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82)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82화(182/350)
에리카의 애달픈 울음소리가 한 꺼풀 잦아들자.
여태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바르간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보았느냐.”
“전부… 전부….”
에리카는 새끼 새와 같이 처연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3세. 격변과 통곡의 시기였던 당시, 바르간이 겪었던 모든 상황을 보았노라고.
“…….”
바르간의 타들어 가는 속에 잠깐의 휴식과 같은 숨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는 벗어났다. 에리카는 소설 밖의 세계에 관한 기억은 보지 못하였다.
그녀가 본 장면은 원작 바르간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비참한 과거.
…다행이라고 말하기에는 현재 바르간이 느끼는 먹먹함이 비대하지만. 안도감 아닌 안도감에 약간, 숨통이 트였다.
“어째서… 어째서 내게 말하지 않았던 거야….”
그녀는 이유를 알면서도 말했다.
모든 것을 보았기에 그 이유 또한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말하며 이어서 자신을 탓한다.
“…왜 나는 너를 믿지 못했던 걸까.”
에리카의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에서 연이어 눈물이 흐른다.
간신히 멈추는가 싶으면 떨어지는 고개와 함께 감정의 물줄기가 떨어졌다.
그녀의 여린 입술에서, 숨겨 두었던 하나의 진실이 새어 나왔다.
“네가 죽을병에 걸린 것도 모르고…….”
원작의 바르간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원인 불명, 피할 수 없는 죽음에 다다르는 병에 걸렸다. ‘신의 저주’라고도 불리는 그것.
가문의 명성을 위해 슈겐하르츠의 가주가 세간에서 숨겼던 불명예.
그리고 그것은….
“‘네가 바뀌어 버린 이유’도 그래서였어….”
슈겐하르츠 트로아 바르간.
비운의 천재는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알게 되고 나서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까지 밟아 왔던 완벽한 엘리트 코스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의인지도 알 수 없는, 슈겐하르츠 울타리 안에서의 망나니 삶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이룩하고자 했던 마법의 성취도.
세간의 부러움과 질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천재라는 타이틀도.
드높은 슈겐하르츠의 가문명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작 시한부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세상이 한순간에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 버렸다.
흑백이 되어 버린 세계는 증오와 의문을 낳았다.
어째서 자신은 죽어야만 한단 말인가. 여태까지 했던 모든 노력은 무엇을 위해서였나.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바람직한 삶과 도덕관을 갖기 위해 수많은 교육을 받으며 행하였음에도. 극악의 범죄를 일으킨 죄인들도 떳떳하게 고개를 들고 숨을 쉬는데. 어째서 자신이.
어째서…어째서….
어째서…!
—괜찮으세요 바르간 님?!
흑백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빛을 잃지 않은 그녀.
약혼녀 에리카의 푸른 눈동자만이 바르간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색이었다.
가문 간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 하지만 이들은 결코 그런 손익적인 계산으로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버티기 힘든 현실에 잠시 주저앉은 바르간. 그는 자신을 걱정하며 이리저리 살피는 그 작은 약혼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모든 사실을 토로한 채, 그녀의 품 안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뇌리를 스치는 현실.
만약 그녀와 비극의 무게를 같이 짊어지게 된다면.
‘슈겐하르츠 가문은…? 약혼 관계로 얽혀 있는 포트레트 가문은…?’
그리고 그 무엇보다,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이 여인.
‘에리카가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이 연약하고 어린 것이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은 언젠가 확실한 죽음을 맞이하며 이는 피할 수 없다…. 심한 경우, 에리카는 자신의 죽음을 따르려고 할 터이다. 그것만은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야만…!
에리카가 바르간에 대해 잘 알고 있듯.
바르간 역시 에리카에 대해서 잘 알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체감하기에, 바르간은 미래를 미리 본 것처럼 훤히 앞날을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바르간은 떠올렸다.
너무나 가슴 아파도 해야만 했다.
‘…에리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수단.’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에리카를 상처입히는 일.
그러나, 그녀를 살리는 유일한 길.
바르간이 에리카를 멀리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창으로 심장을 후비는 것 같은 심정으로 에리카에게 폭언하기 시작한 것도.
하인에게 처음으로 폭력을 행사해 이를 그녀가 알게 한 것도.
그녀의 앞에서, 주고받았던 너무나도 행복했던 시절의 편지를 갈가리 찢어 버린 것도.
전부 이 때문이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다. 아파서 울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사과하고 모든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자신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 터이다.
자신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버리지 못할 터이다.
바르간은 악행에 박차를 가했다. 최대한 에리카가 자신을 싫어하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수를 동원했다.
이 과정은 바르간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구토하고, 자해하고, 정신병자가 되게끔 자신을 몰아붙였다.
한데도 에리카는.
—바르간 님. 그러지 말아 주세요….
약하디약한 그녀는 이미 절단되어 버린 두 다리를 뒤로하고, 그 아픔을 참아 내며 가녀린 두 팔로 지면에 서서, 바르간을 기다렸다.
아무리 바르간이 그녀에게 칼을 꽂고 뒤흔들어도.
에리카는 비명을 지르고, 지칠 때까지 우는 한이 있더라도 일어나 바르간을 안아 주려 했다.
바르간은 망설였다.
유일하게 색을 가진 그녀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도 믿으려 한다.
그녀의 슬픈 울음소리도, 이젠 먼 옛날 같은 그녀와의 행복했던 기억도.
자신이 벌이는 끔찍한 행각도. 모두 바르간을 괴롭게 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바르간을 꽈악 붙잡아 못살게 구는 것은, 자신에 대한 에리카의 ‘신뢰’였다.
흔들리는 바르간. 모든 것을 체념하고 솔직하게 그녀에게 진실을 고백하고자 할 무렵.
마치 잘 짜인 소설과도 같이.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
그 순간이 찾아왔다.
“라일라는… 라일라는….”
여관방 안의 어둠 속에서 창밖의 미세한 불빛을 받는 에리카. 그녀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작은 양 주먹은 쿵쿵거리며 몸 안에서 빠르게 튀는 심장의 부근을 움켜쥐고 있다. 겨우 나오려는 한마디.
“라일라는—”
“—에리카. 그것은 던전이 보여 준 환상이다.”
바르간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이 이어지려는 것을 끊어 버렸다.
그녀가 태어났을 적부터 부모와 같이 돌봐 주었던 시종, 라일라. 에리카에게는 가족과도 같이 소중했던 그녀에 대한 진실을 묻으려 한다.
하지만.
“슈겐하르츠. 더는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
그녀의 눈과 마주친 바르간은 부정하기를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이젠 의미가 없다. 에리카는 이미 자신이 본 광경을 모두 사실로서 받아들였으니까.
에리카는 한없이 애처롭고 가여운 것을 보듯 바르간을 보았고, 푹 젖어 있는 목울대를 울렸다.
“라일라는 여신교(女神敎)였잖아.”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분명 세상이라는 게임판을 가지고 놀음을 하고 있겠지.
과연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툭.
그것은 너무나도 어이없이 떨어졌다.
여신을 본떠 나무로 만든 작은 조각품.
여신교, 그중에서도 형상파를 의미하는 상징. 그 조각이 라일라의 품에서 떨어진 것이다.
물론, 그 전부터 바르간이 라일라의 동태에 이상을 느꼈고.
그 때문에 라일라의 방에 직접 들어가 물색하는 도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일라를 몰아붙이는 와중에 기적과도 같이 증거가 나온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과하지 않겠는가.
바르간은 그녀에게 저주를 걸어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만들려고 했다. 어째서 포트레트가에 잠입하였으며 에리카에게 여태껏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러자 궁지에 몰린 라일라는.
—여신의 축복 영원하리…!
자살했다.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한순간이어서 채 막을 수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의도된 죽음일지 몰랐다.
라일라는 마력을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가슴에 구멍을 뚫었다.
애초에 그런 축복이었던 것은 아닐까…? 어떠한 구조였는지는 인제 와서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어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닫혀 있던 문이 열렸고.
푸른 광휘의 마석이 떨어져 방 안을 밝혔다.
—바르간 님…?
에리카가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믿을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을 본 것마냥.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바르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
그 경위가 어쨌든 소중한 존재였던 라일라의 죽음을 본 그녀가 괜찮은지 확인할 뻔했다.
‘잠깐, 라일라가 여신교였다고 말해서 어쩌려고…?’
그녀가 더욱더 힘들어할 뿐이다. 잠깐 쓰러지는 게 아니라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바르간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일어날 결괏값을 예상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결심을 마친 그의 눈은 차갑게 식었다.
—에리카인가.
무신경한 목소리로, 전혀 놀라지 않은 듯. 담담하고 싸늘하게.
—이 녀석이 나를 모욕하여 벌을 좀 주었다.
바르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 괴로워하지 말자. 슬퍼하지도 말고 해소하려고 들지도 말자.
바랐던 결과가 아닌가. 이것으로 에리카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겠지. 나는 지금의 상황을 값지게 써먹을 뿐이다. 심지어 그녀가 라일라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는 일도 없겠지.
그것으로 족하지 않는가. 완벽하지 않은가.
…이것으로 된 게 아닌가.
…….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이 지나, 에리카가 방 안에서 틀어박혀 있던 시기.
바르간은 포트레트가의 가주인 에리카의 아버지에게 사건의 경위에 대해서 밝혔다.
증거품으로 라일라가 가지고 있던 조각품을 내 보였고, 포트레트가의 가주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라일라는 명백한 포트레트가의 사용인.
비록 자신이 아니라 아내인 리리안스가 고용한 인물이기는 했으나, 이를 확인하지 못한 대가는 크다. 위그드라실에 대한 신실함으로 유명한 포트레트가의 사용인이 여신교 출신이며 이를 인지하지 못했었다니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일라가 여신교였다는 사실은 저와 가주님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모르게 할 것입니다.
바르간은 해당 사건의 정황에 대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자신의 말을 제대로 따르지 않은 시종에게 벌을 주다가 일어난 일.’이라고 밝힌 상황이었다.
에리카의 아버지에게만 진실을 밝힌 까닭은 그의 성향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을 절대로 두고 보지 않는 이.
그 때문에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었다.
—그러니, 에리카가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에리카가 진실을 알게 될 일도 없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걸로 되었다.
부탁을 해야 하는 인물은 포트레트가의 가주임에도 불구하고, 바르간은 고개를 숙였다. 가주는 당황스러워하며 바르간의 고개를 들도록 하였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가주는 바르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라일라에 대한 사건의 경위는 이 둘만의 비밀이 됐다.
훗날, 에리카가 알아보려고 해도 알아볼 수 없도록 모든 흔적을 숨겨 버린 것이다.
가주는 바르간이 떠나기 전에 말했다. 바르간이 파혼을 원한다면슈겐하르츠에는 누가 되지 않도록, 포트레트가의 일방적인 통보로 인해 약혼을 파기해 주겠다고. 그러나 바르간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파혼은… 조금 나중의 일로 미뤄도 괜찮겠습니까?
에리카가 먼저 파혼을 꺼내는 그날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그렇게 각오를 하고 모질게 굴었음에도, 그녀와 자신을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 미루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하고 연약하다.
가주는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였다. 바르간이 모든 걸 짊어지고 갈 것을 우려하였으나 그 덕분에 자신의 실착을 묻을 수 있었다.
바르간은 마지막으로 감사에 답하며 떠나갔다.
빠져나오려는 모든 감정을 구겨 넣은 채, 의연하게.
—악역은 저만으로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