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72)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72화(272/350)
“뭐 하고 있어! 어서 내게 건 고유술식을 해제하란 말이야!”
얼음의 단검을 가미긴의 심장 가까이에 갔다 대는 에리카.
그녀의 날카로운 음성이 얇디 얇은 살얼음판을 훑고 지나는 바람과도 같이 불안한 듯 매서웠다.
에리카는 바르간이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비록 고유술식이 발동하고 있는지 아닌지조차 분간할 수 없지만 분명하다.
그는 거짓을 보이고 있다.
“…에리카.”
긴 한숨을 쉬던 바르간.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낮게 읊조렸다.
“그냥 가만히 속아 주면 안 되겠나?”
“…뭐?”
“가만히 속아 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에리카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었다.
바르간이 어떻게 혀를 놀려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해도 귀를 막은 채 자신의 고유술식의 해제를 외치려 했다.
그러나 바르간이 하는 말은 상정 이상으로 어이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순간 해야 할 말을 까먹었을 정도로 말이다.
가만히 속아 주면 안 되겠냐는 말은 술식을 걸었음을 인정한 게 아닌가.
에리카는 떨리는 숨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바르간의 페이스에 넘어가선 안 된다. 자신이 주장해야 하는 건 오로지 하나다.
“술식을 해제해.”
“…….”
“어서!”
“그럴 수 없다.”
지시를 단호히 끊어 내는 바르간.
에리카는 그런 바르간의 태도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단도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쥐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이… 무슨…!”
그대로 가미긴의 심장에 단도를 꽂아 버리는 에리카.
그녀의 행동에 깜짝 놀란 바르간은 그림자를 움직여 막아 보려 하지만 이미 검날이 심장에 박혀 버린 상황.
핵이 부숴졌다면 바르간의 의도와는 달리 심판무구의 재료가 되어 버리는 것인데.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있다.
다행히 뛰고 있다.
“…….”
바르간은 회동그레진 눈으로 심장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단검 하나 들어갈 정도의 얇고 작은 워프의 구멍이 심장에 나 있다.
에리카가 핵을 찌르는 연기를 한 것이다. 바르간의 반응을 확인한 에리카는 다시금 확신했다.
“역시… 넌 바르간이 아니구나.”
“…….”
에리카는 바르간을… 바르간의 생김새를 흉내 내고 있는 생명체에게 말했다.
잔잔하게 분노하고 있는 에리카의 눈동자는 그 어떤 얼음의 결정체보다도 아름답고, 냉철했다.
그녀가 바르간의 꾀를 읽어 냈다.
“그림자 안에 있는 어둑이는 진짜였어. 자잘한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크게 의식할 정도는 아니었지. 그렇다는 건…. 바르간의 모습으로 의인화하고 고유술식으로 그 위를 덧대어 완성도를 높였다는 거고.”
“…….”
“아르카네. 네 주인의 흉내는 그만두도록 해.”
“…곤란하네요. 여기서 들켜서는 안 되었는데요.”
바르간의 형체를 하고 있던 어둠의 정령 아르카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심판무구를 흡수하여 보랏빛이 아닌 검게 물든 머리칼과 화려한 옷이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부각된다.
“언제부터 눈치채신 거죠?”
“지금 그런 게 중요해?”
“하긴. 그러네요. 언제부터인지가 뭐가 중요한가요. 에리카 님께서는 현재 바르간 님이 어디에, 어떤 상태로 계신지가 가장 궁금할 텐데요.”
“…….”
“죄송하지만, 바르간 님이 어디에 계신지는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렇게 명령을 받았거든요.”
당연하게도 아르카네는 바르간의 위치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에리카는 현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가 여기서 있다는 말은.
자신을 속이고 발목을 붙잡아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바르간은 그 시간 안에 다른 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가미긴과의 전투 후 전사한 굴레마시아.
주인을 잃은 공중 도시 아카데미아.
지금까지 곁에서 지켜봐 온 바르간의 행적과, 그가 원하는 결과 중 하나.
그렇다면 바르간이 있을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여기서 너와 대치하고 있을 때가 아니네. 시간을 끌릴 순 없지.”
판단을 내린 에리카는 과감하게 움직였다.
콰자자작—!
에리카의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얼음.
그것은 일직선으로 퍼져 나와 순시간에 아르카네를 덮치려 들었다.
아르카네가 자신을 붙잡고 있을 게 뻔해 이를 막기 위함이다.
“크윽…!”
아르카네는 재빨리 어둠을 조종하며 방어했다.
벽처럼 솟은 어둠에 에리카의 마법이 들이쳤다. 거센 물살과도 같아 위력이 결코 약하지 않다.
마음이 급한 만큼, 에리카는 설렁설렁 할 마음이 없었다.
아르카네 역시 바르간에게 들었던 명령을 행하기 위해 뼈 마디로 이루어진 꼬리를 펼쳐 보였다.
“다소 강경책을 써도 된다고 했으니 저 역시…!”
그런데.
즈으응—!
아르카네의 상하좌우.
모든 곳에서 발현된 워프의 구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리우는 소스라칠 정도의 짙은 냉기를 품은 얼음의 창들.
해득의 경지를 넘은 창들은 살짝 스치기만 하더라도 상대를 꽁꽁 얼려 죽일 것만 같다.
촤자자자작—!
하나의 목표를 향해 쏟아지는 창들.
에리카는 그 현장을 바라보았다.
빙하에 갇힌 것처럼 얼어 버린 아르카네.
어둠의 정령은 마치 바르간이 시련을 받았던 마지막 달처럼 검은 알의 형태가 되어 얼음의 기둥에 박혀 있다.
어둠으로 몸을 보호한 듯하다.
쩌저적—.
에리카가 발길을 옮기기도 전, 아르카네를 가두었던 얼음에 금이 가 부숴져 버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아르카네는 어둠을 조종하여 에리카를 가두려 한다.
불과 몇 초 전과 완전히 반대되는 상황.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압축까지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르카네는 그렇게 말하며 어둠으로 에리카를 감싸 버렸다.
그러고는 제 양손을 움켜잡으며 작은 공을 잡고 있는 듯한 동작을 취한다.
상대였다면 이대로 악력을 높여 점으로 만들어 버렸겠지만. 그래 버린다면 바르간에게 어떤 끔찍한 벌을….
“없잖아…?”
아르카네는 구의 형태로 둘러싸인 어둠의 안이 빈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까악!
뒤에서부터 들리는 까마귀의 울음소리.
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지만, 이미 에리카는 허공에서 긴 창을 든 채 내찌르고 있었다.
그 긴 창은 지금까지 에리카가 만들었던 그 어떤 얼음의 창들보다 화려했으며 정교했다.
—콰자자작!
아르카네에게 내꽂아진 창은 그대로 상대를 얼려 버렸다.
마치 얼음으로 만들어진 동상과도 같이. 아르카네는 완전히 움직임을 봉인당했다.
에리카는 주변의 마나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지금의 봉인 역시 곧 풀릴 것을 알았다.
더이상 방해를 받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
에리카는 주변을 둘러보며 높이 올라와 있는 한 건물을 바라봤다.
본관과 다소 떨어져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대시계탑. 곧장 그쪽으로 뛰어나갔다.
좁은 보폭이지만 부단히 움직이는 그녀의 다리.
가쁘게 뛰는 그녀의 심장. 서서히 물기가 차오르는 그녀의 커다란 눈.
“기다려, 기다려….”
에리카는 소원을 빌듯 중얼거렸다.
부디 늦지 않기를.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크게 위태롭지 않기를.
“제발 조금만 기다려 줘…!”
탁—.
급하게 도착한 대시계탑의 앞.
아카데미아의 워프를 위해 모든 사람들을 이동시켰기에 이곳을 지키는 경비원 역시 찾아볼 수 없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르간의 마나를 찾아보려 하지만 역시 불가능하다.
에리카는 서둘러 시계탑의 내부로 들어갔다.
본래라면 낯선이의 침임을 허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이미 손상이 되어 있어 에리카가 들어간다 하여도 술식들은 발동되지 않았다.
또각또각또각—.
에리카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나선형으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계단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
부러져 버린 구두굽.
이를 수선할 정도의 시간도, 심적 여유도 마땅치 않았던 에리카는 남은 한쪽 구두마저 벗어 던진 채 다시 계단을 올랐다.
거친 돌의 단면이나 까슬거리는 모래가 하얗고 고운 발에 상처를 낸다.
피가 흘렀고. 상처는 벌어지며 아파 왔지만.
에리칸의 눈은 오로지 대시계탑의 정상을 향했고.
그녀의 귀는 불안한 심장의 고동만을 울렸다.
“하아… 하아….”
연옥에 갇힌 듯 끊임 없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
가까스로 정상에 오른 에리카.
드드드득—.
까가가각—.
짹깍째깍—.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닿은 채 굴러간다.
하나하나는 별 볼일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그 하모니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듣는 것처럼 웅장하다.
“어디 있어… 어디 있어….”
달뜬 숨을 내쉬던 에리카는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거대한 시계를 투과하여 들어오는 달밤의 빛. 내부를 밝히는 그 빛에 의존하여 주변을 둘러보지만 바르간은 보이지 않는다.
“어디 있어… 어디 있는 거야….”
바르간을 찾는 에리카의 음성에 떨림이 커져 간다.
마나로 찾는 건 글렀다. 그가 자신에게 건 고유술식을 풀지 않아서 찾을 수 없다.
에리카는 상처가 나 쓰린 맨발을 움직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 주의하는 사람처럼 양팔을 앞으로 뻗은 채 허우적거리며 바르간을 찾으려 애써 본다.
그러나. 손끝에 닿는 건 차가운 벽과 난간뿐.
바르간은 잡히질 않았다.
“…….”
고개를 떨군 에리카.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달달거렸고.
불안정한 마나가 움직여지며 그녀의 손에 다시금 얼음으로 만들어진 단검을 만들어 낸다.
“바르간…. 여기에 있지…? 여기에 있는 거지…?”
덜덜 떨리는 에리카의 단검은 새하얀 목으로 향했다.
에리카가 얼굴을 들자 전부터 가득 차 있던 눈물의 줄기가 뺨을 타고 흐르며 달빛에 반사되었다.
그녀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유약한 협박을.
“마지막으로 말할게…. 어서 내게 건 고유술식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
냉기를 머금은 단검이 에리카의 목에 파고든다.
날을 타고 흐르는 피는 곧 얼어 버린 채 바닥에 떨어져 구른다.
“아니면 자살해 버릴 거야.”
에리카는 가미긴의 심장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를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했다.
추기경의 심장은 자신의 것이 아닌 바르간의 것.
바르간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계획을 방해할 순 없으니 가미긴의 핵을 자신이 파괴할 순 없다.
하지만, 이 목숨이라면.
진실을 알게 된 이후, 끊어 버리고 싶었던 걸 참고 있던 이 연약한 생명이라면.
협박의 도구로 사용하여 단번에 베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에리카의 귀에 들리는 건 천장에 가득 찬 톱니바퀴들의 움직임뿐.
에리카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닫히자 버텨 있던 눈물들이 떨어져 내려 이미 흘러가던 물길을 넓혔다.
다짐을 마친 에리카.
손에 힘을 주어 단검을 누른다.
“…에리카. 내 추기경을 잡을지언정 너 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구나.”
와장창—!
유리가 박살 나듯 깨져 버린 세계.
눈을 감고 있던 에리카는 자신이 힘을 준 방향과 반대로, 단검을 누군가가 잡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의심할 여지 없는 바르간의 것이다.
“그저 가만히 기다려 주기만을 바랐건만. 아무래도 그건 내 욕심이었던 모양이군.”
에리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과 망막에 맺힌 눈물이 시야를 가리울지라도, 바르간의 모습이 오롯하게 보였다.
에리카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움직였다.
“야…. 이 나쁜 놈아…….”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바르간의 몰골. 특히 입가와 귀에서 흐른 피의 색이 짙다.
피부 위로 지나치게 솟아 올라온 핏줄과 온몸을 시퍼렇게 감싸고 있는 멍.
느껴지는 마나는 불안하기 짝이 없어 주변에서 요동치고 있다.
그의 몸에 구멍이 난 것처럼 마나가 쏟아져 나온다.
“바르간. 이 나쁜 새끼야….”
그런데도 오히려 편안하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바르간.
에리카는 그를 탓하며 처연하게 울었다.
“평소처럼 간단히 내 예상을 벗어났어야지….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비웃었어야지. 왜 이런 꼴이 되어 있어 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