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36)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36화(336/350)
—수림이 집안이 법조인 집안이잖아. 티는 안 냈는데 그래서 예전부터 성적 때문에 엄청 쪼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몰랐다.
녀석이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언제였더라? 이번 년도 4월이었나? 수림이가 2주 정도 학교 못 나왔을 때가 있었는데 그게 아버지한테 골프채로 맞아서 그랬던 거라고 하던데?
몰랐다.
그저 발길이 끊겼길래 공부에 전념하는 줄로만 알았지 학교를 쉬고 있는 줄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공부 스트레스가 엄청 크긴 했었어. 우리 학교 내신 따는 게 장난 아니었잖아. 양아치들도 한 과목씩은 꽉 잡고 가는 학교인데, 집에서까지 압박을 주니까 버티기 힘들었겠지.
몰랐다.
언제나 세상 물정 따위 모른다는 표정을 짓고 바보 같은 말들만 내뱉기에 속 편하게 사는 녀석인 줄로만 알았다.
—근데 너 수림이랑 같은 반이었을 텐데. …전혀 몰랐어?
“…….”
아니.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녀석의 표정에 져 있는 그림자는 읽어 내는 것 정도는 아주 쉬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깊게 관여하려 들지 않았다.
내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 할 일이 바빴으니까.
내가 올라가기 위해서 필사적이었으니까. 주변 학생들 따위 나를 돋보이게 만들 장치이거나 경쟁자로밖에 보지 못했다.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되었구나.”
이수림의 장례식이 열린 날.
나는 오랜만에 배철만을 만나고 있었다.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하는 겸 근황과 앞으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일에 대해선 언론도 제법 주목할 거다. 대한민국의 민낯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인 만큼 여론도 뜨겁게 타오르겠지.”
“…….”
“그 학생과 어울려 다닌 모양이던데…. 충격이 크겠군. 대화는 이 정도면 됐으니 쉬고 가도록 해라. 빈 방은 많으니 적당히 마음에 드는 곳으로 들어가면 된다.”
배철만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자 나는 물었다.
“…장례식에 가지 말라는 뜻이십니까?”
“엮여서 좋을 게 없어. 안 그래도 너와의 친분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굳이 찾아가 불을 쏘실 필요가 있나. 잠자코 조용히 있어라. 어차피 언론 따위는 냄비와 같아서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게 될 테니, 때가 되면 내가 알아서 처리해 주마.”
“…….”
“시후야,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그 이수림이라는 애랑은 그저 같은 반이라 몇 마디를 나눈 사이일 뿐 따로 연은 없었던 거지. 네가 잘하는 연극이라고 생각해라.”
“…연극이요.”
“그래, 네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연극 말이다.”
배철만의 말은 합리적이고 타당했다.
얼굴이 알려져 있는 내가 이런 사건에 휘말리게 될 경우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 건 피할 수 없는 노릇.
비록 내가 자살로 몰고 간 건 아닐지라도 지울 수 없는 꼬리표가 내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게 되겠지.
어차피 이수림과 대화를 나눈 건 주변에 시선이 없을 때뿐이다. 녀석 이외에게는 전혀 까칠한 면모를 보이지 않았던 내 노력 덕분에 말이다.
게다가 친화적인 이수림의 성격 탓에 녀석과 친분이 있는 학생들은 나 이외에도 많았다. 몸을 감추고 있기 적합한 숲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이해했지?”
탁탁—.
배철만이 내 양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배철만의 손이 딱딱했다. 그 손을 만지면 마치 철로 만들어진 것처럼 차가울 것만 같다.
그는 내가 바라는 지향점.
내가 나아가야 할 길.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울대를 울렸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
배철만의 말대로 언론과 대중은 빠르게 끓어오르고, 빠르게 식었다.
한 학생의 죽음을 오랫동안 가슴 속에 담고 있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소란스럽다. 새로운 사건은 연이어 끊이질 않고 사람들은 눈길을 돌렸다.
그저 교육에 극성스러운 부모가 한 남학생을 죽였다…. 그런 일이 과거에 있었다.
딱 그 정도의 잔열만이 남았다.
“오, 모든 천사들이여! 오, 땅이여! 또 뭔가? 지옥을 더할까? 퉤, 버텨라, 심장아. 근육아 세월처럼 빠르게 늙지 말고 날 지탱해 다오.”
대학에 들어간 나는 대학로의 유명 극단에 들어가 활동을 병행했다.
내 인지도와 학력 그리고 연기력 덕에 더 큰 극단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래서야 주역을 맡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터였다.
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적당한 규모의 극단에서 실전 연습 겸 실력을 쌓았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군대와 대학교 졸업을 한 나는 무대를 전국으로 넓혔다.
내 이름은 웹사이트는 물론이고 티비 뉴스에도 꽤 빈번하게 나왔으며.
배철만의 지원 없이도 풍족한 삶을 영위했다.
대신, 받은 게 있는 만큼 여전히 배철만을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라며 내 모든 재능과 자리가 그 덕분에 있을 수 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나는 빠르게 탄탄대로를 내달렸다.
내가 원하던 성공에 전속력으로 가까워져갔다.
하루, 일 개월, 일 년.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이름과 부는 인간의 욕심과도 같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높아졌고, 내 시간의 가치는 이제 황금덩어리보다 비쌌다.
머물던 곳도 오피스텔에서 고급 아파트로 바뀌었다.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의 고층 아파트. 밤이면 꺼지지 않는 서울의 불빛이 아름답게 빛났다.
흔히 말하는 성공한 인생이었다.
“젊은 시절 내 기억의 수첩에서 적어 놓은 시시껄렁한 기록들, 온갖 책의 격언들, 모든 문구와 감상을 지워 버리고 네 명령만 내 두뇌의 비망록 속에서 홀로 살리라.”
28세의 나.
더는 학업을 병행할 필요도 없어 연기에만 오로지 전념하던 때.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로 나아가 왕성한 활동을 이어 가던 그때의 나는 어딘가 맛이 가 있었다.
몇 백은 족히 하는 귀한 와인은 맛을 잃었는지 물처럼 느껴졌고, 아무리 값비싼 고기를 먹어도 혀가 만족하지 못했다.
입이 고급화가 되어서 그런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에 맹세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 내 감각은 분명 무너져 있었다.
연기에 극도로 몰입을 해서일까? 아니면 잠을 지나치게 줄여서?
뭐가 되었든. 아쉽게도 난 배철만이 기대했던 만큼의 독기와 정신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소리겠지.
내 몸 안엔 여태껏 연기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듯했고, 그 자아가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종종 내게서 무대와 현실의 구분은 사라졌다.
내가 떠드는 곳이 곧 무대였으며 반짝반짝 빛나는 야경의 불빛은 조명이었다.
시끄러운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는 관중의 박수 소리와 같았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대사를 읊었다.
“오, 최고로 악독한 여자여!”
특히나 그날은 정신병원에서 준 약도 먹지 않아 증세가 더했던 것 같다.
베란다로 나선 나는 바람을 맞으며 무대에서 보였던 독백 신을 연기했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시절의 나였다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써 상상도 못 할 일이었을 터지만….
그거 알고 있나? 아파트의 최상층 위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악당, 악당, 웃음 짓는 괘씸한 악당!”
나는 망가져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봤을 때 그랬다.
2주일 전. 무대가 끝난 나를 찾아온 여자의 한마디로 인해,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내 모래성은 완전히 쓰러져 내렸다.
“어머니, 전 당신을 증오하지 않았습니다! 한데 당신은 저를 뿌리 끝까지 잡아 뒤흔드시는군요!”
어머니였던 여자가 찾아왔다.
세월의 주름을 얼굴에 새긴 채 뻔뻔스럽게도 억지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냐는 말과 온갖 쓸데없는 잡설을 떠들어 대더니 곧잘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엄마를 도와줄 수 있겠니?
결국 돈을 달라는 말이었다.
돈, 돈, 돈.
시작부터 끝까지 돈이다.
돈 때문에 나를 버렸고 돈 때문에 나를 보러 왔다.
“당신은 너무 늦었습니다. 너무 늦고야 말았습니다. 그토록 간절히 바랄 적에는 얼굴 한번 비추지 않으셨거늘. 이삭이 다 저물고 나서야 낫을 들고 오십니까.”
나는 지금껏 남몰래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녀가 나를 찾을 수 있게 했다.
보육원에서 배철만의 이름을 빌려 웹페이지에 기사를 올렸을 적에도.
대학교에 진학해 연극 활동을 이어 가며 인터뷰를 했을 적에도.
나는 그녀를 그리워했으며 그녀가 나를 찾아와 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찾지 않았으며 내 마음 역시 무한정하지 않다.
이미 어미를 향한 그리움은 떠나 그 자리엔 온기마저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그동안 억눌러 왔던 혐오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당시 사람이 많은 카페 안에 있었음에도 신경을 쓰지 않은 채 그녀를 비난했다.
“당신의 더러운 피를 이어받은 나 역시 더러운 인간이겠지요.”
그 이후, 나는 곧바로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이 고급 아파트에 스스로를 가뒀다.
시끄럽게 울려 대던 회사로부터의 전화를 꺼 버리고 만남을 거절했다.
…그렇게 술에 진탕 취한 채 감정을 곱씹었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정신력은 술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고, 문뜩 날짜를 확인했더니 칩거한 지 1주일이 조금 넘게 지났다.
내 인생에서 이처럼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시간을 보낸 건 이수림과 대화하던 시절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수림….’
그 멍청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난 개통되지 않은 서브 폰을 켰다.
그러곤 녀석이 소설을 올리던 사이트에 올라가 검색 창에 그 어이없는 제목을 검색했다.
‘있다.’
녀석은 죽었지만 녀석이 남긴 글은 아직도 인터넷 세상에 남아 있었다.
무려 600화가 넘는 장편. 놀랍게도 완결 표시가 되어 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게 삼십 몇 화이니까 그 이후에 꾸준히 적었던 건 맞는 듯했다.
“……”
나는 프롤로그를 눌러 글을 읽기 시작했다.
왜냐고 물으면 미안하지만 적절한 답을 줄 수 없다.
당시 난 의지에 의해서 움직였다기보단 의식에 의해서 움직였기에 나 역시도 알 수 없다.
그렇게 나흘간 줄곧 녀석의 글을 읽었다.
잠도 자지 않고 읽었다.
워낙 많은 활자들을 읽어 왔던 탓에 단문으로 처져 있는 그 녀석의 글은 특히나 빠르게 읽어졌고, 리암의 이야기는 완결에 다다랐다.
‘…그랬구나.’
소설을 끝까지 읽은 나는 비로소 당시의 이수림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비극으로 흘러가는 전개와 망가져 버린 주인공 리암. 누구라도 욕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배드 엔딩.
‘너도 외치고 있었구나.’
이수림은 소설을 통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내가 미디어를 통해 어머니였던 여자에게 울부짖었던 것처럼, 이수림은 도와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소설로 표현해 결국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고 만 것.
어쩌면 난 유일하게 녀석을 도와줄 수 있었던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콰직—!
그 직후, 난 베란다에서 몸을 투신했다.
…근데 참나, 어이가 없지.
나쁜 짓을 워낙 많이 해서 지옥으로 갈 줄 알았는데 내가 그리 욕하던 녀석의 소설 속에 들어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