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43)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43화(343/350)
알리시아가 헤일리온의 제자가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
헤일리온은 당일의 고된 수련을 마친 알리시아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알리시아 학생, 예전에 리케이온에서 제가 알리시아 학생의 저주 문양을 살폈던 거 기억나요?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알리시아가 아르하와의 대결에서 패배해 양호실에 옮겨진 후, 헤일리온은 살며시 알리시아를 찾았고 그녀를 덮칠 여신교 신도를 살해했다.
당시 헤일리온은 알리시아가 입고 있던 옷의 목 부분을 늘려 바르간의 저주를 확인하기도 했는데, 알리시아에게 있어 다소 수치스럽기도 하고 여러 의미로 놀랐던 경험인지라 잊을 수 없었다.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말하는 건데, 사실 그때 알리시아 학생에게 ‘매혹의 저주’는 걸려 있지 않았어요.
—……네?
—그런데 이상하죠? 재판에서는 바르간 학생이 알리시아 학생에게 매혹의 저주를 걸었다고 밝혀졌잖아요?
—…….
—알리시아 학생을 보다 다루기 편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면… 매혹의 저주는 알리시아 학생에게 처음 저주가 각인되었을 때 포함되었을 테고, 제가 확인했던 그 시점에도 당연히 있어야 했어요.
알리시아에게 트라우마와도 같은 재판의 날.
당시 바르간이 밝혔던 죄목 중 하나를 헤일리온은 너무나 태연하게 입에 올렸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때의 알리시아 학생에게는 매혹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어요. 참 이야기가 묘하죠? …아, 이건 제 용사 랭킹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요. 그때 제법 꼼꼼하게 살펴봤었거든요.
—…자, 자, 자 잠시만요. 다시 말해, 당시 도련님… 아니, 바르간이 제게 매혹의 저주를 건 것은… 리케이온과의 기말고사를 치른 이후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네, 그렇게 돼요.
—그럴 수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아요. 1학년 기말고사 이후라면 도련… 바르간이 아카데미아를 붕괴시킬 시점과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데 굳이 그 시점에서…… 아!
알리시아는 바르간이 저주를 강화시킨다고 했던 때를 떠올렸다.
처음 저주를 걸 적과는 달리 정확히 어떤 저주를 어떻게 강화한다는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해 주지 않았던 그.
당시 그는 저주의 보완성을 높이기 위해 그랬다고는 했지만… 과연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보아 하니, 뭔가 생각난 게 있는 거 같네요. 혹시나 해서 묻는데 제가 알리시아 학생의 문양을 살핀 사실을 바르간 학생에게 전하지는 않았죠?
—…네, 전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거의 확실하게 알리시아 양이 짐작하는 그 시기에 매혹의 저주를 추가로 걸었다고 봐야겠네요. 바르간 학생은 재판장에서 거짓을 뱉은 거예요.
—거짓… 대체 왜 그런….
—글쎄요. 저는 탐정도 아니고 바르간 학생도 아니라서요. 다만, 결과만을 건조하게 돌이켜 봤을 때, 당시 재판장에서 바르간 학생이 알리시아 학생에게 매혹의 저주를 걸었다는 게 드러나자 긍정적이게 술렁이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악화되었어요.
—…….
—게다가, 바르간 학생의 최측근이던 알리시아 학생은 ‘피해자’라는 인식이 박히게 됐죠.
거기까지 대화를 이어 가자 애써 억눌러 왔던 바르간을 향한 믿음이 다시금 싹을 폈다.
바르간이 했던 말, 행동, 그리고 반응….
전부터 이 모든 걸 잊지 않고 세심하게 되짚던 알리시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르간을 모셨던 그녀는 동시에 가장 근접하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여인이었다.
—도련님…….
바르간과 알리시아가 위치한 밤의 숲.
알리시아의 눈 밑에 투명한 물이 고였다.
곧이어 그녀의 뽀얀 볼을 타고 달빛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도련님. 그 이후, 전 도련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몇 번이라도 곱씹으며 행동했습니다.”
“…….”
“아르볼 프루탈을 여기까지 이끌어 왔던 것도, 성제의 직할대에 들어가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던 것도…. 전부 도련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도련님께서 제게 바라신 상황을 만들고자 힘쓴 결과입니다.”
“…….”
“도련님께선 제 한 몸을 바쳐 악인이 되시어 바엘을 죽이시고 여신교를 뒤흔드셨습니다. 그러니, 이젠… 이젠 됐지 않습니까? 도련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일이 진행되었으니 이젠 돌아오셔도 되지 않습니까?”
“…….”
“부디 괴로운 거짓은 그만두십시오. 더 이상 도련님께서 모든 부담을 짊어지시는 것도, 세상의 미움을 받아 가며 고독하게 버티시는 것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습니다.”
알리시아는 자신의 진심을 토로했다.
바르간은 가만히 그녀의 감정에 귀 기울였다.
“제가 도련님을 변호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랬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제가 하나하나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들도… 단번에는 아닐지라도… 서서히 도련님을 받아들여 주지 않겠습니까?”
“…알리시아.”
“만약 돈이 필요하시다면 제 모든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최초로 계약을 맺었을 때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제 모든 미래 가치는 오로지 도련님에게 종속되어……!”
“알리시아.”
바르간은 알리시아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이어서 억지로 붙잡아 거칠게 자리 잡고 있던 바르간의 마나가 대기에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알리시아 역시 몸과 검에 발하게 했던 성스러운 빛을 몰아냈고, 숲에는 도로 어둠이 찼다.
알리시아를 바라보는 바르간은 웃고 있지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아무리 길게 떠들어도 변하는 건 없다. 어떤 목적이 있었다고 한들 내가 저질렀던 죄가 변하는 것 역시 아니지.”
“…….”
“네가 말한 대로, 나로 인해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마을과 도시는 재가 되었고 가족을 잃은 고아들은 밤새 울음을 터트리며 부모를 찾아 헤맨다.”
“…….”
“강제로 알티프가 된 이들의 운명은 더욱 비참하지. 자아와 자유를 빼앗긴 채 그저 인간을 살해하는 괴물이 되었으니 아마 죽은 뒤에도 나를 원망할 거다.”
“하, 하지만 그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도련님의…! 게다가 도련님께선 알티프에서 인류로 되돌리기 위한 치료제의 개발을 진행하지 않으셨습니까!”
알리시아가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도 바르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아닌 디피엘리아의 결과물이다.”
“도련님…!”
“알리시아, 같은 말은 반복하게 하지 마라. 난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장본인이다. 개인의 감정에 의거해 희대의 악인인 나를 포장하는 건 용사인 네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인가?”
“…….”
“넌 나로 하여금 또다시 피해자들에게 역병과도 같은 공포와 고통을 선사할 셈인가?”
“…….”
“지금의 네 위치를 생각해라. 너는 더 이상 슈겐하르츠가의 시종 알리시아가 아닌, 인류의 희망 영웅 알리시아다.”
바르간의 일침에 알리시아는 침묵하고 말았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눈물이 연이어 쏟아질 것만 같아 함부로 입을 열기가 조심스러웠다.
바르간은 이제 대화가 끝났다고 여겼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사실은 입을 열어 대꾸를 하는 것도 지금의 바르간에게는 용이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도련님께서 멸하신 생명의 수만큼 제가 살리겠습니다.”
알리시아는 미련과 애탄을 가득 담은 문장을 내뱉었다.
마치 바르간이 가지 못하도록 옷 끝자락을 잡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다.
“도련님께서 입히신 피해만큼, 제가 보상하겠습니다….”
알리시아의 음성이 물기에 푹 젖었다.
그녀의 가는 목울대는 여린 잎처럼 애처롭게 떨렸다.
“도련님께서 지으신 모든 죄를… 제가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
“그러니 제발…. 남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 곁에 머물러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알리시아. 그건 사사로운 감정—”
“—사랑합니다.”
지금껏 이 한마디를 하지 못했던 알리시아.
주변의 시선과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신분, 이제는 영웅과 악인이라는 명확한 차이까지 존재했음에도 알리시아는 진심을 이었다.
“계속해서 도련님을 사모했습니다. 도련님께서 여신교의 신자로 활동하실 적에도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끝내 사모하였습니다.”
아무리 떨쳐내 보려고 해도 도무지 지워지지 않던 그 마음.
알리시아는 분순물이 섞이지 않은 형태 그대로 바르간에게 드러냈다.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사실은 당장에라도 검을 내려놓은 채 도련님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습니다. 도련님의 다리를 대신해 몸을 지탱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싶습니다….”
“…….”
“이런 제 발언과 모습이 도련님께서 정의 내리시는 용사의 개념과 상이하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전 도련님께서 기대하시는 용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공익만을 생각하고 인류만을 위하는 위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알리시아의 사과에 바르간의 현세에서의 자신이 비쳐 보였다.
박시후 역시 배철만이 기대하는 인물은 될 수 없었다. 한없이 냉철하고 계산적이며 목적만을 추구하는 인간이 되지 못했다.
“비록 이런 제가 한심하고 못미더우실지라도… 모든 게 제 추잡한 욕심에서 비롯되었을지라도…. 제 하나뿐인 청을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더할 나위 없이 도련님을 사모합니다. 차마 저를 사랑해 달라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부디, 부디 곁에만 계셔 주십시오. 그거 하나면… 저는 평생을 다 바쳐도 여한이 없습니다.”
알리시아는 필사적으로 바르간을 붙잡았다.
용사든 영웅이든지를 신경 쓸 겨를도 없다. 그 정도로 알리시아의 마음은 괴로웠다.
결국에는 눈물을 참아 내지 못하고 쏟아 내는 알리시아.
바르간은 그런 알리시아를 보며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체감했다.
알리시아는 원래부터 마음이 여리고 정에 휩쓸리기 쉬운 타입이다.
때문에 바르간은 더욱 철저하게 그녀를 교육했다. 이상적인 용사의 상에 가까워지도록 지도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본질 자체는 바뀌지 않았으며 바꿀 수 없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했을 바르간은 자신의 계획에 결점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미안하다, 알리시아. 그동안 내가 너를 괴롭게 했구나.”
알리시아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애써 모른 척을 했다.
그렇게 계속 무시를 일관하니 바르간이라는 존재는 알리시아에게 있어 마음의 병이 되어 버렸다.
“네가 아파하는 건 전부 내 탓이다. 내 이기심이 네 삶을 고달프게 했구나.”
“…도련님.”
“하나, 그렇다고 해도 나는 네 마음에 답해 줄 수 없다. 나는… 네가 알고 있던 ‘바르간’과는 분명 다른 인물일 테니 말이다.”
기존 바르간의 영혼은 죽어, 남은 건 오롯한 박시후의 것.
알리시아가 사랑한다고 말한 바르간은 아닐 터이다.
“…….”
눈물을 흘리던 알리시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보였다.
바르간은 쓸쓸함이 감도는 미소를 지으며 알리시아를 마주했다. 그렇게 잠깐 동안이지만 ‘바르간’을 연기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표정을 드러냈다.
그제야 알리시아는 바르간에게 무언가 커다란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렸고, 바르간은 도로 극을 이었다.
막을 내리기에는 아직 풀어야 하는 에피소드가 많이 남았다.
“알리시아, 추기경 제파르와 대주교 글라샬라볼라스의 세력은 전장을 빠져나갔다. 행방불명되었다고 알려진 베리스는 대주교 크로셀을 흡수했으며 지금도 많은 이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있다. 분명 훗날 만만치 않은 적이 되어 네 앞에 나타나겠지.”
여신교 내에서 바르간의 입지가 입지였던 만큼 바르간은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리시아가 알기 쉽도록 천천히 풀어 주었다.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또한, 스포를 하자면 신목이라 불리는 위그드라실은 사실 추기경 부에르가 저주에 걸린 형태다. 성제인 리오베르고는 주교 플라우로스가 권능을 사용해 인간의 탈을 쓴 것이고.”
어차피 그녀가 돌아가면 성녀인 디피엘리아가 쿠데타의 명목으로 공론화할 사실이다.
조금 빨리 안다고 해서 별일이 일어날 염려는 없다.
“얼마 전, 도시 로즈에서 티그레스라는 반가운 얼굴을 보았겠지. 녀석이 어린 소녀로 변했던 축복이 플라우로스의 권능에서 비롯된 힘이다. 위그드라실교의 창시자인 플라우로스는 역대 성제를 전부 먹어 치우며 그 행세를 해 온 것이다.”
알티프를 상대하기 위한 인류의 성체가 사실은 알티프에게 만들어졌다.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과거를 보고 온 바르간은 확실히 알았다.
슈겐하르츠가 부에르의 저주를 풀어 주지 못한 채 죽어 버렸으니 트로아에 있던 플라우로스는 필사적으로 부에르를 살리고자 애썼다.
그 결과, 부에르를 위협하는 여신교로부터 대항하기 위해 위그드라실교를 창시하게 되었고, 인류의 편에 서 그들을 이용했다.
“…그 외에도 얘기하자면 끝도 없으나, 이 정도면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한결 순조로울 거다.”
“…….”
“눈물범벅인 얼굴로 얼빠진 표정을 하니 꼴이 제법 우습구나.”
바르간은 작게 웃은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알리시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는 벌써 무대 아래로 내려와선 안 된다.
바르간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들을 해결했다고는 하나, 아직 사건들이 남아 있다.
그녀가 소설의 주역들과 함께 힘을 합쳐 모두 해결해야만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무책임하게 두고 가기만 한다면 알리시아는 얼마 못 가 망가지고 말겠지.’
그렇기에 바르간은 떠나기 전에 여지를 남겼다.
알리시아가 박시후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말이다.
“헤일리온에게만 말했다만, 내겐 이루고 싶은 한 가지 목적이 있다. 크게 한 번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달은 진정한 행복이지.”
“…그게 무엇입니까?”
“흠… 나도 구상만 해 봤지 아직 실현해 보지는 못해서 말이다. 알고 싶다면 네가 해야 할 일들을 끝마치고 찾아와라.”
“예…? 그 말씀은….”
“널 기다리고 있겠다. 물론, 그때까지 네 연심이 이어졌을 경우의 이야기이겠지만.”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너무 놀라 경직된 몸은 무거운 검의 끝을 서서히 지면 위로 떨어트렸다.
“표정하곤.”
바르간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리며 알리시아에게 말했다.
조금 어린애 같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만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면서.
“영웅이 그런 얼굴을 보이면 세간의 놀림거리가 되겠구나.”
바르간은 숲을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