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2)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2화(32/350)
소설만 읽었을 적에는 몰랐다.
글이 독자에게 주는 정보는 생각보다도 제한적이다. 나열된 활자의 조합은 그 세계의 일부분만을 보여 준다. 분명 독자가 모르는 이야기. 배경. 각종 현상이 일어나며 톱니바퀴처럼 굴러가고 있음에도.
작가가 제공하는 시야로, 언어로만 봐야 하니까.
악역영애 에리카.
그녀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
바르간의 약혼녀이며, 작은 체구, 표독스러운 말투, 특기. 심지어는 그녀의 집안에 관한 내용도 나타나 있었다. 에리카의 정보가 모두 담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그녀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에리카의 특징 중 하나, 악역영애.
그녀가 어째서 악역영애의 포지션을 잡게 됐는지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어째서라니. 그런 설정이니까. 애초에 공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주인공도 아니고 히로인도 아닌데.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인물이 어째서 그런 성격, 역할을 맡게 됐는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다.
이 소설에 들어왔고, 깨닫게 된다.
바르간에 빙의된 순간의 감각을 기억한다.
그가 기억하는 첫 순간부터, 당시 넘기고 있던 책에 적힌 글귀까지. 모든 ‘경험과 감정’이 나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당시 느꼈던 느낌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한순간에 업데이트된 것만 같은 감각을 전했다.
이때 바르간의 약혼녀이자, 일종의 소꿉친구인 에리카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특히나 많은 양이 유입됐는데.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되고, 소설에 적힌 그녀의 정보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체감했다.
현시점의 그녀는 어린 시절과 성격이 다르다. 당연한 말이다. 사람 성격은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것이 절반, 외부적인 요인이 절반이니까.
그러나 바르간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나와 소설을 통해 그녀를 알게 된 내가, 그녀를 떠올리며 이상하다고 느낀 까닭은 과거와 달라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미래와 다르다.
불과 몇 개월 후에 보일 모습과 지금은 성격이 아니라 성질 그 자체가 다르게 여겨진다.
잠깐 언급하자면. 이 세계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떠받드는 종교가 있다.
「위그드라실(Yuggdarsill)」
신을 뜻하기도, 종교 전체를 뜻하기도 하는 단어.
전 세계 어디에 있어도 보일 것 같이 거대한 나무를 숭배하는 종교다. 그 외의 종교는 전부 이단이며. 믿어서는 안 된다.
용사의 중축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는 전부 유일신인 위그드라실을 숭배하기 위한 기관이다.
나무의 크기가 주는 압도적인 존재감과, 제공해 주는 대량의 고품질 마석, 주변의 토지를 풍요롭게 해 주기까지 하니 신봉하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다수의 ‘사람들’에 한정된 말이며 소수가 존재하고. 생명체 전체를 뜻하는 건 아니다.
위그드라실과 척을 지고 있는 거대한 하나의 집단. 알티프의 종교.
그게 바로 여신교(女神敎)다.
쉽게 말해.
사람 측에 종교 하나.
괴물 측에 종교 하나.
이런 대립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갑자기 종교 이야기를 한 데는 에리카가 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문인 포트레트가는 신실하기로 유명한 집안이다. 에리카 또한 어렸을 적부터 용사 훈련을 받음과 동시에 종교학을 공부했다.
어린 시절의 그녀를 직접 봤던 경험을 토대로 판단하자면.
그녀의 믿음에 거짓은 없었고.
그녀도 그것을 자부심으로 여겼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
소설에 적혀 있는 에리카는 유일신, 위그드라실을 믿는 ‘연기’를 하는 소녀였는데.
그녀는 괴물들의 신을 숭배하며, 아카데미아 내부에서 그들의 활동을 도왔다.
이해하기 어렵다고 표현한 것은 단순히 그녀가 인간의 신이 아니라 괴물의 신을 섬겼기 때문이 아니다.
예전에는 위그드라실, 혹은 아카데미아 내부에 스파이가 한 명 있을 뿐이고, 악역이라는 설정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 넘겼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녀의 발자취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다.
그녀가 바르간에게 보인 과거의 모습이 전부 거짓이라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에리카와 마지막으로 만난 게 1년 전.
새롭게 새겨진 기억으로는 그녀가 이단을 숭배하는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약혼자라는 사실을 이용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마찬가지.
가능한 경우는 두 가지.
지금까지 그녀가 철두철미하게 숨겨 온 것이거나, 이후의 전개 동안 변하게 된 것.
소설에서 나온 그녀의 말, 행동 등을 분석하며 바르간을 통해 알게 된 과거와 비교해 봤다. 그렇게 이끌어진 결론으로.
나는 확률이 높은 후자에 걸어 보도록 했다.
에리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마법이나, 그녀의 집안, 나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그녀에 대한 확실성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내가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고뇌했다.
이후의 전개가 진행되면서 그녀가 변하게 됐다면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항상 두뇌 한구석에 넣어 두다가 정말 우연히도, 난 ‘녀석’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별다른 재능도, 외모도 눈에 띄지 않는 조연 중 하나인 줄 알았다. 소설에 빙의하면서 새로이 알게 된 인물. 그게 전부였다.
그러다, 문뜩 에리카를 추종하던. 그녀와 함께 이단을 숭배하던 어떤 이와 해당 인물이 하사받은 축복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이름은 모른다. 생김새도 모른다.
적혀진 정보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말투.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았다.
초반에 에리카의 주위에 붙어 여신교의 사상을 전파하는 녀석이 있었던 것이다. 지독하고 끈질긴 놈이다.
에리카의 마음에 나 있는 틈새를 이용한 것일까.
내 가설이 옳다면 녀석은 이 시기엔 한창 에리카의 주위를 돌아다닐 터이다.
아직은 학기의 초반.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를 이용해 자신의 믿는 종교를 전도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추잡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더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녀석을 끌어내기로 정했다.
그래서 미끼를 던졌다.
밑 작업을 착실히 이어 가며 녀석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파악했다.
그리고 모든 게 확실해진 건, 에리카가 연구실에 온 날.
⎯예에?!
알리시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나이아스가 미리 말해 둔 대로 나에게 언질을 줬고. 나는 에리카와의 약속을 바꿔 계획을 본격적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유독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던 것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녀석의 주의를 끌기 위함이었다.
나이아스는 녀석을 볼 수 있다. 나이아스가 가진 고유 능력,「본질을 보는 눈」 앞에 녀석이 빌린 힘은 무력했다.
결과적으로, 녀석은 나이아스가 의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기야 엘리트 출신인 에리카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그 녀석이 알아차릴 일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니 확인을 한 것이었는데 예상대로였다.
그날 이후, 나이아스를 통해 녀석을 계속 관찰할 수 있었고 녀석은 짜여진 것처럼 그대로 움직였다. 특정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처럼.
녀석의 실체를 알았으니 낚싯대를 들어 올리는 것을 조심할 필요는 없다.
빠르게 움직인다.
과감하게 잡아끈다.
녀석은 반드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도련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시간이 돼서 나가려는데 연구실에 있던 알리시아가 말을 걸었다. 나이아스가 의태한 게 아닌 당사자이다.
주변에는 완전히 녹초가 된 에밀리와 핀.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세레나가 보인다.
“약속이 있어서 말이다. 나머지는 너와 세레나 주도로 진행하면 된다. 클래스전이 며칠 뒤이니 내가 없다고 해서 쉬이 해서는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 에리카 님을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비슷한 녀석은 온다.”
“비슷한… 으음,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은 찾아뵙지 않고, 내일 아침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보인 알리시아가 인사를 한다.
나는 그들을 두고 걸음을 옮긴다.
에리카.
나의 약혼녀.
나는 지금부터 그녀가 없는, 그녀를 위한 무대를 선보일 것이다.
참여 관객은 단 한 명.
지금쯤 다리를 덜덜 떨면서 수업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릴 그 녀석.
녀석이 스토커인 사실은 확정적이지만 이번 무대는 필요한 연극이다. 함부로 밀고 나갈 수 없다. 녀석은 끄트머리일지라도 대규모 집단에 속해 있다.
‘군중 속에서 숨기를 즐기는 놈들이 말이지….’
아카데미아에 잠복해 모든 것을 은밀하게 움직이는 그 종교가. 자신들의 정체를 알리고 싶지 않을 터.
그럼에도 녀석은 이런 당당한 짓을 하고 있다. 이는 현재까지 녀석이 하는 행동을 주변 인물들에게 숨기고 있다는 방증.
녀석의 스토킹을 아는 인물이 오로지 나 하나. 어떻게 보면 나에게 있어도 좋은 기회다.
그러기 위해선 보는 눈이 적을수록 좋고.
“날이 저무는군.”
주변을 둘러본다.
거리가 어두워져 간다.
조금 있으면 어둠을 밝힐 조명이 켜질 것이다.
***
수업이 끝나길 간절히 바란 한 남자가 있다.
하필 수요일은 그녀와 다른 수업 시간으로 겹치는 날이다. 같은 수업이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도 않았을 텐데.
다행히 약속 시각은 오후 6시 10분.
에리카의 수업도 동시에 6시에 끝나니까 서둘러 가면 늦지 않는다.
사실 수업을 제끼고 그녀 근처에 붙어 있을까 고민해 봤지만.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학생들이라면 몰라도 교수라면 혹여나 존재를 눈치챌 위험이 있다.
더군다나, 아직 지금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포트레트 가문의 여식에게 전도하기 위한 명목이라기에는 위험이 더욱 커서 설득에 무리가 있다.
윗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저지하려 할 터.
그래서 수업을 빠지는 것 같이 계획에 없는 행동은 제한된다. …이미 감정에 휘말리는 실수를 한 번 했기에 더욱이.
지금까지 들키지 않고 잘 진행하고 있었는데 인제 와서 들킬쏘냐.
“…젠장.”
에리카가 거절했으면 좋았을 것을.
계속 단호하게 거절할 것만 같더니, 그녀는 왜 갑자기 그런 재수 없는 멀대 자식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까. 사이가 좋지 않은 거 아니었나.
아직 마음을 전하기에는 일러서 준비하는 과정이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그녀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감이 든다.
수업이 끝나자 남자는 불안함에 달달거리는 다리를 멈추고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약속 장소로 가는 건 아니다.
그 전에 들러서 준비해야 하는 과정이 있다.
여기서는 안 된다. 보는 눈이 많다. 갑자기 생긴 이변에 놀라 존재가 밝혀지게 되면 곤란하다.
가장 가까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기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렇게 짧게 기도를 마치고 준비가 끝났다.
축복이 내려왔다. 비로소 완벽해졌다.
아무에게도 줄 수 없다.
그녀의 친구에게도. 약혼자에게도. 형제에게도. 부모에게도.
어떤 누구에게도.
절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처음 본 순간 느꼈다.
예전부터 꿈꿔 온. 바라 왔던.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이건 운명이다. 거스를 수 없고 거슬러서는 안 된다.
그녀는. 그녀는.
그녀는 ‘나’만의 것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