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74)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74화(274/350)
274화 바르간 (完)
바르간을 통해 들어오는 가미긴의 권능.
그것은 에리카의 기억 아주 깊숙한 곳에 들어가 천천히 거슬러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잎을 갉아 먹는 벌레와도 같이.
꾸역꾸역 제 입속으로 밀어 넣어 흔적이 남지 않게 한다.
…….
약혼자가 생긴단다.
그것도 그 유명한 슈겐하르츠가의 삼남.
“편지다! 편지가 왔어!”
“있잖아, 라일라! 이건 무슨 뜻이야?”
“바르간님. 보내 주신 편지 잘 읽어 봤습니다. 문체에서부터 좋은 분이란 걸…… 저도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당신을 만나게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됐다! 분명, 좋아해 주시겠지?”
—…싫어.
편지만을 주고받은 채 서로 얼굴을 본 적 없는 어린 시절.
화창한 봄날에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의 드레스 자락을 잡은 채 뒤로 숨어 있는 에리카.
아버지가 품위를 지키라 말하자 어머니의 드레스에서 조심스레 나오는 그녀.
바르간은 좀처럼 다가오지 못하는 에리카에게 먼저 다가섰다.
상냥한 바르간의 웃음.
글에서 느껴졌던 어른스럽고 친절한 그의 모습이다.
역시 대필이 아니었다.
편지에서 읽혔던 그의 말투다.
어린 에리카는 순수한 기쁨을 느꼈다.
아직은 작은 목소리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저, 저도…. 저도 잘 부탁드려요. 바르간 님…!”
—…싫어. ……싫어!
에리카의 11번째 생일.
그녀는 바르간에게서 검은 고양이 인형을 선물받았다.
살짝 비뚤어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게 귀여운 인형이다.
“정말 감사드려요, 바르간 님!”
에리카는 인형을 껴앉은 채 환하게 미소지었다.
바르간 역시 에리카가 기뻐하니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에리카는 몇 번이나 인형을 바라보다 껴안기를 반복하며 말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절대로 더럽히지 않을 거예요!”
—…싫어! 싫어! 싫어!
바르간과 약혼을 하고 5년이 조금 지났다.
오늘은 아주아주, 매우매우 중요한 날이다.
“이걸로 바르간 님이 기분 푸셨으면 좋겠다!”
굉장히 밝고 아기자기한 목소리였으나, 에리카는 최근 걱정이 많았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걸까….”
“그런데… 라일라는 어디로 간 거지? 포장 다 하면 바르간 님에게 보여 드리기 전에 봐 준다고 했는데.”
“여기도 없네.”
“여기도 없고.”
“…으음.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여기 있나…?”
“라일라… 있어…?”
“바르간 님…?”
—잊고 싶지 않아…!
“끔찍하네. 내년부터 아카데미아에 같이 다녀야 하다니.”
바르간의 얼굴도 보기 싫은 에리카가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
가족들은 바르간과 에리카를 위해 자리를 비워 넓은 식당에 남은 건 두 남녀뿐이었다.
“같은 반이 되어 버리면 리케이온으로 전학이라도 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너 같은 거랑 상종하기도 싫어.”
“이렇게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서 구역질이 나올 정도야.”
“슈겐하르츠. 이 나쁜 새끼야.”
—그 어떤 것도 잊고 싶지 않아…!
신입생들로 북적거리는 연회장.
“흐음. 쟤가 걔구나?”
자그마한 체구에 생기 있게 빛나는 머리칼.
어울리지 않게 고혹적인 눈매와 살짝 앳된 톤.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
그녀는 바르간과 어린 시절을 함께한 친구이자.
약혼을 한 사이다.
“연기하지 마 슈겐하르츠.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잖아. 오기 싫은 걸 억지로 참고 또 참아서 온 거야.”
“정말… 내가 왜 너 같은 거랑 엮여 가지고.”
—지워지고 싶지 않아…!!
에리카는 창문을 열어 새를 안으로 들였다.
방으로 들어온 새는 방 안의 공간을 배회하다, 이내 편지 한 통과 두 장의 연극 티켓이 되었다.
“…뭐지?”
에리카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보낸 소중한 편지.
그러나.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에리카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에리카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걸 슈겐하르츠에게 어떻게 전하면 좋은 거야.”
—그만둬…!
로미오와 줄리엣의 극이 펼쳐지고 있는 극장.
조명이 바뀌자 서로의 얼굴이 잘 드러났고, 바르간과 에리카의 시선이 교차했다.
온전하게 두 눈동자가 보이자.
에리카는 그의 눈이 꽁꽁 얼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평생을 빙산처럼 굳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표면이 조금 녹은 것처럼 느껴졌다.
에리카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도발이 담긴 말을 건넸다.
“누가 보면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겠네. 갑자기 내가 좋아지고 그런 건가?”
바르간은 도로 에리카의 눈을 피하며 그런 일은 없도록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약간은 낯선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극에 집중하여 지금의 분위기를 회피하려 들었다.
—제발 그만둬…!!
에리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린 밤하늘의 빛을 받고 있는 남자의 형태가 보였다.
악몽의 기운을 몰아낸 에리카의 눈이 커졌다.
“알티프는… 그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그리고 너는….”
바르간에게 대강 정황을 들은 에리카는 마음에도 없는, 아니 어쩌면 약간은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말을 뱉었다.
“…버리고 가지 그랬어.”
“그러니까…. 함정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를 버리고 가지 그랬냐고.”
바르간은 그녀에게 고의적으로 악랄한 말을 뱉었고 에리카는 눈시울을 붉히며 대들었다.
“너는… 너는…!”
에리카는 숨을 골랐다.
에리카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바르간이 담겼다.
“나는 아직도 너를 원망해.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너에게 긍정적인 감정 따윈 느끼지 않아.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포트레트가의 차녀로서… 가문의 대표자로서… 너에게 감사를 표할게.”
에리카는 고개를 숙였다. 다리 한쪽은 뒤로 빼었고, 양손으론 드레스 자락을 잡고 있다.
깔끔한 동작. 그녀를 비추는 미세한 불빛.
그 그림 같은 광경은 보는 이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날 구해 줘서… 홀로 두고 가지 않아 줘서… 고마워.”
—그만둬 줘…!!
망각의 와중.
강하게 울리는 에리카의 외침.
“…….”
검붉은 피를 토하며 권능을 발휘하고 있던 바르간은 그것을 들었다.
“그만…. 그만…. 잊고 싶지 않아. 너에 대한 그 어떤 기억도 잊고 싶지 않아, 바르간….”
에리카의 입술이 뻐끔거리며 움직여졌다.
입술은커녕 눈꺼풀도 움직이기 힘든 상황일 텐데 극한까지 치달은 에리카의 감정이 입술을 움직였다.
에리카는 울며불며 사정했다.
“…그만둬 주면 안 될까?”
“…….”
“나, 정말로… 정말로… 너를 잊고 싶지 않아.”
바르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이미 그는 자신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치유 마법을 직접 걸던 에리카는 알 수 있다. 그가 죽어 가는 건 피를 흘리는 몸이 아니었다.
그보단 근본적인 무언가.
가령, 영혼과도 같은 것이었다.
“너를 곧장 뒤따라가지 않을게….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노력해 볼게….”
“…….”
“그러니까 제발…. 내가 너를 그리워할 수라도 있게 해 주면 안 돼?”
바르간을 살리고 싶다. 함께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최소한 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싶다.
절대 잊지 않게 되뇌이고 싶다.
에리카의 간절한 목소리.
그녀의 부탁에 굳게 다잡았던 마음이 흔들릴 뻔하였으나, 바르간은 어떻게든 냉정심을 되찾으려 애썼다.
자신이 죽으면 에리카 역시 자살을 할 가능성이 높다.
‘나’가 에리카의 옆에서 연기를 이을 리도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무엇 때문에 그토록 마법에 매진하고 이야기를 바꾸어 왔는가.
어차피 죽을 목숨을 불태우면서 이렇듯 슬퍼하고 있는가.
어찌하여 ‘나’에게 협력해 가며 여기까지 왔는가.
이를 몇 번이라도 되새기던 바르간. 그녀는 모르고 있을 냉혹한 현실을 들이밀며 에리카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에리카. 이 세계는 한 편의 글일 뿐이다.”
“…….”
“신이라는 자가 자신의 세계를 모방하여 만들어 낸 하나의 창작물.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공기도, 길게 뻗어 있는 나무들도,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생명도. 모두 모조품에 불과하지.”
바르간은 씁쓸하다는 듯 말했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수긍한 지 벌써 오래였다.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도, 서로에 대한 마음도. 결국에는 몇 자 남짓한 설정.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바르간의 손이 에리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어떤 보물을 만질 때보다도 조심스럽게, 정성스레 손을 움직였다.
손의 떨림이 예사롭지가 않다. 곧이라도 바람에 떨어질 꽃잎처럼 위태롭다.
떨림이 에리카에게도 전해지자 에리카의 숨은 가빠지며 안 된다는 말을 중얼거렸고.
바르간은 흐려져 가는 시야를 되돌리기 위해 힘썼다.
그의 망막에 맺힌 에리카의 상이 자꾸만 번져 지워질 것만 같다.
아직은… 아직은 안 된다.
조금만 더 버텨 다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며, 여려져만 가는 음성을 뱉었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걸쳐져 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지. 분명 설정에 불과하여 큰 의미를 갖지 못함을 알면서도. 어째서 너를 보면 이리도 가슴이 아리고 두근거리는 건지.”
서 있을 힘도 없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
바르간은 천천히 몸을 기울여 에리카와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대로 에리카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바르간.
잠시 자세를 유지하다가 입술을 떼곤,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곳에서 에리카의 눈을 보았다.
눈물로 가득 찬 에리카의 눈동자 역시 바르간을 바라봤다.
이미 흐려질 때로 흐려진 그의 눈.
이리도 가까이 있음에도 더는 자신을 비추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째깍째깍—.
거대한 시계탑의 시간이 흘러간다.
밤하늘의 빛을 드리우던 이곳의 색이 바뀌어 간다.
하늘 저편에서부터 조금씩 솟아오르는 해.
새벽의 활기를 담아 이 세상을 따사롭게 비추어 간다.
바르간의 얼굴에도 그 빛이 닿았다.
높게 솟아올라와 있는 그의 콧대를 기준으로 반대편에는 서늘한 그늘이 진다.
바르간이 입가를 움직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몸이 말을 따르지 않는다.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더 좋은 결과를 내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지금까지 너를 괴롭게 해서 미안하다.
네게 모든 사실을 숨겨 왔어서 미안하다.
마지막까지 멋대로 굴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무나 미안하다.
그 수많은 대사를 줄여 그는 말한다.
“사랑한다.”
더할 나위 없이 사랑한다.
비록 너를 향한 내 마음이 한 단락, 혹은 한 문장으로 적힌 설정이라 할지라도.
너를 사랑한다.
그렇게 말하던 바르간은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는 에리카가 보았던 바르간의 어떤 표정보다 밝고 행복해 보였다.
“사랑하지 않겠다 말했는데, 난 그마저도 지키지 못했구나.”
바르간의 마지막 대사.
그 말이 동시에 에리카 안 깊숙이 파고들었던 가미긴의 권능이 빠져나왔다.
요동을 치고 있던 바르간의 마나는 폭풍이 지나간 이후와도 같이 고요해졌으며, 간신히 버텨 세우고 있던 그의 상체가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곧바로 에리카 역시 의식을 잃고 그의 옆에 누웠다.
“…….”
요동치는 전장의 한가운데.
추락해 가는 아카데미아에서.
유난히도 말이 없는 바르간과 에리카.
두 사람은 비로소 완전한 평온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