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20)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20화(220/350)
반짝거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알리시아.
그녀의 망막에 넓은 파티장의 모습이 비쳤다.
천장에 중앙에 위치한 웅장한 크기의 샹들리에, 황금빛으로 칠한 듯 화사한 벽, 보석처럼 아름다운 장식들.
그리고 교복만 입던 학생들을 완전히 딴사람으로 보이게 만드는 화려한 복식.
자유롭게 오가며 음식과 술을 마시는 이곳은 알리시아 인생에 있어 두 번째 연회장이다.
“이번에는 크게 호들갑 떨지 않는구나?”
바르간은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알리시아에게 말했다.
입학 시기의 알리시아만 하더라도 천국이니 뭐니 하며 과장된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은 제법 침착하다.
…아니, 침착하려고 애쓴다.
“도련님의 시종으로서 격식에 어긋날 수 없습니다.”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 그렇습니까? 고치겠습니다.”
“됐다. 아카데미아의 1년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오늘 정도는 다소 들뜬 모습을 보여도 나무라지 않을 것이야.”
어느덧 시기가 그렇게 되었다.
오늘부로 1학년들은 1년 동안의 과정을 수료하게 된다.
겨울방학이라는 시기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내년부터는 2학년으로서 활동하고 새로운 후배들도 들어오게 될 예정이다.
알리시아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다시금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제가 선배가 된다니…. 앞으로 들어올 후배님들에게 있어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니 더욱 수련에 정진해야 할 듯합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높게 평가한다만, 사실 성과로만 보면 이미… 음, 그 부분은 너의 재량에 맡기마. 그리고….”
“왜 그러십니까?”
바르간은 검지를 쭉 뻗으며 알리시아의 손목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목에는 하얀 털뭉치 형태의 팔찌 같은 것이 둘러져 있다.
“너는 진정하려고 애쓰고 있다만, 그 아이는 쉽지 않은 모양이구나.”
“예? 아, 아아…!”
알리시아가 두르고 있던 털뭉치에 올망졸망한 검은 눈코입이 빼꼼 모습을 드러내더니, 곧 잽싸게 몸을 날렸다.
알리시아에게 탈출한 흰담비 부류의 사역마.
이목을 이끄는 화려한 광경에 제 세상인 것마냥 뛰어가기 시작했다.
얇실하고 긴 몸으로 빠르기도 하다.
“도, 도련님…!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 갔다 와도 괜찮겠습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하구나. 소란이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데려오거라.”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기다려! 제비야!”
조금 전까지 격식을 운운하던 알리시아가 헐레벌떡 달려 나갔다.
긴 드레스가 움직이기 힘들어 양 끝을 잡고 뛰는 게 인상적이다. 높은 힐의 구두가 익숙하지 않아 휘청거리기도 하니 더욱 그런 듯싶다.
바르간은 그런 알리시아를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지었다.
“꽤 왈가닥한 성격의 사역마를 골랐군.”
여신교의 교수를 잡은 대가로 얻은 알리시아의 첫 사역마.
참고로 그녀가 사역마를 지칭한 ‘제비’라는 이름은 바르간이 지어 준 것이다.
흰담비도 족제빗과이니 제비라고 지었다고 했다.
“…….”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에리카.
아무런 말 없이 바르간을 잡고 있는 옷 끝에 힘을 주게 되었다.
“음?”
당겨짐을 느낀 바르간이 고개를 돌리자, 타이밍이 겹치며 한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와 안대로 가려져 있는 한쪽 눈이 인상적인 인물이다.
그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아카데미아의 유명 인사를 이제야 좀 가까이에서 보게 되는군. 반갑네 바르간. 나는 켈로라고 하네.”
“알고 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켈로 님.”
“오, 보기보다 예의범절이 갖춰진 친구였군.”
‘보기보다’라는 표현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바르간은 내색하지 않고 사교용 미소를 지었다.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이자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는데.
“용사랭킹 8위씩이나 되는 인물께서 제게 무슨 볼일이십니까?”
“그렇게 굳이 짚어 주니 쑥스럽군. 뭐, 8위 정도면 나름 높은 편에 속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만 아무래도 함께 온 헤일리온이나 페랑기스에 비하면 부족해서 내가 먼저 밝히지는 않고 있었거든.”
뒤르테문드 사건 이후 6위로 올라간 헤일리온.
2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페랑기스.
확실히 두 사람에 비하면 떨어지는 순위이기는 하지만, 수백이 넘는 용사들 중 8위라는 성적은 대단히 높은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 자릿수 속하는 이들은 다른 용사들과 완전히 다른 격의 강자들로 취급하니까 말이다.
바르간은 혀를 놀리며 적당히 그가 기분 좋을 수 있을 정도로 띄워 주었고, 켈로는 누가 봐도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원작에 적혀 있던 대로 칭찬에 약한 인물이다.
켈로는 콧잔등을 훑으며 자신이 바르간에게 말을 건 이유를 밝혔다.
“헤일리온의 하나뿐인 제자라고 하기에 관심이 있었지. 토너먼트에서 활약하는 것도 잘 봤네. 그런 상태로도 제법 잘 싸우더군.”
자신의 안대를 두드리는 켈로.
아무래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요소에 동질감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는 모양이었다.
켈로는 질문을 이었다.
“듣자 하니 알티프에게 당한 것 같던데… 어떤 녀석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나?”
“알티프…요?”
“그래. 너 정도 되는 예비 용사의 눈을 훔쳐 갈 정도면 대주교나 최상위권 주교는… 흠. 그 표정을 보니 내가 들은 정보가 잘못된 것 같군.”
“예. 알티프라니 근거 없는 헛소문입니다.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어 잠시 이러고 있는 것뿐이죠.”
“그래?”
켈로는 턱수염이 나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안대를 차고 있지 않은 방향으로 슬쩍 몸을 돌리더니 먼 지점을 바라보았다.
“저쪽에서 너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여학생에게 들은 말이었는데… 하기야, 친밀한 사이었다면 그리 관찰하듯 볼일도 없었겠군.”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말했다.
알티프에게 당한 게 아니라면 좋은 일이라며 빠르게 회복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바르간은 그 여학생이라는 인물이 짐작이 갔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다.
‘용무가 있다면 나중에 알아서 찾아오겠지.’
여학생에 관한 관심을 접은 바르간. 대신 원작에 적혀 있지 않았던 켈로에 관한 정보를 물었다.
“켈로 님의 오른 눈은 어쩌다 그렇게 되신 겁니까?”
“이거 말인가. 별건 아니네. 다른 용사들이 으레 그렇듯 알티프에게 당한 것이지.”
“켈로 님이야말로 상당히 강한 개체를 만나신 모양이군요. 대주교급인 겁니까?”
“글쎄, 워낙 오래되어 기억도 안 나네.”
“기억이 안 난다고요?”
“아, 기억을 먹는 추기경에게 당한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그냥 하도 상처가 많다 보니까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그렇군요.”
추기경 가미긴을 만난 것도 아니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눈을 당하고 기억을 못 하는 게 말이 되나?—싶기는 하지만, 바르간은 우선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 역시 원작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좋은 시간 보내게나. 용사의 삶은 고달파. 학생 때 시험이니 과제에 치인다고 해도 그때가 가장 좋은 법이지. 뭐… 이미 충실히 보내고도 있는 것 같지만 말이야.”
켈로는 바르간의 옆에 딱 붙어 있는 에리카를 슬쩍 바라보다가 떠나갔다.
금방 왔다가 금방 가는 걸 보면, 단순히 안면을 트기 위해서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용사랭킹 8위의 켈로…. 분명 추기경 가미긴 세력과 맞붙을 때 대주교 사브나크에게 반으로 잘려서 죽었었지.’
정정당당하게 싸운 게 아니라 상처 입은 동료를 챙기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결과는 결과.
어쩌면 곧 있을 미래, 달라진 국면으로 둘이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에리카, 이만 조용한 곳으로 가도록 하자.”
바르간은 조금 전부터 유독 말이 없는 에리카를 위해서 움직였다.
사람이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는 이곳은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 최악의 장소다. 조금이나마 한적한 곳으로 가서 숨을 돌리는 게 나아 보였다.
자신을 배려하는 바르간의 태도에 에리카는 미안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멋대로 돌아다니면 안 돼. 다음에 또 그러면 정말 크게 혼낼 거야.”
파티장의 구석에서 사역마를 붙잡은 알리시아.
결국 그녀의 팔목으로 돌아온 제비에게 나름대로 따끔한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보기 상당히 드문, 치켜 올라간 알리시아의 눈썹.
—뀨르….
제비는 반성을 하겠다는 듯 힘이 없는 목소리를 냈다.
팔찌의 형태로 돌아가 눈코입은 보이지 않았으나, 제법 풀이 죽은 듯 보였다.
그렇게 무사히 제비의 탈출극을 막은 알리시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바르간을 찾았다.
생각보다 꽤 시간이 걸려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마나를 찾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사방에 퍼져 있는 수많은 마나의 기운에서 바르간의 것을 찾던 알리시아. 그녀에게 다가온 남학생에 의해 멈추게 되었다.
“드레스가 아주 잘 어울리오.”
“가바 님….”
“잠시 일행과 떨어진 것 같아 말을 걸었소. 이런 기회는 좀처럼 없으니까.”
다부진 체격의 가바는 적절한 시기를 노리게 되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찾다 보니 그랬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내 힘이 부족해서 토너먼트 1위를 차지하지 못했소. 그대의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아… 아니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여전히 매몰차군. 역시 바르간 때문에 그렇소?”
“왜 갑자기 여기서 도련님이 나오는 건가요…?”
“그거야 알리시아. 그대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
“…….”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 알리시아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러 들었다.
가바와 계속해서 말을 잇게 되면 말하지 않아야 할 것도 꺼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길게 시간을 빼앗진 않겠소.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일 듯한데 조금의 유예를 내 주었으면 하오.”
“…….”
가바의 끈질긴 부탁에 알리시아는 걸음을 멈췄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선천적인 성향의 탓이기도 했지만, 차라리 지금 여기서 모든 관계를 정리하는 게 낫겠다.
그렇게 판단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대의 마음에 빈 곳이 없음을 알고 있소. 내가 다가가면 갈수록 그대는 나를 밀어내려 들겠지. 게다가 경기장 위에서 본 그대의 주인은 정말이지 강하더군. 아르텔리온에게서 압승을 차지할 정도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내가 졌다는 말이오.”
가바는 힘없이 웃었다. 입가는 웃음을 지으려 하지만 꼬리가 처져 있어 슬픔이 엿보였다.
“나는 그대의 주인보다 가진 게 없소. 가문도, 부도, 명예도, 심지어는 강함조차도.”
“…….”
“그래서 하다못해 그가 보이지 않는 적극성이라도 가지려고 더욱 그랬던 것이오. 이런 내 행동이 그대의 마음에 누가 되었다면 뒤늦게나마 사과하겠소. …이런 어울리지 않는 말투도 이젠 그만하는 게 낫겠군. 정말 미안하게 됐어.”
말투를 바꾸자 자연스레 낮게 깔았던 음 역시 올라갔다.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컨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멋이 없으니까.
가바의 태도가 전과 다르자, 알리시아 역시 자세를 바로 하며 그를 제대로 마주했다.
가바는 알리시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느꼈던 감정을 솔직하게 뱉어 냈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감정.
짧은 시기에 농축되었던 짙은 경험.
담담하면서도 간결하게 그동안의 일을 말하는 가바. 알리시아는 경청하며 흘림 없이 받아들였다.
“…그 정도로 너를 좋아했어. 지금만 해도 그래. …하지만, 이제 그만두려고.”
그는 바르간을 언급했다.
당당하게 토너먼트 1위를 차지한 그.
그의 전력을 보면서 가바는 지금껏 그를 과소평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몇 년을 수련에만 매진한다고 하더라도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인 경지.
다른 모든 것들도 이미 꿀렸는데 힘에서까지 밀렸다.
알리시아가 그에게 존경과 연모의 감정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애써 붙들고 있던 그녀를 놓아주기로 했다.
…미련이 없냐고 물으면, 상당히 남아 있어 질척거리기까지 했으나.
그게 알리시아를 위해서도 나을 것 같았다.
씁쓸한 뒷맛을 느끼던 가바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의중을 물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이 물음조차도 미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쯤 그에게 네 마음을 표현하려고?”
“…….”
알리시아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는 이는 없어 크게 떠들지만 않는다면 우선은 괜찮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모른 척하거나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면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 준 가바에게 그런 가식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천천히 연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그런 일을 절대 없을 거예요. 제가 그분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건 죄악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죄악? 표현이 거창하네. 신분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 고리타분한 개념은 용사가 되는 순간 끝이니까.”
용사는 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만을 사용하여 원칙적으로 서로 이름을 부를 때 존대어를 쓰지 않는다.
아카데미아나 리케이온에서 평등을 주장하는 까닭도 애초에 용사라는 체계가 그렇게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가바는 그 점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용사가 되어서 눈이 맞는 경우도 많지. 손톱에 흙 한 번 끼어 본 적 없는 귀족 영애 출신의 용사가 밭을 갈던 용사와 사랑을 나누는 것도 흔한 일이야.”
“저는 그런 분들과 상황이 달라요.”
“왜지? 처음부터 계약관계였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약혼녀 때문에?”
“…아니에요.”
알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가바는 침착하게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며, 알리시아는 고민을 이어 갔다.
지금껏 이 이상으로 타인에게 밝힌 적은 없었다.
에밀리가 집요하게 물어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르간에 관한 연심을 인정한 적은 있었으나 그게 전부.
당시에도 그에게 고백을 하는 일은 하늘이 반으로 갈라져도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아 두었고,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외부적인 이유만을 늘어놓았었다.
‘하지만… 가바 님은 나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셨는데….’
고뇌의 괴로움이 커져 갔다.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결국.
알리시아는 무거운 짐을 잠시 내려놓듯 숨을 천천히 내쉬었고.
진솔하게 속내를 밝히기 시작했다.
“…가바 님은 며칠 동안 빵 한 조각도 먹지 못한 때가 있으신가요?”
“빵?”
알리시아가 뱉은 말은 의외의 문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저는 있어요. 10살도 되지 않은 때. 마을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무덤만을 팠던 적이 있었거든요.”
“…….”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휘어 버린 농기구로 땅을 파며 시체를 꽃과 함께 묻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흘러갔지만, 어린 알리시아의 코는 여전히 악취에 마비되어 있었으며.
그녀의 눈에는 시체에 득실거리는 새하얀 구더기 떼만이 비쳤다.
“빵은커녕 모든 곡식은 불에 타 재가 되었었죠. 우물에 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저는 죽었을 거예요. 이제와 생각해보니 독이 타 있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무기력하게, 기름으로 움직이는 기계와도 같이.
당시의 알리시아는 묘지를 만드는 것만을 반복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어 버린 그때조차도. 빵 한 조각이 절실한 거 아세요? 딱딱하거나 냄새나거나 그런 건 상관없어요. 배를 채울 수만 있다면 뭐든지 위에 집어넣고 싶었어요.”
알리시아는 가바에게 자신이 힘들었던 삶을 공감받고 싶은 게 아니다.
이는 이해를 위한 배경일 뿐,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제부터가 본론이었다.
“그러다가 저는 양어머니에게 구조되었고 오랜만에 식사라는 걸 할 수 있었어요. 새로운 어머니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살아갔죠. 근데… 무서운 게 뭔지 아세요…?”
“무서운 거?”
“몇 주가 지나고 보니 제가 식사의 양과 맛을 비교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오랜만에 입에 넣는 빵은 오래된 걸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세상에 다시 없을 별미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고 배가 채워질수록.
알리시아는 과거 가족들과 먹었던 따뜻한 빵과 스프를 그리워했고, 딱딱한 빵과 대조하게 되었다.
그런 과거의 자신이 끔찍하다는 듯, 알리시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이가 없죠. 배가 조금 부르다고 더 큰 욕심을 부리다니. 얹혀살고 있는 주제에 말이에요.”
“…….”
그 정도는 인간으로서 매우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는 가바였지만, 우선 의견을 내지 않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것을 들었다.
결국 그녀가 말하는 바는, 욕망.
“저는 지금껏 전혀 상상해 본 적 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어요. 그리고 이를 내어주신 도련님께 항상 감사하며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죠. …그런데 가끔 겁이 나요. 지금 느끼는 이 행복에 익숙해져서 더 큰 욕심을 부릴까 봐요. 도련님에 대한 감사함이 줄어들까 봐요.”
알리시아는 너무나 행복한 ‘지금의 순간’을 잃는 데 두려움을 느꼈다.
바르간에게 느끼는 존경심이나 감사함을 잃는 것이.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잃는 것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 이상 욕심을 내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는 안 돼요. 저는 지금으로도 행복하고 만족해요. 제가 열망하는 건 무력의 성취와 도련님의 창창한 앞날. 그 둘만 있으면 충분해요.”
욕심은 끝이 없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포기했다.
바르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출하지 않는 것.
그것은 수많은 외부적인 요인이 족쇄로 작용한 점도 있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이러한 까닭으로 존재했다.
그녀의 다소 무거운 진심을 들은 가바. 여태까지 꾹 다물고 입던 입을 움직이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가바는 언제나 왜곡 없이 상대를 마주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며 모든 상황은 변하게 될 거야.”
“…….”
“적응하고 싶지 않아도 적응하기 마련이고, 변하고 싶지 않으려 해도 변하기 마련이야. 네가 아무리 옴짝달싹하지 않으려 해도 주변이 멋대로 바뀔 테고, 너를 변화시키겠지.”
“하지만….”
“알리시아. 내가 너에게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구애했던 것도 너라는 변수가 내 인생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야.”
“…….”
“충격을 받아 내 가치관에 변화가 생겼고 그 안에서 나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했어. 그 결과가 비록 내가 바랐던 것과는 다를지라도 후회하지 않아.”
알리시아가 고르려는 길은 유지가 아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유지’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다.
“알리시아. 너는 훗날, 지금의 선택을 정말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가바는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알리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너무 그녀에게 감정이입했음을 인지하고 괜히 너스레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가볍게 돌리려 했다.
제안과 강요는 엄연히 다르니까.
“…뭐, 솔직히 네가 선택을 바꾸지 않고 지금이라도 내 품에 안겨 주면 나야 좋긴 하지.”
“…….”
생각이 많아진 알리시아.
그의 장난은 귀에 들리지 않았다.
자신은 바르간을 사랑한다.
하나, 결실을 맺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이미 그녀의 마음은 깨끗하게 결론이 지어졌고, 더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고정 전제였다.
그런데.
‘…이러면 안 되는데.’
알리시아의 심장이 괴롭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 불순한 생각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자꾸만 욕심을 부리고 싶고, 그에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다.
이건 분명 가바의 탓이다. 애써 잠잠해진 호수 위에 왜 또다시 돌을 던지는가.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절로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진짜 안 되는데….’
그때. 기가 막히게 파티장의 대부분의 조명이 꺼지고 홀의 중앙에 빛이 모여든다.
알리시아는 고개를 푹 숙여 자신의 얼굴 표정을 남들이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어두워져 바로 앞에 있는 가바조차도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지 못했다.
‘도련님과 이어지고 싶다는 욕심까지는 정말 안 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