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Villain Bought the Female Lead RAW novel - Chapter (344)
악역이 여주인공을 구입했다-344화(344/350)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 거 같네요. 치료가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거대한 집무실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에리카.
키는 그대로였으나 제법 성숙해진 그녀가 눈앞에 있는 두 여성을 번갈아 바라보며 살짝 웃음 지었다.
“치료제의 초기형은 다소 부작용도 있었는데 잘 극복하셨네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샤를로테. 아, 제가 지금 말씀드린 분은 이쪽의…….”
둘의 이름이 같다는 걸 떠올린 에리카는 하얀 머리칼의 여인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말총머리의 여인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치료제를 맞은 건 이쪽의 샤를로테뿐이라 헷갈릴 일 없습니다. 에리카 님.”
“그건 그렇죠…. 그리고 존칭은 됐어요. 평화유지군에게 직급은 없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본부의 한 축을 담당하시는 분께 저희가 어떻게 반말을 쓰겠습니까? 그동안 도움도 왕창 받았는데. 그렇지, 샤를로테?”
말총머리의 샤를로테는 하얀 머리의 샤를로테를 팔꿈치로 찔렀다.
그러자 하얀 머리의 샤를로테는 정갈하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말총머리의 샤를로테 역시 아차 했는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4년간…. 에리카 님과 디피엘리아 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도움 덕분에 알티프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다시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에리카 님께서 치료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의 상당량을 대 주셨기 때문에 많은 용사들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들을 대신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둘의 진심 어린 감사를 받게 되자, 에리카는 다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자신이 받은 감사를 나눴다.
“큼… 저는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지원만 했을 뿐이에요. 저보다 더 헌신적으로 임했던 건 디피엘리아와 그 아이죠. 제가 이렇게까지 감사를 받을 이유는 없어요.”
그렇게 세 사람은 잠시 동안 낯간지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덧 차 반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자 에리카는 이야기의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저한테 부담 갖지 않으셨으면 해요. 다 같이 잘 살아 보자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잖아요? 애초에 순전히 제 재산도 아니라, 가문을 나올 때 조건을 들이밀어 한몫 단단히 챙겨서 나온 거였거든요. 아, 그리고 대충 알고 계시겠지만 평화유지군에서 주는 월급도 제법 쏠쏠하답니다?”
포트레트 가문을 나와 독립한 에리카.
그녀는 가문의 규율에서 벗어난 채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감사는 몇 번을….”
“자, 자 자 끝. 이후 일정이 꽉 차 있으니 이만 물러나 주시죠.”
에리카는 일부러 다소 퉁명스러운 톤을 띤 채 둘을 물렸다.
과거와 다른 게 있다면, 상대를 진심으로 피하거나 낯설어 한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샤를로테들은 몇 번 고개를 더 숙이더니 물러나려 들었다.
“…근데, 좀 섭섭하시겠네요.”
샤를로테들이 집무실을 나서기 전, 에리카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두 명의 사를로테는 에리카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고, 서로 눈을 마주했다.
그러더니 언뜻 쓸쓸해 보이지만 봄의설렘을 담은 듯 미소 짓는 둘은 말했다.
“그렇기야 하죠. 하지만, 그 아이가 선택한 거니까요.”
끼이익—.
“…….”
두 사람이 나가고 집무실에 남은 에리카는 반 정도 남은 차를 마셨다.
각설탕을 잔뜩 넣은 차는 입안을 달콤하게 감싸며 코끝에는 향기를 전했다.
“…그로부터 벌써 4년이 지났네.”
잠시 생각에 잠긴 에리카는 책상에 올려진 검은 고양이 인형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샐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양이 인형의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러네. 그사이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녀와 함께 집무실을 지키고 있는 남성은 비워진 찻잔을 채워 주며 답했다.
에리카는 차를 따라 주던 남성을 바라봤다.
“너무 바쁘게 보내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어. 밴틀로, 너도 그렇지 않아?”
그는 어릴 적부터 함께한 소꿉친구이자 현재 에리카의 보좌를 맡고 있는 궁사였다.
밴틀로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입을 열었다.
“대전쟁이 있고 나서 세상이 급변했으니까 용사였던 우리도 정신없을 수밖에. 게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디피엘리아가 성제와 신목의 정체에 대해 밝혔으니 그 파장도 어마어마했고.”
“그거 때문에 우리 아버지께서 쓰러지셨던 건 알지? 지금이야 쾌차하셨지만. 참… 신실한 포트레트 가문이 알고 보니 여신교의 추기경을 대대손손 섬기는 가문이었다니, 여간 큰 충격이 아니셨을 거야.”
에리카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봤다.
더 이상 세상 어디에서도 보일 것만 같던 거대한 신목은 없다.
교회와 민심을 사로잡은 디피엘리아의 주도하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리카는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을 과거와 대조하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해.”
“어떤 게?”
“그렇게 큰 나무가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위에 자리 잡은 연합국은 풍요로운 토지를 자랑했었잖아. 위그드라실의 힘이니 성지(聖地)니 하며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치에 맞지 않는 현상이었어.”
나무가 자라고 유지되기 위해선 영양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영양분은 뿌리에서부터 공급이 된다.
그리고 그 양분은 흙에서부터 빼앗아 오는 것이다.
“위그드라실의 거구를 유지하기 위해 세상 곳곳에 숨어 있는 던전에서부터 마나와 양분을 빨아들인 거잖아. 만약… 그 나무가 모든 던전을 먹어 치웠다면, 다음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양분을 섭취해 갔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소름이 돋아.”
밴틀로는 에리카의 말에 공감했다.
만약… 플라우로스와 위그드라실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교회의 체제가 유지되었다면, 이 땅은 먼 훗날 죽음의 땅으로 변할 터였다.
전 세계에 조금씩 재앙을 가져오고 있던 나무. 추기경 부에르.
그리고 이를 진행시킨 주교 플라우로스는 즉결 처형되었다.
아직까지 위그드라실을 그리워하는 맹신자들은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인류에게 위그드라실은 더는 신목이 아니라 악마의 나무였다.
결국, 세상을 지탱하던 거대한 종교는 사라지고 성녀 디피엘리아는 종교로부터의 탈피를 외쳤다.
더는 신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지 말고 인류 스스로가 지키며 앞길을 개척해 나가자는 뜻이었다.
혼란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지탱하기 위해 평화유지군도 창설되었으니, 디피엘리아 역시 매일같이 밤을 새워도 몸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추기경 제파르의 세력도 큰 골칫거리였지.”
밴틀로의 말에 에리카가 긴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 한동안 몸을 숨기고 있더니 글라샬라볼라스의 몸으로 나타나서 엄청 고전했었잖아.”
“게다가 에를리히를 비롯해서 세상에 뿌려 두었던 인공 정령들을 강제로 폭주시킨 것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었고….”
“알리시아랑 핀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때 우린 죽었을 거야.”
다시 생각해 봐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과거에 비하면 여신교의 세력이 크게 쇠퇴하기는 했으나, 그건 인류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인류는 아카데미아를 다시 세우고 병사를 육성했다.
이때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 현 아카데미아의 총장인 파울라와 부총장인 루이사다.
물론, 더는 용사가 아닌 평화유지군을 육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말이다.
“…아무튼, 모든 추기경의 핵은 파괴되었고, 흩어져 있던 여신교의 잔당도 거의 잡아들였으니 슬슬 끝이 보이고는 있는 거 같긴 하네. 끄으응….”
에리카는 피로에 찌든 양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예전 같았으면 밴틀로가 에리카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겠지만, 이젠 그럴 수 없는 신세였다.
에리카는 그 점을 콕 집어 놀리듯이 웃었다.
“요거 요거. 세레나랑 사귀니까 이제 숙녀의 몸은 어깨도 만질 수 없다 이거야?”
“…세레나가 질투를 할 일은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아, 좋겠네. 좋겠어. 누군 업무 때문에 나날이 다크서클만 내려가는데 누군 깨소금 내를 솔솔 풍기고.”
밴틀로는 같은 궁사인 세레나와 교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세레나가 밴틀로를 경계하거나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대전쟁과 각종 사건 사고들을 겪고 난 후 점차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밴트로는 쑥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에리카는 연애할 생각 없어? 구혼 편지는 여기저기서 많이 오는 거 같던데.”
“…연애라. 글쎄, 뭔가 자신이 없어.”
“자신이 없다니?”
밴틀로의 물음에 에리카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뗐다.
그녀의 눈은 안개가 잔뜩 끼어 있는 과거를 멀리서나마 바라보는 듯했다.
“아무도 나에게 ‘그 남자’와의 연결 고리를 말해 주지 않으려 했지만…. 나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거든. 기억은 안 나도 모든 걸 뒤로할 정도로 열렬한 사랑을 했었다는 건 알겠어.”
“……에리카.”
“아니, 무거운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야. 그냥… 그래서인진 모르겠는데 그 이상으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을 순 없을 것 같아서. 이미 연료를 다 썼다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기분이라 지금의 난 내 연애보다 남의 연애를 관망하는 게 훨씬 재밌네.”
밴틀로를 바라보며 슬쩍 미소 짓는 에리카.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장난기가 반짝였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편지를 아무리 많이 받아 봤자 그런 마음이 들 리 없잖아?”
“…그래.”
“응. …뭐야, 왜?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아니야. 아무것도.”
밴틀로는 고개를 저으며 주제를 접었다.
이에 에리카는 ‘싱겁긴.’이라 말하며 남은 서류를 하나 집어 훑어봤다.
서류에는 유물 대여를 요청한 신청인들의 이름과 유물이 적혀 있다.
“카이만… 얘 또 검을 부러뜨렸어? 대체 몇 번째야, 이게?”
“…정확히 7번째지.”
“유물이 무슨 이웃집 개 이름인 줄 아나? 핀을 라이벌로 생각한다면서 대체 왜 이렇게 검을 함부로 대하는 거야? 핀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검을 부러트린 적이 없구만.”
에리카는 카이만의 이름에 붉은 펜으로 엑스 표시를 그었다.
옆에다가는 작은 글씨로 ‘영웅의 뒤꽁무니만 쫓는 지출 덩어리’라고 적었다.
“애초에 아무리 좋은 무기를 쓴다고 해도 핀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실력 차이가 하늘과 땅인데.”
“…에리카, 그 말은 카이만 앞에서 절대 하면 안 될 거 같다.”
카이만 역시 제법 이름을 날린 검사가 되었지만 핀은 그 격이 달랐다.
영웅 핀.
그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유일의 소드 마스터라고 불리는 인물로.
이제는 그 ‘미친 천재’의 검술마저 능가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나저나 중요 일손이 한 명 더 줄어서 큰일이야. 대중은 아직도 영웅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는데.”
“그녀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미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아쉬워서 그래. 우리 최중요 전력 한 명을 쓸 수 없게 됐으니까 손실이 크다고. 걔도 참 변했어? 아카데미아에 있을 적 같았으면 모든 부탁이든 들어줄 기세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어제 울면서 배웅해 주지 않았나? 나 네가 우는 거 되게 오랜만에 봤는데.”
“아니, 그건…! 그… 그만큼 놔주기 아까운 인재였으니까.”
서류 확인을 이어 가다 얼굴을 붉히는 에리카.
필기체로 사인을 남긴 뒤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그, 그리고 그 아이가 지금까지 노력한 걸 아는데 마냥 잡을 수도 없잖아. …실제로 실적도 남들의 몇십 년 치를 4년 만에 해결했는데, 뭘.”
“그렇지….”
에리카와 밴틀로는 언제나 선두에서 일을 해결하고 다녔던 하얀 머리의 여인을 떠올렸다.
분명 피가 마를 정도의 스케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자진해서 일을 늘렸다.
불평을 보이긴커녕, 언제나 온화하게 웃고 있던 그녀.
그런 그녀의 은퇴식이 열린 게 바로 어제였다.
“…잘 찾아갈 수 있으려나.”
에리카는 펜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며 걱정을 표했다.
그녀의 걱정을 덜어 내듯 밴틀로는 은은한 미소를 건 채 답했다.
“알리시아라면, 틀림없이 잘 찾아갈 수 있을 거야. 아무런 단서도 없이 향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똑똑.
에리카가 서류 하나를 또다시 끝내자 마침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서류가 끝도 없이 남았거늘, 그녀를 찾는 인원은 더 많았다.
“하…. 진짜 늙는다 늙어.”
에리카는 괜히 약한 소리를 뱉곤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곧 가지런한 그녀의 눈썹이 올곧고 당당하게 자리 잡혔다.
“들어오세요.”