전히 고개는 들지 못하고 있다.
설렘이 극대화되자, 심장은 요란하였고. 몸은 절로 쭈뼛거렸다.
또래 아이들보다 아기자기한 외모에 나풀거리는 드레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칼에, 나비를 닮아 떨리는 눈꺼풀.
에리카는 바르간의 앞에 서게 되었다. 좀처럼 얼굴을 올리지 못하였지만, 슬쩍슬쩍 눈을 올리며 바르간을 바라본다.
그토록 궁금했던 편지의 주인이다.
글에서 느껴진, 친절하고 어른스러운 그.
부끄러움을 비집고 올라오는 호기심에 자꾸만 눈이 간다.
바르간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가 컸다. 눈매는 날카롭고 콧날은 오뚝하다.
상상한 외모와는 조금 다른 그.
그래서인지 에리카는 더욱 바르간을 마주하는 게 쑥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의 차이가 낯설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바르간은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는 에리카에게 먼저 다가섰다. 그녀가 물러서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차근차근.
“당신이 에리카 님이시군요.”
이윽고 에리카의 앞에 선 바르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이번에 당신과 약혼식을 올리게 된 사람입니다.”
“…….”
대답을 하진 못하였지만, 에리카는 머뭇거리면서도 손을 뻗었다. 바르간은 부드럽게 그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에리카 님은 편지에서 보았던 대로 무척이나 따뜻하신 분인 거 같네요.”
상냥한 바르간의 웃음.
글에서 느껴졌던 어른스럽고 친절한 그의 모습이다.
약간의 안심감이 들자, 마주잡고 있는 손에서는 바르간의 온기가 전해졌다. 손이 차가운 에리카에게 그 온도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바르간은 이어서 말했다.
“부족하지만, 앞으로 에리카 님과 동행하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에리카 님.”
역시 대필이 아니었다.
편지에서 읽혔던 그의 말투다.
그가 적었던 글귀들을 직접 그의 목소리로 듣고 있는 것이다.
이른 봄날에 피어 있는 얼음꽃처럼, 옅게 쌓여 있던 얼음 송이들이 햇살에 녹아내린다.
어린 에리카는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아직은 작은 목소리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저, 저도…. 저도 잘 부탁드려요. 바르간 님…!”
그것은 이들의 첫 만남이자.
처음으로 손을 잡게 된 순간이었다.
***
바르간의 이중융합 사역마로 만든 돔.
그 안은 넓지는 않아도 일반적으로 필요한 가구들이 전부 있었다.
사역마로 인해 일시적으로 만든 것치고는 지나치게 뛰어난 완성도. 직접 만져 보더라도 사역마의 일부인지 실제 가구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다.
에리카는 그 안에서 까마귀 사역마인 까막이와 함께 있었다. 시야를 공유하며 고유술식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고농도의 푸른 마석을 하나 두고 워프 마법을 걸고 있다.
‘역시 마나가 있는 사물은 쉽지 않아… 아직 숙련도와 이해도가 부족한 건가.’
에리카가 현재 연구하고 있는 고유술식은 워프와 관련된 것.
워프는 그 자체로 고유성이 뛰어나 워프 마법 자체가 고유 마법의 종류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에리카는 좀 더 완전한 형태로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녀가 성취하려는 단계는 마나 회로를 가진 모든 생물의 절단.
워프 마법을 단순한 이동이 아닌, 좌표의 분리를 통해 무기로 사용하는 기술.
가령 사람의 상체와 하체를 연결하는 부근을 아주 얇은 층만 이동시키더라도 반 토막이 난 채 죽음에 이르는 위협적인 힘이다.
‘마나 회로가 가지는 고유성 때문에 간섭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게 문제야…. 마나의 적응도가 높은 생물일수록 더욱 어렵고.’
개인의 마나 회로는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일체 차단하는 기능을 가지는데, 물리적인 수단은 방어하지 못하나 워프 마법과 같이 직접적으로 타인의 마나 회로를 건드는 마력을 막아 낸다.
따라서 마나 회로가 없는 일반적인 사물이나 생물의 체내는 에리카의 마음대로 내용물을 빼내고 넣는 행위가 가능하지만.
마석이나 인간과 같이 마나를 가진 것들은 마음대로 건들 수 없다.
현재 에리카의 수준으로는 지성이 없는 사제급 알티프와의 전투에 사용 가능한 정도. 사제급 알티프 중에서도 독특한 형태를 보이는 ‘특이체’들에게는 조건이 갖추어져야지만 쓸 수 있었다.
워프의 고유성을 생각하면 에리카의 성취는 결코 낮지 않았으나, 자신보다 마나 숙련도가 높은 자.
즉, 강한 상대에게 사용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 점을 극복한다면 극도로 견고한 방어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법이 완성되는 것인데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도통 발전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워프의 특수성 때문에 자문을 구할 곳도 없으니 답답할 노릇.
계산이 틀리는 것도 아니고 마나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무엇을 더 해야…….
⎯까악!
공유하던 까막이의 시야가 갑자기 바뀌어 버린다.
자리에서 날아가 버린 까막이. 비추고 있는 것은 푸른 마석이 아닌 입구를 통해 들어온 남성이다.
“그래그래, 어여쁜 것. 옛 주인을 이리도 잘 알아보니 얼마나 영리한지 모르겠구나.”
바르간은 날아온 까막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털을 쓰다듬었다. 까막이는 이리저리 총총 뛰어다니며 몸을 비빈다.
에리카는 마나를 가라앉혔다.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까막이를 쏘아본다.
“자꾸 주인을 까먹는 것 같네. 교육을 다시 해야 하나….”
“주인을 까먹는 게 아니라.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난 것이니 좋게 보아야 할 일이다.”
“나보다 너를 따르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닌데?”
“그건 사역마에 대한 애정표현이 부족한 네 잘못이다.”
“…….”
에리카는 반문을 하지 못하였고.
영리한 까막이는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에리카의 눈이 매섭다. 도로 돌아가기 위해 날개를 펼치다.
⎯까, 까악, 까아악!
화들짝 놀라 에리카에게 달려들었다.
돌발 행동에 함께 놀란 에리카는 졸지에 튀어든 까막이를 품에 안게 되었다. 까막이가 놀란 이유는 뒤늦게 들어온 기괴한 생물체 때문이었다.
⎯그르릉.
여러 생물들이 복합적으로 섞인 것만 같은 괴물. 키메라 크라이가 돔 안으로 들어왔다.
“첫인상은 무섭게 보일지 몰라도 착한 아이니 무서워할 것 없다.”
바르간은 크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크라이가 내던 험악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바뀌며 골골골 소리를 낸다.
“…….”
에리카 역시 까막이와 마찬가지로 크라이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제법 긴장을 하게 되는 외관이었다.
바르간은 좀처럼 까막이가 진정을 하지 못하는 것 같자 크라이를 역소환하였다.
까막이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는 에리카는 함께 들어오지 않은 여인을 떠올리며 묻는다. 바르간과 함께 주변을 탐색했을 인물이다.
“안내원은? 왜 같이 안 들어와?”
“녀석은 밖이 좋은 것 같다. 혼자서 망을 보겠다고 자처하더구나.”
“…아무리 편파적으로 생각해도 거짓말이잖아.”
“뭐, 문지기 여우 한 마리 정도는 있어 줘야 하지 않겠느냐.”
바르간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어서 하얀 손수건을 펼쳐 보이더니 마술과 같이 그 안에서 따뜻한 우유 두 잔을 꺼냈다.
한 잔을 건네는 바르간.
에리카는 이를 받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국에 받았다.
“건강에 좋지 않으니 설탕은 넣지 않았다. 너는 단것을 지나치게 먹는 경향이 있으니까.”
“…내가 애인 줄 알아? 그 정도는 알아서 조절해. 그리고 우유에다가는 설탕 안 넣어 마셔.”
“오호?”
“…….”
“거짓말은 좋지 않다 에리카.”
“……”
아주 가끔 정도는… 기분전환 삼아 넣기도 하는데….
혼잣말하듯 작은 소리로 말하는 에리카. 눈을 피한 채 우유를 홀짝였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의 향이 몸 안으로 퍼졌다.
바르간은 작게 웃고는 에리카가 앉은 침대의 옆에 걸터앉는다.
“…굳이 여기에 앉아야 해?”
“매정하게 굴지 말거라. 내가 어디에 앉든 똑같다.”
“처음 만나는 사람치고는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것 같은데…. 네가 뱉은 말 정도는 지켜.”
“글쎄. 이유는 모르겠다만, 너를 처음 본 나라면 분명 지금보다 더욱 다가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만.”
“…….”
“손이라도 잡을 테냐?”
“…시끄러워.”
다시금 우유를 홀짝이는 에리카. 바르간은 장난스레 내밀었던 손을 거둔다.
⎯까악!
이만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까막이.
마치 분위기를 읽은 것처럼 자리를 피하려 한다.
에리카는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역소환진을 펼쳐 까막이를 돌려보냈다. 이 공간에 남은 인물은 정말로 둘뿐이게 되었다.
묘한 적막함이 감도는 돔.
에리카는 바르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먼저 입을 열며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전환시키려고 했다.
“길드랑 함께 던전에 들어간다고 하면 여러 팀을 꾸리는 게 정석적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는 거야?”
“그건 또 갑작스러운 질문이구나.”
“…갑자기 궁금할 수도 있잖아. 우리 말고 다른 팀도 없다면서. 나는 네가 마데레로랑 협업한다기에 길드의 간부쯤 되는 사람들이랑 함께할 줄 알았는데.”
“걱정되나?”
“걱정이라기보다는 이번에는 또 무슨 시꺼먼 계획을 세우고 있나 궁금한 거야.”
에리카의 질문을 받은 바르간은 고민하는 반응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말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는 소음이 동반되고, 소란스러운 어장에 물고기는 오지 않는다.”
“물고기?”
“그래, 아주 월척으로 말이다.”
바르간의 턱없이 부족하고 애매한 설명에 에리카는 가만히 우유를 마시다가 좁은 눈매로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차라리 싫다고 하지 그래?”
“토라지지 말거라. 첨언을 하자면 인원이 많을수록 위험성만 커지는 던전일지 모른다는 까닭도 있다.”
“그런 던전인지 아닌지는 미리 알 수도 없고 극히 드물지만 말이야.”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는 에리카. 애꿎은 우유를 들이켜며 깨끗하게 잔을 비운다.
바르간은 다 먹은 에리카의 잔을 자연스럽게 받아 도로 하얀이의 안에 넣었다. 자신의 우유는 마시지도 않은 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또 나가게?”
바르간이 밖으로 나가려는 듯 행동하자 에리카는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이미 주변의 탐색은 끝냈을 테고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이에 바르간은 태연스럽게 답한다.
“집 지키는 여우에게도 밥은 필요하겠지. 그리고 나는 수면을 거의 취하지 않는다.”
“어…?”
“이곳은 네가 독차지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바르간은 그 말을 남기고 정말로 미련이 없다는 듯 나가 버렸다.
바르간의 사역마로 만든 공간. 침대 하나.
에리카는 그와 같은 침대를 사용할 생각은 없었음으로 앉아서 자거나 모포를 펼친 채 바닥에서 자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주인이 나가 버렸다.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먹이더니 제 일을 마친 것처럼.
“…….”
홀로 남겨진 에리카는 분한 감정이 올라옴을 느꼈다. 침대를 덮고 있는 솜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처럼.
그의 행동이 ‘배려’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패배감이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신사인 척하기는.”
***
아침의 해가 뉘엿뉘엿 떠오르는 세이만 협곡.
누더기를 걸쳐 입은 검객이 성에 맞먹는 크기의 동굴의 입구 앞에 서 있다.
남자는 얇은 검 한 자루를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손잡이를 감싸고 있는 천 역시 누더기와 같이 허름했다.
“…….”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동굴의 안에서부터 퍼지는 울림은, 감각이 극도로 예민한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여기군….”
탐색을 마친 남자는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막힐 것 없이 곧바로 걸음을 뗐다.
동굴의 입구로 들어서는 검객. 마치 입구에 투명한 물이 차 있는 듯 검객을 중심으로 파문이 일게 된다.
깊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입구를 지났을 뿐인데 검객의 모습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남자의 형태와 같이 퍼져 나가는 파문도 곧 거치고.
다시, 아무런 것도 없는 것처럼.
던전은 시치미를 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