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19)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19화(319/350)
주인을 잃은 술식이 깨져 나간다.
혼란으로 가득찬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텅빈 무대에는 바르간만이 고적하게 서 있다.
“…….”
헤일리온의 잔상이 흩어진 곳을 바라보는 바르간.
그는 승자의 미소를 짓지 않았다.
고인을 기리는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지우고 사고와 육신을 정비한다.
영웅과의 전투로 인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제야 전장의 소음이 제대로 들리기 시작하는군.”
착마를 변경한 바르간. 뛰어난 자가회복 능력을 갖춘 유니를 입었다. 너덜너덜해진 바르간의 몸은 빠르게 수복을 이어 간다.
지이이잉—!
폭식은 무서울 속도로 바르간의 마나를 먹어 치운다.
이번 전투로 인해 마나 전체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가미긴 토벌 당시 아카데미아를 이동시켰던 때보다 더 많은 마나의 양이다.
헤일리온과의 격전은 그 정도로 강렬했다.
“이걸로 심판 무구가 두 개인가.”
바르간이 차고 있던 ‘영광의 링’의 색이 검게 변했다. 헤일리온이 지니고 있던 심판무구 역시 사라져 힘이 이양되었다.
그 전에도 등외품이었던 영광의 링은 폭식과 마찬가지로 터무니없이 강력한 유물이 되어 버렸다.
즈으응—.
바르간은 시험 삼아 마나를 운용했다.
전이 마나의 출력이 대략 1.2배였거늘. 현재는 2배에 가깝다.
생명의 향수와 함께 사용하면 기본 마나 출력의 4배. 그 상태에서 폭식마저 사용하게 되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을 정도의 출력이 나온다.
‘대신 사용할 때마다 몸이 작살나게 되겠지.’
유물은 사용자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어 주지만 안정성을 보장해 주는 건 아니다.
강한 힘에는 반드시 강한 부작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위험성을 떠안아야만 소설 속에 존재하는 정상급 존재들과 겨룰 수 있다.
빠자작—. 채앙—!
이윽고, 바르간을 둘러싸고 있던 헤일리온의 고유술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바르간을 향해 날아오는 활.
그리고 한 명의 검사.
한편, 이를 막기 위해 두 명의 대주교가 나타난다.
『끼야아아아아악—!!』
고막을 찢을 듯 터져 나오는 음성. 대주교 시클라멘의 폭음이 활을 막아 내고, 검사의 급습과 맞부딪히는 건 자색의 번개가 흐르는 창이다.
『카하하학! 엄청난 업적을 이뤘구나, 바르간! 헤일리온을 죽이다니!』
대주교 블뤼란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이빨을 전부 보이며 호방하게 웃었다.
시클라멘 역시 마찬가지다 잔뜩 기세가 올라 평소보다 음파의 위력이 높다.
『믿고 있었습니다, 집행관님!』
『시클라멘!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르간이 죽는 게 아니냐고 안절부절못하던 녀석이 말은 잘하는구나!』
『브, 브브 블뤼란스 님, 무슨 소리 하시는 거예요? 장난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집행관님께서 오해하시잖아요.』
『장난은 무슨. 카하하하!』
카앙—!
검사를 밀쳐 낸 블뤼란스.
창을 잡고 있는 손이 얼얼한 것을 보니 검사의 실력이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검사는 목의 핏줄이 올라올 정도로 화가 나 있다.
“바르간…! 연기하지 마라!”
“…크샤놀인가. 얼굴을 직접 보는 건 3년 만이군.”
“나는 믿지 않는다. 네 꾀일 게 분명해! 헤일리온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놓고서 죽인 행세를 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은 거냐!”
오랫동안 헤일리온과 함께하며 그를 따랐던 크샤놀은 헤일리온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껏 없을 정도로 분노한 그.
바르간을 당장이라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추하군. 고인이 된 내 스승님께서 알게 되면 슬퍼하실 거다.”
“뚫린 입이라고 어딜 함부로…! 그 더러운 입으로 헤일리온을 스승이라고 부르지 마라! 우리를 배신하고 인류를 배신한 네게 그렇게 부를 자격 따위는 없다!”
크샤놀은 이성이 날아간 듯 보였다.
그런 그의 눈에 똑똑히 새길 수 있도록, 바르간은 영광의 링을 들어 올렸다.
“이래도 아직 현실 파악이 되지 않는 거냐.”
“…그, 그건. …심판무구?”
바르간이 소유하고 있는 심판무구는 지팡이 하나뿐.
대주교들의 수와 현재 심판무구의 소유자들을 고려했을 때도 그가 한 개를 더 들고 있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헤일리온이 죽은 게 아니고서야 말이다.
“…가, 가짜다! 가짜가 분명해!”
“언제까지 부정만을 이어 갈 셈이냐. 영웅 헤일리온은 내 손에 죽었다. 어디 그뿐인가.”
크샤놀을 조롱하듯 빙그레 웃음 짓는 바르간.
그 뜻을 이해한 시클라멘은 빙그레 웃으며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내뱉었다.
『헤일리온이 죽었다—!!』
전장의 소음으로 시끌벅적한 토즈캄 평아를 단번에 장악해버린 시클라멘의 외침.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전장에는 정적이 흘렀고.
사태를 파악한 여신교의 세력은 포효를 터트린다.
『크하하하학! 헤일리온! 헤일리온이 죽었다!』
『학살하라! 인간들을 죄다 찢어 죽이고 능욕해라!』
『영웅이 죽었다! 두려워할 것 따위 아무것도 없다!』
『집행관님께서 적의 수장을 쓰러트렸다! 남은 건 승리뿐이다!』
악마들의 웃음소리에 전율하는 전장.
헤일리온이 이끌고 있던 병사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질려 버렸다.
영웅 헤일리온. 그 이름이 가지고 있던 무게만큼, 인류에게로 기울어져 있던 승전의 무게 추가 나가떨어지게 됐다.
바르간에 의해 전장을 완전히 지배당한다.
“나 개인의 승리는 곧 이번 전장의 승리다.”
바르간은 그리 확언했다.
***
신목 위그드라실이 자라 있는 다렉 연합국의 병원.
그중에서도 중환자들만 모여 있는 회복실에는 용사 샤를로테가 있다.
“…이렇게 자주 오지 않아도 돼. 네 할 일들만 해도 바쁠 텐데 미안하잖아.”
“아니에요. 시간이 나서 들르는 거예요.”
“전쟁 중인데 시간이 있을 리가. 틈이 나면 나를 만나러 올 게 아니라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체력을 회복해야지.”
“…제가 좋아서 오는걸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진심으로 좋아서 수발을 들어 주는 사람은 아마 너 말곤 없을 거야. 알리시아.”
알리시아는 종종 샤를로테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
그녀가 의식 불명에서 깨어난 지 이제 1년. 과거 생기 넘치던 샤를로테가 현재는 남의 도움 없이는 보행조차 어려운 신세다.
“……토즈캄 평야 전투에 대해서 들었어. 대패했다고 했지?”
“…네.”
“눈 뜨고 들은 소식 중에 최악의 소식이야. …아,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최악은 아니었네.”
샤를로테는 씁쓸하다는 듯 웃었다.
헤일리온의 죽음 역시 커다란 충격이었으나, 더 충격이 컸던 건 바르간이 여신교에 들어가 최악의 범죄들을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알리시아, 네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네가 바르간을 조우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봐.”
“…….”
“전쟁은 이미 시작됐고, 그는 대주교… 그것도 집행관에 올랐지. 네가 위명을 높인 만큼, 그는 악평을 높였어.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되겠죠.”
무덤덤하고 조용한 알리시아의 반응.
샤를로테는 괴로운 마음을 참아 내고 억지로 말을 이어 갔다.
“헤일리온은 그야말로 인류의 영웅이자 빛이었어. 그리고 그 빛을 잇고 있는 자는 제자인 너야.”
“…….”
“…그래서 나는 너에게 가혹한 말을 해야만 해. 너는 인류에게 남은 몇 안 되는 희망이야. 바르간을 상대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물이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괴로워하는 샤를로테.
그녀는 주먹을 꽉 쥐며 이렇게 되어 버린 상황에 분노했다. 이 이후의 말들을 입에 담을지 말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
알리시아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샤를로테의 심정을 이해해 대신 입을 열었다.
“잠시 지난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게요.”
과거와는 달리 감정이 상당히 억눌러져 있는 알리시아의 목소리.
그녀는 말했다.
“리엘 님께서 저를 찾아오셨어요. 무척 오랜만에 뵙게 된 거였죠.”
“리엘이라면…. 슈겐하르츠 트로아 리엘? 바르간의 쌍둥이 여동생 중 언니?”
“…네. 아름답게 자라셨더라고요. 지금은 리케리온에 입학하셨죠.”
“근데 그 애가 너를 왜…? 네가 슈겐하르츠가와 연이 끊어진 게 4년 전 일이잖아.”
“제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시더군요.”
항상 틱틱 대며 바르간과 얼굴을 붉히기 일쑤던 사녀 리엘.
남을 업신여기는 게 일상인 그녀가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며 알리시아에게 부탁했다.
“뭘 부탁한 건데?”
“……빌어먹을 오빠 새끼를 막아 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바르간이 슈겐하르츠를 떠나가 온갖 악행를 저지르고 있는 지금도, 리엘은 그를 ‘오빠’라고 칭했다.
그 개 같은 망나니 놈도 어쨌건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건 사실이라며 슈겐하르츠가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주장한 채 교회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었다.
“…그럼, 그게 네 결심이라고 봐도 될까?”
머지않은 전장에서 바르간과 조우하게 될 알리시아.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테는 그녀의 힘이 되어 주지 못해 비참한 기분이었으나, 직접적으로 해 줄 수 있는 일 따윈 없었다.
이미 알리시아는 자신 따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고.
본인은 몸 하나 제대로 간수하기 힘든 퇴역 용사였다.
그렇게 잠시 정적이 감도는 사이 회복실의 문이 열렸다.
“알리시아,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바로 일어날게요.”
알리시아를 찾아온 용사. 준용사이자 인류의 희망인 그녀의 일정을 책임지는 신입이다.
알리시아는 누워 있는 샤를로테를 향해 간단하게 묵례를 취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떠나가기 전, 샤를로테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방금 전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샤를로테는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알리시아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고마워요.”
그 말을 끝으로 회복실을 나선 알리시아.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가자 곁을 따르는 신입 용사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현재 중앙교회는 둥지 3체와 알티프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입니다. 또한, 이곳 다렉 연합국까지 분대의 세력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견제를 하곤 있으나, 더 이상은 속도를 늦추는 것도 힘듭니다.”
“적의 주요 전력에는 변함이 없나요?”
“예. 이동형 둥지 2체. 대주교는 크로셀과 베리스. 그리고 살레오스로 셋입니다.”
대주교 살레오스.
알리시아의 친언니인 그녀가 위그드라실을 해하기 위해 다렉 연합국으로 향하고 있다.
“추기경들의 움직임은 아직도 잡히는 게 없나요?”
“…그렇습니다. 다만 추측으로는 벨레드의 권능이 있어 기습이 용이하니 우선은 몸을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병사들의 상태는 어때요?”
“헤일리온의 죽음이 알려지고 사기가 급격하게 저하되었습니다. 성녀 디피엘리아 님과 에밀리 님께서 힘을 내고 계시긴 하십니다만… 헌터 출신의 용병들 중에서 슬슬 탈영병이 발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점차 악화되어 가는 상황.
이 흐름을 반전시킬 무언가가 필요하다.
알리시아는 눈매를 날카로이 하며 지시했다.
“성제님에게 직할대의 출전을 허가 받으시고 트리센나에게 연락을 취하세요.”
“그 말씀은… 이곳으로 향하는 적들의 분대를 먼저 치겠다는 뜻입니까?”
“이대로 있으면 진퇴양난에 빠질 테니 수를 써야죠.”
알리시아의 뜻에 흔들림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신입 용사는 침을 꿀떡 삼킨 채 물었다.
“알리시아도 출전하시는 겁니까?”
“네. 출전합니다.”
준영웅 알리시아.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전장에 발을 디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