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75)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75화(275/350)
275화 외전 : 에리카
—…리카.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긋하면서도 온화함이 느껴지는 목소리.
듣기만 해도 잠이 솔솔 쏟아지는 기분 좋은 음성이다.
—…에리카.
점차 선명해지고 가까워져 가는 소리.
이내 태평한 바다에 잔잔한 물결이 인 것처럼 몸이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근처까지 다가온 남성은 피식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아침이 늦었다. 이만 일어나라, 에리카.
쿡 이마를 누르는 남성.
그 촉감이 느껴지자 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으, 으으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침에 약한 건 변하질 않는구나.”
“으으…음?”
“해가 오른 지 오래다. 더 늦잠을 자면 정말로 늦을 거 같아서 깨웠다.”
기지개를 켜는 에리카. 잔뜩 찡그러진 눈 사이로 한 남성이 보였다.
에리카는 의아하다는 듯 그 남성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간?”
“보아하니 어젯밤 일도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구나.”
에리카는 주변을 둘러봤다.
대충 봐도 값비싼 장식품들과 곳곳에 슈겐하르츠를 상징하는 문양.
아카데미아의 남성 기숙사. 그중 익숙한 바르간의 방이다.
에리카는 눈을 비비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곤 물었다.
“…내가 왜 여기서 잔 거지?”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으음… 어…. 아, 그래. 기억났어.”
“거짓말하긴.”
“아, 들켰네.”
개구쟁이처럼 살며시 입가를 올리는 에리카.
바르간은 어쩔 수 없다며 테이블 위의 와인 병을 가리켰다.
“술을 마시자면서 내 방으로 오지 않았었나. 그리곤 두 잔 마시고 곧바로 취해 버렸지.”
“나 술이 약하니까….”
“그런데 왜 매번 같이 마시자고 하는 건지.”
“매번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다. 가끔이잖아. 아주 가끔. 아이코…!”
침대와 한 몸이 된 것처럼 붙어 있다가 상반신을 일으킨 에리카.
걸터앉아 있던 바르간은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이에 에리카가 의문을 표했다.
“손수건?”
“네 눈가를 닦아 주려 한다.”
“나를…? 왜?”
“…….”
바르간은 섬세하게 에리카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러자 손수건의 끝이 젖어 들었고. 바르간은 걱정스레 물었다.
“슬픈 꿈이라도 꾸었던 건가?”
“…꿈?”
에리카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밤중에 무슨 꿈을 꾸었던가…?
“음… 전혀 기억 안 나.”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꿈이 기억나지 않는 건 자주 있는 일.
에리카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나저나 오늘이 며칠이지?”
“4월 29일이다.”
“4월 29일…. 어제 우리가 분명… 합동 마법식을 연구했었지?”
“그랬지. 상당히 많은 마나와 시간이 소모되었지만. 덕분에 제법 틀이 잡혔다.”
“근데 네 몸은 괜찮아?”
에리카의 자연스러운 물음에 바르간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멀쩡하다. 아직 멀었다고는 하지만 마나총량의 초월이 보이고 있으니 그 정도의 마나로는 문제없지.”
“그게 아니라… 4월 28일이면 너…….”
에리카의 말이 끊어졌다.
분명 무슨 날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뭔가 중요한 날이었던 것 같긴 한데. 착각인가?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질 않자 에리카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정리하며 장롱의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빼곡히 차 있는 에리카의 옷과 교복.
에리카가 바르간의 방에 있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자 아예 에리카의 물건들을 별도로 구비해 두었다.
바르간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교복으로 갈아입은 에리카는 화장대 앞에 앉았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칼은 비단처럼 고와 금세 빗으로 정돈이 되었다.
“받아라.”
향긋하게 올라오는 커피의 향기와 온기.
에리카가 아침 준비를 하는 동안 커피를 내려온 바르간이 한 잔을 건넸다.
“고마워. 설탕은 넣었지?”
“내가 너와 몇 년을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에리카.”
“히. 그건 그렇네… 후릅. 읏. 잠깐 이거 쓴데?”
“아침이라 각설탕 반 개만 넣었다. 애초에 넌 당분의 섭취가 너무 많아. 줄일 필요가 있지.”
“엄마도 아니고….”
“하지만 네 약혼자이지 않나.”
“……후릅.”
에리카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바르간을 바라봤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진 않았다.
건강을 위한다고는 하지만, 혀끝에 닿는 커피의 맛이 어색할 정도로 쓰다.
그런 에리카의 반응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바르간은 슬쩍 보챘다.
“오늘 아침에 학생 회의가 있는 건 기억하고 있겠지?”
“알고 있어. 리케이온이랑 공동으로 치르는 기말고사 때문이잖아.”
“그러니 늦으면 곤란하게 되겠고?”
“…아르텔리온이 사나운 눈초리로 노려볼 게 벌써 상상된다.”
“부학생회장은 성실할 뿐이다. 명색이 학생회장이라는 자가 제 약혼녀… 2학년 대표와 함께 늦으니 반길 리가 있나.”
“빨리 준비할게.”
커피를 후후 불어 식힌 뒤, 입 안으로 털어 넣는 에리카는 곧 혀를 내밀며 지독히도 쓰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르간은 빈 커피 잔을 받아 가고 에리카는 다시금 준비에 힘썼다.
화장대에서 단장을 끝마치는 에리카.
마지막으로 여러 표정을 지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에리카는 만족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러자 이미 오래 전에 나갈 준비를 끝마친 바르간의 넓은 등이 보였다.
“…….”
그걸 보고 있자니 에리카는 이끌리듯이 그의 등을 껴안았다.
그의 허리 사이로 팔을 밀어 넣어 찰싹 달라붙었다.
“진짜 무슨 꿈을 꾸긴 한 건가?”
피식 웃는 바르간.
그는 몸을 돌려 에리카를 내려다봤다.
자세가 바뀌자 에리카는 다시금 강하게 바르간을 껴안으며 말했다.
“몰라. 모르겠는데 왠지 안고 싶은 기분이야.”
“애교는 어젯밤에 이미 충분히 봤다만.”
“내가 그랬어…? 몰라. 나 취해서 기억 안 나.”
“그럼 지금은 취기가 덜 가신 건가?”
“그거 괜찮네. 그런 걸로 하자.”
이제는 얼굴을 파묻으며 바르간의 온기를 느끼는 에리카.
얼핏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편안하고 안심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 바르간은 난처했다.
“곤란하군. 정말로 시간이 많지 않은데…….”
에리카의 머리를 쓰다듬던 바르간은 문뜩 손길을 멈추곤 그녀의 작은 어깨를 톡톡 쳤다.
그의 부름에 에리카의 커다란 눈망울이 위를 바라보았고. 바르간을 꽉 잡고 있던 팔의 힘은 다소 느슨해졌다.
눈이 마주하자 몸을 숙이는 바르간.
그대로 에리카와 입술을 살짝 겹쳤다 뗐다.
“이걸로 참아 줄 수 있겠나?”
아침 키스를 한 바르간이 슬쩍 웃었다.
에리카 역시 그의 미소에 전염된 듯 배시시 웃어 보였다.
“응!”
자신을 붙잡고 있던 팔이 풀리자, 바르간은 에리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려는 두 사람.
그런데.
“…….”
에리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르간이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건지.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이 마치 나가지 말자고 부탁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에리카가 바르간과 마주했다.
그러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을 할지 말지 고민된다는 태도.
그러곤 곧 결심을 끝마쳐, 그와 붙잡지 않고 있는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쳤다.
“…한 번 더.”
“어쩔 수 없군.”
어린아이의 투정을 받아 주듯. 바르간은 다시 한번 에리카와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두 사람. 얇은 입술에서는 서로를 껴안고 있을 때보다도 체온이 잘 느껴졌다.
바짝 세워진 에리카의 구두.
발끝을 세우고 있는 게 힘들어질 때까지 시간이 지나다 겨우 내려왔다.
그제야 기숙사의 문이 열렸다.
아침의 햇살이 문 밖으로 드리운다. 두 사람은 함께 그곳으로 나아갔다.
“에리카, 안에서는 상관없다만 밖에서는 자중을 해야 한다.”
“가문이랑 입장 때문에?”
“그렇지.”
“…그래도 사람 없는 곳에서는 괜찮지 않아?”
“…….”
바르간이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자 에리카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속삭였다.
“사랑해 바르간. 세상에서 제일로.”
“…그래. 나도 사랑한다. 에리카.”
—끼이익.
그렇게 문이 닫히고.
기숙사 안에는 다시금 어둠이 가득 찼다.
* * *
“에, 에리카…! 정신이 들어요?!”
침대에서 일어난 에리카.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하지 않은 병실. 곁에는 자신의 친구인 디피엘리아가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여긴….”
“퀼레에 있는 교회의 병실이에요. 전쟁이 일어났던 숲 가장 가까이 있던 도시요.”
“……전쟁. 윽. 머리가….”
“자, 잠시만요. 바로 치유 마법을 걸어 줄게요!”
디피엘리아는 에리카의 손을 잡아 주며 성스러운 빛을 내 주었다.
그러자 에리카의 안색도 점차 좋아졌으며 대화를 할 정도까지 통증 또한 완화되었다.
에리카는 중얼거렸다.
“무슨 꿈을 꿨던 거 같은데…….”
흐릿한 걸 넘어 단서초자 찾을 수 없는 꿈.
누가 일부러 엉망진창으로 만든 듯한 불쾌한 느낌이다.
그런 에리카를 바라보던 디피엘리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가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요?”
“기억…?”
“전쟁에 관해서라든가… 다른 무언가든지요.”
“…전쟁. 전쟁. …잠깐, 나는 얼마나 자고 있었던 거지?”
“4일이에요, 에리카. 4일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4일….”
체감상으로는 4월 28일에서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지만.
벌써 4일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에리카는 전쟁의 결과를 물었다.
하지만, 어쩐지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디피엘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 우선 기억을 되짚는 것부터 해 보자고 제안했다.
에리카는 다소 얼떨떨하게 그 안을 받아들였고 이어지는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 시작했다.
“에리카.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때가 언제죠?”
“4월 28일… 새벽이 밝아 오던 때.”
“그렇군요. 그럼 혹시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랑 있었는지도 기억나요?”
“대시계탑의 내부에 있었어…. 어라? 근데 내가 왜 전쟁이 일어나는 와중에 대시계탑의 안에 있었던 거지?”
“……같이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겠어요?”
“같이? 같이… 같이…….”
에리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엔 머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었나?”
“…….”
디피엘리아는 치유 마법을 거뒀다.
두통은 해결되었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치유 마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
‘그 이름’을 꺼내도 되는지 걱정이 들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차라리 낯선 환경에서 추궁 당하듯이 물어지는 것보다야 지금이 낫겠지.
생각을 마친 디피엘리아는 얼음장 위를 걸어가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바르간’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요?”
디피엘리아를 에리카의 두 눈을 바라봤다.
여전히 푸른 바다를 한 아름 담은 것처럼 아름다운 눈동자.
그 눈동자는 찬란하게 빛나고 있지만.
“아니. 모르는 이름이야.”
어딘가 뻥 뚫려 공허하게 보였다.
“…….”
에리카의 말에 진솔함을 느낀 디피엘리아는 천천히 몸을 가까이 해 에리카를 안아 주었다.
에리카의 좁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혹시나 제 표정이 보일까 더욱 끌어안았다.
“왜 그래…?”
에리카는 디피엘리아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싱긋 웃으며 그녀와 마찬가지로 감싸 앉았다.
“내가 일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했던 거야? 그러지 않아도 돼. 이렇게 일어나 있잖아.”
“…….”
“걱정하지 말라니까. 몸도 멀쩡하고 마나도… 어? 설마 지금 울고 있는 거 아니지?”
“…….”
“디피엘리아?”
영문을 알 수 없는 친구의 울음.
에리카는 디피엘리아의 우려를 덜어 주기 위해 같은 말을 반복하며, 이번엔 되레 그녀를 토닥였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디피엘리아.”
보다시피 멀쩡하게 네 앞에 있잖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야.
그냥 잠시… 아니, 오랜 잠을 자다가 일어난 것뿐인걸?
어떤 내용이었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런 사소한 꿈을 꾸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