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31)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31화(231/350)
미치광이처럼 검을 휘둘렀다.
약간은 정신을 놓아야 오히려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크케가학!
마물도, 알티프도 아닌 괴물들.
녀석들이 내는 괴음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벌써 몇만 번이나 찌르고 베고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마법을 쓰지 못하니까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검을 휘둘렀고. 당연히 오러 따위의 힘도 사용할 수 없었다.
괴물들의 딱딱한 표피를 뚫는 것은 나의 근육이요.
그들의 살점을 도려내는 것은 나의 피였다.
시련의 세계 속에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몸이 반으로 잘려도, 목이 떨어져도, 체내의 모든 피를 빨아먹혀도.
마치 게임 캐릭터의 라이프 포인트가 무제한으로 있는 것처럼.
나의 몸은 몇 번, 몇십 번이나 되살아나기를 반복했고.
검을 잡고 정확히 78번째 부활했을 때, 시꺼먼 개미 떼 같던 6만의 군세를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러자.
모든 적들을 쓰러트렸다는 것을 인정이라도 하듯이 쥐고 있던 검이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려졌다.
이런 세계라도 공기의 흐름이라는 게 존재하는 모양이다.
나는 손바닥에 남은 검은 재를 탈탈 털어 내곤 겨우 한숨 돌렸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게 치명적이기는 했군. 아니었다면 다섯 손가락 안의 죽음으로 충분했을 텐데.’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나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아무리 시련이라지만 마법사에게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게 말인가.
덕분에 나는 팔의 근육이 터져 나가면서까지 검을 휘둘렀고 간신히 해당 스테이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아, 여기서 말하는 ‘스테이지’란 내가 부르는 호칭일 뿐이다.
이 시련의 세계는 친절하지 않아서 아무런 안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이름을 붙여서 구분을 짓고 있었다.
참고로 이번에 끝낸 스테이지는 24번째였다.
“후우…….”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면서 뛰쳐나갈 것처럼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몸 곳곳에 지나칠 정도로 산소를 공급하는 심장 탓에 과호흡이 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곤 진득한 피가 잔뜩 들러붙은 옷을 찢어 적당한 곳에 던졌다.
다행스럽게도(?) 옷이나 검이 훼손되면 자연스럽게 깨끗한 상태로 복원되었다.
주어졌던 검은 명검이나 유물 따위가 아닌 일반 철검이었기에 몇 번 찔러 박거나 휘두르면 날이 갈아졌고.
심지어는 금세 괴물들의 피와 기름로 범벅이 되어 잘 베이지 않았기에 차라리 중간중간 일부러 부러뜨리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도 몸은 부활할지언정 고통과 피로가 그대로 잔재했다.
그나마 상처는 회복되어 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나는 아르텔리온처럼 검사도 아니고, 알리시아처럼 마검사도 아니건만 어째서 미친 듯이 칼춤을 추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이해가 되질 않지만.
…뭐,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선택한 시련, 내가 선택한 고유술식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는 수밖에.
연약한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주저앉는 것은 인생의 낭비다.
게다가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여기서 겪는 고난과 전투를 고스란히 경험으로 남길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알리시아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걸었던 마법과도 비슷하군.’
시련을 모두 끝내고 나갔을 때 육신이 고스란히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된다고 증명한 비슷한 사례가 알리시아와 핀. 둘이나 된다.
어느 정도의 기대는 해도 되겠지.
“어이쿠….”
갸우뚱하며 넘어질 뻔한 몸의 균형을 바로잡았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핑 돌며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일시적인 현상이었기에 아무렇지 않았지만 역시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었다.
하기야, 이런 미친 짓을 25번째 반복하고 있으니 그럴 만하긴 하다.
나는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다리를 제대로 박아 세우며 언제든지 돌발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감각을 날카롭게 했다.
…음? 어째서 ‘바닥’이 아니라 ‘천장’이냐고?
그거야 이번 25번째 스테이지의 형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대군세의 괴물들을 무찌르자 세상은 격변하였고 나는 커다란 동굴 안에 있게 되었다.
이곳은 위와 아래가 반전된 세상. 나는 커다란 종유석들의 곁에 박쥐처럼 꼿꼿이 서 있다.
그래도 물밀듯이 적들이 밀고 들어오지는 않으니 숨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숨을 돌릴 수 있다는 말을 옳지 않나.
이번 스테이지의 제약이 ‘바닥과 천장, 숨’인 듯하여 숨구멍이 점차 막혀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떡하면 좋은가.’
오감을 지배당하는 마지막 달의 시련은 단순히 무감각해지는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상에 놓인다고 보는 편이 올바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이런 영문 모를 장소에 놓여 있지.
‘에리카에게는 철저히 준비를 해 두었다고 했지만….’
사실 전혀, 아무런 대책이 없다.
왜냐?
대비를 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작위로 나타나는 이 시련 공간의 가짓수를 예측하는 것을 말이 안 된다.
하얀 도화지 위에 아무런 구상 없이 붓을 놀린다고 했을 때 그것을 미리 예측하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결국 이번에 필요한 것은 행동의 유연성.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능력이다.’
추가적으로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꽉 붙잡고 있는 것.
그것 말고는 차도가 없다.
“후….”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호흡을 방지하기 위해 호흡을 조절했는데, 이제는 강제로 폐에 공기를 밀어넣지 않으면 숨이 쉬어지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갑갑하다.
기관지가 꽉 막힌 것처럼 괴롭다.
처음에는 좀 쉴 만한 스테이지인가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도가 심해져 갔다.
나는 체내의 마력을 움직이며 산소로 변환시켰다.
전 스테이지에 걸렸던 마력의 제한이 풀려서 다행이었다.
“후— 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는 딱 거기까지.
그 이후로는 숨을 쉬는 데만 집중해야지 겨우 산소를 공급할 수 있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피부가 허옇게 변하는 게 보일 정도로 내 몸은 호흡을 필요로 했다.
마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음에도 누군가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았고.
나는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죽게 되면 되살아났을 때 누적되는 피로가 더 크기 때문이었다.
벌써 200번은 넘게 죽었으니 사실 내 몸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을 잃게 됐을 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쿠구구궁.
그렇게 말 그대로 숨 막히는 때가 지났다.
어느덧 이번 스테이지도 완료되었는지 다시금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뒤집혀 있던 나의 몸은 도로 돌아와 바닥에 붙었으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거대한 동굴은 일그러지며 다른 모습으로… 음? 어째 동굴이랑 비슷한 형태인 거 같은데?
—찰그락.
새로운 스테이지로 옮겨지자 내 사지는 구속구를 차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발목은 될 법한 두께의 쇠사슬이 당연하다는 듯 나를 붙잡고 있다.
‘여긴 감옥인가…?’
조금 전에 있었던 동굴과 비슷한 재질의 벽.
다른 게 있다면 온도가 훨씬 아래로 내려가 입김이 나온다는 것과, 나가지 못하도록 쇠창살이 가로막고 있다는 점.
아무래도 이번 스테이지의 클리어 조건은 탈출인 모양이다.
“오빠… 추워….”
주변을 살피고 있자 멀리서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우며 소리가 난 방향을 노려봤다.
시련 속에서 ‘나’ 이외의 생물의 음성이라고는 다양한 형태의 괴물들밖에 보지 못했다.
아무리 사람의 언어를 말하고 있더라도 또 언제 공격할지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마나를 움직이며 살피자 멀찍이 떨어진 감옥의 구석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몸을 껴안은 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이곳의 온도는 영하 20도는 되었는데 그들은 얇은 누더기 한 겹만을 입은 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고 있다.
“조금만 버텨…. 정신을 잃으면 안 돼. 분명 ‘마법사님’께서 구해 주려 오실 거야.”
“마법사님이 정말로 와 주실까……?”
“그럼, 마법사님은 전지전능하셔. 분명 우리를 구해 주시고 나쁜 괴물을 죽여 주실 거야.”
서로 다른 외모의 남매.
같은 핏줄을 이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이질적으로 생긴 둘이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지 우물쭈물하던 여자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하지만 오빠…. 옛날에… 우르나가 불탔을 때도 마법사님이 오지 않으셨다고 했잖아.”
“그건…….”
남자아이는 뭐라 대꾸할 수 없었는지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대신 여자아이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불안함을 덜어 주려고 애썼다.
‘우르나…. 세이만 던전에서 보았던 그 우르나를 말하는 건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생각했다.
수천 년 전, 아직 여신교가 없었던 시절.
십이신수 중 하나인 세이만이 습격했던 도시.
던전의 주인이자 그 마을의 주민이기도 했던 안나가 보여 주었던 도시의 이름이다.
던전에서는 나와 에리카, 그리고 주교 한에 의해서 토벌되었던 세이만이지만 본래 역사에서 우르나는 파멸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겠군.’
나는 마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들을 전부 끊어 냈다.
마법에 관한 처리가 전혀 되지 않은 순수한 철덩어리였기에 잘라 내는 것은 간단했다.
“거, 거기 누구 있어요?”
두꺼운 철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자 남자아이가 외쳤다.
나는 대답을 하는 대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우르나 때와 같아. 저 꼬마들에게서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력이란 사람이라면 혈액과 같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의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의 이야기이고 먼 과거에는 이렇듯 마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비록 던전의 환각일지라도 고대의 도시인 우르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련이 어째서 나에게 이런 배경을 보여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클리어하는 데 필요한 정보일지 모른다.
정보는 부족한 것보단 많은 편이 낫다.
그런 생각으로 접근을 하고 있는데 이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품에 파고들려 했고 몸은 소리에 맞춰 흠칫흠칫 떨었다.
남자아이는 여자아이를 지키려는지, 막상 제 자신도 울먹이는 눈을 날카롭게 해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오, 오지 마세요! 더 이상 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잔뜩 겁먹은 남자아이가 나름 호기롭게 말했다.
마력도 없는 평범한 꼬맹이가 하면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저러는지는 몰라도, 우선 오해를 풀기 위해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줘야겠다.
“꼬맹아. 나는 귀가 먹지 않았으니 조근조근 말하거라. 이 이상 시끄럽게 해서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면 팔다리를 묶고 최면을 걸어 정보만 빼내는 수가 있다.”
“오, 오빠…! 나, 무서워!”
“거,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내 뒤로 숨어 자간!”
이리도 상냥한 어투로 말했는데 더욱 겁먹고 잔뜩 몸을 움츠린 아이들.
팔다리를 잘라 버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저리도 두려워할 필요가….
잠깐, 지금 저 녀석이 뭐라고 했지?
그 생각이 든 것은 꼬마들을 눈앞에서 제대로 본 직후다.
처음 본다.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 보는 아이들.
하지만, 저 둥근 눈매며, 버선코처럼 튀어나온 코, 입의 모양….
묘하게 익숙하다.
머리색이나 피부색은 조금 다르지만 분명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오, 오지 말라고…!”
“아니, 그거 말고. 네 옆에 있는 꼬맹이를 뭐라고 불렀냐는 말이다”
“네, 네…?”
단순한 우연?
하기야, 원작이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그 이름이 불길의 대상으로 여겨지니 사람의 이름으로 삼는 건 없지만 여신교가 없는 지금이야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간과하고 넘기기에는 지나치게 외모가 닮아 있어 무시할 수 없었다.
나는 여자아이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이 녀석을 ‘자간’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그러자 남자아이는 두려움에 일그러진 눈을 끔뻑거리며 입술을 떨었다.
좀처럼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나는 불쑥 앉아 남자아이의 머리채를 잡았다.
소란스럽게 할 거 같아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을 입안에 집어넣은 채로.
천천히 얼굴을 돌리며 살폈다.
그런 뒤 내가 녀석에게 꺼내 보인 이름은.
“네 이름이 혹시 ‘아미’냐?”
뒤르테문드에서 헤일리온에게 죽음을 당했던 대주교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