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75)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75화(175/350)
“…….”
한의 이질적인 눈동자가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침의 안개와 같이 고적하지만, 명백한 인외의 것이다.
‘생명의 향수’의 지속 시간은 아직 문제가 없다. 적어도 이번에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여도 버텨 줄 것이다.
바르간은 언제든지 대응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몸에 적절한 긴장감을 주었다. 한은 검을 쓰는 알티프. 한순간의 판단에 목이 베일 수 있다.
그렇게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있자.
그의 뒤편에서 한 여성이 빠져나왔다.
“자, 잠시만요! 저희는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여성에게는 어떠한 마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떨리는 두 다리로 한과 우리의 사이를 막아섰다.
한과 관계가 있는 인물인 건가?
이상하군. 한은 단신으로 세이만 협곡의 던전에 들어왔을 텐데.
그녀는 누가 봐도 겁을 잔뜩 먹고 있었지만 용기 내어 말했다.
“두 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자,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부디 제 말을 들어 주세요!”
바르간은 차분히 그녀를 살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아니, 마나 회로를 갖지 못한 원시 인간. 그렇다면 이곳의 주민이라는 소리인데….
“너는 누구지?”
화살처럼 쏘는 목소리로 에리카가 물었다. 여성은 눈썹을 굳힌 채, 침을 삼켰다.
“저는 안나라고 해요. 이곳 우르나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시민 중 한 명이에요.”
“그런 걸 물은 게 아니야. 거기에 있는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를 물은 거지.”
“아… 이, 이 분은…….”
자신을 안나라고 밝힌 여성은 한과 에리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곡 없이 자신의 뜻을 전하고 싶은데 어려워하는 눈치다.
줄곧 입을 닫고 있던 한이 그녀를 대신하여 답했다.
“…자리를 옮기지.”
대화를 하기에 여긴 너무 소란스럽소.
한의 말은 타당하게 느껴졌으나, 그는 여신교의 주교. 에리카는 순순히 따라갈 수 없는지 눈가를 좁히며 쏘아붙인다.
“언제든지 우리를 죽이려 들지 모르는 적의 무엇을 믿고 자리를 옮기자는 거야.”
경계심을 최대치로 올린 에리카와는 상반되게, 한의 마나는 지극히 안정되어 있었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안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나는 그대들과 싸울 마음이 없소.”
“뭐라고?”
“잠시 이 여인의 말을 들어 주시오. 우리의 일은 그 뒤로 미루어도 늦지 않소.”
졸지에 검을 받게 된 안나는 이도 저도 못 하며 당황해하다가, 눈썹을 곧게 세우곤 에리카를 대면하였다. 입 근처의 잔근육들이 잔뜩 수축되어 있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제 이야기를 들어 주세요!”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알티프와 어떻게…… 슈겐하르츠?”
바르간은 잠시 에리카의 말을 멈추게 하였다. 공간을 짓누를 것처럼 무겁던 그의 마나의 압박감이 사라졌다.
“에리카. 저들을 따라가 보자꾸나.”
“슈겐하르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상대는 알티프라고!”
“위그드라실에 대한 네 신앙심을 모르지는 않으나. 저 여인은 던전의 주민임이 틀림없다.”
던전, 즉 마물과 알티프는 공생 관계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 척을 지고 죽이려 드는 원수 관계에 가깝지. 그런데도 한과 협력하며 우리까지 엮으려고 하는 걸 보면….
…속으로 판단을 마친 바르간은 말을 이었다.
“분명 던전의 공략과 관계 있는 일일 것이다.”
세이만 협곡의 던전은 일반적인 던전들과는 다르다.
그 사실은 이미 복도를 지나면서 확인을 마쳤다.
어떠한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이 던전은 주어진 임무가 있어 이를 클리어해야지만 나갈 수 있다는, ‘조건’이 필요한 듯하다.
외부와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까닭도 그런 탓이고.
“마땅치는 않겠지만, 우선 이야기를 쫓아야 한다. 던전의 주민이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경우에는 더욱이.”
“…….”
빛을 발산하던 에리카의 목걸이가 잠잠해진다. 경계 태세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바로 전투를 벌이지는 않겠다는 의사 표명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이지만 에리카는 바르간의 말을 따라 주었다. 바르간은 그런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너를 믿는 게 아니라 던전에 관한 슈겐하르츠가의 지식을 믿는 거야.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공격할 거니까.”
에리카는 길들여지지 않은 고양이와 같이 차갑게 대꾸하였다.
***
안나는 자신의 집으로 모두를 안내하였다. 한의 검을 품 안에 안은 채 앞장서서 나아갔다.
에리카는 한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마나를 민감하게 하였고, 바르간은 계속해서 그를 살폈다.
마나에서 느꼈던 대로 이성을 잃은 상태로 보이지 않는다. 소설에서 묘사된, 도로 미쳐 버린 한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광인 그 자체였는데.
아직도 평화를 즐기는 검객의 행색을 하고 있으니….
이 역시 빙의 이후에 연쇄 작용이 거듭되면서 바뀌게 된 것인가?
가능성이 없는 가설은 아니다. 아무리 견고하게 수를 예측하고 계획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한 인과관계가 있을 테니까.
일단 조금 더 지켜봐야겠다. 바르간은 잠정적으로 그리 결론 내렸다.
“우선 저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릴게요.”
안나가 말했다.
집에 도착하여 식탁에 둘러앉아 처음으로 뱉은 말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신원을 밝혔다. 직업이라고 부르기에는 뭐하지만 주로 빵을 굽는 일을 하고 있으며 별다른 것 없는 일반적인 시민이었다.
그녀의 특이점이라고 한다면 하나.
“저는 기운을 느낄 수 있어요.”
“기운?”
에리카가 추가적인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듯 되물었다.
“네. 마법을 쓸 수 있는 신비한 힘이요. 한 씨의 말을 빌려 말씀드리자면, 마나, 다르게는 마력이라고 불리는 것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듯해요.”
안나는 마법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전설에 의거해서, 최초의 마법사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 마법을 전파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은 한이 말해 준 것이 전부.
신기한 일이다. 마나 회로도 가지지 않은 자가 마력을 느낀다니. 이건 소설의 기존시대에서 더는 찾아볼 수 없는 경우였다.
“한 씨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마나를 느꼈기 때문이에요. 갑자기 우르나 안에서 거대한 기운을 가진 존재가 나타났음을 알아차렸고, 부리나케 달려갔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르간은 의문을 표했다.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곳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마법사라는 작자 하나를 제외하곤 전부 마물이라고 들었는데 죽고 싶지 않은 이상 이해가 되지 않는군.”
이 세계에서의 적은 알티프가 아니라 마물이다.
얼마 남지 않은, 항설과 같은 유사 역사에 따르면 최초의 마법사가 마왕을 토벌하기 전까지 마물들은 사람들을 죽여 왔고, 십이신수는 그들을 통솔했다고 했다.
사역마를 사랑하는 바르간으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소문은 높은 확률로 사실이고 마물은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는 듯하다.
그런데 마나를 느끼고 좋다고 달려 나가? 선후 관계가 이상하지 않은가.
바르간의 의문에 안나는 조심스레 답했다.
“…예전에 마법사님이 이 도시에 오신 적이 있었는데 한 씨에게 그때 느낀 것과 같은 선한 마나를 느꼈거든요. …저도 제대로 설명드리고 싶지만 추상적인 느낌이라 그 이상으로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요….”
“선한 마나라….”
“두 분에게도 선한 마나가 느껴져요. 한 씨나 마법사님과는 조금 형태가 다른 것 같지만요.”
“그럼 너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마법사인 줄 알고 달려 나갔다는 소리로구나.”
“…네. 맞아요.”
“마법사는 왜 찾으려고 한 거지?”
이번에는 에리카가 물었다. 안나는 에리카의 날카로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켕기는 게 있는 게 아니라 날 선 태도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에리카는 의문의 꼬리를 잇는다.
“우리까지 찾아온 걸 보면, 단순히 영웅을 보고 싶다는 이유는 아닌 것 같은데.”
“…정확하세요. 제가 마법사님을 뵈려고 했던 건 간곡히 부탁드릴게 있어서였어요.”
“계속 말해 봐.”
안나는 무릎 위에 올리고 있는 양손을 주먹 쥐었다. 입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잠깐의 머뭇거림. 그러나, 숨을 고른 채 담았다.
“오늘 자정. 우르나에 마물이 찾아올 거예요.”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각.
자정이 되려면 족히 10시간은 더 남은 시점에서 안나는 말했다.
“그냥 마물이 아니에요…. 아주 강한 마물… 지금까지 제가 느껴 본 적 없을 정도로 짙고 포학한 마나를 가진 마물이 다가오고 있어요.”
무리도 아닌, 한 마리의 마물.
안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점차 다가오는 존재의 힘을 다시금 인지하자 두려웠다.
그러나, 에리카는 그녀의 말을 믿기 어렵다고 했다.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네 힘이 설령 진짜라고 하더라도 아직 10시간도 더 남은 일이잖아? 무리도 아니고 한 개체가 온다고 하면 속도도 빠를 텐데 그걸 알아차리는 게 가능하다고?”
바르간은 가만히 대화를 지켜봤다.
에리카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당장 엘리트라고 불리는 에리카와 자신만 하더라도 이곳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셋이 전부이다.
단순히 거리만 따지더라도 몇 킬로나 몇십 킬로, 어쩌면 몇백 킬로는 될지 모르는 거리.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그 정도 떨어진 거리의 마나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녀의 말은 사실이오.”
평온하면서 단호한 음성.
한이 입을 열었다.
“십이신수… 그 이상 가는 기운을 가진 존재가 이곳으로 오고 있소.”
그에 말에 바르간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근거는?”
“나도 이 여인과 같은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알 수 있소. 이 던전의 전조 현상을 알아차린 것도 그 덕이지.”
“오호라.”
재미있는 일이다.
최근 마데레로 길드에서 던전의 전조 현상을 느낄 수 있다고 거짓을 뱉은 참인데 이렇게 진짜를 만나게 되다니.
한이 어떻게 던전의 발현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는지 의문이었는데 그 때문이었나.
단순히 던전의 전조 현상을 느끼기만 하던 것도 아니었군. 마나에 대한 감응성이 지나치게 뛰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원작에서 알지 못한 정보이니, 권능의 일부 같은 건 아니다. 한이 쓰는 권능은 알고 있으니까.
그의 언급대로 ‘체질’이라는 표현은 적합하다.
하지만 바르간은 정보를 더 끌어내기 위해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체를 했다.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진즉부터 던전을 쓸고 다닐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서야 움직였다는 게 이상스럽다.”
“…….”
대답을 하기 싫은 것인지 고민하는 것인지. 한은 한동안 시간을 끌다가 밝혔다.
“지금까지의 던전들은 들어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소.”
“그 말은 즉, 이번 던전에서는 그 이유가 있다는 뜻이군.”
한은 대답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간은 이를 보며 생각했다.
한은 원작에서 홀로 이 던전을 깬 적이 있다. 방금 십이신수에 비견되는 강자라는 사실을 말한 것으로 봐서는 전력도 대강 파악한 상태.
그런데도 굳이 안나와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그 말은, 혼자서 이길 수는 있지만 상대하기 버겁거나,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라는 뜻인데.
고독을 즐기고, 아직까지는 인간을 적대시하지 않으려는 그가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를 끌어들였을까? 심지어는 남을 속이는 데는 재능도 없는 듯한데 말이다.
머릿속으로 한 가설을 성립한 바르간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마물이라는 게 네놈보다 강한가 보군.”
“…그렇소.”
역시.
바르간은 이해를 끝마쳤다.
한 던전의 기본적인 성질은 그 안에서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이 던전의 초입 부분인 복도를 떠올리면 상대에 따라 맞춤형으로 적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중앙에서는 모두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강력한 적이 등장한댄다.
게다가, 한은 위치를 파악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오기 전에 미리 그 마물을 잡으러 떠나지 않고 기다렸다.
‘던전에 들어온 인원의 힘과 비례해서 적이 강력해지는 구조. 마나를 쓸 수 없는 주민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안내원은 죽어 버렸지만 한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탁드릴게요. 부디 우르나를 구원해 주세요!”
바르간이 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 동안, 마찬가지로 말을 잇고 있던 안나. 그녀가 참아 왔던 감정을 보였다.
“아무도 제 말을 믿지 않아요. 몇 번이나 강한 마물이 오고 있으니 모두 대비해야 한다고 했는데도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그녀는 일찍이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렸으나, 도시는 그녀를 묵살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모든 사람들이 생업을 중단하고 도주하면 경제가 굴러가지 않을 테니까. 평범한 사람의 호소쯤은 차마 들을 수 없었겠지.
“우르나는 정말 좋은 곳이에요. 저는… 저는… 이곳의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걸….”
안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근처에 앉아 있던 에리카의 손을 붙잡으며 부탁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걸 다 드릴게요. 마물을 퇴치하고 나면 도시의 사람들에게 말해서 자금도 최대한 마련해 볼 테니까….”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안나는 기도하듯이 말했다.
이에 바르간은.
“그래 좋다. 지극히 선량한 우리가 도움을 주도록 하지.”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하나, 조건이 있는데 괜찮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