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71)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71화(171/350)
바르간 일행은 던전의 입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대한 동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던전.
그 어둑한 입구에는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 투명한 점막 같은 것으로 포장되어 있다.
저 막을 지나치게 되면 그때부터는 현실 세계와는 또 다른 공간인 던전의 구역이다.
“바르간 님이라면 느껴지시죠? 던전에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아요. 중심부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파장이 일정하지가 않아요. 내부의 형태가 지속적으로 변하는 던전이라는 뜻이죠.”
여우 귀를 바짝 세운 안내원은 그렇게 말했다. 바르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안내원은 말을 잇는다.
“이미 숙지하고 계시겠지만, 입장하기 전 마지막으로 말씀드릴게요.”
안내원은 눈매를 모은다. 조금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한다.
만약 일반적인 모습의 던전이라면 자신이 안내하면 되니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출발 지점이 개인마다 달라지는 던전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흩어지게 된다면 먼저 사역마를 통한 통신이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해요. 간혹 통신이 먹히지 않는 던전이 있는데 그럴 때는 가장 눈에 띄는 커다란 구조물 아래에서 모이는 게 좋죠.”
게다가, 에리카의 경우. 워프 마법은 시야의 확보가 중요한데 사역마끼리의 통신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야의 공유 역시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반드시 확인할 사항이었다.
“알겠어.”
에리카 역시 이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바르간은 에리카를 바라보았다. 내색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눈썹에 다소 힘이 들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리카, 만약 무섭다면 중도에 포기를….”
“내가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는 아니지?”
에리카의 당돌한 대꾸.
바르간은 어깨를 으쓱한다.
“뭐, 그건 그렇지.”
이어서 몇 가지 주의 사항의 언급을 추가로 끝낸 안내원은 몸을 돌렸다. 침을 삼키며 긴장감을 죽인다.
“그럼, 가시죠. 모두 무운을 빕니다!”
일행은 지체 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던전은 그들을 삼켜 버렸다.
***
물의 수면에 몸을 담그는 것 같은 감각을 지나쳤다. 밖에서 봤을 때는 그저 커다란 동굴에 불과했던 던전.
그러나, 막상 안으로 들어서니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 펼쳐졌다.
바르간은 차분히 둘러봤다. 주변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 아무래도 이번 던전은 유의했던 대로 입장 시 와해되는 구조인 듯하다.
사역마의 통신 역시 되지 않는다. 아마 에리카의 장거리 워프 마법 또한 사용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형태의 구조물이 보이는가? 그것도 아니다. 외부의 정경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 형태라 확인할 수 없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건….’
바르간은 옅게 마나를 뿌리며 대략적으로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을 확인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에리카, 안내원, 그리고….
‘있다.’
최정상급 주교 한.
그가 현재 같은 던전 안에 있었다.
그 역시 우리의 존재를 눈치챈 것 같다. 한은 기운의 감지에 특출나니 어쩌면 입구에 있을 적부터 눈치챘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에리카와의 빠른 합류가 급선무다.
에리카가 단독으로 한과 마주하거나, 내가 단독으로 한과 마주하는 경우는 피해야 한다.
과신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했을 때.
에리카와 자신의 힘을 합쳐야지 한을 잡을 수 있다.
개인으로 상대했을 때의 승산은 거의 없다.
또한, 파트너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에리카여야 한다. 한의 약점을 노릴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 에리카니까.
던전의 대략적인 파악을 끝낸 바르간은 품 안에서 등외품인 생명의 향수를 꺼내 뿌렸다.
가득 들어 있던 향수의 삼분지 일이 사라졌고. 고유 마법의 시련으로 인해 절반으로 깎였던 바르간의 마나가 기존의 상태로 돌아왔다.
“대충 어떤 구조인지 알겠다. 이래서야 마물이 발견되지 않을 법하지.”
바르간은 조소하며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긴 복도에 덩그러니 있는 한 아이.
10세 정도 되었을 날카로운 눈매의 아이는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숙해 보였으며 흉흉한 기운을 뿜어댔다.
“과거의 나인가. 재밌는 던전이로군.”
현재 바르간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10세의 바르간.
보아하니 길을 비켜 줄 생각은 없어 보인다. 침입자를 제거하기 위해 마나 회로를 움직이고 있다.
바르간은 가볍게 손목을 풀면서 준비를 하였다. 여유로움은 잃지 않은 채, 눈동자는 번들거린다.
“구슬 탑 훈련으로 같이 논 적은 있어도 이렇게 직접 싸우게 될 줄이야.”
이 한 녀석이 끝일 리 없다.
분명 복도를 지나갈수록 나이를 먹어 가는 자신과 싸우는 방식이겠지.
성취를 꾸준히 했다면, 혹은 노쇠하지 않았다면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보다 강할 리는 없고….
관건은 체력과 마나를 얼마나 비축하면서 전투에 임할 수 있냐.
마지막 관문에 이르렀을 때 전력을 다하는 과거의 자신을 쓰러트릴 수 있냐. 이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망설일 필요 없다. 어차피 상대는 던전이 만들어 낸 가짜.
서걱⎯.
착마마법을 통해 어둑이를 입은 바르간은 한순간에 10세의 바르간을 지나쳤다.
10세의 바르간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반응은커녕 상대의 움직임을 감지하지도 못했다.
어린 바르간의 몸통 중간에 붉은 가로 선이 생겼다. 확장된 동공은 채 수축하지 못하고 상체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진다.
복도의 찬 바닥과 부딪히자 그의 상체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남아 있던 하체 역시 마찬가지로 뒤를 따랐다.
“뭐, 당연한 결과지.”
바르간은 오른 손목을 움켜잡은 채 돌렸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손에도 마찬가지로, 어둑이로 만들어진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이래서 ‘한’이 흉포하게 바뀌게 된 것이었군….”
대충 이유를 짐작하던 바르간은 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고, 더욱 속도를 내게 되었다.
***
콰자작⎯!
에리카의 빙결 마법이 쏟아진다. 워프 마법을 통해 곳곳에서 솟아오르는 얼음기둥이 올라왔다.
그러나, 상대 역시 워프 마법을 사용해서 자신을 방어했다. 나풀거리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13세의 에리카는 이미 제법 워프 마법을 다룰 줄 알았다.
“칫.”
에리카는 처음으로 워프 마법을 성가시다고 느꼈다.
여태까지 자신이 사용하기만 해 봤지, 상대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에리카의 신경을 긁는 것은 워프 마법이 아니었다.
⎯있잖아. 지금 여기에 바르간 님이 계시다는 거지? 어때? 어떻게 성장하셨어?
10세와 11세를 처리하고 지나자, 세 번째로 나타난 13세의 에리카가 쓸쓸하다는 태도로 바르간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10세의 에리카는 자신이 바르간과 함께 럭셔리한 곳에서 식사를 했다며 자랑하였고.
11세가 끝날 무렵의 에리카는 바르간과 단둘이서만 놀러 갔다면서 얼굴을 붉혔었다. 손을 잡고 다녔다는데 부끄럽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었다.
13세의 에리카는 다른 에리카들과는 다르게 현재 던전의 어딘가에 있을 바르간에 관심을 보였다.
⎯최근 바르간 님이 기분이 안 좋으신가 봐…. 자꾸만 차갑게 대하시고… 추억이 담긴 편지를 찢어 버리셨어…. 너는 이유를 알고 있어? 그때가 되면 다시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거지?
13세의 에리카는 간절해 보였다. 제발 긍정적인 답변을 달라고 부탁하듯이.
던전이 만들어 낸 가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에리카는 불쾌함을 숨길 수 없었다.
희망을 가지려는 과거 자신의 모습이.
슈겐하르츠가 아닌 주변과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으려고 필사적인 어린아이가.
무척이나 짜증 났다.
⎯저기, 말해 주면 안 돼? 나를 죽이는 건 괜찮아. 너무 불안해서 그래…. 바르간 님께서 분명 큰 상처를 받으신 거 같은데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너무 괴로워.
13세의 에리카는 두 손을 자신의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곧 울 것만 같이 위태롭다.
⎯알려 주기만 한다면 더는 저항도 하지 않을 테니까… 부탁해. 바르간 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지금의 관계는 회복이 된 거지? 예전처럼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녀는 연이어 말한다.
불안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 급하게.
⎯나 있잖아. 바르간 님의 생일을 위해서 아주 귀한 마석을 준비했어. 내가 직접 구한 건 아니지만 정말 비싸고 좋은 물건이라고 했어. 바르간 님께서 분명 좋아하실 거야. 사이도 다시 좋아질 거야. 그렇지?
다시… 예전처럼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시는 거지?
어린 에리카의 질문에 현재의 에리카는 이를 악물었다.
여태까지 대꾸하지 않고 참아 왔으나 이 시절의 모습은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슈겐하르츠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녀석이 아니야.”
13세의 에리카는 그녀의 말에 집중하였다. 미래의 자신의 말을 조금이라도 잘 듣기 위해서 지팡이를 떨구곤 가까이 다가선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바르간 님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니… 그리고 왜 바르간 님을 슈겐하르츠라고 부르는 거야…? 약혼 관계잖아… 나는 바르간 님을 그렇게 부르지 않아.
에리카는 13세의 그녀에게 잔혹한 현실을 고한다.
연약한 그녀의 모습이 눈에 거슬렸기에.
자꾸만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에.
“며칠 뒤. 너는 슈겐하르츠에게 지독한 배신을 당할 거야. 그 상처는 평생토록 너를 괴롭힐 거고, 결코 지워지는 일은 없어.”
⎯……뭐?
“그러니까, 헛된 희망 품지 말고 현실을 봐. 아무리 눈을 돌리려고 해도 네가 보았던, 낯선 그의 모습이 진실이고 본모습이야.”
어린 에리카의 눈가가 떨린다. 불규칙한 숨을 뱉는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바르간 님과 5년을 같이했는데 조금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셨어. 몇 년이 지나더라도 분명….
“⎯녀석은 라일라를 죽였어.”
에리카는 듣기 싫다는 식으로 과거의 망령과 같은 시절의 말을 끊어 버렸다.
사라지지 않는 분노를 눈동자에 담은 채 멍청한 자신을 나무란다.
“그러니 제발 어리석은 짓 좀 그만해. 더 비참해질 뿐이야.”
그것은 현재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리저리 방황하지 말고.
그를 옹호하려 들지 말고.
라일라와의 추억이 바래지지 않게.
어린 에리카는 덜덜 떨며 부정한다. 바르간 님이 그러실 분도 아닐뿐더러 그럴 이유도 없다는 반론이었다.
그러나, 에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의 긍정도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
어린 에리카가 망연하게 중얼거린다. 다가오려는 걸음도 멈췄다. 되레 다가가는 것은 얼음의 창을 공중에 띄워 둔 현재의 에리카.
고통 없이 보내 주기 위해 창끝에 마나를 모았다. 한 번의 궤적으로 그녀를 편안하게 해 줄 것이다.
13세의 그녀는 계속해서 문장을 우물거렸다.
그녀가 에리카를 올려다본다.
⎯거짓말…. 너는 거짓말쟁이야….
“…….”
그 말을 들은 에리카는 눈가를 좁혔다. 마지막까지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꼬락서니가 추레하기까지 했다.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너는 미래의 내가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왜 그런 심한 말을 하는 거야. 왜 바르간 님을 욕보이는 거야……!
⎯왜…왜….
13세 에리카의 주먹이 원망스럽다는 듯 에리카의 양어깨를 때린다. 충격에 제대로 주먹을 쥘 힘도 없어 쓰러질 것만 같다.
에리카는 공중에 떠 있는 창을 조종한다. 마나를 머금은 얼음의 창은 고속으로 회전하더니.
⎯왜 바르간 님을 믿지 못한 거야….
쿠확!
순식간에 날아들어, 눈물 줄기를 흘리고 있던 어린 시절의 목을 떨어뜨린다.
분리된 머리는 떨어진 눈물방울이 먼저 연기가 되어 흩어졌고, 순서대로 사라져 갔다.
“…….”
에리카는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복도를 다시 나아갔다.
마지막에 뱉은, 원망을 담은 그녀의 대사가 메아리처럼 복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