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02)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02화(302/350)
“오랜만에 뵙는군요. 슈겐하르츠 님. 저를 찾고 계신다고 하여 한 걸음에 찾아뵈었습니다.”
심볼처럼 쓰고 다니는 탑햇을 들더니 인사하는 얼트레만.
싱긋 웃고 있는 눈가는 상냠함을 가장하고 있어 수상해 보인다.
바르간을 대신해서 얼트레만을 맞이하고 있는 슈겐하르츠는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방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고맙네. 내 저택은 아니지만 편한 곳에 앉도록 하게.”
“실례하겠습니다.”
가운데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전문가인 바르간의 시선으로 봤을 때, 슈겐하르츠의 연기력이 차마 대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오히려 그 미묘한 어색함이 분위기와 어울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슈겐하르츠, 부디 내가 시킨 대로만 잘 진행시켜라.’
들리지는 않겠지만 바르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현재 바르간과 벨레드는 저들과 다른 방에 위치해 있다.
이 세계에서 일면식도 없고, 신원도 불분명한 바르간이 얼트레만을 조우하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게 뻔하기에 제자 중에서도 이름을 알린 슈겐하르츠를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얼트레만을 수소문할 때도 슈겐하르츠의 이름을 빌리자 금방 튀어나온 것처럼, 네임드는 이럴 때 쓸모가 많다.
“…다시 한번. 바쁜 걸음을 흔쾌히 허락해 주어 고맙네.”
공간을 지배하는 벨레드의 마법.
그 아주 작은 틈 사이로 저들의 음성이 새어 나온다.
바르간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집중하였고. 얼트레만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슈겐하르츠 님께서 저를 부르셨는데 기쁜 마음으로 달려오는 게 마땅하지요.”
기본적으로 상대방을 높이는 어휘.
그러면서도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건 얼트레만이 풍기는 미스터리함 때문일 터이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동안 겉치레를 이어 갔고.
내린 차가 식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자네를 부른 건 다른 용무가 아니라 묻고 싶은 게 있어서네. 이 대륙에 자네만큼 많은 소식을 알고 있는 자도 없지 않은가.”
“과찬이십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전능하신 마법사님을 제외하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작게 웃는 얼트레만.
자만심에서 비롯된 미소가 아니라는 게 그의 무서운 점이다.
큼큼…. 목을 가다듬는 슈겐하르츠는 천천히 바르간이 준비해 준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마법사님이 걱정되어서 말이네. 행진에는 참여하시겠다고 의사를 밝히셨지만, 몇 달간 밖으로 나서신 적이 없으셔서. 수발을 드는 이들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지.”
이는 제자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었다.
마법사가 방 안에만 틀어박힌 채 바엘을 제외하곤 그 어떤 이의 출입도 금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마법사님의 제자로서 건강상에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닐까 하고 우려가 되지 않겠나. 기도가 막힌 듯 영 답답하지만 면회 자체를 거절하시니 이렇게 자네를 부르게 되었네.”
“슈겐하르츠 님의 애심은 높디높은 야카 산조차 우러러 볼 정도로군요. 저 역시 본받아야 할 듯합니다.”
얼트레만은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을 언급하며 슈겐하르츠를 띄어 주며 말꼬리를 이었다.
슈겐하르츠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목소리 톤을 싹 바꾼 채로.
“말씀하신 대로. 마법사님께서 요 몇 달간 스스로를 독방에 가두시니. 저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던 부에르 님도 이젠 완전히 플라우로스 님에게 맡기는 꼴이 되었으니까요.”
여신의 딸인 부에르.
그녀의 보모 역할을 맡은 제자 플라우로스.
원래는 단순히 뒷바라지를 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독박 양육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슈겐하르츠는 그 사실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슨 문제라도 생기신 건 아닌지…….”
“…….”
가는 눈 사이로 슈겐하르츠를 살피던 얼트레만.
그는 슬슬 때가 되었다고 여겼는지 품 안에서 특이한 도구를 꺼내 테이블로 올렸다.
“이게 뭔가?”
“음성을 기록할 수 있는 마도구입니다. 라페즈 님에게 구입한 물품이지요.”
“음성을…. 이런 걸 왜?”
“보다 원활하고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함입니다. 슈겐하르츠 님, 이 이후의 대화는 단순한 사담이 아닌 거래로서 다뤄도 괜찮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한낮 거래상인 제가 개인적인 이유로 할 수 있는 대화는 극히 제한적입니다만, 일과 관련이 되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얼트레만은 제안했다.
지금부터 하는 모든 대화를 녹음하는 대신, 자신은 슈겐하르츠에게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거래를 통한 서로의 정보 공유와 대화의 녹음을 허가해 달라는 얼트레만.
이에 슈겐하르츠는 얼떨떨했다.
오르가논… 즉, 바르간이 미리 말했던 그대로 상황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얼트레만이 거래에서 거짓을 뱉는 일은 없으니. 받아들이라고 했었지….’
자신보다 얼트레만에 대해서 빠삭히 알고 있는 듯한 오르가논.
슈겐하르츠는 묘한 느낌을 받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세.”
“흔쾌히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트레만은 테이블에 올려 둔 마도구에 마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가동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알기 힘들 정도로 정밀한 작용이 일어났다.
그가 은밀한 마음을 먹었다면 처음부터 모든 대화 내용을 녹음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굳이 꺼내 보인 건 신뢰를 얻기 위함.
얼트레만은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자, 그럼 다시 이야기를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마법사님 말입니다만…. 수도에 칩거를 시작하신 지 정확히 6개월 하고도 12일이 지났습니다. 마왕 토벌 직후에도 활발하게 대륙을 횡보하신 전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게 말이네. 그토록 세상 누비기를 좋아하셨던 분이 어쩌다.”
“그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칩거에 들어가시기 전, 마법사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정확히는 중얼거림이라고 표현하는 게 올바를까요?”
“중얼거림?”
관심을 가진 슈겐하르츠가 테이블에 바짝 몸을 가까이하자, 얼트레만은 잠시 텀을 준 뒤 입을 열었다.
“‘찾아야 해.’ 그렇게 말씀하셨다더군요.”
“…찾다니? 무엇을 말인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혼잣말을 하시던 마법사님께서 평소와 달리 불안해 보이셨다는 겁니다.”
“불안해하셨다니…? 마왕과의 전투에도 눈 한 번 깜짝 하지 않으셨던 그분이?”
“저도 믿기 힘듭니다만. 그 이후 마법사님께서 칩거에 들어가신 걸 보면 아예 신빙성이 없는 말인 거 같진 않습니다.”
슈겐하르츠는 당혹감에 손으로 입을 쓸어내렸다.
‘그렇다면 마법사님께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시는 까닭은 ‘두려움’ 때문이란 말인가? 천지를 창조할 만한 힘이 있으시고 불로(不老)의 육신을 가지신 그분께서?’
“…….”
“실제로 유일하게 마법사님과 독대하실 수 있는 바엘 님께서는 대륙을 돌아다니느라 바쁘십니다. 명목은 마물 잔당의 토벌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잠깐.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나? 어찌해서 우리에게는 명하시지 않는 거지? 그분의 제자들만 하더라도 이제 몇 천은 되네. 진정으로 찾고자 하신다면 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을 텐데?”
“진의는 알 수 없습니다. 마법사님께서 입을 열지 않고 계시니까요. 바엘 님께서도 마찬가지고요. 할 수 있는 건 단서들을 종합한 추측뿐이지요.”
“…마법사님.”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기는 슈겐하르츠.
그는 일찍이 제자로 들어왔으면서 마법사에 대해 아는 게 얼마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를 믿지 못하시는 건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죠. 그분께서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으시는 분이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바엘 님 혼자서….”
“정확한 건 아닙니다. 가능성이 높다는 것뿐이지요. 또한, 앞으로 어떻게 방침을 정하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상황이 절박해지면 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게 될 테니까요.”
“…….”
“슈겐하르츠 님, 저도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말해 보게나.”
슈겐하르츠는 어쩐지 진이 빠져나간 듯한 말투로 허가했다.
애초에 교섭이기 때문에 얼트레만의 물음에 답해야 했다.
“마법사님께서 들고 다니시는 「책」의 내용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책…? 아, 시민들 사이에서 「성서」라고 불리는 그것 말인가?”
“예.”
“본 적 없네. 애초에 몸에서 떼 놓으려 하시지도 않고 남들 앞에선 펼치지도 않으시지 않은가.”
“슈겐하르츠 님께서도 보신 적이 없으시군요….”
얼트레만은 슈겐하르츠가 들을 수 있는 혼잣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골몰하고 있음을 일부러 드러내는 게 노골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흘려들을 수 도 없었다.
“마법사님께서 유일하게 집착을 보이시는 물건. 정보를 얻을 곳이 정녕 없는 건가.”
“……별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지금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한 참고가 되었습니다. 정보가 얼마나 독점되어 있는지는 값어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니까요.”
싱긋 웃는 얼트레만.
둘은 몇 차례 동안 말을 이어 가다가 교섭을 종료했다.
주로 제자들 관련된 내용이었으며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꼴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어째 정당하지 못한 교섭이 된 거 같아 면목이 없네. 자네가 제공한 정보에 비해 내가 아는 게 너무 없었군.”
얼트레만은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마도구의 활동을 정지시키곤 품 안에 넣으며 답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장사꾼은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하지 않는 법이거든요.”
“그런 건가?”
“예. 그런 법입니다.”
“어찌 되었건 오늘은 고마웠네. 내 언젠가 반드시…….”
…지지지직.
한편, 저택에 마련된 또 하나의 방.
벨레드의 마법을 통해 음성을 듣던 바르간은 이만 자리에 일어섰다.
얼음 덩어리보다 차가울 것만 같은 그의 눈동자에 잔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비춰진다.
‘슈겐하르츠와 얼트레만. 둘 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
말로는 교섭이니 뭐니 해서 서로 터놓고 이야기 하는 것 같았지만.
분명히 정보에 제한을 두고 중요한 사실들을 밝히고 있지 않음이 분명했다.
얼트레만이야 속에 뱀을 키우고 있음을 몰랐던 것은 아니니 그러려니 하지만… 슈겐하르츠 역시 그랬다는 게 조금 의외라면 의외다.
“…….”
생각을 정리하던 바르간은 고개를 돌려 구석에 있는 여성을 바라봤다.
사각사각—.
하얀 양피지에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벨레드.
제법 그림 솜씨가 좋아 선이 많지 않음에도 대상이 확실했다.
어린 소년의 얼굴.
코의 선과 눈동자가 벨레드와 닮아 있어 전쟁 통에 잃어버린 그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그림을 천천히 관찰하던 바르간은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했고.
곧바로 움직인다.
* * *
얼트레만과의 긴 대화가 끝난 후.
슈겐하르츠는 바르간과 벨레드가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모든 대화를 들었을 오르가논.
아니, 이름 미상의 남자와 깊은 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억이 났다. 정체 모를 환각 속에서 오르가논과 헤어지고 제자들 가운데 그의 이름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었다는 것을.’
이미 얼트레만의 대화 전부터, 자간과 아미를 통해 프릭칸리스크의 토벌 등 현재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를 제대로 파악한 슈겐하르츠.
오르가논의 이름이 가명이라는 사실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트레만과의 대화 도중 불현듯 떠올릴 수 있었다.
‘자네는 대체 정체가 뭔가.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난 건가?’
그는 분명 목적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그를 도와준 것처럼 이번에는 그가 자신에게 협력할 차례였다.
그렇게 복잡한 사고를 정리하며 빠르게 복도를 걸어가는 슈겐하르츠. 이윽고 두 사람이 있을 방 앞에 도착하여 문을 활짝 여는데.
“……오르가논.”
눈에 담기는 건 허무하기 그지없는 공실.
바르간은커녕 벨레드 역시 사라지고 없다.
남은 건 그녀가 그린 소년의 그림 한 장뿐.
슈겐하르츠는 절망감에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네. 이 사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