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83)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83화(183/350)
“알리시아, 들어가겠다.”
늦은 시각. 알리시아의 기숙사 방문을 노크도 없이 들어온 남자.
보는 이를 움찔하게 할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의 남자는 제집마냥 당당하게 알리시아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리시아는 오랜만에 듣는 그리운 목소리와 외관에 잠시 흠칫하였지만, 이내 커진 눈을 돌리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나이아스 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설마 고작 몇 주가 지났다고 설마 제 주인의 얼굴을 까먹은 것이냐?”
“벌써 일주일 동안 독실에 계셨잖아요. 훈련은 이제 끝나신 건가요?”
“…쳇, 알리시아는 못 속이겠네. 전혀 통하질 않아.”
나이아스는 완벽하다고 생각한 자신의 의인화가 먹히지 않자 혀를 차고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알리시아는 싱긋 웃으며 나이아스를 반겼고, 나이아스도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왜 도련님의 모습으로 오신 건가요?”
“그냥! 알리시아가 좋아할 거 같아서.”
“…좋아하다뇨. 제가 언제는—”
“그보다 말이야! 나 뭐 달라진 거 없어?”
나이아스가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채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알리시아는 눈가를 좁히며 원하는 대로 자세히 살펴 주었다. 외관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나에서 차이가 났다.
“설마… 드디어 성공하신 건가요?”
“히히. 맞아! 나 이제 완전히 전성기의 힘을 되찾았어! 더는 어중간한 적들에게 쩔쩔매지 않아도 돼! 이제 내가 최강이라고!”
나이아스가 배시시 웃었고 알리시아는 너무 축하한다며 기뻐하였다. 물의 정령은 으스댔다.
“정령위 공작인 나의 전력이 회복되고 심판무구까지 합쳐졌으니 이젠 도련님이라고 해도 함부로 나를 대하지 못할걸? 내가 아르카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니까…! 나를 더욱 소중히 해야 해!”
나이아스는 실질적으로 두 명의 주인을 모시고 있다. 최초의 주인은 바르간, 이와 동등한 권한을 허락받은 알리시아.
나이아스의 매개체인 검은 알리시아가 사용하기에 바르간과 함께 다니지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지만 나이아스는 내심 서운했었다.
특히, 같은 공작급 정령인 아르카네가 바르간과 함께 다니고 나서부터는 더욱.
알리시아는 이 점을 알곤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소년과 같이 웃고 있지만 섭섭한 감정이 얼핏 보이는 정령을 긍정하기 위해.
“도련님은 성과를 중요시하시잖아요. 나이아스 님께서는 도련님이 아카데미아에 안 계시는 동안 부단히 노력하셨고 멋지게 결과를 이룩하셨어요. 도련님께서도 분명 기뻐하시며 나이아스 님을 어여삐 여기실 거예요.”
“정말…? 정말 그럴까?”
“그럼요.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나이아스 님.”
“뿌으에엥. 역시 알리시아밖에 없어…!”
나이아스는 지난 설움을 토해 내듯 알리시아의 품에 안겨 들었다. 알리시아는 따뜻하게 등을 토닥여 주었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나이아스는 빨개진 코끝을 훌쩍거리며 말했다.
“노력은 나보다 알리시아가 더 하고 있잖아…. 매일같이 수업 듣고 예습하고 복습하고, 아르텔리온이랑 수련하고, 또 잠 줄여 가면서 혼자서 검술이랑 마법 연습하고.”
“도련님에 비하면 아직도 부족한걸요.”
“둘 다 비정상적이야.”
울음을 뚝 그친 나이아스가 알리시아게서 몸을 떼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아 있는 마나의 흐름을 살피니 지금은 웬일로 훈련을 하고 있던 게 아닌 모양이다.
“뭐 하고 있었어?”
“그게… 별건 아니고요….”
“응? 뭐야, 뭔데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해? 왜? 혼자서 야한 짓이라도 하고 있던 거야?”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건가요…!”
“별로 숨길 일도 아닌데 내숭은. 아무튼, 그럼 뭐 하고 있던 건데? 음? 뭐야 이건.”
나이아스는 수려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책 한 권을 들었다. 어떠한 요리의 레시피로 보였다.
“여기에 적혀 있는 것들 전부 같은 요리인 거 같은데 뭐가 이렇게 방법이 다양해? 이거 다 네가 연구하고 있는 거야? 떡… 볶이… 튀김? 뭐야 이게.”
“아, 그… 축제 때 도련님께서 관심을 보이신 음식들이에요. 저도 처음 먹어 보는 음식들이어서 조리법을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설마 그 맛이 날 때까지 계속 도전하고 있던 거야?! 도련님한테 만들어 주려고?”
“네…. 형편없이 실패만 하고 있지만요.”
알리시아는 부끄럽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아스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회동그래 뜨며 이 믿기지 않는 생물체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 정도로 애쓴다는 것도 그랬지만, 대체 그 바쁜 일정에서 언제 짬을 내서 또 움직였단 말인가.
“전혀 몰랐네. 나도 몰랐을 정도면 수련도 다 끝난 뒤 했다는 건데…. 잠은 제대로 자고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제대로 2시간씩 규칙적인 수면을 취하고 있어요.”
“정령인 내가 봐도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휴. 너도 진짜 독하다 독해. 누가 그 도련님의 시종 아니랄까 봐 아주 치열하게 살아.”
나이아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알리시아가 적어 온 기록을 훑었다.
워낙 글씨체가 단정해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원인을 분석하며 대체할 재료들을 까먹지 않도록 빼곡하게 적어 두었다.
알리시아는 이번 일을 비밀에 부쳐 달라고 부탁했다. 바르간이 쓸데없는 짓 한다고 책할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나이아스는 옅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 좋아했으면 좋겠네.”
두꺼운 책을 덮은 나이아스. 앞으로 하루만 더 있으면 바르간이 복귀하기로 예정된 날이다. 비록 그 전에 완성은 못 하겠지만, 알리시아라면 분명 제대로 된 맛을 낼 수 있을 터였다.
곱게 모여 있는 알리시아의 양손에 다소 힘이 들어갔다.
은방울꽃과 같은 순백의, 수수한 미를 품은 미소가 피어졌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어딘가 애처로운 음성이 귓가를 간질인다.
“…그러면 더할 나위 없겠어요.”
—사그락사그락.
창밖의 나뭇가지가 요란스럽다.
늦은 시각에도 바람은 쉬지 않고 움직였으며 나뭇가지가 창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옷을 입고 있지 않은 나뭇가지는 추운 듯 보인다.
차가운 밖의 바람을 피해 따뜻한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처럼.
들여보내 달라, 부탁하듯 앙상한 팔을 긁는다.
***
창밖의 바람이 소란스러운 건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바르간은 진정하지 못하고 연신 울어 대는 에리카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디버프 계열의 저주 마법까지 사용해서야 겨우 그녀의 눈꺼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밤바람이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들으며, 바르간은 벽에 기댄 채 침대에 앉아 있다. 모든 감정을 소모한 이와 같은 공허한 표정으로 에리카는 바르간의 어깨에 의지해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에리카의 음성이 비집고 나올 때마다 그녀가 기댄 바르간의 어깨에 그 진동이 전해졌다. 처연하고 암울한 어조로 말하는 에리카.
라일라가 여신교라고 밝혀진 지금. 에리카는 그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가문도, 친구도, 자신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인물이.
낯설고 두렵게만 느껴진다.
그녀를 위해 분투했던 바르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가치를 잃었다.
그토록 친절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던, 부모와도 같았던 라일라에 대한 충격은 그녀를 옥죄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옥죄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심장을 파헤치는 것과 같이 에리카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힘들었지…? 괴로웠지……?”
메마른 에리카의 음성에서 온갖 감정에 폭 젖어 있는 말들이 나왔다.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그것도 모르고… 너에게 모진 말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어….”
“…….”
“나는 너를 끝까지 믿지 못했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진짜 괴로운 게 누군데… 너를 미워하고 되레 칼을 쑤셔 박았어.”
비 오는 날의 이파리처럼 떨리는 에리카의 입술.
아무런 의미 없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진심 어린 한마디를 뱉는다.
“미안해….”
“…….”
“너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도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미안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네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 그래도… 그래도….”
에리카는 한동안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같은 단어였지만 떠올리는 장면과 자신의 행적이 다른 것인지 의미 또한 다르게 와닿았다.
그렇게, 죄스러움의 끝에 다다른 감정은 자기혐오였다.
“나 자신이 증오스러워…. 너무 증오스러워서, 지독하게 증오스러워서…. 이대로 확 죽여 버리고 싶어. 최대한 고통스럽고 잔혹하게… 죽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너에게 또 못 할 짓을 하게 되어 버려…. 너를 또다시 괴롭게 해 버려…….”
바르간이 어째서 악역을 자처하며 자신을 밀어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대로 자살을 한다고 해서 죄를 갚을 수 없을뿐더러, 그의 모든 노력과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가장 최악의 수였다.
그녀의 감정이 다시 차오르며 잠을 몰아내려고 하자, 바르간은 저주 마법의 강도를 높였다. 맴돌고 있던 자욱한 안개가 그녀의 숨이 되어 들어오고 내뱉어진다.
그때마다 에리카의 거센 물결은 다시 잠잠해져 갔고.
무거워지는 눈꺼풀은 나풀거리며 내려앉는다.
심적으로 지친 그녀의 고개가 어깨선을 타고 내려가려고 하자, 바르간은 이를 받쳐 주며 천천히 무릎 위로 올려 주었다.
꺼질 듯한 에리카의 음성이 부분적으로 들려온다.
“있잖아…… 슈겐하르츠….”
바르간은 무언으로 그녀의 대사를 들었고.
에리카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 슬픔을 수놓았다.
“나는… 나는….”
“…….”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빚을 갚을 수 있는 거야…?”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무게의 빚.
그 질량만으로 압사해 버릴 정도로 에리카에게 그것은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흐려지는 에리카의 시야. 바르간의 모습이 그림자 형상만 남게 되고.
“……슈겐… 하르츠.”
잠들기 직전, 에리카의 작은 주먹이 바르간의 옷 끝을 붙잡았다.
손목에 올라온 가느다란 뼈.
맥이 뛰는 게 보일 것만 같은 새하얗고 얇은 피부.
마치 떠나가지 말아 달라고 사정하듯 그녀는 바르간을 잡았다.
“…….”
에리카가 완전히 잠들게 되자, 바르간은 그녀가 깨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레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잔뜩 움츠러든 에리카의 표정.
악몽을 꾸고 있는 것처럼 숨 막혀 보이기도 한다.
두근두근.
지금은 몸 안에 있지도 않은 바르간의 심장이 격하게 울려 댄다.
결국 밝혀진 진실의 대가는 그에게 더없는 고통을 선사했다.
본래 바르간이 지니던 감정과 기억일 뿐이라고 해도.
꺼져 가는 목숨처럼 꽤 약화하였다고는 해도.
지금 느끼는 이 감정과 아픔에는 조금의 거짓도 완충제도 없었다.
에리카의 머리칼을 정성스레 쓸어내리던 바르간.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에리카.”
쓸쓸하면서도 애달픈 눈동자로 에리카를 바라보며, 그는 고한다.
곧 안식을 맞이할 낙엽처럼 안정된 목소리로.
“머지않은 때에,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해결해 주겠다. 네가 느끼는 그 아픔도, 죄책감도… 모두.”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텨 다오.
오래 걸리지 않게 할 터이니.
“…….”
바르간은 에리카를 쓸어넘기던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다. 바람에 칼춤을 추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색색거리는 에리카의 숨소리.
거센 바람에 창문을 긁는 바람의 소리가.
끝없이 길고,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