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59)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59화(259/350)
그렇게 나는 바르간과의 협의점을 찾았다.
나의 목적, 그의 목적.
굳이 입으로 담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하면 에리카를 구할 수 있다는 건가?
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의문에 긍정했다.
망설이게 해서는 안 됐다. 무조건적인 안심과 신뢰를 줘야 했다.
그가 자칫 폭주하여 자살을 해 버리면 나 역시 곤란했기에 희망의 동아줄을 내려 줘야만 했으니까.
“당연한 말이야. 게다가, 어차피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몇 년 후에 어련히 죽어 버릴 네 영혼. 비록 수명을 앞당기는 꼴이 된다고 해도 큰 상관 없는 거 아니야?”
네 유일한 후회는 에리카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그가 받아들이자 나는 살며시 미소 지었다.
“얘기가 잘 통하는 상대라 좋네. 모든 게 공유된다는 게 또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야.”
누가 날 이토록 이해해 줄 수 있으리.
또한 누가 널 이토록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바르간. 우리는 협력해야만 해.
서로를 도와 각자의 목표에 도달해야만 해.
나는 명료하게 그의 결승 지점을 정리했다.
“네 목적은 에리카를 살리는 것. 그리고 그녀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거야. 틀림없지?”
—맞다. 그리고 네가 이루려 하는 바는….
아, 내 거는 말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 넌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소설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너라면… 아니, 그보다 바르간 본인이라면 더 잘 알 거 아니야?
내가 목적을 위해서 소거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
너에게는 너무나 소중할 그녀가.
나에게는 크나큰 걸림돌이야.
너의 그 무거운 마음도 내게는 장애물일 뿐이지.
바르간에게 두 가지 약점이 있다고 했지? 그래, 영혼의 짧은 수명과 에리카.
사실 가만히 있어도 너는 알아서 죽을 거야. 네가 죽으면 에리카에 대한 내 마음 역시 사라지겠지.
“그런데도 내가 널 도우려고 하는 건, 네 수명을 단축시켜 내가 하루빨리 자유로워지기 위함인 동시에 네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어서야.”
—같은 감각과 기억을 공유하기 때문인가.
그래.
네 괴로움은 내 괴로움.
네 상처는 내 상처니까.
나는 바르간을 눈을 움직여서 손목에 그어진 자상을 보았다.
피는 나오기를 멈췄지만 어떠한 마법도 사용하지 않아 그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우린 힘을 합쳐야만 해. 바르간. 네가 가지고 있는 마법에 대한 재능과 지식, 그리고 가문. 내가 가진 연기력과 소설의 지식. 이걸 이용하는 거야.”
—정말로 바꿀 수 있는 건가…. 정말로 에리카를….
“바르간. 더 고민할 필요 없어. 너도 내 행동 철칙 알잖아. 움직이면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가만히 있으면 그 가능성조차 없다는 거.”
그러니 계획을 세우자.
소설의 틀을 완전히 깨부숴 버릴 계획을.
대충 시간을 계산해 보면… 7일 정도 걸리려나?
나도 너에게 익숙해지고, 너도 나에게 익숙해지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일주일 동안 방 안에 박혀 있게 되겠지만. 큰 상관은 없잖아?”
—상관없다. 그런데… 처음 포섭해야 하는 인물을 꼭 그녀로 해야 하는 건가?
음? 아, 내 마음을 읽었구나?
흠…. 그래. 네가 그녀를 꺼리는 건 인정해. 네 가슴에 칼을 쑤셔 박은 여자이니까 당연히 좋은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르하를 데려다 쓰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커.
통제하기도 어렵고.
반면, 그녀는 아직 교회에서도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까. 지금이 적기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잘 생각했어.
자, 그럼 우리 함께 계획을 짜 보도록 할까?
딱 7일 뒤면 적합하겠네.
가능한 한 모든 전개를 예상하고 세부 사항을 완성시킨 후.
그때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알리시아를 마중 나가도록 하자.
그녀의 양어머니에게 할 말로는… 아, 이런 대사는 어때?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팔라는 건 어감이 좀 그런데 이건 뭐, 깔끔하잖아?
그랬는데 이해 못 하면 그냥 팔라고 하고.
내 제안에 바르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리시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보였다. 하여간, 어지간히도 순애보인 녀석이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그게 에리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그거야.
그 마음가짐이야 바르간.
아무래도 우린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에리카의 음성이 귓바퀴를 울리자 바르간은 정신을 차렸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낸 지 벌써 한나절이 되었다.
지상을 따뜻하게 비추던 해는 진작에 떨어졌고 달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바르간은 옅은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으음…. 근데… 혹시 나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도 돼?”
“상관 없다.”
“진짜지?”
배시시 미소 짓는 에리카는 바르간의 품으로 더욱 들어갔다.
꼼지락거리면서 가까이 갈 때마다 그 움직임에 따라 침대의 커버에 구김이 늘어났다.
곧 에리카는 바르간과 완전히 밀착해서 붙어 있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두 사람의 신장 차이가 워낙 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면 에리카가 있는 게 티도 나지 않을 듯하다.
“따뜻하다.”
에리카가 행복하다는 듯이 말했다.
바르간은 에리카를 감싸고 있는 손으로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때마다 에리카가 입고 있는 하얀 수면용 원피스. 로렐라이의 부드러운 촉감이 여리한 몸체와 함께 느껴졌다.
두 사람은 오늘 하루 동안 둘만의 시간을 보내며 아카데미아의 명소들을 돌아다녔다.
오색빛깔 화려한 잎을 자랑하는 꽃들부터 수수하지만 꼿꼿하게 펴 있는 풀들이 자라나 있는 식물원.
공중 도시의 위엄을 알리듯, 지상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아카데미아의 끝자락.
자신들 이외에도 여러 남녀의 쌍이 손을 잡고 다니던 넓은 호수공원.
밤이 되어야 반짝거리는 빛을 밝히는 분수대….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다 간 것만 같았다.
바르간은 에리카를 쓰다듬다가 물었다.
“상당히 많은 곳들을 돌아다녔는데 지치지는 않았느냐.”
“전혀. 하나도 안 힘들었어.”
“그래?”
“응. 정말로 힘들지 않았어. …이대로 오늘 하루가 쭉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물론 그럴 수는 없겠지만.”
에리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녀를 품고 있던 바르간의 몸에 그 숨결과 진동이 전달되었고. 바르간은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릿함을 느꼈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바르간에게 얼굴을 묻고 있는 에리카가 문뜩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일부러 시간을 낸 거야?”
“잠시 바람을 쐴까 해서 말이다.”
“…….”
에리카는 바르간의 품으로 더욱 파고 들었다.
더 이상 가까워질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붙으려고 했다.
“…바르간. 나는 너만 있으면 돼.”
“…….”
“몇 년인지는 상관없어. 길면 좋겠지만 설령 길지 않더라고 해도 괜찮아.”
“에리카….”
“네가 불치병 때문에 그러는지 다른 무언가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나… 너무 무서워….”
“…….”
바르간은 아무런 대답 없이 에리카를 안아주었다.
에리카가 원하는 반응은 그게 아님을 알았지만, 그녀의 불안감을 덜어 줄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었다.
“흐윽….”
그렇게 바르간은 에리카의 흐느낌을 모른 척했다.
실은 그 숨결과 진동으로 모두 전달되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말 없이 등을 토닥여 줄 뿐이었다.
***
콰앙콰앙—!
카가가가각—!
“1열! 마지막까지 조금 더 출력을 올리도록!”
“2열은 대기! 순번이 넘어오면 곧장 붉은 오러를 휘두른다!”
“마법사 공격 부대는 계속해서 원소 마법을 사용하고, 지원 부대는 마나의 공급을 멈추지 마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붉은 장막.
지형을 통째로 삼킨 듯한 붉은 오러로 만든 투명한 막의 앞에서.
수많은 용사들이 머리를 싸맨 채 공략책을 찾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대부분은 다 해 봤다.
같은 붉은 오러를 가진 용사들을 데리고 와 동시다발적으로 검을 박아 넣어 보려고도 했고.
한 곳을 집중적으로 노리기도 했다.
헤일리온의 신성 계열 고유마법과 페랑기스의 정령술을 이용해서 틈 하나를 내 보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작은 구멍 하나 나기는커녕, 흠조차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난공불락.
마치 아카데미아나 리케이온을 덮고 있는 방어막과도 같이 견고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효과가 없다니.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다소 떨어진 위치에서.
현장을 한눈에 담던 헤일리온이 말했다.
그러자 우락부락한 거구의 남성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외쳤다.
“개소리! 곱상하게 자란 도련님은 이래서 문제야! 정신력이 약해 빠졌어!”
“…곱상하게 자란 도련님은 저를 말하는 건가요, 그레이든?”
현 용사랭킹 3위.
무투가의 정상, 그레이든.
하나만 해도 장정 셋이서 들어야 할 것 같은 철덩어리를 목걸이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남자.
그가 강직하고 굵다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럼 여기에 헤일리온 너 말고 또 누가 있나!”
“하긴 그러네요. 그런 말을 태어나서 처음 들어 봐 가지고 헷갈렸어요.”
“아무튼! 저 녀석들도 패기가 부족해! 이래서 무기 들고 싸우는 것들은 죄다 나약해 빠졌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그런 말은 그레이든 아니면 아무도 하지 않지만요.”
헤일리온이 무슨 말을 하든 간에 그레이든은 전혀 듣지 않았다.
대신 부리부리한 눈으로 붉은 장막을 뚫어져라 보다가 뜨거운 콧김을 뱉었다.
“답답해 뒤지겠구만! 안 되겠어. 내가 직접 나서야지. 붉은 막 녀석에게 무투가의 진정한 힘을 보여 줘야겠다.”
“오, 그레이든이요? 그럼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연한 소릴! 애초에 이곳에 나를 가장 먼저 불렀어야 했다! 실베스테르가 다른 잡일만 시키지 않았더라도 내가 이곳에 있던 대주교들을 모조리 패 죽일 수 있었을 텐데! 그 멍청한 놈!”
그레이든은 용사랭킹 1위의 남자를 모욕했다.
그는 자신이 있었다.
대주교와 제대로 붙는다면 녀석들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 자신이.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영 기회가 없어 대주교의 목을 비튼 적은 없지만, 그의 주먹은 권능해방을 마친 대주교들의 몸을 부술 정도로 강력했다.
“잘 봐라 헤일리온. 이게 무투가의 무서움이다.”
그레이든은 웃옷을 찢어 버렸다.
그가 전투에 임하기 전 항상 하는 버릇이었는데 이 때문에 그를 보좌하는 용사는 항상 여벌의 옷을 대량으로 가지고 다녀야 했다.
“기대할게요. 그레이든.”
“곱상한 도련님은 여기에 발 뻗고 누워서 구경이나 해라!”
퍼엉—!
대포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든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나간 소리였다.
쿵쿵쿵쿵—!
마치 거대한 멧돼지가 달리듯이 땅이 울린다.
“흐랴아아아!!”
천둥 같은 그의 기함은 숲속의 모든 생물에게 강제로 아침을 선사했다.
그의 돌격에 자리에 있던 용사들은 황급히 양옆으로 분산되었다.
그렇게 붉은 장막과 맞부딪히는 그의 주먹.
어지간한 폭발음보다도 거대한 소리가 한순간에 터져 나가며 주변의 용사들에게까지 그 진감이 거세게 울렸다.
고막에서 피가 나오는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의 압도적인 소음과 물리력.
그가 타격한 곳을 기점으로 붉은 장막에 호수의 표면과도 같이 파문이 일었다.
가히 대단한 일격이었다.
‘…역시 무리인 거 같네요.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요.’
그러나, 그레이든의 주먹을 보고 있던 헤일리온은 그렇게 결론 지었다.
대단한 파워이기는 하지만 붉은 장막을 깨트릴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다른 방법은 고안해 내야 한다. 이 이상 시간을 빼앗기기는….
쿠웅—! 쿠웅—!
“으라아아악!!”
붉은 장막을 깨트리지 못한 그레이든이 연타를 이어 나갔다.
그때마다 붉은 장막은 명확한 흔들림을 보였으나 결코 깨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헤일리온이 고민에 잠긴 채 수를 찾고 있자. 그를 급히 찾아오는 용사가 한 명 있었다.
“헤, 헤일리온! 아카데미아의 총장 굴레마시아 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굴레마시아 님이…?”
“예, 굴레마시아 님께서… 아니, 아카데미아가…!”
용사는 굴레마시아의 뜻을 전달했다.
“붉은 장막을 깰 수 있을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