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1)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1화(31/350)
“도련님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녀가 말한다. 내 옷자락을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꼭 쥔 채.
눈동자가 흔들리며 곧이라도 눈물을 쏟아 버릴 듯 찰랑거린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이런 제 감정이 잘못된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더는 억누를 수 없습니다.”
⎯도련님이 에리카 아가씨와 함께 춤을 추던 그날. 제 마음은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도련님이 아가씨에게 보인 웃음은.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용기를 내 보고자 합니다.
“도련님. 부디 저를 받아들여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그녀가 발끝을 들었다.
그녀의 오밀조밀한 눈, 코, 입. 모든 것이 더욱 가까워져 간다.
바로 코앞까지 다가서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고 두 손은 나를 당긴다.
나는 그렇게 가까워진 그녀의 뽀얀 살갗에.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꺄아아아아악!”
그녀의 가냘픈 비명이 날카롭게 찢어진다.
고통이 상당한 모양인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이마에 마력으로 냉기를 불어 넣었다.
“너무해, 너무해요. 도련님! 저는 도련님을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에서.”
“며칠이 지났건만, 아직도 알리시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냐. 나이아스.”
“역시 들켰지? 아이. 분위기 좋게 다 잡아 놓고서는! 아, 근데 너무 아파! 진짜 미친 거 같아. 손가락에 철이라도 심은 거야?”
나는 눈앞의 여성을, 아니 알리시아를 빙자한 정령을 내려다봤다.
나이아스는 샐쭉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여자아이를 이토록 험하게 대하면 벌을 받을 거야! 알리시아는 지금까지 이런 고통을 어떻게 참았나 몰라.”
“웃기는군. 정령에게는 성별이라는 게 없지 않느냐. 그리고 평소 알리시아에게 한 것보다 강하게 했다.”
“그런 거지? 어쩐지. 이걸 그렇게 맨날 맞으면서는 못 살지. 아, 진짜. 후유증 미쳤네. 도련님, 나 멍든 거 아닌지 좀 봐 줘.”
뭐, 가끔은 이 정도로 치기도 하지만.
알리시아의 모습으로 다가와 이마를 보이는 나이아스.
분명 같은 외관일 터인데 성격이 다르다는 것으로 완전히 상이하게 느껴진다.
저 이마에다 한 방 더 꽂아 줄까 하다가.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녀석에게 물었다.
“왜 이런 같잖은 짓을 한 거냐. 오늘은 보고를 받는 날도 아니거늘.”
“아 그거? 엣헴. 그건 말이지. 아, 알았어. 까불지 않고 바로 말할 테니까 그 손가락 망치 좀 저리 치워 줘. 도련님아!”
까불거리기에 다시 매운맛을 보여 주려 했더니 아쉽게 됐다.
“내 힘의 절반이 돌아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 왔지! 보다시피 이젠 더 완벽하게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하는 게 가능해졌어!”
“그건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본심은 뭐지?”
“알리시아로 변신해서 도련님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려고… 아, 아니야! 아니야! 아아아악⎯⎯!!”
이게 나이아스만의 화법이다. 녀석의 행동에는 다른 숨겨져 있는 뜻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처음 나와 계약할 때 걸어 둔 제약으로. 나에겐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에둘러서 표현하는 것까지는 아슬아슬하게 가능하지만. 이렇게 콕 짚어서 말하면 피할 수 없다.
“내 이마 터지겠어!”
정령위(位) 공작의 위엄은 다 어디 가고 이런 모습일까.
루비드 마을에서 알리시아에게 하사했던 검,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정령 나이아스. 검 자체는 리암이 원작에서 사용하여 익숙하나 정령 나이아스는 소설에서 언급만 됐을 뿐 등장한 적이 없다. 그야, 리암이 발견할 적에는 이미 죽어 버렸으니까 당연한 일이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이젠 그 모습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여간 재미없는 사람이라니까. 모처럼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로 변신했는데 좀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덧나나.”
“알리시아로 잘도 긴장하겠구나.”
“하긴 그건 또 그러네. 하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쭉 지낼 거야. 이 외관이 마음에 들었거든. 거울 볼 때마다 기분 째진다니까?”
“…….”
아무튼, 그래서.
“보고해라. 이왕 온 거 지난 3일 동안의 보고는 지금 끝내겠다.”
“그래 좋아. 으음… 별다른 일은 없었어. 다만, 집착이 어후… 장난이 아니더라. 자기 수업 시간이 아니면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니까?”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딴 주관적인 생각 말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행동을 말해라.”
“아, 다 준비해 놨지. 나도 학습하는 정령이라고.”
나이아스는 마나로 만들어진 양피지를 꺼냈다. 그 안에는 한 인물이 있었던 장소나, 했던 행위가 시간별로 적혀 있었다.
빠르게 한 번 훑어봤지만, 미리 말했던 대로 특이한 점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역시 생각대로다. 미리 정해진 시간표 그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나이아스는 ‘그치? 그대로지? 근데 소름 돋는다니까.’라며 웃었다.
나이아스는 내 방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마력의 흐름이 좋은 곳을 찾았는지 몸을 공중에 띄운 채 특정 구역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도련님 생각한 것과는 달리 되게 섬세하네. 배려심이 깊다고 해야 하나. 약혼녀 몰래 이렇게까지 하다니 대단해.”
“뒷문장만 들으면 내가 그녀를 스토킹하라고 명령한 것 같구나.”
“하하핫, 결국은 비슷한 거 아닌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는 건 마찬가지니까.”
허공에서 웃고 있던 나이아스의 목에 검은 목줄 같은 문신이 생기더니, 곧 중력이 강해진 것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문신에 의해 실체화를 풀지 못한 나이아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떨어진 부위를 문지르고 있다.
“너와 내가 계약을 했다는 것을 가끔 잊는 모양이구나. 나이아스.”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나도 말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있는 거잖아!”
“자유롭게 말해도 좋다.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수 있다면 언제든지.”
지금의 나이아스는 내 사역마가 된 상태다.
사역마와 인간이 맺는 계약은 인간과 인간이 맺는 것과는 달라서 강제성이 더욱 강하다. 내가 사역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아 그래그래. 있잖아, 도련님아. 나 할 말이 있어.”
잠시 잠겼던 생각을 마친 나이아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하곤 빙그레 웃어 보인다. 방금과 같이 웃고 있어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입가에 걸린 미소엔 작게나마 적의가 담겨 있다.
“그놈. 「여신교」더라?”
말을 잇는다.
“그 녀석이 자신에게 걸고 있던 거. 마법이 아니었어. 여신교에서 내린 ‘축복’이지. 하긴, 마법이었으면 도련님이 나한테 부탁할 일도 없었겠지.”
나이아스가 엄지를 세워 관자놀이를 꾹꾹 짓눌렀다. 인상을 구기며 고민하는 척을 한다.
한쪽 눈은 게슴츠레 뜨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궁금하다. 우리 도련님은 녀석이 에리카라는 인간에게 붙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나처럼 눈이 좋아서 여신의 축복이 보이는 것도 아닐 텐데.”
“오호, 확실히 그 눈의 성능이 좋긴 좋은 모양이구나, 축복과 마법도 구분하고.”
여신교(女神敎).
붉은 괴물들, 알티프(Artife)의 종교.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그 뜻에 의해 움직인다. 사람을 습격하는 이유도 오락이나 번식을 위한 것도 있지만, 종교의 계명을 따른다는 목적이 가장 크다.
즉 여신교란, 알티프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자, 그들의 정신인 것이다.
‘뭐, 여신교의 신자가 괴물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백한 괴물의 종교이긴 하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신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신자들이 비밀리에 퍼져 있으며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이라 하면 대표적으로, 1년 후에 있을 아카데미아의 비극이 있다. 내부에 잠복해 있는 여신교의 세력이 급습하기 좋은 적절한 시기와 방어 체계를 무력화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외의 만행들도 대단하지만 우선 이 정도로만 언급하겠다. 그들을 짧게 설명하자면.
이 세계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절대악.
공교롭게도 내가 이 세계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는 멸절시켜야 하는 적이다.
이번에 에리카 주위를 얼쩡거리는 목표물도 그 종교의 신자로, 인간이지만 여신의 추종자인 녀석 중 하나로 여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
축복은 알티프 이외의 종족이 여신교를 택했을 때 하사받는 권능.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달리 발현되는 이 매력적인 힘을 얻기 위해 괴물 쪽에 붙는 녀석들도 다수 있는 상황이다.
“놈들이 이곳저곳에 있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걸 발견하는 건 별개의 일이지. 그게 힘드니까 골머리를 썩고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지금 나이아스는, 그렇게 꽁꽁 숨어 있는 여신교의 신자를 어떻게 별다른 증거도 없이 꼬리를 잡을 수 있었는지를 묻고 있는 거다.
내 주변 인물들은 궁금증도 참 많다.
모든 걸 말해 줄 수 없는 내 입장은 생각도 안 하고.
“보이진 않아도 알 수 있다. 내 가설이 맞았다면 녀석이 그렇게 움직일 시기일 테니까.”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평화를 흉내 내는 때란 말이다. 게다가 네가 말했듯, 내가 그 녀석을 볼 수 있었다면 너를 활용하지도 않겠지.”
“으으으음. …뭐 됐어! 도련님이 특이하다는 거야 처음 본 날부터 알았으니까. 또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여간 비밀이 많은 인간이란 말이야.”
나이아스가 활발한 남자아이처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는다.
심심할 틈은 없어서 좋다는 말도 이어 붙인다.
“인간이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데, 참 인간은 어렵게 사는 거 같아. 그 리암이라는 수컷이랑, 에리카라는 암컷이랑 도련님을 감시하려 했잖아? 근데 또 도련님은 그 녀석을 감시하고. 왜들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그냥 무력으로 제압해 버리면 될 텐데.”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될 일이었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나이아스는 또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지, 바닥에 가부좌하고 앉은 자세가 기울어진다.
이 녀석에게 뭔가를 제대로 말해 준 적은 없으니 부족한 머리로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을 테지만.
“머리 아프니까 생각하는 건 그만둘래. 어차피 도련님의 예상보다 결과가 빨리 나오게 된다며? 난 그 순간을 즐기면 되지!”
나이아스의 말대로다.
내가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원만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제 남은 건 해당 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
얼마 남지 않았다.
녀석은 반드시 미끼를 문다.
그리고 그때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낚아챈다.
***
“알겠어…. 오늘 저녁 말이지.”
“그래, 저녁에 보자꾸나.”
슈겐하르츠 녀석.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포트레트가의 차녀.
포트레트 트로아 에리카는 최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이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주마다 한 번씩. 식사 약속을 제안한 지 3주째 되는 날. 저번에 말했던 대로 슈겐하르츠는 이번 세 번째 점심 약속을 저녁으로 미뤘다.
‘예전보다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슈겐하르츠와 자신은 사이가 좋지 않다. 약혼자라는 건 서로에게 족쇄일 뿐이다. 이렇게 된 것도 다 그 녀석 탓이지만.
그가 자신을 싫어했고 밀어냈기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으며. 지금의 관계가 된 것이다.
자신이 그를 싫어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슈겐하르츠도 자신을 싫어해서 서로 엮이고 싶지 않을 텐데.
그런데 도대체 왜.
‘왜 이런 연기를 시키며 엮이려 드는 거지?’
오랜만에 그 녀석을 만나 춤을 춰야 했던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그때부터 녀석은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슈겐하르츠가 걸었던 불쾌한 귓속말.
⎯에리카. 큰 소리 내지 말고 들어라.
나는 앞으로 너에게 대략 열 번 정도, 그 이하일 수도 있지. 동일한 시간, 동일한 내용의 제안을 할 것이다. 네가 질색할 만한 것으로 말이다.
너는 그 제안을 솔직하게 거절하면 된다. 어차피 네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확실히 해야 하기에 말한다.
내 제안을 계속 거절해라. 그러나, 내가 갑자기 처음 제안과 다른 안을 내민다면.
‘받는 척’을 해라.
받는 척. 어째서?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가?
왜 그래야 하는지 도저히 감도 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아무런 까닭 없이 이런 귀찮은 일을 할 만한 녀석이 아니다.
그리고 무도회장과 연구실에서 마주한 그 눈빛.
마치 진심으로 자신을 위한다는 그 가증스러운 눈동자.
거짓임을 알지만, 그때의 슈겐하르츠의 눈은. 이제는 잊은 줄 알았던, 예전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다.
“…짜증 나.”
슈겐하르츠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질색이다. 녀석과는 엮이고 싶지 않으며 될 수 있으면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다.
하나, 그와 자신이 약혼 관계인 것은 현실이었고. 자신이 할 일이 어렵지 않다. 불이익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득이지.
마지막에 슈겐하르츠는 이 안을 따라 준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10카티아(Cattia)를 준다고도 했다.
수석인 녀석이 현재 가지고 있을 카티아는 20. 제안으로 건 10카티아면 한 달에 줄 수 있는 카티아의 최대치. 녀석이 가지고 있는 절반의 지분을 건넬 셈이다.
정식으로 건넬 수 있는 수단은 없으니 등급전을 통해서 줄 것이다. 그렇게 자존심 강한 녀석이 자신의 전적에 일부러 패배를 남긴다? 믿기 힘든 일이다. 계약을 한 것도 아니니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
하지만.
악덕한 놈이라도 치졸한 놈은 아니다.
10카티아라.
클래스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초반에 무시할 수치는 아닌데.
이걸 별것도 아닌 일의 입막음과 약간의 거짓으로 지불한다니.
‘뭘 꾸미고 있는 거야.’
자신이 할 일은 단순하다.
단순히 저녁 약속을 받아들이겠다는 말만 하고 가지 않으면 되는 간단한 일.
이것도 그의 이득과 연관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이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여기서 만약 당하는 꼴이 된다면 앞으로 그의 앞에선 어떠한 대항도 의미가 없는 행위이겠지.
“에리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아, 밴틀로. 아니야. 별일 없었어.”
복도를 걷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선한 인상의 남자. 자신의 몇 없는 친구, 밴틀로. 그가 듣던 수업도 같은 시간이니 끝나고 온 것 같다.
그가 이 정도로 말하는 걸 보면, 지금의 인상이 사나워 보이긴 한 모양이다.
“걱정되네…. 에리카, 몸 상태가 안 좋은 거면 일찍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어때?”
“괜찮아. 고작 이 정도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
“힘들면 말해. 내가 업어서라도 데려다줄게.”
“너 이따가 전공 오후 수업 있잖아.”
“수업 시간은 곤란하지만 그 전이라면….”
“말만이라도 충분해.”
아무리 슈겐하르츠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대외적으로는 되도록 숨기고 있다.
그는 우리 사이를 알고 있으니 더욱, 그런 눈에 띄는 행위를 할 리 없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겉치레. 그런데, 이런 따뜻한 겉치레 한마디가 왜 이렇게 와닿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언제든지 말해 줘. 오랜 친구로서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참 고마운 친구다.
누구와는 다르게 자신의 모난 성격을 받아 주니까. 바르간과 사이가 좋지 않아진 뒤로 만난 꽤 오랜 친구이지만 지금까지 그와 한 번도 싸우는 일이 없었다. 그는 뭘 하든 항상 자신에게 맞춰 줬다.
그런 밴틀로가 하는 말이다. 뭐가 됐든 선한 의도로 말하는데 너무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그땐 민폐 좀 끼치도록 할게.”
…….
문뜩 웃고 있는 밴틀로와 과거의 그 녀석이 겹쳐 보인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왜인지 모르게.
그 녀석이 갑자기 돌변하지 않았다면.
혹은 그 돌변조차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속이 깊었더라면.
지금의 이런 관계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파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었을까.
‘…아니, 그럴 일은 없어.’
정신 차리자.
그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똑똑히 기억한다.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아 통증을 호소하는데, 뭐? 녀석이 달라져? 웃기지도 않는 말이지.
녀석은 달라진 게 아니라, 원래부터 이런 놈이었던 것이다.
에리카는 욱신거리는 가슴의 통증을 냉소로 씹어 넘겼다.
에리카의 심장에는 바르간이 박아 놓은 과거의 칼날이 아직까지도 그 예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