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18)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18화(218/350)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들을 쓸어 모으듯 난분분하게 하늘을 배회하는 붉은 오러.
바다를 헤엄쳐 다니는 정어리 떼와도 같이, 중심축을 두고 빙빙 도는 은하와도 같이.
무기물인 오러에서 생명력마저 느껴졌고 그 중심에는 황금의 기사 아르텔리온이 있다.
그의 검신은 또 다른 붉은 오러로 덮였다.
모든 것을 베어 버릴 수 있는 힘. 그 위협적인 오러가 바르간을 상대하기 위해 기세를 뿜어 댔다.
—탁. 탁.
바르간은 빙그레 웃었다.
지팡이는 경기장 바닥을 툭툭 찍어 대며 술식을 준비하는 바르간. 그 모습이 너무나 여유로워 지금부터 격전을 벌일 상대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너라면 그렇게 웃을 줄 알았다.’
아르텔리온은 검을 들었다.
정확히 상대를 향해 고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했다.
섣불리 먼저 들어가지 않는 두 사람.
제3자가 봤을 때는 ‘저게 지금 뭐 하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 있을 법한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지금.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틈을 노리며,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시기를 재는 것.
어느 정도의 반열에 올랐기에, 또한 서로에 대해서 제법 이해도가 높았기에.
둘은 함부로 선공을 치지 않았다.
—치직.
…그렇게 3분 가량이 흘렀을까.
시야를 확보하고 있는 바르간의 마나의 전도율이 아주 미세하게 변하는 시기가 도래했고.
아르텔리온은 맹수와 같이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아니, 바르간의 입장에선 시세포를 대신할 마나가 채 완전히 복귀하지도 않은 때.
코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아르텔리온은 목을 떨굴 사람처럼 검을 휘둘렀다.
—서걱!
그대로 허무하게 베어진 바르간.
절단된 몸통과 다리는 아직 떨어진 것을 인지하지 못했는지 붉은 선만 그어질 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르간, 나는 분명 너에게 말했다.
아르텔리온의 목소리.
또렷하고, 정확하게 그의 침착한 음성이 들린다.
1초를 수천으로 쪼갠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한 점의 왜곡 없이.
한 치의 방심 없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라고.
젊은 검제 아르텔리온은 예전처럼 환각에 현혹되지 않았다.
솨악—!
평범한 인간의 신체로는 불가능한 움직임을 선보이는 그.
경기장 바닥과 마찰을 일으키며 몸을 틀었고.
뒷편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검이 향한 곳은 바르간.
좀전에 베어 버린 환각 따위가 아닌, 그의 실제 형상이다.
“……이런.”
시뻘건 오러가 자신의 목을 노리자 급히 몸을 뒤로 뺀 바르간.
마나의 충격파까지 일으키며 간신히 거리를 벌렸다.
준비해 두었던 저주 마법을 거듭 건 채 잠시 시간을 번 바르간. 뒤늦게 벌어진 상처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내려 옴을 느낀다.
바르간은 그게 어처구니가 없어 말했다.
“하…. 왕자님, 저를 죽일 심산이십니까?”
그의 목에 옅게 생채기가 생겼다.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빠르게 회피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지금쯤 저 아래에 목이 굴러다닐 게 분명했다.
자신에게 걸려 있던 모든 저주 마법을 ‘벤’ 아르텔리온. 옅게 반짝이는 황금의 눈동자로 바르간을 노려본다.
“…못 할 것도 없지.”
“고작 기말고사에 살기를 보이시다니…. 제정신이 아니시군요.”
이번 토너먼트 내내, 아주 작은 피해라도 발생한 적이 없던 바르간.
어찌 보면 이번 기말고사에 세워질 수 있었던 기록이 깨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아르텔리온…. 이젠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옅은 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건가.’
저 지고한 왕자님께서 붉은 오러로 마법을 베는 경지에 이르셨다.
정말로 ‘뭐든지 베는 힘’.
더는 환각에 쩔쩔매던 아르텔리온이 아니다.
물론 정밀하고 높은 수준의 마법일수록 베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그만큼의 정신력이나 체력을 소모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이제 알리시아를 놀릴 때나 사용하는 정도가 먹히지 않는 건 확실했다.
‘게다가… 저것도 성가시군.’
바르간의 시야를 대체하는 대기 중의 마나.
그것을 끊어 내는 아르텔리온의 붉은 단풍.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는 건가. 저거 때문에 설치해 둔 저주 마법마저 모조리 제거되고 있다.’
바쁘게 움직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금 전에 아르텔리온의 검에 베일 뻔한 것도, 주위에서 산만하게 움직이는 저 단풍잎들이 시야로서 제공되어야 할 마나의 흐름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여간 귀찮게 하는 녀석 같으니라고….
—바르간.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입으로 대화를 이어 나갈 마음이 없는 아르텔리온.
경기장을 수두룩하게 채운 단풍잎들을 한 곳에 집중하고, 반복해서 전했다.
—전력을 다해라.
솨아아—!
붉은 파도가 바르간을 덮친다.
오롯이 아르텔리온의 명에만 따르는 짙은 핏빛의 단풍잎.
유리 조각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오러가 잔인한 칼날이 되어 바르간을 노린다.
그 폭풍의 중심에 위치한 바르간.
살벌한 단풍들로 전혀 모습이 파악되지 않는 사태에 이르렀으나, 강하게 마나를 터트리며 잎들을 일시적으로 퍼지게 만들었다.
그 안에 있는 건.
교복이 아닌, 검은 정장의 바르간.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그의 복장에는 주름조차 없다.
탁—!
바르간이 지팡이를 짚었다.
그를 중심으로 마나가 일렁이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눈에 인식되지는 않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불길한 기운의 마나.
바르간은 입가에 머금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 안대를 풀었다.
동시에, 빛을 잃은 눈동자 위로 스쳐 지나가는 아지랑이.
피부에 변한 것은 없어도 저 현상은 착마. 아르텔리온은 그것을 알았다.
이제야 바르간이 본격적으로 시합을 할 마음이 생긴 듯하다.
“왕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사양 않고 가겠습니다.”
사방에서 떠오른 소환의 술식.
이중융합을 하여 두 원을 중심으로 두고 있는 네 개의 기하학적인 문양, 두 개의 일반 소환진 위로 사역마들이 나타났다.
공작위 어둠의 정령 아르카네와, 전신이 뼈로 이루어진 강골이의 융합체.
공작위 물의 정령 나이아스와, 눈이 유독 발달한 호크의 융합체.
압중한 중량을 자랑하는 태산이와, 분자 단위로 나눠지는 엘리엇의 융합체.
사슬로 변신이 가능한 늑돌이와, 시야와 소리가 공유 가능한 왕눈이의 융합체.
그 자체로도 충분히 다양한 사역마들이 섞여 있는 인조 키메라 크라이.
바르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나 덩어리의 유령 공급이.
경기장 위로 소환된 그들은 바르간이 따로 명령을 하지 않아도 각자의 위치에서 살기를 번뜩이며, 역할을 분배했다.
즈으응—.
이로도 부족했던지 12개의 부패 마력구를 떠올린 바르간.
시련을 받은 채 마나 총량과 위력이 절반으로 깎여 있음에도.
그는 유물의 사용이 금지된 현 경기장 위에서, 이토록 강력한 사역마들을 완벽하게 통솔한 채 자신의 마법 또한 구사할 수 있었다.
—탁!
바르간이 지팡이로 바닥을 찍으며 본격적인 개전을 알렸다.
—크롸아아아!
쿵쿵쿵쿵—!
가장 먼저 달려든 건 비가시화 상태의 태산이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는 거대한 다리를 내뻗으며 금세 아르텔리온의 앞에 다다랐고.
힘차게 양 주먹을 내려 찍으려든다.
“……보인다. 거구.”
눈을 감고 있던 아르텔리온.
거대한 질량이 내리꽂힘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되레 검을 높이 세워 들며 붉은 오러의 빛을 강하게 만드는 그.
그러자, 아르텔리온을 향해서 내리 박히던 태산이의 주먹이 양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고, 태산이는 급히 분자 크기로 몸을 나눴다.
—투홧!
태산이가 터져 나가자 아르텔리온은 고속으로 이동했다.
이를 지켜보던 나이아스. 안 그래도 잘 보이던 눈이 더욱 또렷하게 된 정령이 가장 먼저 외쳤다.
“아르카네! 뒤—!”
“알고 있어요!”
콰각—!
아르카네는 재빠르게 뼈의 꼬리를 활짝 펴며 아르텔리온의 일격을 막았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거대한 충격. 아르카네의 전신 구석구석에서 전율과 통증을 호소했다.
“크으읏……!”
아르카네는 이를 악물면서 버틴다.
그런데도 점차 뼈를 베어 가며 다가오는 붉은 오러.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공간장악’을 발동해 주변에 어둠을 가득 차게 만든다.
어둠은 아르카네의 힘. 이를 조종하여 강력한 중력으로 압축시켜 버린다면…!
그런 생각으로 한 시도였으나, 곧바로 종이 쪼가리처럼 갈가리 찢겨 나가는 어둠.
아르텔리온의 붉은 단풍은 정령의 힘조차 잘라 내 버릴 수 있었다.
“아니…!”
“야, 이 새끼야! 내 후배 괴롭히지 마!”
아르텔리온의 검이 아르카네에게 닿으려 하자 전력을 다해 뒤를 잡은 나이아스.
일전에 에를리히에게 사용하려고 했던, 극한으로 마법을 담은 주먹을 내찌른다.
나이아스의 정권에는 공작위 정령의 힘과 심판무구의 힘이 담겼다.
하지만.
‘말이 되는 속도야 이게…?!’
몹시 뛰어나진 시각. 이로 인해 온연하게 보이는 현상.
나이아스는 자신이 온 힘을 다해 내찌른 주먹이 간단히 피해지는 장면을 두 눈으로 보았다.
분명, 아르카네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어 제대로 알지도 못했을 텐데도.
아르텔리온은 뒤에 눈이라도 달린 건지, 그대로 검의 방향을 틀어 꼬리를 절단한 채 되레 역공을 시도한다.
쿠구궁—!
폭탄이 터져 나간 광음과 함께 충격파가 일었다.
나이아스의 정권과 맞부딪힌 여파가 경기장을 울렸고, 단풍잎들은 경기장 끝자락으로 퍼지게 되었다.
둘 모두에게 전해지는 반동.
“…….”
잠시 숨을 돌리며 정황을 빠르게 되살피는 아르텔리온.
자신의 단풍 역시 밀려 나가기는 했어도.
주변에 있던 아르카네와 나이아스는 충격에 의해 밀려난 상황.
바르간에게 남은 걸음은 앞으로 스무 걸음 안팍.
‘사역마들을 아무리 베어도 효력 없다. 그를 직접 베지 않으면….’
계산을 끝낸 황금의 기사는 다시금 땅을 박차려 들었다.
그때.
크르르릉—.
그의 양 발목을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두 마리의 늑돌이.
늑대는 사슬로 변하여 아르텔리온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어서 분신을 만들며 수를 불리는 늑대들. 순식간에 포위된 그.
아르텔리온은 눈을 좁혀 늑대들에게 마력을 공급하여 수를 불리고 있는 수수께끼의 사역마를 바라보았다.
분명 마나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알지 못했던 사역마도 보이는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상정하지 못했던 존재들이 나타났다고 해서 기세가 죽을 아르텔리온이 아니다.
자신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드는 늑대 떼가 아르텔리온의 곳곳을 물어 댔다.
이빨이 살을 꿰뚫고 박히자 사슬이 되었고.
사슬은 바닥에 팽팽하게 박히며 움직임을 점차 묶어 나갔다.
어찌나 단단한지 잡혀 있는 팔을 끌어당기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
그렇다고 퍼져 있는 단풍을 모아 잘라 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단풍은 사용하지 않는다.’
아르텔리온의 검신에 물들어 있던 붉은 오러의 형태가 변한다.
일렁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그것. 형태를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은 주인인 아르텔리온의 재량이다.
—깨갱, 깨갱!
채찍과 같이 변한 붉은 오러는 자유자재로 움직였고.
아르텔리온을 구속하고 있는 사슬을 잘라 내며, 달려드는 늑돌이들을 학살했다.
멈출 생각이 없는 아르텔리온.
경기장 바닥에 금이 가도록 힘을 주곤 대포와 같이 튀어 나간다.
나아가는 방향에 있던 수수께끼의 유령을 베어 낸 그.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12개의 마력구가 광선을 쏘아 대며 아르텔리온을 맞이한다.
아르텔리온은 숨을 참으면서까지 전신의 근육과 마나를 끄집어 올렸고.
기름을 부은 불꽃처럼 재빠르게 달려들었다.
‘일곱… 여섯….’
발을 내뻗으며 검을 내두르는 그.
남은 걸음 수과 마력구의 수가 줄어 간다.
광선의 속도가 워낙 빨라 중간중간 스치는 피해를 입고 만다.
부패의 불꽃이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선사함에도 황금의 기사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셋… 둘….’
정확하게 마력구의 중심을 벤 그. 들판에 부는 바람과 같이 매섭고, 부드럽게 진격했다.
‘…하나.’
이윽고 바르간과 바로 앞에 마주하게 된 그.
아르텔리온은 여기까지 달려온 추진력과 합산한 일격을 휘두르려 한다.
—성급하시군요. 왕자님.
동시에 아르텔리온은 보았다.
그리고 들었다.
—아직 한 발 남았습니다.
바르간의 입가에 올라간 미소.
곧이라도 터져 나갈 듯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 대는 13번째 마력구.
그리고, 아르텔리온의 머릿속에서 울려 대는 그의 웃음기 섞인 음성까지.
—최근에 사용 가능한 마력구의 수가 늘었는데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음을 남기며 쏘아지는 부패의 마력포.
바르간은 깜짝 놀란 아르텔리온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어떻게든 간신히 마력구를 피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피해를 받으면서까지 일격을 가하려 할 것인가.
그러나 그런 바르간과의 바람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간다.
“…역시.”
황금의 기사의 품 안에 숨어 있던 붉은 단풍잎들이 고개를 내민다.
아르텔리온은 바르간이라면 숨겨 둔 패가 남아 있을 것으로 여겼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너라면 그럴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단풍잎이 마력포를 갈라내며 공멸한다.
이제 아르텔리온의 앞을 방해하는 존재는 바르간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의 검이 머뭇거릴 이유도 없다.
—꽤 음흉해지셨습니다. 왕자님.
전에 보이지 않았던 그의 전투 방식에 제법 놀란 바르간.
초 단위로 어둑이를 입은 손날에 부패의 마법을 일게 만들며, 그의 두뇌에다가 직접 음성을 집어넣자.
아르텔리온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구두를 대신했다.
‘그건… 생각보다 듣기 좋은 말이로군.’
휘둘러지는 검.
이를 역공하려 드는 바르간.
그리고.
“우릴 두고 어딜……!”
전열을 가다듬은 채 사방에서 아르텔리온을 향해 달려드는 사역마들.
경기장 내부는 쉴 틈도 없이 격렬한 진동을 울린 채, 유례없는 화려한 결승전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