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07)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07화(207/350)
—너무 깊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바르간 학생을 따로 부른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에요.
몇 시간 전에 헤일리온과 나누었던 대화.
그는 다른 까닭 없이 스승과 제자로서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내가 분명 과거에 그를 스승이라고 언급한 적은 있었지만 아직까지 거기에 얽매여 있을 줄은 몰랐는데….
미래의 2위 님은 시답지 않은 걸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저희가 이곳에 온 건… 미안하지만 아직 밝힐 수 없어요. 별일은 아니에요. 바르간 학생은 저희의 일에 신경 쓸 것 없이 우선 기말고사에 집중하면 돼요.
참나, 사람 좋아 보이는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았다.
10위 내의 용사들이 셋이나, 그것도 팀으로 왔는데 별일이 아닐 리가 있나.
따지려면 수많은 반박거리로 따질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가 말해 줄 의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접었다.
헤일리온, 이 용사는 설령 내가 고문을 한다고 해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인물.
그것을 아주 잘 알기에 넘어가 주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대충 짐작 가는 바는 있으니 그의 말대로 우선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게 낫겠지.
그 이후로는 정말 잡담을 나눴다.
종종 나를 관찰하는 듯한 그의 시선을 모른 체하며 영양가 없는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밖으로 나오자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완전히 검게 변해 있었고, 나는 에리카와 함께 방으로 돌아오고 나선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금방 나왔다.
몸을 씻기 위해 잠시 에리카와 떨어져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에 별도로 욕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같이 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공동 샤워장의 내부는 각 칸마다 가림막이 있었고 옆에 사람이 들어왔는지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틈새만이 바닥 면에 뚫려 있었다.
눈이 멀어 사물이 온전하게 파악되지는 않으나 널찍하기는 해서 샤워를 하는 데 불편함은 없을 듯했다.
—솨아아.
막힘 없이 물줄기가 나오는 소리.
익숙하면서 반복적인 리듬이 들린다. 몸을 데우는 온도는 항상 경계하고 있는 몸을 다소는 녹이는 듯하다.
이렇듯 따뜻한 물줄기를 가만히 받고 있으면 이곳이 소설 속의 세계인지 밖의 세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중세, 근대, 심지어는 가끔가다 현대까지 뒤섞여 있는 마법의 세계관.
세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외관만 같을 뿐 이를 운행하는 구조는 다른 게 태반이지만.
가령, 이런 샤워기만 하더라도 분명 생김새는 현대의 것과 같으니 기존 바르간의 기억과 내가 인식하고 있는 샤워기가 혼동되기도 한다.
이것은 ‘나’의 사고인가.
그렇지 않으면 ‘바르간’의 사고인가.
뭐… 어차피 나는 소설 안에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니 큰 의미를 갖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몸을 씻고 방으로 돌아오니 에리카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최근 그녀의 샤워 시간은 극도로 짧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겠지만, 불안정해진 후로는 떨어져 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일부러 빨리 끝내는 모양이었다.
‘달려 나오지 않다니. 별일이군.’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간단한 인사만 하고 여전히 침대에 앉아 있다. 손에는 작은 편지 봉투 십수 개를 든 채 수심에 잠긴 표정이다.
나는 자연스레 그 옆에 앉았다.
에리카의 마력이 폭주할 뻔했던 이후로 그녀와는 같은 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제대로 정식적인 승인도 받았고, 약혼자의 관계였기에 규칙을 운운하는 이들도 없다시피 했다.
설령 불만이 있다고 해도 어쩌겠는가. 무시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지도해 주어야지.
“아직도 열어 보지 않은 건가.”
“……응. 아직.”
길게 늘어진 흑발이 찰랑거렸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방금 씻어 다소 남아 있는 물기가 그녀의 머리칼을 더욱 반짝거리게 만들고 있을 것이다.
에리카가 들고 있는 고급스러운 편지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인 리리안스가 보낸 것이다.
원래부터 에리카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 인사를 했던 리리안스.
에리카의 상태가 좋지 않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선 더욱 극성스럽게 보내고 있으나 에리카는 여태껏 한 장을 뜯어 보지 않았다.
에리카는 두려워했다.
어머니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인물을 무서워했다.
리리안스가 쓴 편지에 걱정과 사랑스러운 단어들이 한 아름 써 있을 게 짐작이 가니 더욱 열 수 없었다.
그런 에리카의 심정이 전해지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읽고 싶을 때 열면 된다. 무리할 필요는 없어.”
“…응. 하지만….”
에리카는 편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한 미련이 있는 것처럼 여지를 남겼다.
그러자.
“…지금 열어 보고 싶어.”
에리카의 자그마한 입술이 말했다.
간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여린 목소리로.
“너와 함께 있을 때 읽을래.”
그녀는 나름의 결심을 한 모양이었다.
내가 그녀의 의지를 방해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 네가 그러길 원한다면.”
에리카는 컷팅 나이프로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손이 벌벌 떨리고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차가운 에리카의 손. 그녀는 안에 담긴 편지지를 꺼내 천천히 펼쳤다.
에리카는 그 글자 한 자 한 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듯했다.
뭐라고 적혀 있는지는 현재의 나로서는 알지 못했다.
편지지를 잡고 펜으로 쓰면서 생겼을 작은 굴곡을 파악하려고 집중하면 모를 것도 없겠지만 굳이 그러지는 않았다.
에리카는 한 장씩 밀린 편지를 읽어 갔다.
옅게 떨리는 에리카의 숨소리와, 컷팅 나이프의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고.
나는 그녀의 손이 떨릴 때마다 잡아 주기만 할 뿐 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에리카는 모든 편지 봉투를 뜯게 되고 마지막으로 읽고 있던 편지지를 가만히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에리카는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슈겐하르츠.”
다행이다.
생각보다 에리카의 상태가 안정되어 있다. 편지에 가득 담겼을 따듯한 어구들이 되레 고통스럽고 두려울 법도 하건만 에리카는 끝까지 모든 글자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나, 너무 한심하지…? 고작 편지 몇 통 읽는데 이렇게까지 무서워하고… 네가 없으면 읽지도 못하니….”
에리카는 기어 들어가듯 작은 음성으로 자신을 탓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으며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해 주었지만 에리카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 내가 원래대로 돌아가야 해……. 그래야 너에게 이 이상 폐를 끼치지 않을 텐데.”
내가 아무리 상관없다는 말을 해 주어도 에리카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스로를 책하고 괴로워한다.
에리카는 처음 입학했을 때와는 달라진 몇몇의 학생들을 언급했다.
차기 학생회장이 된 디피엘리아.
재능을 얻게 된 핀.
지금 이 순간조차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성장해 나가는 알리시아.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그들과 대조되는 자신.
에리카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상실했다.
“슈겐하르츠.”
그런 에리카를 나를 바라본다.
깨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얼어 있는 푸른 눈동자로.
설원처럼 새하얀 뺨을 점차 가까이하며.
다소 갑작스럽게.
“…키스해 줄래?”
그리고 조심스럽게 부탁한다.
에리카에게 부탁을 들은 건 실로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에리카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프리다에게 입을 맞춘 걸 본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접었다.
당시 에리카가 완전히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주변의 마나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에리카는 보지 못했다. 프리다도 외부로 발설하지는 않았을 터.
즉, 에리카는 순수한 자신의 의사로 이와 같은 말을 뱉었다.
다른 불안한 요소들이 그녀를 자극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다른 여인과 입을 맞추었기에 부탁한 것은 아니었다.
“너와 입을 맞추면… 조금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우수에 찬 그녀. 떨리는 눈동자는 안쓰럽게 보이기까지 하다.
지금의 에리카는 불안했고 안정을 원했다.
마법의 성취든, 나에 대한 것이든, 다른 여인들의 탓이든.
차마 내가 헤아리지 못한 수많은 요인이 그녀를 이리저리 흔들어 놓고 있는 것이겠지.
몇 센티만을 남겨 두고 다가오는 것을 멈춘 에리카.
색색거리는 그녀의 숨결이 피부를 간질였고, 부끄러움을 온전히 숨기지 못한 에리카의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내게 선택권을 넘겼다.
아니, 애초에 이건 에리카의 부탁이었다.
여기서 입술을 맞출 것인지, 맞추지 않을 것인지는 내 의사에 달렸다.
“…….”
결정을 한 나는 그녀와 더욱 가까워졌다.
에리카는 반쯤 감았던 눈꺼풀을 완전히 닫았고.
나는 양팔로 그녀를 감싸 안으며 부드러운 에리카의 뒷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우리의 몸은 완전히 포개지게 되었다.
“…슈겐하르츠?”
쿵쿵거리는 에리카의 작은 심장 소리가 직접적으로 울렸다.
그녀의 고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으스러질 것 같은 작은 체구의 여인은 너무나도 작고 말라 품 안에 쉽사리 들어왔다.
나는 키스를 하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런 것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거라는 걸.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
프리다의 경우와는 다르다.
에리카는 증거가 아닌 안정과 용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한 감정은 가벼운 말이나 입맞춤으로는 얻어 낼 수 없다.
똑똑한 에리카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이번 에리카의 행동은 불안정한 자신과 이를 걱정하는 나의 우려를 이용한 욕심.
한 번 닿으면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늪이다.
“미안해….”
품에 안긴 에리카는 흐느끼며 말했다.
에리카의 두 손이 나를 꽉 붙잡는다.
나는 그녀가 이어서 말할 대사를 짐작했고, 미리 답하듯 강하게 안아 주었다.
“…버리지 말아 줘.”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
바르간의 약혼녀이자 악역영애라고 불렸던 인물.
단지 소설 속의 인물에 불과했던 여인의 울음소리가 이렇게까지 나를 아프게 한다.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는 감정과 괴로움으로 내 심장을 꽉 쥔다.
바르간의 영혼은 분명 죽어 가고 있음에도, 에리카에 대한 이 마음은 분명 약해지고 있음에도.
그녀가 이렇듯 약한 모습을 보이면 나는 만고불변의 설정을 의심할 정도로 큰 통증을 느낀다.
곤란하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이 정도이기에 원작에서 그리 정확하게 명시되었던 것이구나. 다시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바르간의 첫 번째 약점.
불치병.
리암이 읽었던 소설에서도 똑바로 적혀 있던 그것.
설령 읽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바르간이 된 지금에서는 절대로 모를 수가 없는 치명적인 두 번째 약점.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
그런 여인이기에 그녀의 슬픔은 내게 독과 같았고.
그녀의 웃음은 내게 마약(痲藥)으로 다가왔다.
***
작은 창문을 통해 땅거미가 내린 리케이온의 풍경을 바라보는 헤일리온.
정적으로 공기조차 무거워서 내려앉는 그의 방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헤일리온 님. 크샤놀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헤일리온은 같은 팀의 일원은 그에게 들어올 것을 허락했고 크샤놀은 그의 앞까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팀원과 팀장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소 지나치게 깍듯한 태도였다.
그는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미세한 마나를 느끼고는 말했다.
“조금 전에 바르간을 방 안에 들이셨군요.”
“네, 오랜만에 사제지간끼리 대화나 좀 할까 해서요.”
“설마…. 중앙교회의 지시를 말씀하신 건… 아니시겠죠?”
“걱정하지 말아요. 크샤놀. 아무리 바르간 학생과 가깝다고 해도 정보가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는 이상 말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헤일리온은 싱긋 웃어 보이며 도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에서도 크샤놀의 모습이 반사되었다. 그의 입이 움직였다.
“현재까지 조사한 결과, 아직 별다른 단서를 발견하진 못했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렇겠죠. 그들은 언제나 조직적이고 비밀스럽게 움직이니까요. 쉽사리 찾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네. 하지만, 반드시 찾아내 보이겠습니다.”
“너무 급할 필요 없어요. 저희가 이 안에 있는 이상 그들은 절대로 도망치지 못해요.”
헤일리온은 리케이온의 풍경을 천천히 눈에 새겼다.
밤이 찾아온 이곳은 아무런 문제 없이 평화롭게만 보인다.
“리케이온에 숨어 있는 여신교의 신도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