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294)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294화(294/350)
“벨레드 님. 만약 얼마 후 있을 정방회의에서 집행관이라는 제 직위에 관한 불만이 나온다면 어느 정도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벨레드에게 집행관의 자리를 받던 때.
바르간은 벨레드에게 그렇게 전했다.
이에 벨레드가 추기경인 자신의 권한으로 내린 것인데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를 묻자 바르간은 답했다.
“벨레드 님을 충실히 따르는 강경파의 주교들만 하더라도 제 존재를 좋지 않게 여기는 시선이 많이 있습니다. 한데 다른 곳은 오죽하겠습까.”
추기경 벨레드의 특별 대우.
여신교 내에서 지나치게 빠르게 입지를 다진 인간. 바르간.
때문에 바르간은 한발 물러설 필요를 느꼈다.
정확히는 한발 물러선 것처럼 ‘보일’ 필요를 느꼈다.
“독주는 남들의 시샘을 사기 마련입니다. 그건 인간이든 알티프이든 마찬가지죠.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들의 시기심을 달랠 수 있는 좋은 방안입니다.”
『아이야. 뭘 생각하고 있는지 그대로 말해 보거라.』
벨레드의 지시에 바르간은 씨익 입가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위대한 존재. 추기경께서 내린 제 직위입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온건파의 추기경이라고 한들 함부로 취소할 순 없겠죠. 대신 약화시키려 기를 쓸 것입니다.”
바르간은 말했다.
그들이 권한을 약화시키게 내버려 두라고.
“중요한 건 집행관이라는 자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처음 자리를 따내는 것은 어렵지만, 그 자리에 앉아 주변을 정돈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요.”
자리만 유지할 수 있다면 남은 건 시간이.
그리고 자신이 범위를 넓혀 가 보이겠다는 바르간.
벨레드는 그런 바르간의 생각을 존중했고, 받아들였다.
***
어둠으로 가득 찬 드넓은 방.
중간중간 세워져 있는 두꺼운 기둥이 고독하게 보이는 회장.
다른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공간에 기다란 네 개의 테이블이 있다.
정사각형을 형상화하는 테이블의 위치.
그중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자색 머리칼의 여인은 생각했다.
‘대주교 바르간…. 성서를 완독한 자.’
여신교 내에 내려오던 전설.
성서를 완독한 자가 나타나 여신교를 앞날을 밝혀 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이 전설을 알고 있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여신교 안에서도 추기경들과 몇몇 대주교… 그리고 주교 얼트레만 정도일까.
그를 직접 보게 되는 건 이번이 처음.
더 많은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강경파가 도착했다.
그들이 앉을 위치는 미리 정해져 있었다.
『오셨습니까. 벨레드.』
비어 있는 두 개의 테이블.
그중 하나에 벨레드를 비롯한 강경파의 대주교들이 앉자, 반대편에 앉아 있는 자색 머리칼의 여인이 벨레드에게 인사했고.
벨레드는 그녀를 보곤 살며시 입가를 올렸다.
『이젠 빈 두 자리가 제법 자연스러워졌구나.』
온건파의 수장, 아몬.
그녀와 함께 앉아 있는 다섯 명의 대주교.
대주교 자간과 아미를 포함하여 꽉 차 있던 때를 떠올리면 다소 초라하게 보이기도 하다.
이죽임이 담긴 벨레드의 발언에 아몬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쪽은 저번에 비해 자리가 좁아 보이는군요.』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벨레드의 수하에는 두 명의 대주교 말고는 없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바르간, 블뤼란스가 강경파에 들어오면서 마주하고 있는 온건파에 비견되었다.
‘…그녀가 추기경 아몬인가.’
아몬과 벨레드가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와중.
바르간은 조용히 회장 안을 살피면서 추기경들과 대주교들의 얼굴을 외웠다.
먼저, 추기경 아몬.
나릿나릿한 말투를 가졌음에도 본래 지니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섬뜩하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으나 벨레드가 그녀를 아몬이라고 불렀으니 확실할 터.
자색의 머리칼. 여리여리한 소녀의 외모. 깊이감이 느껴지는 눈동자. 소설에 묘사되어 있던 외관과도 일치한다.
‘강경파의 수장 벨레드에겐 숙적과도 같은 존재. 그리고… 저자는….’
바르간은 눈동자를 굴려 다른 테이블을 살폈다.
얼굴이 익은 대주교 살레오스와 함께 앉아 있는 남자.
미치광이 과학자 추기경 제파르.
그는 낄낄거리며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대주교 글라샬라볼라스는 데려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굴에는 인피면구 같은 것을 쓴 채 노인을 흉내 낸다.
조심성이 많은 녀석으로 자신의 외관을 좀처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기는 했으나, 이 자리에서까지 방비할 줄이야.
‘…하지만, 나는 이미 제파르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바르간은 첫 번째 고유술식을 습득하기 위해 시련에 들어갔을 적을 떠올렸다.
머나먼 과거로 가 슈겐하르츠와 같이 다니던 남자.
‘라페즈’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녀석.
그는 틀림없이 추기경 제파르의 과거 시절이었다.
아미와 자간은 그대로였으니 제파르 역시 뜯어서 고치지 않았다면 본 그대로일 것이다.
‘뜯어서 고쳤을 가능성이 높지만, 버릇 같은 걸 새겨 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바르간의 눈에 든 존재는 온건파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자.
대주교 이포스.
소위 집행관이라고 불리는 자.
대주교 중 제일의 무력으로도 유명한 개체로 단단하고 질겨 보이는 갈색의 피부가 특징적이다.
본래 집행관이라는 자리가 이포스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무력이 얼마나 높은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바르간은 용사 중에 헤일리온이나 실베스테르가 있다면, 여신교에는 이포스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저나, 내가 저들에게 관심이 있는 만큼. 저들도 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군.’
바르간은 여신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입에 오르내리던 요주 인물.
그런 예비 용사가 돌연 여신교에 들어와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으니 주목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덕분에 강경파의 세력이 급팽창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없었다.
내색은 하지 않으나 추기경 아몬, 추기경 제파르, 집행관 이포스.
그들은 바르간을 샅샅이 살피는 중이었다.
『모두 모이셨으니. 이만 정방회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먼저 제 인사를 올리도록 하죠. 오랜만에 뵙습니다. 만물 거래장 테라리움을 운영하고 있는 주교 얼트레만입니다.』
그때, 테이블을 비추고 있던 빛이 껐다 켜지며 얼트레만이 테이블의 중앙에 나타났다.
그는 드높은 존재들의 앞에서 탑햇을 벗은 채 깊이 인사했고 진행을 이어 갔다.
여신교의 자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얼트레만. 그는 비록 주교이지만, 여신교 내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으며 중립을 주장하기에 사회를 맡았다.
추기경들을 중심으로 한 각 세력의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얼트레만은 매끄럽게 말을 뱉으며 회의의 첫 번째 안건을 꺼내려 들었다.
『현재 여신교에는 11개의 대주교 좌가 차 있습니다. 역사에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주교의 자리가 비어 있는 셈이죠. 때문에 저희는 새로운 대주교를 선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있는 주교들 중 후보를 추리자면…….』
『그 전에, 먼저 논의해야 할 사안이 있죠.』
진행을 끊은 아몬.
예정에는 없던 돌방 상황이었으나, 얼트레만은 자연스레 물었다.
『아몬 님. 어떤 사안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대주교 바르간. 추기경 벨레드에 의해 집행관의 직위를 얻게 된 그에 대한 것.』
아몬의 발언이 벨레드의 눈가를 주름 잡히게 했다.
『내 아이가 집행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미 충분한 성과와 무력을 증명했을 텐데?』
『성과와 무력은 인정합니다. 다만, 그는 명백한 인간. 대주교 자리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란을 야기하는데 멋대로 집행관에 올려서는 곤란합니다. 벨레드.』
『하하….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아몬. 형상파와 무형파로 품고 있는 주제에 입이 살아 있어.』
인간 신도로만 구성된 형상파와 무형파.
언뜻 다른 세력인 것처럼 보이지만, 두 그룹은 온건파라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아몬은 벨레드의 지적에 반론했다.
『역사적으로 형상파와 무형파의 신도가 대주교가 되었던 적은 없습니다. 대주교 바르간의 케이스가 워낙 특이한 것이죠. 그가 아카데미아를 무너뜨린 공적을 인정해서 대주교까지는 묵과하고 있었으나, 대주교를 이끄는 집행관이라면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래서, 내 아이의 직위를 해제하고 일반 대주교로 돌리라는 건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추기경 벨레드의 입장도 있을 테니 차선을 택하려 합니다.』
아몬은 고개를 돌려 바르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르간에게 명령을 하듯이 말했다.
『집행관 바르간의 직위를 ‘일부’ 인정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강경파 내에서만 한하며 저희 온건파와 중립 세력에는 집행관의 권한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즉, 바르간은 집행관의 직위를 가졌음에도 아몬과 제파르의 대주교들에게 명을 내릴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없다는 것.
이에 벨레드가 더욱 눈가를 좁힌 채 나서려는 때.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제파르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동의한다. 바르간이라는 인간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기 짝이 없지만, 내 작품들을 건드는 꼴은 볼 수 없지. 뭐… 지금이라도 강경파에서 나와 내 수하가 되겠다고 하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제파르…. 아몬에게 꼬리치는 꼴이 우습구나.』
『뭐라고 해도 상관없네. 나는 어디까지나 실리를 추구할 뿐이니까. 낄낄낄.』
불쾌함을 표하는 벨레드.
반면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장본인 바르간은 침착하게 속삭이더니, 벨레드의 허락을 받고 손을 들었다.
『말씀하시죠. 바르간 대주교님.』
“두 추기경분들의 의견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였습니다. 확실히, 인간인 제가 단기간에 집행관의 자리에 오른 것은 분란을 일으킬 정도로 파급이 크지요. 그럼에도 제 직위를 일부 인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표하겠습니다.”
귀족이었던 만큼 깔끔하고 담백하게 고개를 숙이는 바르간.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건 채 말을 이었다.
“그럼, 배려해 주신 대로 저는 일부의 권한을 인정받은 집행관의 직위를 이어 가겠습니다. 강경파를 제외한 다른 대주교에게는 일체의 지시와 간섭을 내리지 않도록 하죠.”
예상했던 것보다 쉽게 받아들인 바르간.
바르간과 귓속말을 했던 벨레드 역시 첨언을 하지 않는다.
마치 미리 짜 맞췄던 것처럼.
『…그렇다면 됐습니다.』
뭔가 속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능구렁이 같은 바르간과 벨레드를 살피던 아몬.
그러나 좀처럼 티를 내지 않는 두 존재에 뭔가가 걸리는 느낌을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바르간 대주교 님에 관한 안은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예정을 변경해야 할 듯하군요. 지금 대주교 선발에 관한 안을 꺼내게 되면 분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이니 두 번째 안건을 먼저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분위기를 살피던 얼트레만은 여기에 있는 모두가 관심을 보이며 논쟁이 아닌, 정말로 논의할 수 있는 주제를 뱉었다.
『대전쟁. 끈질겼던 인류를 무참히 짓밟을 거대한 전쟁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