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10)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10화(210/350)
“바르간 학생과 도움을 주고받고 싶어요.”
리케이온의 인원들이 아카데미아를 방문했을 때.
리케이온의 총장 하이겔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와 나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기로 했다.
그에게 고유술식에 대한 팁들을 전수받는 대신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주 명확하고 간단했다.
“아르하에게서 완벽한 승리를 쟁취해 주세요.”
그는 토너먼트가 진행됨에 따라 내가 아르하와 만나는 것을 필연으로 보았고, 흥미롭게도 그녀를 무력으로 짓누를 것을 부탁했다.
그에게 있어, 그리고 리케이온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한 존재일 아르하.
그런 그녀를 패배시켜 달라니. 앞뒤 정황 없이 듣는다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소설을 통해 총장인 하이겔의 대략적인 성향을 알고 있었고 아르하의 건방짐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넘어진 적 없는 아르하가 넘어져 무릎이 깨져 보는 경험을 하길 원했다.
그러니 이리도 태평하게 내뱉는 것이지.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아직 아르하는 배움이 부족해요. 바르간 학생의 성취라면 충분히 압도할 수 있을 겁니다.”
참나. 굴레마시아를 포함해서 일정 경지에 오른 이는 다 이런 건가.
마치 지금의 내 상태가 훤히 보인다는 듯. 그는 내가 시련을 받고 있음에도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았다.
얼추라도 내 전력을 멋대로 엿본다는 건 유쾌한 느낌은 아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렇다.
“하이겔 님은 교육 방법이 상당히 엄하고 음흉하시군요.”
나는 차의 향기를 즐기다가 말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으며 그녀의 성장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덧붙였다.
하이겔의 말을 듣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알리시아를 강제로 각성시키기 위해 다소 강압적이고 험하게 다루었던 게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와 나는 비슷한 면이 제법 있다.
그래서 말이 잘 통한다.
“뭐… 좋습니다. 어려운 조건도 아니군요. 아르하가 세상의 넓음을 알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침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야기가 원활하게 진행되네요. 그럼 바르간 학생이 아르하와 만나게 되면….”
“아, 하지만 그 가르침을 전하는 건 제가 아닐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그가 의문스러운 눈길을 내게 건넸다.
나는 이를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
“알리시아가 적임자입니다.”
“알리시아… 하지만 현재 그녀의 성취로는….”
그는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알리시아가 아르하를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확언했다.
아르하를 자극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여야 한다.
“저를 믿고 맡겨 보시죠. 알리시아라면 분명 아르하가 여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극도의 불쾌함을 선사할 것입니다.”
…….
교섭은 성립됐다.
미래의 커다란 전력이 될 아르하가 일찍이 개과천선하는 건 나로서도 환영할 일.
내가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알고 말을 꺼낸 것도 실로 하이겔이라는 케릭터답다…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말이지.
이거야 원.
‘설마 뒤에서 또 다른 이익을 챙기려 했을 줄이야.’
나는 최근 리케이온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종합해 보곤 그렇게 결론 내렸다.
속된 말로 하면 극한의 효율충.
좋게 말하면 상당히 영리한 작자.
하이겔은 하나의 과정으로 둘 이상의 결과를 내는 수완가이다.
* * *
8강이 모두 끝나고 찾아온 점심시간.
바르간은 식사를 빠르게 마치고 에리카와 방 안에 있었다.
그녀가 망가졌다고는 하지만 학문을 접은 것은 또 아니라, 눈이 보이지 않는 바르간 대신 마법서를 읽으며 특정 주제에 관한 논증을 나누었다.
다만, 바르간이 반박하면 에리카는 대항할 생각도 없이 자신의 의견을 접어 버린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무조건 그게 옳을 거야.”
에리카는 확신을 담은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신을 찬양하는 열렬한 신도와 같이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에리카. 나를 믿어 주는 건 기쁜 일이나, 계속 그리 쉽사리 수긍해 버리면 연구의 진척이 없지 않느냐.”
“하지만 슈겐하르츠…. 네가 틀린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는걸…?”
“그럼 내가 아카데미아의 전공 서적에 적힌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내 말을 믿겠다는 거냐.”
“응. 책의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잖아.”
“…….”
예상은 했다만 이 정도로 확증편향이 심하단 말인가.
과장을 조금 보태어, 현재의 에리카는 바르간이 물을 가리키며 불이라고 설명해도 그렇다고 수긍할 터였다.
바르간에 대한 의심이 아닌 기존 자신의 가치관을 의심하게 되겠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똑똑.
그렇게 바르간이 에리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바르간은 들어올 것을 허락했고, 여우 귀가 쫑긋 솟아 있는 프리다가 들어왔다.
“…읏.”
흠칫 놀란 에리카는 재빨리 바르간의 뒤로 몸을 숨겼다.
다른 인물보다도 유독 프리다에 관해서 격한 거부 반응과 공포심을 보이는 그녀였다.
반면 프리다는 그런 에리카를 보아도 눈길은커녕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바르간의 앞으로 다가와 종이 뭉텅이를 꺼내 건네주었다.
“말씀하신 대로 구해 왔어요.”
“딱 적당한 시기군. 수고했다.”
“별말씀을요.”
바르간은 에리카가 떨고 있음을 알았으나 프리다를 적당한 자리에 앉혔다.
에리카가 걱정되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프리다와의 대화를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나를 집중하여 종이 뭉텅이의 활자들을 읽어 나가는 동안 잠시 적막이 감돌았고.
우선 대략적으로 내용을 살핀 바르간은 생각을 정리하며 작게 읊조렸다.
“역시 그런 건가….”
겁을 먹은 에리카는 그 와중에도 궁금증은 참을 수 없는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바르간이 읽던 종이를 훔쳐봤다.
“그렇게 볼 것 없다. 그다지 중요한 서류는 아니니까.”
바르간은 에리카에게 이를 건넸다.
그가 건넨 종이는 리케이온 학생들에 관한 약력이 적힌 리스트였다.
에리카에게 도로 리스트를 받아 낸 바르간은 그중 한 명의 페이지를 펼친 채 탁자 위에 올렸다.
“이 녀석이 최근 소리 소문 없이 자퇴한 놈이구나.”
“네, 같은 반의 학생들에게도 아무런 말 없이 나갔다고 해요. 사유로는 가정사라고 적혀 있긴 한데 이것도 분명치는 않아요.”
“이런 어중간한 시기에 조용하게…. 휴학도 아니고 자퇴라.”
검지로 책상을 툭툭 치던 바르간은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 하는군.’
기존의 스토리와 완전히 다르게, 그것도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는 별도의 이야기가 있다는 게 제법 흥미로웠다.
“…….”
프리다는 에리카에게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바르간만을 바라봤다.
커다란 강아지풀 같은 복실복실한 그녀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알리시아만큼은 아니지만 프리다도 어느 정도는 바르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그가 짓고 있는 웃음은 본심. 연기 따위가 아니다.
그러다 문뜩 이 방까지 오는 동안 들었던 찜찜함이 떠올랐고, 기분 좋게 춤추던 꼬리가 멈췄다.
“바르간 님. 근데 그거 알아차리셨나요?”
“뭘 말이냐.”
“리케이온은 거의 모든 구역이 총장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이요.”
“오호라, 구석구석 설치된 영상 마법들 말인가. 제법 은신이 잘되어 있는 술식이었거늘… 프리다, 마나 감지의 성취가 오른 모양이구나.”
“별말씀을요. 제게 필요한 능력이니 가꾸고 있을 뿐이죠. 그보다 아무리 보안을 위해서라도 수가 너무 많다고 여기지 않으세요? 리케이온의 총장이 조심성이 많아서 그런 건지, 다른 뜻이 있는 건지….”
“술식들을 전부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에 비례하는 양의 마나가 지속적으로 소모되지. 적절한 의문이다 프리다. 그래, 네 말대로 이상한 일이지.”
“물론, 정말로 보안 차원에서 아카데미아의 인원들이 체류하는 기간에만 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요.”
현재 리케이온의 거의 대부분의 시설이 실시간으로 총장 하이겔의 눈에 담기고 있다.
욕실이나 화장실, 객실과 같은 공간에는 없으나, 리케이온 자체가 마치 현대의 CCTV와 같이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유난스러우며.
그야말로 수상하기 그지없는 일.
효율성을 따지는 그가 보완을 위해 이런 식으로 체계를 구축했을까?
뒷배경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음? 무슨 일이냐 에리카.”
돌연 에리카가 바르간의 옷 끝을 잡아당겼다.
프리다를 신경 쓰면서도 천천히 입을 떼는 그녀.
“내가…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여자의 촉이 온 건지 에리카는 바르간이 어떤 냄새를 맡았고 움직일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떠한 장애물이 기다리고 있든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괜찮다 에리카.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어.”
“그런 거야…?”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된다. 사건이 터지고 나서 제스처를 취해도 늦지 않아. 아니, 오히려 그래야 자연스럽게 보이겠지.”
바르간은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보았다.
수면 아래서 바쁘게 진행되는 스토리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최선이다.
“어차피 곧이다. 아마 내 예상으로는… 준결승부터 점차 변화가 일어날 것 같구나.”
바르간은 시기를 예측했다.
* * *
—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준결승 1차 시합.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리케이온도 지금의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저희도 미리 전달받은 게 없고, 학생회 멤버들부터 해서 관계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현재 경기장 위에 올라 있는 선수는 아카데미아의 바르간 학생뿐. 정말로 이대로 부전승을 하고 말 것인가.
준결승 제1 시합.
관중은 술렁거렸고 관계자들은 한시가 급했다.
돌발 상황의 발생은 경기장을 혼란으로 가득 차게 했다.
반면, 너무나도 고적하게 경기장 위에 혼자 올라서 있는 바르간.
그가 따분하다는 듯 간혹 때려 대는 지팡이의 소리만이 경기장 위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탁. 탁.
시계의 분침처럼.
지팡이 소리가 바닥면에 울렸고.
시간은 제 갈 길을 가기에 바빴다.
—1분도 남지 않은 상황! 리케이온! 이렇게 어이없게 1승을 넘겨주고 말 것인가!
—8강에서 생긴 부상으로 문제가 생긴 걸까요?
—그랬다면 저희에게도 정보가 들렸을 텐데 말이죠. 당최 알 수 없습니다.
—네 지금 말씀드리는 순간, 남은 시간이 10초가 되었고 이제부터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겠습니다.
바르간은 가만히 서서 상대가 나와야 할 방향을 바라보았다.
8강으로 인해 잔뜩 흥분하거나 성이 나 있는 상태로 씩씩대며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녀석.
그 천방지축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2… 1…! 아, 네! 결국 경기 종료되고 맙니다!
—이럴 수가 있나요! 아카데미아의 바르간! 상대 선수 아르하의 부재로 인해 부전승을 거두게 됩니다!
결승 진출이 확정되자 조용히 미소를 짓는 바르간.
시합이 끝나고도 아르하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