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194)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194화(194/350)
리케이온의 모든 인원이 돌아간 후.
청각을 잃은 바르간은 프로텍터에 점차 적응해 가고 있었다.
연구실에는 1조의 인원들이 모여있다. 그들은 각자 교수들이 내어준 산더미 같은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리암, 리암.”
에밀리가 옆자리에 앉아 과제를 수행하던 리암의 어깨를 톡톡 건드려 귓속말을 했다.
“저기 있잖아… 요즘 바르간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다니?”
“행동이 조금 굼뜨다고 해야 하나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조금 이상해.”
에밀리의 말은 타당해 보였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같은 조원인 리암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최근 바르간은 소리에 다소 둔감한 것처럼 느껴졌다.
‘벌써 고유술식의 시련을 받고 있는 건가?’
리암은 바르간의 고유술식에 시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기가 빠르기는 하지만 성취에 언제나 목마른 그의 성향을 생각하면 시기를 앞당겼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해서 리암은 시치미를 뗐다.
바르간이 남들에게 밝히지도 않았고, 굳이 떠벌리고 다녀서 절대로 좋은 말 못 들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 흠. 분명히 이상한데.”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도 있지. 그렇게 신경 쓰여?”
“신경 쓰이기는 무슨. 그냥 상태가 조금 묘해 보이니까 괜히…”
“—시끄럽구나. 잡담할 시간에 서둘러 과제나 완료해라.”
단칼로 에밀리의 말을 끊어 버리는 바르간.
그는 개별 과제가 끝나면 바로 이어서 조별 과제를 해야 하니 한시가 바쁘다고 쏘아붙였다.
에밀리는 수업 시간에 딴짓하다 걸린 학생처럼 흠칫 놀라더니 곧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엄청 집중하는 줄 알았는데 귀신같이 뭐라고 하는 걸 보니 완전히 내 착각이었나 보네.”
그럼 그렇지.
에밀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리암을 바라봤다.
그에게 들릴 정도는 됐을 텐데 반응이 없으니 절로 고개가 돌아간 것이다.
“…….”
“…리암?”
“……”
“리암? 왜 그래 리암?”
“……어?”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있다가 초점을 되찾은 리암. 두 눈을 깜빡이면서 상황을 파악하곤 에밀리를 마주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아, 잠깐 멍 때렸네.”
“또? 최근 자주 그러네.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야? 훈련의 강도가 너무 높아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으면 꼭 말해 줘. 알겠지?”
“응, 알겠어.”
떨어져 있던 바르간은 가만히 리암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고는 별거 아닌 양, 그 관심도 그새 거두어 눈앞에 있는 술식에 집중했다.
‘하필이면 청각이 필요한 과제이지만, 동시에 프로텍터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여러 곳에 다리를 뻗고 있는 거미줄의 생김새. 마력의 실을 하나씩 건드릴 때마다 청아한 악기의 소리가 났다.
제대로 음정도 있어 마나로 이를 수정하면서 모양을 완성해 가는 바르간.
이해가 가지 않는 음이 있으면 여러 번 건드려 확인했다.
똑바로 음을 내기 위해서는 절묘한 마나의 강약이 필요하다.
마나의 세기에 따라서 내는 음이 달라지는 일종의 악기다.
“잠시만.”
간혹 바르간이 과제를 이어나가다 이처럼 에리카가 말을 걸 때가 있다.
옆에 착 달라붙어 있는 그녀는 마력의 실에서 나는 음정이 미세하게 틀릴 때마다 이를 정정해 주었다.
포트레트가의 영애인 에리카. 음악에 관한 조기교육도 철저하게 받아 도움이 되었다.
세밀한 마나의 조작으로 실의 온전한 소리를 낸 에리카가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편안한 표정.
자신이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게 그녀에게는 행복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됐다.”
실에서 만족스러운 소리가 나자 기쁜 에리카. 고개를 돌려 바르간과 마주했다.
새삼스레 느껴지는, 옅은 숨결조차 느껴질 거리.
서로의 눈은 오로지 상대의 눈동자만을 담고 있다.
문뜩 그 사실이 부끄러운지 주춤거리며 시선을 내렸으나 고개만 조금 뒤로 뺄 뿐 몸이 멀어지지는 않는 에리카.
바르간이 조금은 낯설면서도 그리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돌연 연구실의 문이 열렸다.
디피엘리아와 밴틀로였다.
“무슨 일이냐.”
바르간은 둘에게 물었고 디피엘리아가 대답했다.
“에리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 말에 안 그래도 움츠러든 에리카가 바르간의 뒤로 완전히 숨었다.
디피엘리아와 밴틀로는 그런 에리카의 모습이 슬프면서도 안쓰럽다는 반응이다.
디피엘리아는 에리카가 최대한 무서워하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에리카?”
“…….”
바르간의 옷 끝을 잡고 있는 에리카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다른 이들과 한자리에 있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아직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심하던 바르간 이내 생각을 마치고 에리카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의 얼굴이 올라가며 시선이 교차하자 바르간은 물었다.
“괜찮겠느냐?”
선택권은 에리카에게 맡기겠다는 바르간.
에리카는 떨리는 자신의 손을 감싼 바르간의 온기를 느꼈다.
지금이라면… 아마 괜찮을 것만 같다.
그런 안심감이 그녀의 고개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응… 괜찮아.”
***
겨우 에리카와의 자리가 마련된 디피엘리아.
연구실의 한편에 마련된 어두운 별실에서 힘겨운 첫마디를 꺼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많이 당황스럽죠? 미안해요, 에리카.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좀처럼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조금 무리해서 말을 걸었어요.”
“…….”
옆방에 바르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이 공간에는 에리카와 디피엘리아 그리고 밴틀로만이 있었다.
그 사실이 에리카를 떨리게 했고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으나, 에리카는 꾹 참고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그녀 역시 언제까지나 겁쟁이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에리카가 얼마나 무서운 경험을 했는지는 몰라요…. 애석하게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할 정도로 두려운 일이라고 감히 추측 정도만 할 수 있네요.”
슬픔에 푹 젖은 디피엘리아의 음성.
그녀는 진심으로 에리카가 겪었을 무언가를 생각하며 아파하고 있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환각인지 다른 것인지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해도, 성녀인 디피엘리아는 친구인 에리카가 걱정되다 못해 가슴이 쓰렸다.
“하다못해… 정말로 하다못해 마음이 아닌 몸에 난 상처였다면… 제 힘으로 낫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마음 깊숙한 곳에 난 에리카의 상처는 성녀의 힘으로도 도와줄 수 없다며 슬퍼하는 그녀.
성녀의 힘을 사용하면 자신의 신체에 커다란 악영향이 옮에도, 에리카를 원래대로 돌릴 수만 있다면 디피엘리아는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
디피엘리아보다 에리카와 더 오랜 연을 잇고 있었던 밴틀로는 그 근처에 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불안해하는 에리카와 이를 가여워하는 디피엘리아를 지켜보고 있을 뿐.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지만 그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이 내뱉는 그 어떤 문장이, 단어가 그녀에게 비수로 꽂힐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리카 그거 알아요? 에리카는 저의 버팀목이었어요.”
디피엘리아는 에리카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짧다면 짧은 기간에 이다지도 두꺼운 기억의 층.
겹겹이 쌓인 짧은 역사를 그리워하며 입술을 열었다.
“에리카가 선거인단으로 있어 주었기에 저는 학생회장이 될 수 있었어요.”
바르간에 의해서 얼떨결에 참가하게 된 차기 학생회장 선거였지만, 선거가 이어지면서 디피엘리아는 먼지 덮이지 않은 자신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학생회장이 되고 싶다. 아카데미아를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고 싶다.
그렇기에 디피엘리아는 도중에 발을 빼지 않았고 대충 넘어가려 하지도 않았다.
신충의 연구, 마법의 공부, 학생회의 일… 없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열성을 다해 학생회장 선거에 임했다.
가장 큰 경쟁자는 용사랭킹 1위의 딸, 클레멘스.
가만히 있어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더욱 자신을 바짝 조이며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조금… 아니, 사실 꽤 많이 힘들었어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고, 이 정도 했으면 되지 않았나… 하는 무른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에리카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거예요.”
심적으로도 실제로도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에리카.
그녀가 옆에서 지켜 주었기에 디피엘리아는 차기 학생회장이 될 수 있었다.
디피엘리아는 그동안의 감사의 마음을 입 밖으로 불었다.
“클래스전에서는 에리카가 먼저 저에게 손을 내밀어 줬죠. 제가 마지막에 에리카를 의심하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에리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텐데… 얼마나 스스로를 탓했는지 몰라요.”
프리다의 혀에 넘어간 디피엘리아는 에리카를 의심하고 공격했었다.
그 일을 몇 번이나 후회하고 질책했는지 모른다.
에리카에게 말을 걸기도 미안해서 며칠이 지나고야 과제를 빌미로 겨우 말을 걸 수 있었다.
“1학기 과제 기간에는 함께 술식을 분석하고… 사역마를 단장하고… 참 즐거웠는데….”
과거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눈물이 차올랐다.
먼 옛날의 이야기도 아니건만, 너무나도 멀어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목이 메였다.
디피엘리아는 고개를 숙여 조용히 눈물을 닦아 냈다.
에리카가 세이만 던전에 갔다 온 이후로, 성녀의 눈은 메마를 날이 없다.
디피엘리아는 억지로라도 눈을 굳세게 만들었다.
자신이 연약한 모습을 보여서야 에리카를 더욱 불안하게 할 뿐이라고 생각해 더욱 눈매의 각을 세우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저도 에리카를 돕고 싶어요.”
“…….”
“오래 걸려도 좋아요. 전에는 에리카가 다가와 줬으니까 이번에는 제가 에리카에게 천천히 다가갈게요.”
에리카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느리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사용되더라도 차분하게.
“에리카가 놀라지 않도록… 그렇게 다시 걸어갈게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예전처럼 웃으며 대화할 수 있겠죠.”
디피엘리아는 진심을 고한다.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도 참으며 최대한 밝은 미소로.
“걱정하지 말아요, 에리카.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 안 해요. …우린 친구잖아요.”
“…….”
다소 떨어진 거리에서.
디피엘리아를 마주하고 있는 에리카.
어두컴컴한 방이었지만 작게 반짝이는 디피엘리아의 눈물방울은 에리카의 눈동자에도 비쳤다.
그래서였을까.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에리카의 몸이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한겨울을 지나 아직은 이른 봄을 맞이하듯, 천천히 눈이 녹는 것처럼.
“…미안해.”
“에리카……?”
에리카의 여린 한마디의 말.
살며시 고개를 드는 꽃봉오리.
“내가 무서워해서… 피해서 미안해.”
그 연약한 한마디에 희망이 내리쬐는 듯했다.
에리카도 디피엘리아와 밴틀로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로 피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하고 싶어도, 깊은 대화를 하고 싶어도 짙게 깔려 있는 두려움이 그녀를 자꾸만 괴롭게….
—있잖아. 라일라. 이건 무슨 뜻이야?
“……!”
라일라와 나누었던 대화.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와, 살내음.
—그건 사랑한다는 말을 비유한 거예요. 바르간 님께서 아가씨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정말?! 정말이지? 그럼… 라일라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그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거야?!
—네, 제가 사랑하는 만큼, 에리카 아가씨가 저를 사랑해 주시는 만큼. 바르간 님도 아가씨를 사랑하고 계시답니다.
어린 시절 동안 차곡차곡 쌓여 온 라일라와의 추억이, 행복이.
그녀를 괴롭게 한다.
놓아주지 않는다.
그 행복이 깊었던 만큼 커다란 구덩이를 남겼다.
“싫어…….”
에리카의 호흡이 가빠진다.
눈앞에 보이는 디피엘리아에 라일라의 모습이 겹쳐져 간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던 라일라.
—자, 이건 라일라한테 주는 편지! 항상 바르간 님한테만 썼지만 오늘은 특별히 라일라를 위해서 썼어!
—라일라. 이것 봐! 나 드디어 워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됐어!
—어떻게……. 라일라… 바르간 님이 이제 나를 싫어하게 되셨나 봐.
“싫어… 싫어. 싫어싫어……!”
태어났을 때부터 쭉 함께였던 라일라.
친구 같기도, 엄마 같기도 했던 라일라.
아버지에게 크게 혼나면 안아 주며 달래 주었던 라일라.
라일라, 라일라.
너무나도 사랑했었던, 사랑을 주었던.
—여신의 축복 영원하리…!
여신교(女神敎)의 신도 라일라.
“무서워.”
또 상처받을까 무서워.
“에리카!”
콰자자작—!
에리카를 중심으로 더없이 낮은 냉기와 함께 얼음이 터져 나왔다.
극도로 불안한 정신에서 폭주한 마나.
공포에 짓눌러진 에리카를 터트리고 나오듯, 방대한 양의 얼음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디피엘리아는 반사적으로 신성 계열의 마법을 발동시키며 에리카의 정신을 바로잡아 주려 했지만 역부족.
에리카로부터 번진 죽음의 냉기는 모든 것을 잡아먹을 것처럼 퍼져나가—
“…역시 아직 무리인 건가.”
의식을 잃은 뻔한 에리카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 바르간의 음성.
언제부터인지 있던 그는 에리카를 끌어안으며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바르간의 손길에 이는 마나의 파문.
그러자 폭주하던 에리카의 마나가 순식간에 정상화되고, 에리카 역시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충분히 여기에 있는 이들을 살해할 수 있었던 극한의 냉기는 단지 그의 등장과 약간의 저주 마법으로 인해 멎었다.
에리카는 어두워져 가는 시야에서 바르간을 보았다.
매번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달려와 잠든 사이에 모든 일을 해결해 주는 그.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해, 자신을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죄스럽지만.
그만큼 사랑하는 남자.
바르간에 의해 커다란 사건이 될 불씨를 잠재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