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02)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02화(202/350)
‘정말로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순간 그런 생각이 드는 에를리히였지만, 이내 마음이 꺾이게 되었다.
이제는 상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반대.
측은지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대와 전력으로 싸워서 이긴다.—그게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분명 눈이 멀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저리된 걸까? 알티프와 싸우다 다친 걸까?
이런 저런 잡생각이 들며 그녀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에를리히의 입술이 그 망설임을 담았다. 걱정스럽다는 듯 바르간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대로 시합을 벌여도 괜찮겠어요?”
난생처음 보는 사람이고 분명 싸워야 할 상대라고 해도 자신과 같이 용사의 꿈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다.
눈은… 어쩌다가 실명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역마의 눈으로 대체하지 않은 것을 보면 다친 지 얼마 되지 않을 터.
준비도 되지 않은 이런 상황에서 싸우면 더 크게 다칠 뿐이다.
에를리히는 무고한 타인이 상처입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미 부상을 당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어처구니없다는 식의 냉랭한 말투.
이에 에를리히는 당황스러워 입을 벌리곤 ‘네…?’와 같은 반응을 보일 뻔했지만, 곧 이해했다.
‘아카데미아의 수석이고 명문가라고 했었으니까. 비록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고 해도 자존심을 내려놓을 순 없는 걸 거야.’
짧은 순간에 에를리히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꾸려 나갔다.
재능을 가진 오만한 귀족이 아카데미아에 들어와 모든 영광을 누리고 살던 어느 날. 간신히 상대할 수 있는 혹은 이겨 낼 수 없는 알티프를 만나 겨우 목숨을 건지는 전개.
하지만 절망스럽게도 이 사건으로 인해 양쪽 눈을 잃게 되어 그를 향한 주변의 시선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기대는 실망으로, 환호는 비아냥으로.
그런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는 어떻게든 다시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려 했다.
이번 기말고사는 그 첫 번째 무대가 될 장소.
‘어떡해 너무 안쓰러워…….’
눈동자에 물기가 차오르려고 한 것을 얼른 닦아 버리는 에를리히.
바르간은 현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면박하는 어조로 그녀를 부추겼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수 없으나 어서 준비를 끝내라. 의지도 없는 것과 싸워 봤자 시간만 낭비할 뿐이지. 뭐 하고 있나? 곧 시합이 시작될 거다.”
“그렇군요… 역시 당신은 역경에 절대로 굴하지 않는 사람이군요. 잘 알겠습니다….”
뭔가를 혼자서 납득한 에를리히는 지팡이를 들었다.
입으로는 ‘이 이상 기권을 권하는 건 무례한 행동이겠네요. 저도 진심으로 임하겠습니다.’ 따위의 말을 지껄이고 있다.
바르간은 대화가 엇물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경기에 지장은 없을 듯하니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삐이이익—!
이윽고 고주파의 기계음이 터져 나오자.
고오오—.
연약해 보이던 에를리히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풍부한 마나와 생명의 기운이 그 안에 담겨 있는 듯했다.
바르간은 그 변화를 느꼈다.
‘마치 이중인격인 블뤼란스를 마주하고 있는 듯하군… 아니지, 그것과는 조금 다르려나.’
리케이온의 정령술사 에를리히.
그녀는 소설의 최후반부까지 살아남는 나름 비중이 있는 조연이다.
직업 그대로 여러 정령을 다루며 자신의 몸을 빌려줌으로써 빙의를 당할 수 있는 그녀.
몸을 빌려주게 되면 그녀의 영혼과 정령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합쳐져 본래 스펙의 몇 배는 되는 힘을 얻는다.
기능적인 면으로 봤을 때 착마마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는 능력.
검사의 붉은 오러와 같이 정령술사 중에서 소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인데 그녀는 1학년인 현시점에서 이미 개화했다.
‘뭐… 에를리히에게서 주의해야 할 점은 정령술의 수준이 높다는 게 아니지만….’
탁—!
바르간이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아주 얇은 층의 마나가 퍼져 나가며 그의 주위에는 십여 개의 마법진이 발현되었다.
그 위로 가지각색의 사역마들이 모습을 보였고, 마찬가지로 정령들을 소환한 에를리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이아스랑 아르카네…?!”
다른 사역마들도 물론 놀랍지만 정령술사인 그녀의 눈에는 그 두 존재가 가장 눈에 밟혔다.
공작위의 정령들이 둘.
그는 분명 마법사라고 들었는데 무슨 수로 계약을 맺었단 말인가.
분명 정령들이 맺고자 하지 않을 텐데…?
사실 정령술사였던 건가?
에를리히에게서 그런 의문들이 떠오르고 있을 때. 나이아스는 가는 눈으로 에를리히와 그 주변을 살폈다.
“와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많네.”
나이아스는 재회를 반기는 듯 입가를 올렸다. 손가락으로 에를리히부터 해서 하나하나씩 짚었다.
“빛의 정령 이그니스, 땅의 정령 오리에드, 숲의 정령 드라이어드. 그리고 그 밖의 떨거지들… 몇천 년 만인가?”
비밀 던전에 봉인당해 있던 나이아스. 이 늙은 정령에게는 공작위 정령들이 다섯이나 모인 현 자리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옛날의 일이었다.
—그르릉. 크악!
바르간의 전투용 사역마들이 곧이라도 치고받을 것처럼 이를 갈았다.
에를리히의 정령들은 의인화를 한 나이아스나 아르카네와 달리, 본래의 상념 그 상태 그대로라 특이한 색들을 갖은 회오리나 증기 덩어리같이 보였다.
양 세력이 서로 눈치를 보며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되자, 나이아스는 먼저 앞서 나가며 그들을 도발했다.
“야야야. 해 봤자 공작위에 머문 것들이 말이야. 내 모습 보이지? 무려 심판무구를 먹었는데 완전히 회복하기까지 했다고 감당할 수 있겠어?”
“나이아스. 그만두세요. 같이 있는 저까지 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야, 아르카네. 후배면 건방지게 굴지 말라고 했지? 잘 봐 내가 얼마나 강한지 보여 줄게. 도련님아! 이제 싸워도 되지?”
천진난만한 나이아스의 물음에 바르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전투를 허가했다.
신경 쓰고 있는 점이 하나 있어 우선 양상을 지켜보면서 따로 지시를 내릴 심산이었다.
“좋았어! 잘 봐! 이게 심판무구를 획득한 정령위 공작의 힘…….”
나이아스가 주먹을 쥔 손목을 잡은 채 몸을 뒤로 비틀었다.
언뜻 느끼기에도 처음 던전에서 봤을 때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타당치 않은 수준의 마력이 대기와 함께 나이아스의 주먹에 몰렸다.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한 에를리히가 서둘러 정령들에게 지시를 내려 제지하려 하지만, 크라이를 필두로 한 바르간의 사역마들이 되레 공격을 가했다.
지잉, 지이잉—.
압축에 압축을 가하는 나이아스.
이윽고 최대치까지 물의 성향을 띤 마나가 모이자.
“받아라!”
나이아스는 뛰쳐나가며 정권을 질렀다.
콰화아아악—!
마력을 잔뜩 머금은 묵빛의 회오리가 경기장을 통째로 삼킬 것처럼….
“어…? 어어어? 에쿠!”
나아가는 게 아니라, 허공에 용처럼 솟아올랐다.
나이아스의 스텝이 꼬이면서 바닥에 넘어진 탓이었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정령.
기존의 방향과 엉뚱하게 하늘로 솟아 버린 힘찬 물기둥.
바르간은 어둑이를 펼쳐 본인에게 튀기는 먹물을 막아 냈고, 가만히 에를리히를 바라보면서 읊조렸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힘이군.”
그가 말하는 것은 나이아스의 힘이 아니었다.
경기장을 온통 칠하고 있는 먹색.
그러나, 마치 그녀에게만 보이지 않는 배리어가 쳐 있는 것처럼 물기둥의 잔재가 튀지 않는다.
나이아스가 혼자 자빠진 것?
뭐 녀석이야 워낙 철부지에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라도 하니 그럴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지만, 에를리히에게 가한 공격이었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정령술사 에를리히, 그녀에게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자 상대하기 귀찮은 이유는.
‘운(Luck)’.
그 수치가 비약적으로 높다는 데 있다.
* * *
“이게 무슨 상황이야…? 지금 넘어진 거지? 하… 참.”
시작부터 꼬인 나이아스를 보고 탄식을 뱉는 에밀리.
그녀의 옆자리에서 함께 경기를 바라보던 리암 역시 그 말에 동감했으나, 그보다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운…? 이게 뭐야. 지금까지 이런 게 뜬 적은 없었는데?’
관중석에 앉아 있는 리암은 경기를 진행하고 있는 에를리히의 스테이터스를 살폈다.
그녀는 뛰어난 정령술사인 만큼 월등한 마력의 수치를 보였는데, 그런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전혀 본 적 없는 란이 추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운 : 9.5/12
운…? 정말로 그 운이라고?
왼쪽에 보이는 숫자가 현 그녀의 상태.
오른쪽에 보이는 숫자가 한계치를 의미하는 건 다른 능력들과 같은 모양.
하지만, 정말로 다른 능력과 똑같다면 이 수치가 의미하는 바는 엄청났다.
‘아카데미아에 입학했을 당시 신입생들의 평균 능력치가 3점대 후반이었다. 한계치는 높아도 10이었고. 그런데 이건….’
리암은 소설에서 읽었던 에를리히를 되새겼다.
그래, 분명 운이 좋았던 건 맞았다.
격한 전쟁 통에서도 항상 최소한의 상처만 입거나 받지 않거나 하기는 했었다.
심지어는 길을 걸어가면 금화를 줍는다거나, 리케이온을 방문했다가 방을 착각하고 들어간 용사랭킹 2위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게 되어 예비 멘티로 받아들인다거나….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눈으로 직접 보게 되어 느낌이 다른 건가?’
리암은 경기장의 국면을 파악하려 들었다.
공세를 이어 나가고 있는 바르간의 사역마들.
수세에서 열심히 막아 내고 있는 에를리히의 정령들.
분명 바르간이 유리하다. 바르간 본인이 전투에 참여하고 있지 않음에도 그의 세력은 맹렬하게 정령들을 물어뜯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피해가 크지 않다.’
어찌 된 일인지 바르간의 사역마들 공격은 헛나가거나 깊게 베이지 않는다.
반면 에를리히의 정령들은 몰려서 반격을 함에도 가하는 일격 하나하나가 치명타로 이어진다.
말이 되지 않는 상황.
지나가다가 벼락을 다섯 번은 연속으로 맞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확률.
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게 ‘운(Luck)’.
아마도 공식적으로 적혀 있을 그녀의 ‘설정’이었다.
바르간의 철저한 교육을 받은 엘리트 사역마들이 애를 먹고 있다. 스테이터스에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이 이상의 증거는 필요 없겠지.
‘혹시… 대부분이 암속성인 바르간의 사역마를 상대하는 데 빛의 정령인 이그니스를 데리고 있는 것도, 심지어는 빙의를 하고 있는 게 다른 공작위 정령이 아닌 빛의 정령인 점도 이 탓일까?’
과한 상상이긴 하나 운이라는 것이 그렇다.
모든 개연성을 퉁 쳐 버리는 알 수 없는 힘. 그렇기에 더욱 무시무시하게 작용된다.
“……큰일이네.”
리암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의 바르간은 본래의 캐릭터의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빙의한 영혼 때문인지는 애매해도 확실한 건 극도로 ‘계산적’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수를 파악하고 최적의 수를 가장 효과적으로 도출하는 그.
삶의 방식이 그렇고 전투 방식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바르간이 ‘우연, 운’이라는 사안을 고려하면서 싸운 적이 있을까?
아니, 없겠지.
왜냐하면 예측할 수 없으니까.
예측할 수 없으니 계산의 항목에 두지 않는다. 즉.
‘그녀는 바르간에게 있어 천적(天敵) 같은 존재다.’
게다가 현재의 바르간은 시야의 제한을 받고 마력 총량이 절반으로 깎여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과연 정상적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
리암은 처음으로 바르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