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80)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80화(180/350)
‘여긴… 어디지?’
순백의 공간에 홀로 남겨진 에리카.
주변을 살피며 확인하려고 들지만 아무런 정보도 파악할 수 없다.
마나를 넓게 퍼트려도, 목소리를 내도, 돌아오는 것은 고요.
안나의 말을 듣고 빛의 공간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자신은 이런 영문을 알 수 없는 장소에 떨어졌다.
‘아직도 안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가?’
설마 던전의 실수로 허무의 공간에 남게 되었다는 결과는 아닐 터….
그렇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에리카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발을 묶어 두고 있어서야 시야가 제한되어 있으니 자리를 옮기면서 직접 살피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가도 배경의 형상이 바뀌지 않는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어디가 위이고 아래인지조차 헷갈린다.
그녀의 걸음에 속도가 붙는다. 너무나도 낯선 상황에 부닥치자 두려움이 꿈틀꿈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체력이라는 개념도 없는지 제법 빠르게 뛰어도 숨이 차지 않았다.
허무와 무지는 공포를 나았고.
에리카는 어느새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고 있었다.
“슈겐하르츠…! 슈겐하르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를 불러 댔다. 메아리조차 대답을 주지 않았지만, 얕게 떨리는 입술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이 더 지났을까.
아니, 시간이라는 감각조차 모르겠으나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났을 터이다.
드디어 다른 사람이 보였다.
“슈겐하르…츠?”
에리카의 멈춰 선 걸음 앞. 서 있는 소년의 모습은 너무나도 그와 닮아 있었다. 마치 13세의 바르간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소년이 풍기는 느낌은 너무나 유사했다.
소년은 에리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 눈동자를, 가만히 그녀에게 두었다.
그러다가.
“어디, 어디 가…! 어디 가는 거야!”
소년이 에리카를 뒤로하고 움직이기 걸어 나갔다.
에리카는 소년을 쫓았다. 아무것도 없는 세계의 유일한 존재인 소년. 지금 놓치면 결코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의 두 발이 급하게 움직였다.
소년의 걸음은 결코 빠르지 않아 보였으나 너무나도 쉽게 멀어져 갔다.
에리카의 열 걸음의 그의 한 걸음처럼 느껴진다.
전력으로 달려야 겨우 소년의 걸음 속도와 같은 정도. 에리카는 소년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름도 모르는 소년을 불러 대며 달렸다.
“멈춰! 멈춰 줘!”
소년은 대답하지 않는다.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저 그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묵묵하게 나아갈 뿐.
“그게 안 된다면, 나도 같이 갈게…! 조금만 천천히……!”
에리카의 보폭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녀의 시야도 낮아지며 소년이 크게 느껴져 갔다.
소년을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도, 한참을 여물지 못한 소녀의 음성이 되어 있었다.
“부탁이에요… 저도… 저도 같이 갈래요…! 혼자 남겨 두지 말아 주세요. 바르간 님!”
어린 에리카는 그를 불렀다.
소년이 도착하고자 하는 곳에는 순백의 세계에서 어울리지 않는 색상이 존재한다. 익숙한 저택의 모습. 그런데….
…어라. 내가 왜 저 애를 ‘바르간 님’이라고 부르는 거지?
***
던전의 중심부에 서 있는 바르간.
안나의 기억이 빛으로 환원되고 난 후, 바르간은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바르간의 옆에는 키메라 사역마인 크라이의 등 위에서 에리카가 잠을 자고 있다.
악몽이라도 꾸는 것인지 미간이 일그러지기 일쑤. 그래도 제대로 숨은 쉬고 있었고 마나의 문제도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깨어날 것이다.
바르간은 에리카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난 후, 눈앞에 보이는 빛에 집중하였다.
‘나를 유인하는 건가.’
빛은 발자국과도 같이 공중에 떠 있는 채 방향을 제시했다.
바르간은 이를 살폈는데 평범하게 마나를 가시화한 것에 불과했다. 던전이 그를 불렀다.
바르간의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그 안에서 어둑이가 튀어나왔다. 그가 명령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일어나는 건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어둑이는 빛의 흔적에 관심을 보였다.
“따라가자는 거냐.”
어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간이 에리카가 염려된다는 듯 흘겨보자, 그녀를 업고 있는 크라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크르릉거리며 목울대를 울렸다.
바르간은 옅게 미소를 짓곤 어둑이와 함께 빛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자국은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얼마 걸으니 곧바로 막다른 벽에 다다랐고, 빛은 문양이 되어 벽에 새겨져 있었다.
바르간이 그 앞에 도착하자 벽에 새겨진 빛의 문양이 변하며 술식이 해제되었다. 벽은 허물어지고 사람 한 명이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 뚫렸다.
이런 현상이 있었다고는 원작에서 확인한 바가 없다.
별도의 조건을 채웠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바르간은 고민을 잇다가 결국에 안으로 들어갔다. 어둑이가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검은 이불을 뒤집어쓴 아이 같은 게 위아래로 움직여 대며 의사를 표출하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구멍의 안에 들어가자 작은 제단 같은 무언가가 보였다.
그 위에는 독수리는 될 법한 크기의 날개 한 쌍이 있었다. 깔끔하게 절단된 날개는 에리카를 고생하게 했던 무언가와 많이 닮았다.
‘세이만의 날개… 그 축소 버전이라.’
세이만과의 전투 중 날개의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면밀히 살펴서인지 어렵지 않게 비슷한 재질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과 비교하면 떨어지지만 어지간한 수준의 물리력을 방어하는 데는 문제 없이 튼튼할 터이다. 등외품까지는 아니더라도 1품은 족히 하겠지.
‘이 역시 원작에서는 조금의 힌트도 없었던 물건이다. 전개가 달라졌으니 대가로 지급되는 물건이 달라졌다…? 개인마다 주어지는 보상이 다른 건가?’
바르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날개의 앞에 바짝 서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어둑이. 애초에 눈이라는 기관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녀석은 그것을 만지고 싶다는 듯 강하게 의사를 표출했다.
“이걸 먹고 싶다고?”
끄덕.
“제대로 소화할 수는 있겠느냐.”
끄덕끄덕.
다소 흥분한 듯한 어둑이의 머리가 반복해서 움직였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분명 의미가 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결정을 내린 바르간은 어둑이가 날개를 다루는 것을 허락했다.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어둑이는 슬라임처럼 늘어났고, 제단을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날개를 삼킨 어둑이.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소화를 시키고 있는 것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곧 움직임을 멈춘 녀석. 갑자기 날개가 돋아난다거나 하는 현상은 없다. 외관상으로 생긴 이상이나 변화는 없는 듯하다.
어둑이를 살피던 바르간은 착마마법을 시도했다.
어둑이는 금세 바르간의 몸을 감싸며 검은 정장의 형태로 모습을 바꿨다.
“착마마법 시에는 외관에 미세한 변화가 있군.”
아무런 무늬가 없던 정장에 작은 패턴이 생겼다. 빛을 비추어야 옅게 보이는 형식이다. 바르간은 곧바로 마나를 돌렸다. 외관보다 중요한 건 내용물. 성능이다.
확인을 마친 바르간은 길게 미소 지었다.
‘물리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이 대폭 상승했다.’
본래 바르간이 지니고 있던 저항력과, 어둑이가 가지고 있던 방어력, 착마마법의 효과에 이번 유물의 성질이 부여되었다.
‘이 정도라면 안나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세이만의 날개와 비견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을 정도이겠구나…!’
녀석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철통방어는 하지 못해도 수준이 대폭 상승했다. 이 정도라면 주교 한의 일격조차도 몇 차례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고 보니 이제 막 던전을 나간 것 같군.”
바르간은 한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게 되자 그렇게 말했다.
조금 전, 기억의 세계에서 막 빠져나왔을 때.
바르간은 한을 다시금 경계했었다. 안나가 그에게 준 것이 그가 잃어버렸던 기억일 가능성이 높아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던 한은 말했다.
—나는 정말로 끔찍한 삶을 살았었군….
마땅한 연유도 없이 살인하고.
그저 흥밋거리로 마을을 불태운다.
어미의 배를 가르는 것은 아이의 비명을 듣기 위함이요.
아이의 목을 베는 까닭은 부모의 피눈물을 보기 위함이다.
—아주 일부분만의 기억이 돌아왔는데도 이 정도라면…. 모든 기억이 돌아오고 나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겠소.
그는 아직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그 기운이 전에 비했을 때 탁해졌을지 몰라도, 먹은 백지를 적시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죄스러움과 우려가 실려 있었다.
구름이 얹어진 듯 뿌옇던 협곡의 안개가 걷혀 가는 감각.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기억을 모조리 회복한다면, 그 변화를 버틴 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대들을 해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시오. 적어도 현시점의 나는 그대들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소.
한은 그대로 물러나려 했고 바르간은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
그는 인격을 유지하고 죄의 무게를 버티는 것 역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이라면서 당분간은 사람을 멀리하고 은신하여 자신을 다스리는 데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로 광인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으니 이를 방지하고자 장치도 해 둘 것이라고.
바르간은 멀어져 가려는 그에게 제안하였다.
‘이성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테니 나를 위해 몇 가지 일을 해 주지 않겠느냐.’
그러나, 한은 단번에 거절하였다.
그는 누군가의 아래에 들어가는 것도, 누군가의 명을 듣는 것도 원치 않았다.
자신의 죄를 청산해 가며 세상을 떠돌며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내 죄를 남이 같이 지는 것은 옳지 못하오.
한의 확고한 의지를 재확인한 바르간은 아쉽다고 말하며 가만히 그를 보내 주었다. 두 사람은 별다른 인사랄 것도 없이 그렇게 헤어졌다.
“한이라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역시 대단하군.”
벽의 구멍에서 빠져나온 바르간.
자신이 이곳에 온 최초의 목적을 떠올리며 여러 변동 사항과 기타 조건들을 따지며 계산했다.
그 끝에 나온 값.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는 말하는 뉘앙스와는 달리, 길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
한은 던전의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서서히 머릿속에 채워지는 악하고 폭력적인 자신과 싸워가며, 보이기 시작하는 빛을 향했다. 지난날의 과오는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버티기 힘들었으나 이 역시 죗값의 일환.
견뎌 내야지만 진정으로 괴물을 벗어날 수 있다.
끔찍한 괴물의 삶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바르간이라고 했나….’
그러다 문뜩. 괴물을 흉내 내는 사람을 떠올렸다.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그는 사람을 벗어나고자 했다. 선천적인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세뇌하고 행동을 습관화하여 본질을 바꾸려고 한다.
지금까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평온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왔을 터.
자신과는 정반대인 그.
‘…머지않은 미래에 재회할 것만 같다. 아니, 분명 그러하겠지.’
그가 원하는 것은 격변과 소란.
서로의 입장이 다른 이상 필수 불가결하게 만나게 될 터이다.
그때의 자신은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던전의 끝에 다다랐다. 들어왔을 때와 같이 투명한 막이 입구에 둘러싸여 있어 밖이 보이지 않는다.
던전의 점막을 통과한 한.
아침의 햇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하루가 훌쩍 지나, 새로운 태양이 은혜가 대지를 감싸고 있다.
협곡의 선선한 바람이 묶어 둔 한의 머리칼을 흔들리게 했고.
한은 잠잠히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소.”
한은 천천히 숨을 뱉으며 세이만과의 전투로 지친 마나를 끄집어 올렸다. 사람의 것과는 다른 자색의 기운을 띤 마나. 알티프의 증표가 그의 몸에 타오른다.
적요하게.
그는 눈앞의 상대에게 전력을 쏟기 위한 준비를 한다.
짧게 친 머리의 남자. 1품은 되어 보이는 창을 들고 있다. 아무런 마나가 느껴지지 않는 그. 적의도 살의도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명백하게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다.
그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명에 의해서. 그런데도 긍지는 절대로 낮지 않았으며 오히려 고고했다.
그를 직접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기운을 찾을 수 없다. 과연 던전에 있을 적에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하다.
한을 마주하고 있는 남자는 창에 붉은 오러를 둘렀다. 오랜 세월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의 오러였다.
그는 바르간의 충신, 마데레로 길드의 장.
소설 속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검사이자 웨폰 마스터.
부르템베르크의 무신 브람.
주인 바르간의 명에 따라 주교 한을 토벌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한은 음속으로 달려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말했다. 들리지는 않음을 알지만,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바르간, 그대는 충분히 괴물이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