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08)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08화(308/350)
“어린 시절. 당신은 큰 상처를 입었어. 그걸 자세히 살피고 싶어.”
그간 함께했던 시간 동안 꾹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제법 열리게 된 것인지 벨레드는 바르간에 대해서 알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가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더라도 바르간은 코웃음을 쳤다.
“내가 큰 상처를 받았다고? 지금껏 들은 말 중 가장 우스운 말이군.”
“받았어.”
벨레드는 단언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올곧게 바르간을 직시했다.
“당신의 부모는 나랑 같아.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어. 아무런 죄가 없는 아이의 가슴에 고칠 수 없는 상처를 내 버렸지.”
“…….”
“오늘 당신은 평소랑 좀 달랐어. 어린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었던 거야.”
“…하. 부에르를 감싸는 것도 모자라 이젠 내 부모 행세를 하는 거냐.”
눈살을 찌푸리는 바르간.
자리에서 일어나 벨레드와의 위치감을 새롭게 조성한다.
“여기까지. 딱 여기까지는 너그러이 넘어가 주겠다. 그러니 더 이상 입을 나불거리지 마라.”
“오르가논. 나는….”
“그만 다물라고 했다.”
“…….”
“이만 물러나라. 이곳의 경비를 맡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눈가에 힘을 주며 나직하게 화를 억누르는 바르간.
눈꺼풀도 감지 않은 채 그를 직시하던 벨레드는 혼자 고갯짓을 하며 중얼거렸다.
“어지간히도 남이 건드리는 게 싫은 거구나….”
발길을 돌리는 벨레드.
그녀는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던졌다.
일찍이부터 커다란 사건을 겪었을 그를 위한 한 줌의 위로의 말이다.
“자식은 잘못이 없어. 잘못은 부모가 하는 거야.”
“…끝까지 떠들다가 가는군.”
혼자 남은 바르간.
그는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귀찮은 벨레드의 한마디를 무시한 채 주변의 감시를 이어 나갔다.
어느새 해가 제법 떠올랐다.
장막에 가려져 있던 세상의 다채로움이 다시금 번져 갔다.
***
대륙의 북서쪽.
수도 페트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 땅은 마법사를 견제하는 세력들이 모여 있는 은밀한 장소였다.
국가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작은 나라들과 부족들이 연합한 형태로 최근에 슈겐하르츠가 이끌고 온 마물들과 정령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었다.
그중 ‘트로아’라고 불리는 소국은 다른 소국들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역적 슈겐하르츠를 품었다.
덕분에 슈겐하르츠는 무사히 마법사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고 목숨을 보전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당도한 마법사의 유일한 자손 부에르를 기점으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부에르 님. 저, 슈겐하르츠가 새롭게 인사드리옵니다.”
도시의 성문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부에르 네를 반긴 건 슈겐하르츠였다.
맨땅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부에르에 대한 극진한 예를 표하는 그.
이미 마법사와 함께 있으면서 타인의 예의를 볼 때로 본 부에르였지만 자신만을 향한 예는 아직 익숙하지 못했다.
“…네, 네에.”
플라우로스의 곁에 착 달라붙은 부에르.
그녀를 조심스레 살피던 슈겐하르츠는 인삿말을 이었다.
“큰 변고를 겪으셨음에도 무사히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오랜 이동에 지치셨을 텐데 이만 안에 드셔서 쉬시지요.”
“…….”
“플라우로스도 고생했네. 부에르 님을 모시고 안으로 들게나.”
“고맙군. 그럼 실례 좀 하겠네.”
시종으로 보이는 자들이 부에르와 플라우로스를 안내했다.
부에르는 바르간이 쫓아오기 전에 발빨리 걸음을 옮겼고 성문의 앞에는 슈겐하르츠와 바르간, 그리고 벨레드를 비롯한 몇몇의 인원이 남았다.
먼저 말을 건 인물은 슈겐하르츠였다.
“오랜만이군. 자네. 벨레드도.”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 지난 과거가 떠올랐는지 힘 없는 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내가 얼마나 황망했는지 아는가? 자네의 도주에 대체 몇 번이나 식은땀을 흘려야 하는지….”
언뜻 바르간을 나무라는 말투였으나, 표정은 오랜 친우를 만난 듯 반가움을 드러내는 슈겐하르츠.
그는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지난 것치고는 상당히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바르간은 그의 주변에 있는 몇몇 인물들을 살피더니 웃음 지었다.
“재밌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구나.”
“아, 벌써 알아차린 건가?”
“이제 막 입문한 자들의 마나는 눈에 띄는 법이지. 색과 기운이 아예 다른데 모를 수가 있나.”
슈겐하르츠를 호위하듯 지키고 있는 이들.
그들에게 풍겨지는 마나는 여신과 그 제자들의 것과 달랐다.
익숙한 푸른 빛의 마나.
알티프의 것이 아닌 원작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힘이다.
슈겐하르츠는 대화를 주도했다.
“아무튼, 부에르 님을 도와주어 고맙네. 배에서 온 연락으로 자네와 벨레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크게 놀랐지만 자네 일이니 그럴 수 있겠다 했네. 역시 자네는 매번 위급한 상황에 나타나 주는구만.”
“…매번 위급한 상황인가.”
슈겐하르츠의 말에서 묘한 괴리감을 느낀 바르간.
바르간이 다른 말을 하기 전, 슈겐하르츠는 성문 내부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긴 대화를 나누어야 할 듯한데 안으로 드는 게 어떤가? 내 비록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제법 입지를 구축해 두고 있네.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방 하나 정도는 마련해 줄 수 있지.”
“그러는 게 좋겠군.”
“정해졌군. 시장할 테니 식사라도 하고 이야기 나눔세.”
***
슈겐하르츠가 안내한 곳은 그의 거처였다.
투박해도 제법 커다랗고 잘 꾸며진 저택이었는데, 이 연합국의 국력이 현재 밑바닥 수준임을 감안하면 이질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슈겐하르츠는 아직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손님의 입장.
그런 자에게 이런 거대한 거처를 빌려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역시 전부터 준비를 해 두고 있었던 건가.”
음식이 테이블 위에 올려지자 바르간이 말했다.
얼트레만과의 교섭 당시 슈겐하르츠가 뭔가를 숨기고 있음은 알았기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슈겐하르츠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원래는 내가 일을 그만두고 나면 지내리라 생각하고 조용히 준비했던 곳이네. 한데… 마법사님을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영 맛이 가고 있는 거 같아 쓰임새가 바뀌었지.”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인물로 보았다만, 저택의 크기와 고용한 사용인들의 수를 보면 그렇지만도 않았던 건가?”
“자네…. 내가 탐욕스럽다고 말하고 싶으면 그렇게 이야기하게. 괜히 돌려서 이야기하지 말고.”
“전혀? 탐욕스러운 게 딱히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본디 권력과 재산은 힘의 근원이다.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하지. 네가 일으키려는 일의 규모에 비하면 오히려 아직 터무니없이 작다고 본다.”
“…자네에게는 항상 속이 훤히 엿보이는 기분이구만. …뭐, 우선 식사를 즐기도록 하세나.”
바르간과 벨레드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요리를 입안에 넣을 수 있었다.
둘이 오두막에서 지낼 때는 대충 한 끼를 때우는 게 일반적이라 거르는 날도 적지 않았는데, 많진 않더라도 정성스레 조리된 요리는 역시나 맛이 좋았다.
“맛있어….”
“벨레드. 이젠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가?”
“…….”
“아, 미안하네. 놀라워서 그만 식사 도중 말을 걸었구만. 마저 먹고 이야기함세.”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접시를 싹 비운 이들.
슈겐하르츠는 다시 만난 자신의 전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다가 말했다.
“아, 알겠네. 지쳤을 텐데 이만 방으로 들어가서 푹 자게.”
벨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 마법을 연속으로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밤을 새우는 것 또한 기본이었으니 이만 숙면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벨레드가 침실로 들어서고 나서 남게 된 두 사람.
슈겐하르츠가 따라 준 차를 마시는 바르간이 말문을 열었다.
“만났을 때부터 나를 ‘자네’라고 부르고 있더군.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애매해서인가?”
“…하하. 용케도 그런 걸 알아차렸구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부른다고 했던 것이었는데.”
“이제 자리도 마련되었으니 조금은 솔직해져도 괜찮겠지. 그래,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현상’을 일으킬 수 있었나?”
“이런 현상이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걸 묻는 건가?”
“시치미 떼기는.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이곳. ‘머나먼 과거’로 나를 부른 이유와 방법 말이다.”
“…….”
후릅—.
바르간은 차를 마셨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다시금 입을 뗐다.
“슈겐하르츠. 너는 내가 이 과거로 왔을 때 나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가 회귀를 하고 나선 더욱 또렷하게 기억해 내곤 이번 사건과는 관련 없는 또 다른 세계선의 일도 알고 있었지.”
“…….”
“그뿐인가? 세이만 던전을 제외하면 내가 이 시기로 온 것이 두 번 연달아 고유술식과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시련 당시에는 내가 고유술식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조력자 역할을 맡기도 했지.”
“…그렇군. 완전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말일세.”
짐작이 가는지 작게 웃음짓는 슈겐하르츠.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기억이 또렷하지 않음을 전했다.
바르간은 그 표정을 살피다 말을 이었다.
“또한, 내가 겪고 있는 회귀의 현상은 지나칠 정도로 나의 제2 고유술식과 방식이 유사하다. 좀처럼 티가 나지 않으나 이것은 저주 마법… 그것도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 낸 환상. 어지간히 저주 마법에 몰두한 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는 현상이지.”
“…….”
“보아하니 주변 인물들에게 푸른 빛의 마나를 나눠 준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한데. 너도 나에게 진실을 알려 주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닌가?”
“…아예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군. 일부러 자네가 볼 수 있도록 푸른 마나를 사용하는 인원들을 호위로 놔둔 것이었으니.”
“그러니 속 시원하게 말해라. 나를 어떻게, 어떤 이유로 부른 거지?”
“…….”
뜸을 들이는 슈겐하르츠. 하지만 곧 푸른 빛의 마나를 움직이며 말했다.
“본래 플라우로스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것을 금지했지만. 자네라면 보여 줄 수 있네. 아니… 보여 주고 알려 주어야 하지. 자네가 말한 대로. 그게 자네를 부른 이유니까.”
슈겐하르츠의 의지에 따라 모이는 푸른 빛의 입자들.
옹기종기 모이던 빛의 무리는 하나의 형태를 만드는가 싶더니 커다란 책이 되어 식탁 위에 떴다.
“이건….”
바르간은 의문의 책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슈겐하르츠 역시 고개를 올려 그 책을 바라봤다. 어딘가 거룩하기까지 해 보이는 책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지만…. 세간에서 부르는 명칭을 빌리자면 「성서」 정도가 되겠군. 마법사님께서 들고 다니시는 것과 동등할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네.”
“성서…. 그 자색 표지의 책과 동등한….”
“바르간. 나는 지금껏 자네에게 거짓을 고하지 않았네. 내가 그대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도 연기가 아닌 실제였지.”
“그런 건 알고 있다. 넌 거짓을 하면 얼굴에 티가 나는 성격이니 말이다.”
“그랬다면 다행이군. 그럼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오해하지 않고 들을 수 있겠어.”
슈겐하르츠는 바르간을 오르가논이 아닌 실명으로 말했다.
바르간의 기억상 단 그 어떤 시간선에서도 슈겐하르츠에게 실명을 공개한 적은 없었다.
‘처음 회귀를 했을 시점의 슈겐하르츠는 전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구조가 반복되게 시스템을 구축해 놨다면, 2번의 회귀를 더 한 지금은 그의 머릿속에 더 많은 정보가 들어갔을 터.’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회귀를 인지하고 다른 시간선을 인식한 슈겐하르츠.
그는 틀림없이 모든 해답을 꺼낼 수 있는 열쇠다.
슈겐하르츠는 곧게 눈썹을 세우며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내 자네에게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해 주겠네. 그러니 바르간. 이야기가 끝나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나?”
“…….”
“이곳까지 도달한 자네 말고는 부탁할 수 있는 인물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