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79)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79화(179/350)
날개를 잃은 세이만은 저돌적으로 공격하는 한과 바르간을 막지 못했다.
순식간에 상황은 역전되었고, 결국에는 세이만의 거구가 지진과 같은 울림을 남긴 채 땅으로 쓰러졌다.
에리카는 쓰러진 세이만의 위에 있다.
힘을 잔뜩 짜내어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가쁜 숨을 내쉬며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샅샅이.
‘계위가 상승했어….’
고위의 끝자락에서 올라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마나 총량. 일순간이고 강압적이었으나 그 위의 단계를 직접 체험한 에리카의 성취는 한 단계 올라 있었다.
워프 마법 역시 마찬가지.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도저히 변하지 않았던 자신의 한계가 시원하게 돌파되고 상승기류에 탄 기분이다.
숨은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으나, 개방감에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두 분야가 동시에 ‘해득’의 계위에 올랐다. 평생을 오르지 않을 것처럼 갑갑하더니 더 이상 그런 감각이 들지 않는다.
잃어버렸던 방향도 도로 찾아졌다.
한 번 높은 수준을 경험하게 되니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거 보거라. 내가 뭐라고 했는가. 분명 이로운 일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쩐지 거만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실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잔뜩 으스대며 말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에리카는 고개를 돌려 바르간을 쳐다보았다. 바르간은 에리카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눈을 마주했다.
“…정말로 도움이 되긴 했네.”
살짝 튀어나온 에리카의 입술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 제대로 듣지 못한 바르간. 그녀가 말한 바를 재확인하기 위해 되물으려 하자, 에리카는 재빨리 주제를 돌린다.
작은 발로 세이만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 그것보다. 이제 슬슬 숨통을 끊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제대로 목숨을 끊어야 이 과거의 세계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까.”
바르간은 십이신수인 세이만을 천천히 살폈다.
아직 세이만은 살아 있다.
미약하지만 심장 활동을 이어 가며 연명을 하기 위해 발악했다. 그러나, 세이만이 입은 피해가 막대하여 곳곳에서 살점이 생성되는 자가회복은 의미가 없는 것과 같았다.
이대로 가만히 두어도 죽음에 이르게 될 터이다.
“녀석을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빠르게 끝내 주는 게 좋겠지.”
시간이라는 자원은 유한하니까—그렇게 말하려던 바르간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협력하여 세이만을 쓰러트렸던 한의 붉은 오러가 다시금 피어났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서 하는 것이냐.”
바르간은 자신들을 향해 검을 내밀고 있는 한에게 말했다.
누더기를 입은 채, 머리를 묶은 검객.
직접 세이만에게 검을 휘두르며 상대한 만큼 상처가 적지는 않았음에도, 고적한 눈에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틈이 없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곧바로 베어 버릴 거라고 말하듯.
고요한 살기까지 뿜어 대며 검 끝을 내밀고 있다.
“알기 쉽도록 표한 것이오.”
“오호라. 이용할 만큼 이용했으니 베어 버리겠다 이 말이냐? 토사구팽이 따로 없구나.”
“…….”
지그시 눈을 감은 한. 무언가를 회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눈을 감고 있어도 방심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다시 한의 눈꺼풀이 떠지며, 마른 입술이 움직였다.
“그대는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왔을 적부터 나를 쫓으려 하였소.”
“목적지가 같으니 어쩌겠는가. 결국 던전의 중심부에 도달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냐.”
“아니오. 그대는 내가 있을 것을 예상이라도 하듯 마나를 움직였소. 단순 수색을 위해서가 아닌, 특정 대상을 지정한 마나였음을 기억하오.”
한의 말은 정곡이었다.
그러나, 바르간은 천부적인 연기력을 선보이며 부정했다.
“즉, 내 목적이 던전의 돌파가 아닌 너였다 이 말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여신교 주교의 동선과 던전의 발현을 동시에 알 수 있다고 여기다니. 그런 신비가 가능하다면 나는 마법사가 아니라 점쟁이가 되었을 것이다.”
한은 아무 말 없이 바르간을 살폈다. 당당하며 떨림 없는 눈. 얼굴의 근육 역시 수상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다.
완벽하게 진실된 모습.
그러나, 오히려 지나치게 완벽해 보여 속을 알 수 없다. 눈썰미가 좋은 한이었지만 바르간의 생각은 좀처럼 읽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숨기는 게 능숙한 사내다.
바르간을 바라보던 한은 나지막하게 뱉었다.
“나도 내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소. 하지만, 그대라면…. 어쩌면 정말로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소.”
“꽤 고평가로군.”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자진하여 괴물이 되려는 자. 내게는 그대가 그리 보이오.”
“방심할 수 없으니 나중에 더 방해가 되기 전에 잘라 버리겠다는 뜻인가…. 뭐, 그래서 어쩔 거냐. 지금 당장 치고받고라도 할 생각인가?”
바르간은 시니컬하게 물었다. 싸움을 굳이 건다면 피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
한의 시선이 이번에는 에리카에게 향한다.
에리카는 이미 충분히 무리를 하여 더 이상 마나를 쏟아 내면 마나 회로가 손상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데도 언제든지 대응할 수 있도록 마나를 빠르게 순환시키고 있다.
그녀의 눈에도 바르간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이란 없었다.
“저 여인의 마법 역시 위협적이오.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저 거대한 세이만의 날개를 잘라 낼 정도의 힘이라면 나 역시 무사하지 못하겠지.”
한의 카운터는 에리카다. 바르간도 그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에리카를 이번 던전에 데려왔다.
결국, 바르간과 에리카. 이 둘은 한에게 있어 훗날 커다란 적이 될지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에리카가 대규모 워프 마법의 시전으로 인해 지쳐 있고 바르간의 더 성장하기 전인 지금이, 어쩌면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몰랐다.
자신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테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
한은 서서히 검을 내렸다. 그의 검날에 빛나던 붉은 빛도 흩어졌다.
철컥. 검을 집 안에 넣자 철과 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살기를 지운 그가 말한다.
“나는 사람이 되고 싶소.”
하지만,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하다못해 사람 흉내를 내는 괴물이 되고 싶소.
한은 바르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의 뜻을 이들에게 전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칼을 들이민다면… 나는 더 이상 사람 흉내조차 내지 못하게 되겠지.”
알티프가 인정(人情)을 말한다.
함께 공동의 적과 싸운 전우를 그 자리에서 바로 해할 수 없다며 검을 거둔 것이다.
“훗날에 재난이 일지 몰라도, 지금은 그대들과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는 게 본심이오. 그대들이 허락한다면 더는 분쟁 없이 이곳에서 목적을 달성한 뒤 빠져나가고 싶소.”
“분쟁 없이라…. 괴짜인 건 확실하구나.”
바르간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에리카는 여전히 경계 태세를 했다. 바르간은 싸우고 싶지 않다는 한의 의지를 확인하자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좋다. 지금 이곳에서 싸워 봤자 서로 의미 없는 피를 흘리게 될 듯하니 네 뜻을 따르도록 하지.”
미치광이 과학자 추기경 제파르.
원작에서는 미래에 그의 수하가 되는 한을 미리 잡기 위해 이곳에 온 바르간.
그런 그가 한의 의견에 동조하며 한발 물러서기를 택했다. 그가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한은 간단한 묵례로 감사를 표하곤 이어서 자신의 목적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기억을 되찾고자 하오. 다른 것은 탐내지 않으니 전부 가져가시오. 나는 내 죄의 무게를 알게 된다면 빈손으로 이곳을 떠나겠소.”
“한데 방법은 알고 있는 거냐.”
“모르오. 다만, 세이만은 이 던전의 주인. 이 생명을 앗아 가면 어쩌면….”
한은 말을 이으려다가 홀연히 나타난 여성을 보게 되었다.
그 여성은 소리 소문도 없이 이들과 함께 존재했다.
“안나?”
에리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이만의 토벌을 부탁한 그녀. 기분 탓인지 살짝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안나가 걸음을 멈췄다.
별다른 대꾸를 보이지 않고 세이만의 심장 부근에서 신비로운 기운을 뽑아냈다.
두근두근.
그 기운은 심장 고동과 같이 지속적으로 울렸고 곧 반짝거리는 작은 별들로 만들어진 심장의 형태가 나타났다.
세이만의 심장.
처음 보지만 느껴지는 마나에서 그것이 세이만의 심장을 축소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의 고동이 점차 약해졌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심장은 천천히 죽음을 맞이했다.
바르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안나를 살폈다. ‘…역시 그런 거였나.’와 같은 문장을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이 던전의 진정한 주인은 너였구나 안나.”
원작에서 한이 세이만 협곡의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서, 이후 몰려든 사람들은 던전에서 시체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시체는 던전의 주인으로 추정되고, 젊은 여성의 외관을 하고 있었다.—라고 묘사되어 있었다.
세이만이 이 기억의 주인이라고 하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는데 과연, 안나가 기억의 주인이면 말이 된다.
세이만의 심장을 정지시킨 안나는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봤다.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한 눈을 한 채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들….”
그녀는 가녀린 음성으로 말했다. 세이만으로부터 우르나를 구해 줘서 정말로 고맙다고. 이윽고 바르간의 말을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이곳은 제 기억 속. 제 생전 마지막 기억이에요.”
본래의 역사에서는 세이만에 의해 멸망해 버린 도시 우르나, 체질적으로 마나 민감성이 뛰어났던 그녀는 시민들을 설득하려고 온갖 수를 벌이지만 결국 대피시키는 데 실패.
마법사라고 칭송받는 존재 또한 나타나지 않은 채 세이만은 아무런 방해 없이 도시에 도착했고 모든 것을 파괴했다.
안나 역시 그때의 피해자였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거를 개변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우르나가 구해지는 장면을 보고 싶었다는 건가. 같잖군.”
바르간은 경멸에 가까운 어투로 뱉었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자기만족일 뿐. 바르간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고였다.
안나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바르간에 말에 부정을 하진 못하지만 긍정하지도 않았다.
“우르나가 파괴되지 않은 모습을 보고 싶었어요. 평화로운 땅에서 번영하는 우르나의 미래를요….”
세상의 모든 사물이 빛의 조각이 되어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한이 풀어지자 던전이 만들어 낸 세계는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주륵. 안나의 입가에서 피가 흘렀다. 안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야속한 일이에요. 세이만의 심장이 곧 제 심장이라니. 던전은 심술궂은 거 같아요. 결국 제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은 볼 수 없으니까요.”
던전이 발현되었을 때 재형성된 안나의 인격은 자신의 욕망과 던전의 구조를 알았다고 했다. 기억 속의 우르나를 구할 순 있지만 그 결과를 보지는 못하는 그녀.
살짝 어긋난 희망의 형태로 던전이 구성되었다.
안나는 한, 에리카, 바르간의 순으로 모두를 훑어보았다. 허리를 깊이 숙여 다시 한번 진심 어린 감사와 사과를 표했다.
“제 후회 때문에 여러분들을 고생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
그녀는 세이만을 무찌를 대가로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많지 않다고 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누군가에게는 인격이 바뀔 정도로 커다란 의미가 있을지도.
그리고 또, 누군가에게는 끔찍하고 괴로운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의 형태가 어떻든 소중하게 다뤄 주세요. 더는 아프지 않게요.”
안나가 서글프다는 듯이 말했다.
부탁에 가까운 그 마지막 문장을 끝으로. 피가 섞인 기침 소리가 들렸고.
이 기억 속 세계의 모든 것들이 빛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